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2F3E46,#000><colcolor=#f7f7f7,#dddddd> 슈거 레이 레너드 Sugar Ray Leonard | |
본명 | 레이 찰스 레너드 Ray Charles Leonard |
별명 | 슈거 Sugar |
출생 | 1956년 5월 17일([age(1956-05-17)]세)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윌밍턴 | |
국적 | 미국 |
복싱 전적 | 40전 36승(25KO) 3패(1KO) 1무 |
신장/리치 | 175cm / 179cm |
체급 | 웰터, 슈퍼웰터, 미들, 슈퍼미들, 라이트헤비급 |
스탠스 | 오소독스[1] |
링크 |
1981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 ||||
미국 아이스하키 대표팀 | → | 슈거 레이 레너드 | → | 웨인 그레츠키 |
1. 개요
미국의 전 권투선수.역사상 최고의 '테크니션'을 꼽을 때 항상 거론되는 선수이며, 이외에도 훌륭한 쇼맨십도 갖추고 있었고, 경기마다 상식을 뛰어넘는 운동 능력까지 선보이며 수많은 복싱팬들을 매료시킨 슈퍼스타였다.
2. 어린 시절
1956년 5월 1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윌밍턴에서 태어났다. 레너드의 본명인 레이 찰스 레너드는 그의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던 가수 레이 찰스에게서 따온 것이었다. 슈거 레이 레너드라는 이름은 후에 레너드가 자신이 존경하던 복서 슈거 레이 로빈슨의 이름을 쓰면서 생겨났다. 로빈슨의 이름을 쓰면서 '슈거'라는 별명을 갖게 됐는데, 이것은 그의 아내가 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대부분의 흑인 복서들이 겪는 필연적인 환경일지 모르지만, 그의 어린 시절도 불우했다. 가난한 빈민가에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가정 폭력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는 빈민가의 흑인들이 성공할 길은 갱이 되거나 운동을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 역시 믿을 수 있는 것은 맨주먹뿐이었고, 14살이 되었을 때 메릴랜드주 팔머 파크에 있는 팔머 파크 레크리에이션 센터에서 권투를 시작하게 된다.
3. 커리어
3.1. 아마추어 경력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레너드는 당시 엄청난 풀을 가졌던 미국 아마추어 복싱계에서 상대들을 연파하며 150전을 치러 145승을 거두었고, KO로 이긴 경기 수만 해도 75경기나 되었다. 이외에도 내셔널 골든 글러브 챔피언십 2회(1973, 1974), AAU 챔피언십 2회(1974, 1975)를 차지했으며, 1975년 팬아메리칸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이처럼 20살 이전에 아마추어 무대를 제패한 레너드였지만, 그에게도 수차례 고비가 찾아왔던 적이 있었다.16살 때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열린 1972년 동부 올림픽 선발전에 참가했다. 규정에 따르면 권투 선수가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선 17살이어야 했기 때문에 레너드는 나이를 속였다. 그는 준결승에서 신시내티의 그렉 휘일리에게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판정패를 당했다. 휘일리는 레너드에게 너무 심하게 맞아서 선발전에 계속 참가할 수 없었고, 다시는 권투를 하지 않았다.
1974년 5월 16일, 러시아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판정으로 아나톨리 캄네프에게 패배했다. 군중은 판정에 대하여 야유를 보냈고, 캄네프는 레너드에게 방금 따낸 챔피언십 트로피를 건네주었다.
1975년 1월 18일,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캄네프와 다시 만나게 된 레너드는 이번엔 포인트싸움에서 앞서며 승리를 거두었다.
레너드는 1974년 폴란드에서 카지미에르즈 슈체르바에게 패배했다. 레너드는 첫 두 라운드를 지배했고 세 번째 라운드에서 슈체르바를 세 번이나 쓰러뜨렸지만, 심판은 세 번째 녹다운이 벨이 울린 후에 나왔다고 판단하여 레너드를 실격시켰다.
하지만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올림픽에 라이트 웰터급 국가대표로 출전한 레너드는 또다시 군계일학의 경기력을 선보였고, 준결승에서 2년 전 맞붙었던 슈체르바와 다시 만나 이번에는 5:0 판정승을 거두며 지난 경기의 억울한 패배를 완벽하게 설욕했다.
마지막 결승전만이 남은 상황에서 당시 쿠바의 슈퍼스타이자 'KO 아티스트'라 불리던 안드레스 알다마가 우승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이 지배적이었지만, 레너드는 주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동요 없이 차분히 경기를 풀어갔다. 한 라운드, 한 라운드 침착하게 상대의 허점을 노리던 레너드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펀치를 폭발하며 알다마를 일방적으로 꺾었다.
안드레스 알다마와의 경기
3.2. 프로 경력
3.2.1. 데뷔 전 에피소드
몬트리올 올림픽 금메달로 아마추어 복서로서 정점을 찍은 그는 곧바로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그의 선택은 프로 진출이 아닌 대학 진학이었다.올림픽을 통해 레너드는 이미 검증된 복서이자 준비된 스타나 다름없는 상태였기에 복싱계에서는 난리가 났다. 경기력은 기본이고 스타성과 상업성까지 갖춘 그를 향한 프로모터들의 적극적인 구애가 끊이지 않았다. '레너드를 링에 올리기만 해도 대박'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제안들을 거절하고 결국 메릴랜드 주립대에 입학했다. 이걸 보고 대전료와 몸값을 올리려는 레너드의 '베팅'으로 여기는 시각도 있었는데, 결과론적으로 레너드가 경제적 어려움과 아버지의 병환을 이유로 은퇴를 번복한 후 1977년 2월 프로에 데뷔했으니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뒷 얘기는 금방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다. 뭐가 어찌됐든 천재 복서가 프로에서 경기를 갖게 된 건 사실이기에 모든 기대와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대전료부터가 이미 4만 달러[2]로 당시 신기록이었으며, 프로 경력이 없는 신인 선수의 데뷔전을 CBS가 전국에 생방송 했다. 그의 인기와 지명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3.2.2. 챔피언 벨트 획득
프로 데뷔전 승리 이후 승승장구하며 무려 25연승을 달리던 레너드는 1979년 마침내 세계 챔피언에 오를 기회를 잡게 되는데, 상대는 천재 복서로 알려진 윌프레드 베니테스였다. 대표적인 기교파 복서였던 두 선수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맞섰고, 결국 체력이 달린 베니테스를 레너드가 마지막 15회에 눕히고 챔피언에 등극했다.프로 데뷔 2년 만에 챔피언에 오르면서 레너드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복싱 영웅이 된다. 당시 그와 함께 마빈 해글러, 토마스 헌즈, 로베르토 두란 등이 미들급과 웰터급에서 전성기를 누렸는데, 레너드까지 포함해 이들 4명은 1980년대 복싱 황금기를 이끌었던 4대 복싱 영웅으로 불리며 큰 인기를 누렸다.
3.2.3. F4와의 맞대결
복싱계의 F4, 즉 레너드, 해글러, 헌즈, 두란은 비슷한 체급의 선수들이다 보니 서로 경기를 치른 적이 많았다. 이들의 대결은 당시 복싱팬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으며 이후에도 복싱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명승부로 늘 회자된다. 이중에서 특히 두란과의 2차전은 복싱 역사상 유명한 미스터리가 되기도..3.2.3.1. VS 로베르토 두란
1980년 6월 레너드는 캐나다 퀘벡에서 라이트급에서 체급을 올린 두란과 방어전을 치른다. 대부분의 전문가가 6-4 정도로 레너드의 우세를 점쳤지만, 레너드의 완패. 지금 경기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드시, 레너드는 치고 빠지며 도망다니다, 두란의 돌주먹에 걸려 상당히 고전했다. 레너드의 껴안기와 빠른 스텝이 없었다면 일치감치 레너드의 KO패가 될뻔한 경기였다. (다만 영화를 보면, 두란이 레너드를 자극해서 레너드가 흥분한 상태로 경기에 임한 것으로 나온다)이후 절치부심한 레너드는 같은 해 11월에 열린 두란과 2차전에서 빠른 풋워크로 두란을 농락하며 8회 TKO승을 거둔다.
하지만 이 경기는 레너드의 승리로 끝나긴 했지만 두란이 경기 중 갑자기 등을 돌리며 시합을 포기해 의혹을 남겼다. 두란 자신은 갑작스러운 위경련으로 경기를 계속할 수 없었다고 후에 밝혔다.
이 경기를 두고 여러 이야기가 있었는데, 두란이 생리 현상을 호소했다고 하는 이도 있고 또 다른 이들은 레너드가 라이벌전에 걸맞지 않은 상대를 자극하는 쇼맨십을 계속해 두란이 짜증이 나서 그만두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6월에 경기를 치르고, 5개월만에 다시 재경기를 치르는 강행군. "hands of stone" 영화상에서는 두란이 쉬고 있었는데, 매니저가 돈 때문에 같은 해에 또 재경기를 잡은 것으로 두란의 준비 부족이었다고 나오기도 한다.)
레너드 vs 두란 2차전. 32분 00초 시점에 두란의 "No mas"가 나온다.
레너드는 2차 은퇴 번복 후 한참 뒤인 1989년에도 다시 한 번 두란과 맞붙어 판정승을 거둔다.
두란은 F4중 유일하게 레너드를 한 번 이겼다.
3.2.3.2. VS 토마스 헌즈
두란과 방어전에 승리한 레너드는 1981년 10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숙명의 라이벌 토마스 헌즈와 웰터급 통합전을 가진다. 지금까지 열렸던 수많은 라이벌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최고로 꼽는 시합이다. 레너드의 우세를 점친 미국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헌즈의 우세를 점친 전문가들이 많았다. 레너드의 기술보다 헌즈의 공격력이 워낙 강해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레너드는 시합 전 왼쪽 눈 부상이 있었고, 헌즈의 잽을 계속 허용하는 바람에 중반전 이후 거의 보이지 않게 된 악조건 속에서 경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레너드는 조금씩 경기 분위기를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면서 초반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마침내 14회 헌즈를 눕혀 버렸다. 헌즈는 프로 데뷔 후 첫 패배를 당했고, 그것도 실신 상태의 KO패라 더욱 충격이 컸다. 이 경기에 승리하며 레너드는 헌즈와 양분한 웰터급을 통합하게 된다. 스타성 역시 폭등했다.레너드 VS 헌즈 1차전
이후 89년에 재대결을 펼치는데, 내용상 헌즈의 완전한 승리였지만 무승부 판정이 나와 엄청난 비난을 받는다.
레너드 VS 헌즈 2차전
3.2.3.3. VS 마빈 해글러
1982년 들어 프로모터들은 레너드와 마빈 해글러의 일전을 준비한다. 둘의 대결은 성사만으로도 관심을 끌었고 프로모터들에게는 떼돈을 안겨줄 회심의 카드였다. 해글러와 레너드 역시 목돈을 만질 기회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해 11월 9일 레너드는 두 번째 은퇴 선언을 하고 만다.사실 레너드는 1982년 5월 14일에 로저 스태포드를 상대로 언디스퓨티드 웰터급 챔피언십 타이틀 방어전이 예정되어 있었고, 가을에는 아론 프라이어를 상대로 타이틀을 방어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스태포드와의 경기를 위해 훈련하는 동안 레너드는 왼쪽 눈의 망막이 분리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경기는 취소되었고 레너드는 1982년 5월 9일에 망막을 복구하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레너드는 1983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경기력으로 자신이 최강자라는 것을 입증하겠다며 다시 링으로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1986년 4월 6일 마침내 모두가 바라던 "The Super Fight" 레너드와 해글러의 경기가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야외 특설 링에서 시작됐다. 1만 5336명의 관중이 경기장을 찾아, 입장 수익만 790만 달러(약 82억원)였고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75개국에 동시 생중계가 됐던 경기였다. 전문가들은 헤글러의 절대 우세를 점쳤다.
하지만 경기 분위기는 달랐다. 레너드는 자신을 괴롭힌 두란과의 경기처럼 아웃복싱 스타일로 치고 불리하면 클린칭하는 전법으로 해글러의 러시를 막아냈다. 또한 해글러는 초반 라운드에 레너드보다 자신이 더 나은 테크니션이라는걸 보여주겠다며 오소독스 스탠스를 유지하며 경기를 이끌어 나갔고 결국 이런 자만함 때문에 초반 라운드를 몽땅 레너드에게 주게 되는 일이 되어버렸다. 레너드는 해글러와 붙기 전에 해글러의 강인함과 사우스포 스탠스 덕에 고민이 심했는데 해글러가 시작부터 오소독스 스탠스를 취하자 자신감이 붙었다고 한다. 결국 해글러는 묵직한 정타를 던졌으나 레너드가 더 많은 펀치를 해글러에게 적중시켰고 최종 판정은 레너드의 승리였다.
레너드 VS 해글러
이 일전 후 해글러는 판정에 크게 불만을 표하며, 반복해서 재대결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레너드는 재대결을 계속 거부했다. 해글러와의 대전은 링사이즈나 글러브 무게, 라운드 수에서 WBC 표준이 아닌 아웃복서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행해졌는데, 재대결에서는 해글러가 불리한 조건에 동의하지 않을테니 이길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래도 해글러가 계속 재대결을 요구하자 레너드는 얼마 뒤 아예 재은퇴를 해버린다. 레너드가 은퇴한 후에도 해글러는 1년 넘게 재대결을 요구하지만 레너드는 두문불출하며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 해글러는 이런 더러운 수작이 복싱이냐며 분노하고 은퇴를 선언.[3]
그리고 해글러의 은퇴로부터 며칠 뒤, 레너드는 귀신같이 은퇴를 번복하고 링에 복귀한다. 헌즈와의 2차전, 두란과의 3차전은 이 복귀 이후 가진 경기이다.
한편 해글러는 이전부터 계속 러브콜이 오던 B급 영화계에 입문해 이탈리아로 촬영을 떠났다. 하지만 그렇게 나온 액션영화도 흥행에 실패. 즉 딱 2편, 인간병기 인디오 시리즈 1,2편에 출연한 뒤 배우로서도 은퇴하게 된다.
3.2.4. 5체급 석권과 커리어 말년
천재 복서답게 2차 복귀 이후로도 노익장을 과시했다. 1988년 11월 체급을 올려 복귀전을 가졌는데, 캐나다의 도니 라롱드와 맞붙어 9회 TKO로 이기고 WBC 수퍼 미들급, 라이트 헤비급 왕좌에 오른다. 사상 최초의 메이저 기구 5체급 석권.[4] 이 때까지가 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후 수퍼 미들급에서 상술한 헌즈와의 2차전, 두란과의 3차전을 가졌으며, 논란은 있었지만 결국 타이틀을 지켜냈다. 이 시점까지도 레너드의 패배는 오래 전 두란에게 당한 1패 뿐이었다.
이 경기 뒤로는 한동안 경기를 가지지 않았지만 1년이 넘는 공백을 가진 뒤 만 35세가 된 1991년 또다시 복귀했다. 그리고 테리 노리스를 상대로 수퍼 웰터급 타이틀매치를 가지며 그만의 도전을 이어갔으나 나이는 속일 수 없는지 두 번이나 다운을 당한 끝에 12회 판정패하고 만다.
1997년 나이 마흔이 넘어서 또다시 복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 나이를 속일 수 없었는지 6세 연하인 푸에르토리코의 헥토르 카마초에게 KO패. 이 40번째 경기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은퇴했다.
4. 은퇴 후
ABC, CBS, NBC, ESPN, HBO 같은 방송에서 권투 분석가로 일했는데 HBO와의 관계는 10년 이상 계속 이뤄졌다.2001년부터 2004년까지 SRL Boxing이라는 프로모션 회사를 운영하였다. 이 회사는 매달 첫 번째 금요일에 ESPN II에서 경기를 홍보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레너드는 쇼를 홍보하는 것 외에도 방송 중에 특별 게스트 해설을 제공했다.
Sugar Ray Leonard 재단을 설립하여 청소년 당뇨병 연구 재단과 매년 치료를 위한 걷기를 지원했고 이러한 기부활동으로 LA스포츠 엔터테인먼트위원회로부터 앰배서더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5. 파이팅 스타일
양발을 앞뒤로 흔들며 춤을 추는 듯한 경쾌한 스텝, 만화에서나 볼 법한 풍차 돌리기 후 상대에게 날리는 오른손 훅, 그리고 때릴 테면 때려보라는 식으로 상체를 내밀고 상대의 펀치를 유도하는 심리전까지 모든 능력을 겸비했던 완성형 복서였다.순발력이 뛰어났고 양손을 모두 잘 사용했는데, 특히 그의 '현란한 풋워크'를 따라올 수 있는 선수는 거의 없었다. 또한 영리한 데다 기회 포착에도 능했으며, 승부처에서의 폭발력도 대단했다.
6. 평가
"어느 날 밤이든 레이 레너드는 저지 조 월컷을 훌륭하고 효과적으로 흉내낼 수 있고, 무하마드 알리처럼 발을 움직이고, 슈거 레이 로빈슨처럼 잽을 던지고 움직이며, 윌리 펩만큼 교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호랑이, 슈거 레이 레너드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토마스 허네스와 함께 본 것과 같은 호랑이, 심지어 로베르토 두란과의 첫 번째 싸움에서 레너드가 지는 노력에서도 본 것과 같은 호랑이; 물론, 레너드가 마빈 해글러를 물리치며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한 그 날 밤에 본 호랑이입니다."
조지 포먼 공식 웹사이트#
조지 포먼 공식 웹사이트#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렇게 다양하고 뛰어난 상대와 5번이나 싸운 권투 선수가 있었을까? 정말 극소수일 뿐이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프랭크 데포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프랭크 데포드
1979년 11월부터 1981년 9월까지 레너드가 윌프레드 베니테스, 로베르토 두란(2), 아유브 칼룰레, 토마스 헌즈와 맞붙었을 때 그들의 전적은 다 합쳐서 177승 1무 1패. 이외에도 당시 기준으로 사상 최초였던 메이저 기구 5체급 석권을 하는 업적까지 종합했을 때 그를 '복싱 천재'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으며, 세기의 기량과 쇼맨쉽을 앞세워 권투 역사상 최고의 인기 선수 중 하나로 군림했다.
다만 그의 빛나는 업적과 실력과는 별개로, 언론이나 복싱계에서 과도하게 그를 밀어주는 측면이 있었다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다. 당장 해글러와의 대전에서 레너드가 이겼다는 점을 억지로 부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일전을 채점하는 시각으로 만일 헌즈와의 2차전을 본다면 과연 그 경기를 무승부로 판정할 수 있을까 의문을 품는 복싱팬들이 많다.[5] 가장 아쉬운 점은 해글러와의 재대결을 피하다가 정작 그의 은퇴 직후 링으로 복귀한 점이며, 이후 헌스와의 2차전, 두란과의 3차전, 그리고 노리스, 카마초와의 경기들은 레너드의 이름값에 걸맞지 않는 졸전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7. 여담
- 레너드의 아버지, 시세로 레너드는 해군에서 권투를 했다. 그는 156파운드에서 미국 해군 챔피언이었고 46승 1패의 전적을 가지고 있었다.
- 레너드의 형 로저 레너드도 프로 권투 선수였다.
- 레너드는 복싱으로 1억 달러 이상의 대전료를 벌어들인 최초의 선수였다.
- 1978년부터 1990년까지 HBO의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 2011년 6월 6일, 레너드의 자서전 'The Big Fight: My Life In and Out of the Ring'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뉴욕타임스에서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으며, 레너드는 이 책을 통해 어린 시절 익명의 "유명한 올림픽 복싱 코치"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 2011년 개봉한 영화 리얼 스틸의 복싱 기술 자문을 맡았다.
- 메이웨더와 키보드 배틀을 벌인 적이 있다. 가만히 있다 봉변 당한 헌즈는 덤.
[1] 왼손이 앞을 향하고있는 오른손잡이 스타일[2] 2023년 기준으로 약 20만 달러에 달하는 가치이다. 참고로 2023년 미국 프로복싱 선수들의 평균 연수입이 4만 달러를 갓 넘는 정도이다.출처[3] 해글러는 생전의 인터뷰에서, 도전자가 링에서 일관되게 피하기만 하는 복싱을 한 후 챔피언 벨트를 빼앗아 가는 것을 자신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4] 흔히 레너드의 업적으로 일컫는 '5체급 석권'은 사실 정확하지 않은 주장이다. 그가 1988년 11월 7일 공석이던 WBC 슈퍼 미들급과 라롱드의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을 놓고 라롱드와 싸워 이긴 것은 사실이나, 라롱드는 슈퍼 미들급으로 체급을 맞춰서 나왔다. 즉 레너드가 5개 타이틀을 획득했다는 말이라면 맞는 이야기지만, 적어도 5체급 석권이라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 당시로서는 4체급은 물론 3체급 석권도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체급을 월장해서 타이틀을 획득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이 이 업적을 빛나게 만든다는 측면이라는 점을 의도적으로 도외시한 주장이다.[5] 그 경기에서 해글러가 챔피언이고 레너드는 도전자였으며, 헌스와의 2차전에서는 레너드가 챔피언이고 헌스가 도전자였다. 즉 헌스와의 경기가 혹시 챔피언에게 어드밴티지를 주었기 때문에 무승부였다는 것이 맞다면, 해글러와의 경기도 최소한 무승부라고 판정해야 한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