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10:16:12

스티븐 케시

나이지리아의 축구인
파일:스티븐케시.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스티븐 케시
Stephen Keshi
본명 스티븐 오케추쿠 케시
( Stephen Okechukwu Keshi )
출생 1962년 1월 23일 /
나이지리아 아자레
사망 2016년 6월 7일 (향년 54세) /
나이지리아 베닌시티
국적
[[나이지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85cm
직업 축구선수 (센터백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ACB 라고스 (1979)
뉴 나이지리아 뱅크 FC (1980~1984)
스타드 드 아비장 (1985)
아프리카 스포르트 아비장 (1986)
KSC 로케런 (1986~1987)
RSC 안데를레흐트 (1987~1991)
RC 스트라스부르 (1991~1993)
RWD 몰렌베이크 (1993~1994)
센트렐 캘리포니아 밸리 하이드라 (1995)
새크라멘토 스콜피온스 (1996)
페를리스 FA (1997~1998)
감독 나이지리아 대표팀 (2000~2001 / 코치)
나이지리아 U-20 대표팀 (2000~2001)
토고 대표팀 (2004~2006)
토고 대표팀 (2007~2008)
말리 대표팀 (2008~2010)
토고 대표팀 (2011)
나이지리아 대표팀 (2011~2014)
나이지리아 대표팀 (2015)
국가대표 64경기 9골 (나이지리아 / 1981~1995)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감독 경력5. 갑작스런 사망6. 여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나이지리아의 축구선수 출신 축구감독. 1990년대 나이지리아 대표팀의 일원으로써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다.

감독이 된 이후 서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대표팀을 맡아 토고 대표팀의 역사상 첫 월드컵 본선진출과 나이지리아의 16년만의 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끈 명장이었다.

2016년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인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2. 클럽 경력

1979년 나이지리아 리그의 ACB 라고스에서 프로로 데뷔한 그는 1980년 뉴 나이지리아 뱅크로 이적해 4년간 활약했고, 1985년 코트디부아르로 넘어가 1985시즌 스타드 드 아비장, 1986시즌 아프리카 스포르트에서 모두 우승을 경험하는 등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이어간다. 특히 1986시즌 아프리카 스포르트의 시즌 4관왕을 이끈 핵심 수비수로써 활약했다.

당시 아프리카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선수들이 많이 진출하는 유럽리그가 벨기에 리그였고, 그도 예외없이 벨기에 리그 팀들의 러브콜을 받아 1986년 KSC 로케런에 입단했다.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1986-87 시즌 28경기 6골이라는 많은 골을 넣으면서 가치를 인정받았고, 1987년 리그 최강팀인 RSC 안데를레흐트로 이적한다. 여기서 그는 4시즌 동안 99경기 18골로 득점력 좋은 수비수의 전형을 보여주며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1986-87 시즌 로케런에서, 1990-91 시즌 안데를레흐트에서 모두 리그 우승을 경험했고, 특히 1989-90 시즌에는 UEFA 컵 위너스컵 결승까지 진출하는 등 다양한 대회에서 활약했다.

이후 그는 더 큰 리그인 프랑스 리그에 진출해 RC 스트라스부르에서 2시즌을 주전으로 소화했다. 1991-92 시즌 팀의 1부리그 승격을 이끌었고, 1992-93 시즌에는 승격팀 돌풍을 이끌며 리그 8위라는 좋은 성적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1993-94 시즌 다시 벨기에로 건너가 리그 강등권 팀 RWD 몰렌베이크에 입단해 아슬아슬한 강등 싸움 끝에 극적인 잔류를 이끌었다.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선수생활을 접은 그는 코치 연수 겸 선수 생활 목적으로 미국으로 향했고, 세미프로리그에서 2시즌을 더 뛰었다. 그러다 말레이시아 리그의 제의를 받고 1997년 시즌 34경기 4골을 기록한 뒤 은퇴했다.

3. 국가대표 경력

수퍼 이글스로 불리던 1990년대 나이지리아 대표팀 전성기의 핵심 멤버 중 한명이었다. 1987년 네이션스컵 예선전 시에라리온과의 경기에서 A매치에 데뷔한 그는 1988년 네이션스컵 본선에도 출전하는 등 빠르게 팀의 주전급 수비수로 성장했다.

이후 1990년대 나이지리아 대표팀의 돌풍을 이끄는 멤버가 된다. 1992년 네이션스컵 4강, 1994 네이션스컵 우승을 경험했고, 1994년 월드컵에서 첫 출전한 나이지리아의 16강 진출을 함께했다. 나이지리아의 16강 진출 여부가 걸렸던 그리스와의 조별리그 최종전에 선발로 출전해 무실점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1995년 킹파드컵 엔트리에 들었지만 출전하진 않았고, 자연스럽게 대표팀에서 멀어지게 된다.

4. 감독 경력

2001년 아프리카 U-20 선수권에 나서는 나이지리아 청소년 대표팀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첫 감독직을 시작했다. 이 때 나이지리아 대표팀의 코치도 겸직하고 있었고, 청소년 대표팀 레벨에서의 나이지리아는 세계적 강호였기 때문에 이 대회만 잘 치러낸다면 차기 대표팀 감독의 길도 열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 대회 조별리그에서 광탈하는 충격적인 성적을 내고 말았고, 그대로 대회 종료와 함께 경질되었다. 개최국 자격이긴 했으나 2년 전 대회에서 8강까지 올랐기 때문에 여론이 좋을 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이후 야인 생활을 하다가 2004년, 이웃나라인 토고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는다. 이 때가 그의 감독으로써의 1차 리즈 시절이다. 토고는 FIFA 월드컵 지역예선과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에서도 늘상 1차 예선부터 치러야 하는 아프리카 내에서도 전형적인 약체팀이었고, 당시 20살 약관의 유망주 엠마누엘 아데바요르를 적극적으로 대표팀 주전 공격수로 발탁하면서 팀 전력의 상승을 이끌어냈다. 1차 예선에서 적도기니를 다득점 끝에 겨우 누르고 2차 예선에 진출해, 세네갈, 잠비아, 말리 등 토고보다 한 수 위의 팀들과 한 조에 묶였다. 그나마 만만한 팀들이라곤 라이베리아와 콩고 둘 뿐이었다.

이렇게 되니 현실적으로 토고는 2006 FIFA 월드컵 독일 본선 진출은 고사하고 조 3위 안에나 들어 대신 2006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이집트 본선 진출로나 만족해야 할 판이었다. 첫 경기 잠비아 원정에서 무난하게 0-1 패배를 하면서 예상은 현실이 되는 듯 했으나, 2차전 세네갈과의 홈 경기에서 아데바요르의 미친 활약으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8강 진출팀인 세네갈을 3-1로 잡는 대 이변을 연출한다. 3차전 라이베리아와의 원정경기에서 0-0 비기며 한 숨 고른 토고 대표팀은 4 ~ 7차전까지 4연승을 질주하며 조 선두로 올라섰고, 일약 첫 월드컵 본선을 노려보는 위치가 되었다. 8차전 세네갈과의 중요한 일전을 2-2로 잘 치른 토고는 남은 두 경기마저 다 승리하며 끝까지 쫒아온 세네갈을 제끼고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하게 된다. 이는 지금까지도 월드컵 예선 역사상 가장 반전의 결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케시 감독의 아데바요르 주전 발탁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데바요르는 아프리카 예선 11골로 득점 1위를 기록할 만큼 원맨쇼를 펼쳤다.

이후 2006년 1월 열린 네이션스컵에 참가해 월드컵 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여기서 아프리카 예선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예전의 약체 토고의 모습만 보여주며 3전 전패로 허무하게 대회를 마무리했다.[1] 본 게임 월드컵이 중요했겠지만, 여기서 토고 축구 협회는 그를 전격 해임하는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만다. 악에 받친 케시 감독은 대회 직전까지 오토 피스터 체제의 토고 대표팀을 흔드는 발언을 쏟아내며 분풀이를 했고, 결국 피스터 감독도 뾰족한 묘안을 뭐 하나 내지도 못하였고, 게다가 월드컵을 앞두고 팀을 떠났다가 다시 복귀하는 등 혼란스런 모습까지 보인 끝에 3전 전패로 대회를 마쳤다.[2] 이후 2007년 2월, 토고 축구 협회는 그와 화해한 뒤 다시 그를 토고 대표팀 감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2008년까지 토고 대표팀을 지휘했다.

이후 2008년 4월, 말리 대표팀으로 옮겨갔다. 역시 말리를 네이션스컵 본선에 올려놓았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이 원하던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거기에 2010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앙골라 본선에서도 조별리그에서 광탈하면서 결국 해고되었다.

그렇게 기나긴 타국 생활 끝에 2011년, 자국인 나이지리아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다. 토고, 말리에서와는 달리 나이지리아에선 더 진일보한 모습을 보이며 그의 감독 생활 두 번째 리즈 시절을 열었다. 2013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자국에게 19년만의 우승이라는 선물을 안겨 주며 감독으로써 첫 타이틀을 따냈고, 이 우승으로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네이션스컵 우승을 달성한 인물이라는 기록도 세우게 된다. 이 우승 타이틀 덕분에 2013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브라질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비록 조별리그에서 아쉽게 광탈했지만, 그래도 우루과이, 스페인이라는 대륙을 대표하는 강호들과의 경기력은 괜찮았다는 평이었고, 이후 열린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아프리카 최종예선에서 돌풍의 팀이던 에티오피아를 무난하게 잠재우고 월드컵 본선 진출도 이끌게 된다. 이로써 케시 감독은 아프리카인 감독 최초로 두 국가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끈 감독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이래저래 아프리카 지역의 감독으로써는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중.

2014 월드컵에서도 비록 오심으로 이긴 경기였으나 보스니아를 잡고 아르헨티나와의 2-3 한점차 승부를 연출하는 등 선전하면서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이후 16년만의 월드컵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달성한다. 이후 프랑스와의 16강전에서 전력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0-2로 지면서 탈락했다. 대회 종료 이후 나이지리아 대표팀 사임 의사를 밝혔지만, 나이지리아 축구 연맹의 간곡한 설득 끝에 2015년, 다시 나이지리아 대표팀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모로코와의 예선 경기 패배 이후 너무 많은 압박감의 시달리고 있다며 다시 감독직 사임을 요청했고 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았고, 이것이 그의 선수와 지도자 다 통틀어 영원한 마지막 축구인 커리어가 되었다.

5. 갑작스런 사망

2016년 6월 7일, 그가 거주하고 있던 베닌 시티 자택에서 심장마비가 일어나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그는 곧장 구급차에 실려 호송되었으나 병원으로 가던 중 사망하고 만다. 향년 5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앞서 2015년 겨울 그의 아내와 사별했고, 바로 이어서 세살 짜리 막내딸이 암으로 투병중 사망하는 등 연거푸 일어난 비극에 나이지리아 축구계는 큰 슬픔에 빠졌었다.

6. 여담

  • 다양한 종교가 혼재하는 나라인 나이지리아에서 소수에 속하는 천주교인이었다.[3]
  • 큰 아들 코스 케시는 현재 나이지리아 프로 축구리그에서 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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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나마 같이 3전 전패로 대회를 마친 남아공이 골득실에서 더 저조했기에 전체 꼴찌는 면했다.[2] 그래도 월드컵 이후에 2008년까지 연임은 하기로 했지만, 당해 가을에 사임했다.[3] 나이지리아의 천주교도는 2000만명으로 그 수만 보면 절대 적지 않으나, 나이지리아가 1억이 넘는 인구 대국이고, 이들 대다수가 이슬람이나 기독교도인 것은 감안하면 소수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