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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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 팔각정 | 순흥 안씨 양도공파 묘역 | 지장사 철불좌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4호 | |
순흥 안씨 양도공파 묘역 順興安氏 良度公派 墓域 | |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 산126-1번지 |
시대 | 조선 시대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기타 |
수량 / 면적 | 분묘 5基, 석물 32基, 토지 2,247.1㎡ |
지정연도 | 1990년 6월 18일 |
관리자 (관리단체) | 순흥 안씨 양도공파 종회 |
<colbgcolor=#C00D45> 순흥 안씨 양도공파 묘역[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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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흥 안씨 양도공파의 파조인 양도공 안경공과 그 후손들의 묘역.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 있다.2. 상세
이 문서에서 다루는 묘역은 현재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받은 묘 5기의 영역이다. 양도공 안경공(良度公 安景恭)과 그의 아들 정숙공 안순(靖肅公 安純), 그리고 안순의 세 아들인 문숙공 안숭선(文肅公 安崇善), 소윤공 안숭신(小尹公 安崇信), 안천공 안숭효(安川公 安崇孝)의 묘이다.15세기에 조성한 묘역으로, 당대의 모습이 잘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0년 6월 18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받았다. 원래는 안경공과 안순, 안숭선의 묘만 문화재로 관리받았으나 2017년 2월 9일에 서울특별시에서 안숭신, 안숭효의 묘까지 범위를 확대하여 지정했다. 안숭신, 안숭효의 묘 역시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는 이유였다.
석물은 총 32기이다. 묘비, 혼유석, 상석 등 묘에 필요한 기본적인 석물은 묘마다 각각 1기 씩 있다. 장명등의 개수는 3기(안경공, 안순, 안숭효)이며, 신도비는 2기(안순, 안숭선)가 있다. 문, 무인석은 묘마다 있는데, 안숭선의 묘에는 4기가 있고 다른 묘에는 각각 2기 씩 있다.
<colbgcolor=#C00D45> 순흥 안씨 양도공파 묘역에 있는 사당 흥녕부원군부조묘[2] |
사당을 기준으로 왼쪽에 안순과 안숭신, 안숭효의 묘가 있고, 오른쪽에 안경공과 안숭선의 묘가 있다.
3. 인물
3.1. 안경공
안경공은 조선 개국 공신으로, 자는 손보(遜甫)이다. 1347년(충목왕 3년)에 경상도 순흥부에서 태어나 고려 공민왕 때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우왕 시절에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경상도 안렴사를 지낼 때 사노비들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했고, 공양왕 때는 정몽주를 몰아내려다가 도리어 좌천당했다. 이를 보아 고려 말에는 이미 이성계 측의 일원이 된 듯 하다.조선 건국 당시 좌대언으로서 아버지 안종원과 함께 참여했다. 그 공으로 중추원 도승지 직을 제수받고 다음 해에 '흥녕군(興寧君)'으로 봉해졌다. 이후 지역 행정 업무를 주로 맡아 전라도관찰출척사를 거쳐 수도 한성의 최고 책임자인 판한성부사와 옛 수도 개성을 책임지는 판개성부사를 역임했다. 개성부사를 지내던 중에 1차 왕자의 난으로 살해당한 정도전과 남은의 죄를 줄여줄 것을 태종에게 간언했다가 대간에서 탄핵을 받았다.
1416년(태종 16년)에는 집현전 대제학이 되면서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으로 격상되었다. 1421년(세종 3년)에 75세[4]로 사망했고 시호 '양도(良度)'를 받았다.
3.2. 안순
안경공의 아들로, 자는 현지(顯之)이다. 1371년(공민왕 20년)에 태어나 세종 시기에 호조참판 자격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이후 공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세종 중반에는 판중추원사와 호조사 및 의정부 찬성사를 지냈고 1437년(세종 19년)에는 기근이 일어난 충청도로 내려가 백성들을 구휼했다.앞의 이력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주로 나라 살림과 관련있는 일을 많이 맡아서 했으며, 재정을 다루는 책임자였던 만큼 매사에 엄격하고 강직했다고 한다. 1440년(세종 22년)에 병으로 사망했고 시호 '정숙(靖肅)'을 받았다.
3.3. 안숭선
안순의 차남으로, 자는 중지(仲止)이다. 처음에는 음서로 관직을 지냈다가 1420년(세종 2년)에 문과에 급제[5]한 후 사헌부 지평으로 본격적인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조전랑, 대사헌, 공조참판,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 고위직을 주로 역임했으며, 명나라에 여러 번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병조판서 역임 중에 지춘추관사를 겸하면서 《고려사》 편찬에 참여했고,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받았으나 병으로 몇 달 못가 사직했다. 이후 예문관대제학 직을 맡았으며 의정부 좌참찬으로 있던 1452년(문종 2년)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3.4. 안숭신
안순의 3남이다. 1395년(태조 4년)에 금천에서 태어나 오위도총부 사직과 형조 정랑 직을 맡았다. 함길도 도사를 역임하던 중 구휼 실패로 파면당했고, 파면 한 달 후에 황희의 천거로 경기좌도 찰방이 되었다가 세종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1441년(세종 23년)에 사망했다.3.5. 안숭효
안순의 4남으로, 자는 계충(季忠)이다. 진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호조 참의와 지사간원사를 역임했다. 단종이 왕이 된 후에는 경기도관찰사와 덕녕부윤 직을 맡으면서 수양대군의 즉위에 협력했다.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뒤에는 대사헌과 공조 및 호조 참판으로 일했고, 1459년(세조 5년)에는 동지중추원사 겸 충청도관찰사로 제수받아 충청도로 갔는데, 이때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고 탐관오리들을 엄벌하여 백성들의 인망을 얻었다. 그러나 너무 열심히 일했던지 재직 중에 중병에 걸려 이듬해에 충청감영에서 세상을 떠났다.#[1]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사진 출처 - 디지털구로문화대전.[3] 단, 지붕에 기와를 올렸다.[4]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 기준.[5] 장원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사진 출처 - 디지털구로문화대전.[3] 단, 지붕에 기와를 올렸다.[4]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 기준.[5] 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