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04:25:42

서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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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대구대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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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안세화 플로리아노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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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38)
2대
문제만 제르마노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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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2)
3대
하야사카 큐베에 이레네오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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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6)
4대
주재용 바오로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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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1948)
5대
노기남 바오로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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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6대
최덕홍 요한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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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954)
7대
서정길 요한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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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1986)
8대
이문희 바울로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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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2007)
9대
최영수 요한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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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009)
10대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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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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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000> 7대 천주교 대구대교구
서정길 사도 요한
徐正吉 | John Baptist Sye Bong-kil
파일:서정길.jpg
출생 1911년
경상북도 울산군 두서면 미호리[1]
사망 1987년 4월 7일 (향년 77세)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주교 임명일 1955년 대목구장 임명
1962년 7월 5일 대주교 승품
재임기간 대구대교구장 1955년 9월 15일 ~ 1986년 7월 5일
파일:external/www.cbck.or.kr/20_1.jpg
ADVENIAT REGNUM TUUM
(주의 나라가 임하시기를)[2]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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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가톨릭의 제7대구대교구장. 세례명은 '사도 요한'[3]이다. 교구장으로 1955년 9월 15일부터 1986년 7월 5일까지 재임하였다. 개명 전 이름은 서봉길(徐鳳吉)이었다.

2. 생애

경상남도 울산군 두서면 미호리[4]에서 출생. 1932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 중등과 · 철학과를 거쳐 1938년 신학과를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그의 동기로 주교품을 받은 사람은 서정길 대주교를 포함해서 무려 3명이었는데, 한 사람은 마산교구장을 지낸 장병화 요셉, 다른 한 사람은 부산교구장을 지낸 최재선 요한이었다.

사제 수품 후 부산 청학동본당 주임신부, 1943년 부산 범일동본당 주임신부, 1945년 대구교구 경리부장, 1948년 대구 계산동본당 주임신부, 1954년 경남감목대리 겸 부산 범일동본당 주임신부 등을 역임했고, 1955년 제7대 대구교구장(겸 초마티타누스 명의주교)으로 임명되어, 동년 9월 15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주교 서품식의 주례주교는 대구교구 제2대 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제르맹 무세 (한국명 문제만) 주교였다. 주교 수품 얼마 후에 서정길로 개명하였다.
1962년 3월 한국 가톨릭의 교계체제가 확립됨과 동시에 대구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되자, 동년 7월 5일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이어 1965년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2·3·4차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1972년 이문희 바울로 보좌주교를 총대리로 임명, 대구대교구의 행정을 맡게 하였다.

1955년 대구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986년 정년 은퇴할 때까지, 많은 남녀 수도회대구대교구로 초치, 전교와 교육을 전담시켰고, 또 부산교구, 안동교구 등을 분할, 독립시키는 등 대구대교구와 한국 천주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형 이단을 잡아낸 전적도 있는데, 1957년에 있었던 "상주시 황 데레사 사적계시 사건"[5]에 대해 직접 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사를 실시하여, 황 데레사와 관련된 신심 일체를 금지시키는 교령을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와 함께 발표했다.[6] 이후 이들 세력은 수원교구미리내 성지로 이동하여 여러 수도회를 창립하였고, 결국 2008년에 최덕기 바오로 주교에 의해 한 번 더 정죄되었다가, 미리내 수도단체연합 vs. 수원교구로 사건의 스케일이 커져, 교황청이 직접 개입하여 중재에 나선 2013년에야 완전히 해결될 수 있었다. 2013년 최종 합의문.

건강이 썩 좋지 못하여서 재임 내내 병석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주교가 되고 얼마 후 결핵 진단을 받고 장기간 요양을 하였다. 결국 독일에서 효험이 좋은 약을 처방받아 결핵을 완치시켰는데, 당시 서정길 대주교를 간호해 주었던 사람 중의 하나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었다.

1987년 4월 777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대구대교구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2018년에 서 대주교의 선종 31주기를 맞아, 칠곡군 동명 성가양로원 내부에 서정길 대주교 기념전시관이 조성되었다.

숫자 7과 은근 인연이 깊다

3. 여담

서정길 대주교의 대구대교구장 재임 기간 중에는 서 대주교와 이름이 한자와 세례명까지 똑같은 서정길 신부가 심지어 대구대교구에 있었다. 서정길 신부는 1967년 12월 12일 동명이인인 서정길 주교에게 수품@, 비산성당 보좌신부와@ 칠곡성당 주임신부와 @ 복자성당 주임신부 @로 사목하고 교구 평신도회에서 사목하다가 @ 유학 후 귀국하고 @ 다시 평신도회에서 사목하다가 @ 군종 입대 발령을 @ 받았다. 이 이후로 서정길 신부의 근황은 어찌된 일인지 가톨릭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없다. 한국천주교사제인명록에 따르면 1986년 7월 사망[7]하였다고 전해지는 서정길 신부는 환속 사제로 분류되어 있다.


[1]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미호리.[2] 주님의 기도 중 일부.[3] 축일은 12월 27이다[4] 현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미호리[5] 쉽게 말해서 경상도판 마리아의 구원방주라고 보면 된다.[6] 이때 당시, 대구대교구 신부였던 김남수 안젤로 주교도 이 사건으로 교구청에 불려가서 서 대주교에게 엄청 깨졌는데, 이때 정신을 못 차렸는지, 수원교구장 시절에 이 이단들에게 다시 간접적으로 협력해버렸다.[7] 공교롭게도 서정길 대주교의 은퇴 시기와 일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