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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대구대교구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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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000> 8대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이문희 바울로 李文熙 | Paul Ri Moun-hi | ||
출생 | 1935년 9월 14일 | |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정 (現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
사망 | 2021년 3월 14일 (향년 85세) | |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주교 임명일 | 1972년 10월 7일 보좌주교 임명 | |
1985년 부교구장 임명, 대주교승품 | ||
재임기간 | 대구대교구 보좌주교 | 1972년 11월 30일 ~ 1985년 1월 4일 |
대구대교구 부교구장 | 1985년 1월 5일 ~ 1986년 7월 4일 | |
대구대교구장 | 1986년 7월 5일~ 2007년 4월 30일 | |
SICUT IN COELO ET IN TERRA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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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성직자. 본관은 성산(星山)[2].한국 가톨릭의 제8대 대구대교구장을 역임했다. 세례명은 '바울로'이다.
2. 초기 생애
1935년 9월 14일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태어났다. 제3공화국에서 국회의장을 역임한 한솔 이효상 슬하 3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러한 가정적 배경 때문에 본래는 정치에 뜻을 품었고, 1954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한 후[3]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진학했고 1959년에 졸업했다.그 후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1962년 리옹대학, 1966년 파리 가톨릭대학을 각각 졸업했고, 파리 가톨릭대학에 재학 중이던 1965년 12월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966년 7월 프랑스에서 귀국, 잠시 대구대교구 동촌 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하다가 그해 12월 청주교구로 파견되어 청주 내덕동 본당 보좌신부로 1년간 사목했고, 1967년말 대구대교구로 복귀한 후 교구 가톨릭액션 지도신부를 지냈으며 ,1969년 군종 신부로 대한민국 공군에 입대, 대한민국 국방부 군종실에서 복무하였다.
3. 주교 시절
1972년 공군 대위로 전역하고 대구대교구청에 근무하던 중, 동년 10월 7일 대구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 11월 30일 만 37세에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역대 한국인 주교들 중 최연소 주교 수품이다.[4] 이어 총대리로 임명되었다. 건강이 좋지 못한 서정길 대주교를 대신해서 교구의 모든 일을 도맡아하였다.1979년 교구 전교 추진 5개년 계획을 수립 주도했고, 1983년 200주년 기념 대구대교구위원회를 결성하여 부총재로 200주년에 대한 대구대교구의 독자사업을 벌였으며, 그 밖에도 대구대교구의 여러 전례와 신심운동을 주도하였다.
1985년 부교구장 대주교로 승품된 후 1986년에 대구대교구 교구장으로 착좌하여 교구 사목을 20년 이상 이끌었다. 그의 교구장 재임 시절 대구 및 경북 지역의 천주교 신자는 2배 가량 증가했고 67개의 본당이 새로 만들어졌다. 2003년 2월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때는 상주를 자처하며 추도 미사를 봉헌했다. 당시 이 대주교는 "지금 대구는 상중"이라는 말로 시민들과 슬픔을 함께 했다. #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가정 배경(집권층의 아들), 당대 권력의 지역 기반이었던 대구 및 경북 지역에서 활동했던 탓인지, 독재 대 민주 구도의 1970~80년대 정치/사회적 상황에서, 다른 천주교 고위 성직자들에 비해서는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2007년 4월 24일 교구장직에서 은퇴하였다. 교회법상 정년인 75세는 아니었지만 본인의 원의에 의해 조기 은퇴하였다.
4. 만년
은퇴 다음 해인 2008년에 식도암 수술을 받았으나 건강을 곧 회복하고 활발한 저술 활동과 사회봉사 활동을 하였다. 호스피스 운동, 문화를 통한 복음화에 전념하여 교구장 시절에 못지 않게 사회에 기여를 많이 하였다. 그러나 80대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건강이 쇠락해지기 시작해서 2021년 3월 14일 오전 1시 20분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86세. #장례 미사는 사망 사흘 후인 3월 17일 오전 10시 반,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범어 대성당에서 1시간 30여분 동안 가톨릭평화방송의 특별중계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교단과 사제,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되었다. 장지는 천주교 군위묘역이다.
이문희 대주교의 사망 소식, 생전 행적을 소개하는 CPBC 평화방송의 뉴스 영상 |
5. 기타
- 성직자 생활의 대부분을 고위 성직자로 있었음에도 성품이 소탈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았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서의 말씀대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여 남모르게 애긍시사를 많이 하였다.
- 한국 가톨릭 교회의 큰어른으로서 조용하고 실질적인 북한 동포 돕기(라선국제가톨릭병원 설립), 한일주교교류 모임 결성 및 운용, 중국에 대한 선교활동동, 평신도 역할 강화, 성직자 납세 추진 등 시대를 선도하는 혜안을 가졌다는 교회 내부의 평가가 있다.
-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개최되던 시기에 프랑스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사제품을 받은 신식 사제였으나, 가친의 정치적 성향과 대구, 경북의 정치 성향의 영향으로 보수파 사제 내지 주교로 인식되고는 했다.
- 성무 수행 중에도 시인과 사상가로서의 업적을 많이 남겼다. <아득한 여로>, <오후의 새> 등의 시집과 떼이야르 드 샤르댕 저서의 번역본과 기타 여러 저서 및 번역서를 남겼다.
- 문화를 통한 복음화에 깊은 관심이 있어 은퇴 후에 <앞산밑 북카페>를 열어 일반 시민 및 신자들에게 인문교육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 생전에 자신의 세례명이 '바오로'가 아닌, '바울로'로 불리길 원했다.
[1] 방패형 왼쪽은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의 기도 손, 팔공산과 낙동강을 그려넣어 대구대교구를 표시함과 함께 서정길 대주교에 대한 존경의 의미도 담았다.[2] 기국공파(杞菊公派)-달성(達城) 인흥파(仁興派) 31세 문(文) 항렬.[3] 35회 졸업생이며 부친 이효상은 4회 졸업생이다.[4]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의 주교 수품년도가 문헌마다 1943년과 1944년으로 달리 기록되어 있다. 그중 1944년 수품설을 따른다면, 이문희 주교가 근소한 차이로 최연소 주교가 된다. 자세한 사항은 주교 문서의 한국 주교들의 여러 기록 문단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