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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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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도시 전역에 구석기 시대의 유물과, 청동기 시대고인돌, 집터 등의 유적이 남아있어 이 곳의 오래된 역사를 알 수 있다.

2. 각 시대별 역사

2.1. 삼국시대 ~ 후삼국시대

명목상으로는 마한의 일부였고, 근초고왕 때부터는 백제의 마한연맹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백제의 간접 지배지였다. 다만 신미국을 중심으로 뭉친 소국 연맹체 침미다례는 백제의 견제 탓에 전라도 동부로는 전혀 세력을 뻗치지 못했기에, 순천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종래의 마한 소국은 침미다례와는 무관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475년 한성백제가 수도 위례성 함락으로 몰락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 전부터도 무역을 통해 전라도 일대에 그 영향력을 투사해가던 반파국(대가야)이 이러한 틈을 타 순천을 포함한 호남 동부 지역에 진출했고, 이때 순천은 사타국(娑陀国)이라고 불렸다. 고락산성에서 가야토기가 출토되었고 특히 서면 운평리 고분군의 묘제와 토기 주류가 반파국 양식임이 밝혀져 대가야의 호남 진출 때 순천 일대도 반파국에 복속되었음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반파국이 사타국을 직접 지배화한 건 아니고, 사타국 입장에선 프랜차이즈 모기업을 백제에서 대가야로 바꿨다고 여기는 정도 입장이었다. 백제는 어떻게든 간접 지배지를 직접 지배지로 바꾸려는 입장을 그 존속 기간 동안 한 번도 바꾼 바 없었던 반면 반파국은 여간해선 휘하 소국들의 권익을 보장해준 편이었으니, 사타국 입장에선 반파국이 백제보다 훨씬 나은 파트너였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마한연맹의 새로운 맹주국을 자처하고 마한 전체를 직접 지배화하겠다는 입장을 이미 그 수백 년 전인 고이왕 시절부터 분명히 한 백제 입장에서, 이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결국 세력을 회복한 백제무령왕 시기인 512년도에 반파국을 꺾은 후, 반파국이 주도하는 가야연맹의 가맹국이었던 사타국을 멸망시키고 직접 지배화하였으며, 이때부터 순천 일대는 백제의 직접 지배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 감평군(欿平郡)[1]이라고 불렸으며, 원촌현(여수), 돌산현(돌산 지역), 마로현(광양)을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이후 전라도 동부는 백제가 520년대 초반까지 약 십 년 동안 반파국과 공방을 주고받으며 영토를 빼앗기고 빼앗는 전장이 되지만, 순천, 여수, 광양 일대는 한번도 빼앗기지 않고 확고하게 장악했다. 이후 관산성 전투 패전 이후 신라가 밀고 들어와서 백제는 반파국에게 어렵게 되찾은 전라도 동부 일대(남원, 장수 일대)를 다시 신라에게 잃게 되는데, 이때도 순천, 광양, 여수만큼은 진흥왕의 신라에게 빼앗기지 않고 확고하게 백제령으로 유지했다. 다른 지역은 몰라도 이 일대를 빼앗기면 옛 침미다례 일대도 방어가 어려워질 게 뻔했으니, 백제 입장에선 다른 곳은 내줘도 순천, 여수, 광양은 결코 내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660년 백제 멸망 후 663년까지의 백제부흥운동 진압 과정에서 신라의 군현으로 편성된다. 남북국시대인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 승평군(昇平郡)으로 개칭하고 해읍현(海邑縣), 여산현(廬山縣), 희양현(陽縣)을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에 의해서는 승주(昇州)로 불리었고 이에 후삼국시대 기록에도 승주로 나타난다. 호족 박영규가 웅거하였으며, 이후 후백제의 강역이 되고 박영규는 후백제왕 견훤의 사위가 된다. 후백제가 일리천 전투 결과로 멸망한 후에는 고려의 군현이 된다.

2.2. 고려 시대

940년(태조 23년), 해읍현은 여수현(麗水縣)으로, 여산현은 돌산현(突山縣)으로, 희양현은 광양현(光陽縣)으로 개칭되어 그대로 승평의 속현이 되었고, 곡성군의 영현이던 부유현(富有縣, 현 주암면 승주읍 일대)이 승평의 속현이 되었다. 983년(성종 2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 승주목(昇州牧)이 되었다.

1108년 또는 1172년에 광양현에 감무가 파견, 1350년에 여수현과 돌산현이 현령이 파견되어 속현에서 벗어났다.

2.3. 조선 시대

태종 13년, 군현제가 도입될 때, 순천읍 지역이 순천도호부로 개편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8도를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에 전라도의 중심지역이 전주나주였지만 전라좌도[2]지역에서는 제법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세종실록지리지 중에서 순천도호부 내용 이후에도 순천도호부라는 이름이 몇번 등장하지만 실록내용을 조회해 보면 순천부와 혼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이후에는 쭉 순천부로 등장한다.[3] 조선 시대 별칭은(별호라고도 함) 평양(平陽)으로 평안도 평양은 平'壤' 여러번 강등과 복권을 겪은 역사도 있다. 여담으로 태종실록에 여러번 나오는 유배를 간 코끼리 이야기에서 이 코끼리가 갔던 곳이 순천부에 속한 장도(獐島).[4] 태종실록 중에서 순천부 장도(獐島)에 방목중인 길들인 코끼리를 육지로 내보내게 하였다는 내용

1397년 오흔인 현령이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대한 거부로 인해 독립현이었던 여수현이 1414년에 연안 도서를 독자의 군현으로 편제하기보다는 수군 진지로 편성하고자 하는 방침으로 돌산현이 폐현되어 순천도호부로 편입되어 여수주민들이 1897년 여수군 독립이 되기 전까지 5백여년동안 삼복현 삼파현등 갖 가지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이 현재 행정구역으로 해룡면 신성리 해안가에 일명, 왜교성이라고도 불리는 순천왜성(順天倭城)을 건설하였다. 이 순천왜성은 1598년에 사륙병진작전에 따라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일본군에 매수된 명나라 육군의 비협조와 명나라 수군의 패배로 결국 함락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왜교성 전투에 대해 그동안 조명이 잘 되지 않았었다. 순천시에서는 순천왜성 표지판을 세워 그 위치를 알리기는 하였으나 보존 상황이 매우 열악한 편이다.

1895년에는 남원부 순천군으로 이듬해 전라남도 순천군이 되었고 "1896년 순천군 도서지역은 완도군과 지도군(현 신안군)과 함께 돌산군으로 설치.분리되었고 1897년에 반도지역은 용두면(현 해룡면)을 제외하여 여수군으로 설치.분리되어 군역(郡域)이 대폭 줄어든 동시에 바다와 별로 관계 없는지역이 되었다"고 순천시사내용에서 나와 있지만 실제 순천시의 관할해역은 순천만일대와 해룡면광양만 일부분 해역[5]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1908년에 일제에 의해 실질적인 권한을 빼앗기고 겉모습만 유지된 대한제국 당시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을 통해 순천과는 별도의 지역으로 존재하던 낙안군을 둘로 나누어 현재의 벌교읍에 해당하는 지역을 보성군으로 편입시키고 나머지 지역인 낙안면, 별량면, 외서면을 순천으로 편입시켰다. 이 과정을 통해 낙안군은 해체가 되었고 그 중에서 절반이 순천시의 역사로 들어오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벌교와 낙안은 분지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진 이후에도 같은 생활권을 구축하고 있다. 낙안군의 전반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벌교읍 문서에 잘 서술되어 있으므로 이쪽을 볼 것.

2.4. 일제강점기 ~ 대한민국(순천시승주군, 그리고 몰락한 승주읍)

1929년 동초면이 폐지되어 별량면[6], 낙안면[7] 및 보성군 벌교면[8]에 분할 편입되었다. 1931년 11월 1일[9] 순천군 순천면이 순천으로 승격하였다.[10] 1949년 8월 순천읍, 도사면, 해룡면 조례리가 순천부(府)→순천(市)로 승격되면서[11] 순천군의 잔여 지역은 승주군으로 개칭되었다.[12] 대략 이런 경우에는 시로 승격한 곳에 군청까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1985년 10월에 쌍암면을 승주읍으로 승격시키면서 군청을 이전하였다.[13] 순천 시내에 남아 있던 군청 청사는 민간에 매각했다가, 2014년 재매입했다. 본래는 청사 건물을 철거한 후 순천시 역사를 다룬 역사 전시관을 세울 예정이었으나 정책이 바뀌어서 건물을 리모델링한 후 시민들의 문화 예술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1948년 10월에 벌어진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인해 큰 학살 피해를 입었다. 당시 반란을 일으킨 14연대가 여수와 순천을 장악한 이후 지역에서 반란군의 좌익 사상을 따르지 않았다던가 자신들이 장악할 때 저항한 이들을 먼저 학살하였고, 이후 좌익 반란군을 소탕한 이후에는 우익 진영에 의한 학살이 또 일어났다. 특히 전반적으로 우익이 우세하던 여수 지역보다는 좌우익 세력이 비등비등하던 순천 지역에서 무자비한 보복성 학살이 많이 일어났다. 당시 순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떠한 생각을 가졌든지간에 그와 상관없이 수없이 학살당한 비극을 겪었다. 이 당시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이 순천 사범학교에 있을 때 "기독교 성향이다 → 그럼 미제의 앞잡이일 것이다" 라는 황당한 논리로 좌익 성향의 인물들에게 학살당하기도 했다.

1949년 8월 14일 순천군 순천읍과 도사면, 해룡면 왕지리, 연향리, 조례리을 순천부로 승격시켰고 하루 뒤인 8월 15일 부(府)제가 시(市)제로 개편되면서 순천시가 되었다. 잔여 지역은 승주군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승주군 일부, 특히 해룡면은 현재 순천시 동지역(통합 이전의 순천시)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어 이전부터 많은 불편이 따름으로 인해 순천시로 편입해달라는 민원이 자주 제기되었다. 결국 1995년 지방자치제 부활에 따른 도농복합시 제도 시행에 따라 순천시와 승주군을 통합하여 통합 순천시가 되었다.

승주읍에서는 군청 주변을 키워서 발전시키려는 계획을 진행했는데 승주군이 순천시와 통합해 쓸모가 없어진 구승주군청사를 순천시청 제2청사로 삼아서 농정분야 1개국과 일부 기능을 분담하도록 하고, 순천시내(용수동 삼거마을)와 승주읍(신성리 성산마을)을 잇는 가칭:옥녀봉터널을 건설하기로 하는 등 통합 이전에 몇 가지 합의를 이뤄냈다.
하지만 통합 이후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아, 2개 이상의 청사를 가지고 있던 도시들이 단체로 청사를 정리하는 마당이라서 순천시도 제2청사를 순천제일대학교에 매각하고 농업기술센터 등 일부기관을 제외한 나머지를 다시 본청으로 복귀시켰다. 그나마 순천제일대학교 승주캠퍼스가 된 구승주군청사는 2003년 전후로 하나씩 학과를 다시 본 캠퍼스로 복귀시키더니 2013년 현재는 빈 건물로 남아있다.[14] 현재 구승주군청사 일대를 보면 다른 읍에서 보기 힘든 중앙분리대가 있는 4차선도로가 있지만 그에 맞지 않는 쇠락한 상권을 볼 수 있다.[15]

또한 예산등 여러문제로 용수동~승주읍 옥녀봉 터널 공사가 시급함에도 지금까지도 이루고 있지 못하고 있다.

2015년 들어 도입된 책임읍면동제가 향후 확대될 경우 통합 이후 지나치게 넓은 인구와 몰락한 곳에 대한 행정적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순천시의 옆동네인 벌교읍과 함께 순천 관내에서는 승주읍과 더불어 옛 낙안군 지역이던 낙안면 일대에 이 제도의 도입이 필요해 보인다. 행정자치부에 의하면 2차 도입추진 지역으로 순천시와 광양시가 지명되었는데, 얼마 안가 도입이 무산되어 승주읍의 부흥은 다시 미궁속으로...


[1] 이칭은 사평군(沙平郡), 무평군(武平郡). 단, 사평과 무평은 순천이 아닌 화순군 사평면과 그 인근을 가리킨다. 즉, 당시에는 사평 지역이 중심지이며, 순천은 그 속읍이었다.[2] 당시엔 수도 한성에 있는 왕이 보는 입장에서 좌우를 나누었기 때문에, 삼남 지방은 북쪽을 기준으로 하여 그려지는 일반적인 지도에서 보았을 때와 달리 동쪽이 좌도, 서쪽이 우도가 되었다. 전남의 남동부인 여수에 세워진 수영의 이름이 전라좌수영이라 붙여진 이유도 이와 동일.[3] 근데 '도호부' 자체를 줄여서 '부'라고 하기도 했다. 도호부의 수장인 '도호부사'도 고을 이름 뒤에 붙일 땐 '부사'로 줄여서 대부분 'XX부사' 등으로 적었다. 당시 순천의 수장을 '순천부윤'이 아닌 '순천부사'라고 불렀던 것을 보아 쭉 도호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4] 여수시 율촌면에 있는데, 현재는 매립으로 인하여 육지화되었다. 한편 한자까지 똑같은 보성군 벌교읍의 장도는 동시대에 낙안군 소속이며, 현재는 보성군 벌교읍 장도리이다.[5] 1897년 순천에 잔류된 용두면이 절반내지 전부가 여수군으로 되었을 경우 광양만에 접하는 부분은 더 줄어들거나 없어졌을것이다.[6] 금치리, 죽산리, 송기리, 구룡리, 두고리, 원창리, 대룡리의 7개 마을.[7] 내운리, 용릉리, 이곡리, 신기리의 4개 마을.[8] 연산리, 봉림리, 회정리, 장양리, 호동리의 5개 마을. 벌교리와 벌교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매우 가까운 지역이었다.[9] 여수읍(현 여수시)와 달리 지정면이 아니었다.[10] 이것은 당해년도에 인구가 더욱 많았던 보성군 벌교면(1937년에 읍 승격)보다 읍 승격이 빨리 된 것이다. 인구통계를 보자면, 1930년 인구통계에서 순천면 18,497명에 벌교면 22,646명이, 1935년 인구통계에서 순천면 21,938에 벌교면 24,254명이 찍혔다. 순천읍이 벌교읍을 앞지른 통계는 그 다음 조사인 1944년.[11] 1949년 8월 14일 순천부로 승격했는데 다음날인 8월 15일 전국의 모든 부가 시로 개편되면서 '순천부'라는 이름은 단 하루 쓰이고 말았다.[12] 1980년 4월 이전에는 군청소재지가 부/시로 승격하면 잔여 지역이 옛 지명이나(창원군->의창군, 경주군->월성군, 충주군->중원군), 명칭의 일부를 바꾸기도(대전군->대덕군('덕'은 회덕에서 따온 것), 전주군->완주군('완'은 완산에서 따온 것), 청주군->청원군('원'은 지명에 흔히 붙는 접미사) 했다. 나주시같은 경우에는 읍 지역이 고려시대의 명칭인 금성시로 바뀌고 남은 지역이 나주군이 되기도 했다.[13] 이 때 쌍암초등학교, 쌍암중학교 등도 개명당했다(?).[14] 이러한 일들로 인해, 통합 당시 8,000여명에 달하던 승주읍 인구는 2015년 5월 기준 주민인구통계에서 3,092명 정도로 떨어졌다.[15] 그래서인지 구승주군청사는 영화 강철비를 비롯해 여러 매체에서 북한 핵심장소로 나온곳이다. 예를 들어,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보위부 청사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