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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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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용산
본명 김영호
출생 1946년 11월 29일
충청남도 논산시
사망 2001년 9월 19일 (향년 54세)
본관 충주 김씨

1. 개요2. 활동 내역3. 밝혀진 실체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종교인.

충청남도 논산시 출신으로, 한국 불교흑역사.

한국의 승려였다가 1996년[1] 조계종에서 멸빈[2]땡추. 그러므로 사망 시점에는 정식 승려가 아니었다. 속성은 석씨가 아니라 책에서 스스로 밝힌 바 김씨다. 본명은 김영호. 참조. 법명 앞에 성처럼 석(釋)자를 덧붙임은 4세기 중국 동진시대의 고승 도안(道安, 312-385)이 증일아함경에서 출가하면 모두 석자(釋子)가 된다는 구절[3]을 근거로 삼아 승려들은 모두 석(釋)자를 성처럼 써야 한다고 주장한 데에서 유래한 동아시아 불교계의 옛 관습이다.

2. 활동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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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여보게 저승갈 때 뭐 가지고 가지>라는 수필집을 출간해서 인기를 끌었다. 제목만 보면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연상시키지만, 실상은 무소유와는 비교도 상당히 민망할 정도로 글 솜씨가 상당히 형편없고 횡설수설했다.[4]

그럼에도 이 책이 150만부나 팔린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지금은 망한 고려원이라는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과 그럴 듯하게 생긴 석용산의 외모 때문이다. 그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자 각지로 설법하러 다녔는데 설법 내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도들이 외모에 홀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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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여보게 이 땅에 다시 오려나>, <나의 사랑 나의 방황 나의 종교>, <진짜 나와 가짜 나>, <어찌 삶이 반짝이는 별 빛일 수만 있으랴> 등 책을 참 많이도 찍어냈다. 심지어 오디오 에세이 같은 이상한 형태로도 돈을 벌었다. 시집 <허공꽃>이나 소설 <등신불>[5]도 집필했다.

거기에 동년 10월 13일 KBS2 조영남쇼에 가수 양희은, 정치인 신순범 등과 함께 게스트로 같이 나올 당시 얼굴까지 들이대며 홍보하면서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그 외에도 1994년 TV는 사랑을 싣고, 1995년 10월 25일 MBC '이야기쇼 열린아침' 등지의 여러 TV 프로그램들에 출연하며 연예인 같은 인지도를 얻었다.

자신이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출신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3. 밝혀진 실체

1997년 11월 4일 MBC PD수첩 300회 특집편 1탄(윤길용 취재)을 통해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출신이라는 주장은 거짓임이 밝혀졌다.

더불어 1990년대 후반에는 여러 가지 비리들로 말썽을 많이 일으켰는데,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과의 성추문도 있었고[6] 자신이 교주로 있는 (대구광역시 공덕원과 부산광역시에도 지부가 있다.)에서 신도들의 자금을 유용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실체를 밝힌 PD수첩 방송 부제조차도 이 사람의 책 이름을 패러디"석용산 스님은 뭘가지고 저승 가지?"였다. 게다가 그 절에서는 석용산을 비로자나불의 현신(아바타)라고 떠받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우즈베키스탄에 고려사라는 절을 차려 성금을 강요한 탓에 조계종에서 사이비 불교라며 강력하게 비판한 바 있다.

PD수첩 방송으로 그의 추악한 실체가 밝혀지자 신도들이 여의도 본사에 들이닥쳐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개신교계 비리 종교인들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후에도 계속 모습을 비추는 데 반해 이 인간은 PD수첩 방영 후에는 사실상 언론과 불교계에서 사라져 잠수를 타버린 줄 알았으나, 1999년 7월 15일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민사합의3부에서 불교 관련 신문기자 A씨(당시 34세)가 혼인을 빙자한 간음으로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며 석용산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패소하여 3천만원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1년 가을에 병으로 사망했는데, 남겨진 재산[7]을 두고 그의 동생 외 여러 사람들이 서로 상속을 주장하며 마지막까지 추태를 보였다고 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이 사람의 책들은 전부 절판되어 헌책방이나 중고서점, 도서관 같은 곳에서조차도 구경이 힘들고, 설사 국립중앙도서관 사이트에서 디지털 파일로 스캔 후 업로드됐다고 해도 시간을 들여서 협약 공공도서관의 원문검색용 컴퓨터로 접속해야 한다. 책벌레불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 승려, 불자들 사이에서도 이 사람의 이름 석자가 거론되는 일 또한 현재는 거의 없어졌으며, 90년대에 열풍을 일으킨 베스트셀러 저자라고 하기에도 믿기 힘들 정도로 완벽하게 잊혀졌다. 또 당연하겠지만 불교계 역시 불교의 수치가 된 사람인지라 이 사람의 이름 석자를 꺼내는 일도 극도로 꺼리고 있다. 베스트셀러는 단지 많이 팔린 책일 뿐 반드시 '좋은 책'을 뜻하는 건 아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꼽힌다. 물론 이 사람 외에도 비슷한 사례는 많이 있고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1] 당시 중앙일보 기사[2] 이유는 여신도와의 염문이 확인되어서...[3] "또한 지금부터는 부모가 지어준 성을 쓰지 말고 석자사문(sakyaputtiya samanas)이라고 하라." (증일아함 37권 팔난품 제3경 중)[4] 이 책에는 윤웅렬&윤치호 부자에 대한 야사도 실려 있다. 윤웅렬이 전생에 석왕사라는 승려였다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윤웅렬이 이를 진지하게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아들 윤치호는 감리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휴양지 삼아 석왕사에 상당히 자주 들렀다.[5]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과는 다른 작품으로, 석용산의 등신불은 상하 2권짜리인데, 김동리의 등신불은 1권도 부족한 단편소설임을 통해 간단히 구별 가능하다.[6] 잡지사 여기자를 을 먹이고 성폭행한 후 내연관계를 가진 적도 있다.[7] 대표적인 것이 사찰 공덕원 등. 조계종에 등록된 사찰도 아니어서 가볍게 상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