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0 21:53:02

시베리아 내전

시베리아 내전
러시아 내전의 일부
날짜
1918년 8월 ~ 1920년 7월[1]
장소
연해주 및 극동 지역
원인
일본 제국러시아 내전 참전
교전 국가 및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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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딘 수흐바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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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적군의 승리
영향
일본 제국의 시베리아 철수

1. 개요2. 전개3. 한인들의 항일 운동4. 시베리아 내전의 종료
4.1. 시베리아 백군의 패배와 가이다 봉기
5. 참고 문헌

[clearfix]

1. 개요

러시아 내전 중에 시베리아에서 발생한 내전. 러시아 내전 중 가장 기간이 길었고 외부 세력(일본군)이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한 전쟁이자 러시아 혁명에서 한국 독립 전쟁사와 가장 큰 관련이 있는 전쟁이다.

한국에서는 시베리아 내전[2]이라고 부르며 일본에서는 시베리아 출병이라고 했다가 시베리아 전쟁이나 간섭 전쟁으로 부르는 경향도 나타났다.[3]

2. 전개

2.1. 러시아 내전 발발

1917년 2월(3월 8일) 당시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시작으로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었다. 1917년 10월(11월 7일)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10월 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백군이 적군[4]에 반대해 다시 내란을 일으키면서 러시아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 지역은 크게 3곳으로 나눌 수 있다. 유럽 러시아에선 무르만스크를 중심으로 유데니치가 봉기했고 볼가 강 유역인 남부 러시아에선 데니킨이 봉기했으며 시베리아에선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 진영이 적군에 반대하며 봉기했다. 일본 제국이 깊게 개입한 것도 시베리아 내전이며 한국 근대사의 항일 전쟁과 관련이 큰 것도 시베리아 내전이다.[5]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시베리아 중심부 톰스크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는데 포타닌 진영이 시베리아 지방의 독립과 자치를 위해 내란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이 봉기는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시베리아 내전에 개입하려고 했다.

일제는 1916년 6월 러일 동맹을 맺은 뒤 중국을 러시아와 둘이서 나눠 지배할 생각이었지만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진 데다 혁명의 영향이 조선과 중국까지 끼치는 게 거슬렸다.[6]

1918년 1월 12일 일본 제국은 일본 해군이와미 함블라디보스토크에 파병했고 뒤이어서 시키시마급 전함 아사히를 보냈으며 이듬해인 1919년 4월 5일 밤 일본 해군 육전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7] 1918년 5월에는 일본 육군다나카 기이치가 주도하여 중국과 중일 공동 방적 군사 협정(일화 공동 방적 군사 협정)을 체결해 시베리아 내전에 개입할 준비를 했다.[8] 또한 친일 성향의 돤치루이를 복직시키기 위해 평화정책을 주장하던 왕스전 내각을 붕괴시키고 3월에 돤치루이를 국무총리로 복직시켰으며 2천명의 중국군을 일본군의 지휘 아래에 시베리아에 공동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2.2.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봉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러시아 육군에 속해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협상국측에게 많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소속의 체코인[9], 슬로바키아인[10] 장병들이 포로로 잡혔는데, 체코인 정치가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와 슬로바키아인 정치가 밀란 라스치슬라프 슈체파니크등의 노력으로 포로로 잡힌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으로 구성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러시아 등지에서 창설되었다. 특히 러시아에서 창설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규모가 제일 컸으며 심지어 여기에는 이전에 러시아에 거주하던 체코인들도 가담했다. 그 병력은 5만에 이르렀고 1개 군단을 창설해 키예프 부근에 모였다. 그러다가 1918년 2월 블라디미르 레닌 정부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과 단독으로 강화 조약을 맺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러시아에서는 더 이상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전투를 할 수가 없게 됐다. 그러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파리에 있던 체코 임시 정부로 이동한 뒤 독일군과 싸우려고 했다. 3월 프랑스 정부가 주선해서 러시아 정부에게 승인받았다.

하지만 독일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서 동유럽 일대를 장악한 탓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어쩔 수 없이 시베리아와 러시아 극동 지역을 경유해서 서유럽으로 이동하는 루트를 선택하였고 이에 따라서 1918년 4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키예프에서 출발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부대를 60여개 정도로 나누고 시베리아 철도 열차를 이용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송 인프라의 열악함으로 인하여 원래는 5월 중순까지 도착 예정이었지만 결국 6월 초순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사람의 수는 1만 4천명뿐이었다. 그 결과 1918년 5월 당시 5만여 병력은 팬자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시베리아 철도 선로를 따라 쭉 늘어선 형태가 됐고 주로 옴스크첼랴빈스크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수송이 어려우니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게 무장 해제를 명령했는데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여기에 반대하며 볼가 강 중류와 시베리에 수용소에서 봉기했다. 이들은 철도 주변 일정 지역을 점령한 뒤 자신들을 연합국의 일원이라고 말하면서 장갑열차 등을 사용하여 독일과 정전 협정을 맺은 소비에트 붉은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6월 4일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일본 외교 대표들은 성명을 발표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연합군의 일원이며 연합군이 지키고 있다고 밝혔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러시아 육군 소속 체코인들도 7월 1일에 유럽으로 호송될 예정이였으나 동료들의 봉기 소식을 듣고, 6월 29일 봉기를 일으켜서 블라디보스토크 소비에트를 무너트렸다.[11]

한편 미국은 원래 일본 제국의 영토 확장 야심 때문에 일본 제국군의 간섭을 경계했다. 그런데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이 봉기하자 미국은 이들을 구원하고자 하여 7월 8일 미국은 일본에게 함께 출병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일본은 내각 회의를 소집한 뒤 미국의 제안에 찬성하고 8월 2일 시베리아 "출병"을 선언하고 8월 3일에 시베리아 전쟁 참가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일본군은 미군이 들어오기 전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병력 약 2만 8천명을 배치했다. 미군은 8월 16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영국은 8월 3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증원군을 상륙시켰다. 이후 캐나다군 6000명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8월 10일에는 프랑스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원래 일본은 미국과 협정을 맺어 각각 1만 2천명을 파병하기로 했다. 다른 국가의 군대들은 이보다도 적게 파병했다. 그런데 일본은 협정을 맺은 규모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일본은 잇따라 시베리아와 연해주에 군대를 보냈다. 일본 제국이 시베리아와 연해주로 보낸 병력의 수는 무려 약 6만 ~ 7만명 정도였다. 시베리아 내전에 간섭한 외국군의 대부분이 일본 제국군이다. 이후 두 차례에 걸쳐서 파견 부대가 바뀌었으나 지휘 계통은 변하지 않았고 병력수는 대체로 6만 ~ 8만명선을 유지했다. 시베리아 전쟁에서 가장 오랫동안 파견하고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한 외국군은 일본군이였다.[12]

시베리아 백군은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볼셰비키를 몰아내고 백군 정부를 수립했다.

2.3. 일본군의 계속된 간섭

일본의 시베리아 침공 문서도 참조할 것.

191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독립 국가가 됐다. 이에 시베리아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1919년 말 고국으로 귀환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연합군은 시베리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원조했다. 1919년 12월부터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철로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모여들었다. 1920년 2월부터 9월 사이에 모두 유럽으로 귀환했다. 체코슬로바키아군이 돌아가자 연합국 군인들도 차례로 시베리아에서 떠나갔다. 1920년 1월 16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봉쇄를 해제해 시베리아에서 자국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했고 미국도 따랐다. 그러나 일본 제국 육해군만은 철수하지 않았고 남았다. 당시 일본군은 시베리아 영토에 대한 야심이 있었던 데다 러시아 혁명 때문에 조선과 중국에 대한 식민지 권력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다른 군인들이 다 떠나는데도 일본군은 철병하지 않았다.[13] 일본 제국군이라는 존재 하나 때문에 다른 러시아 내전과 다르게 시베리아 전쟁만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군은 시베리아에 계속 주둔하기 힘들었다. 명분은 없고 군사비는 주둔하면 할수록 쏟아져 나간 데다 철병 여론이 강했으며 일본 제국은 처음부터 전쟁 명분도 명확하지 않았다. 전쟁이 이어질수록 군인들은 전투할 의지도 없고 사기도 오르지 않았다. 일본 군인 사이에는 전쟁에 대한 의문이 퍼졌고 군대 내부에선 사회적 모순이 두드러졌으며 탈주나 도망 사례도 상당했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이란 결국 일본 제국주의가 지닌 모순과 침략이라는 성격만 폭로한 셈이다.[14]

한 육군 병사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병졸의 인격 무시!… 그들에게는 어떠한 자유도, 의사 표현도, 개인으로서, 한사람의 인격으로서의 권리도 허락되지 않는다. 보통 선거, 쓸데없는 짓! 무거운 세금과 생활고!」[15]

일본에서 철병 여론만 강해지던 와중에 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니콜라예프스크에서 일본 육군이 전멸하고 일본 거류민들이 몰살됐다.

2.4. 니콜라옙스크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니콜라옙스크 사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한인들의 항일 운동

일본군이 상륙하자 시베리아 연해주에선 많은 한인들이 항일 세력을 이루었다. 붉은 군대로 들어가 싸우는 경우도 있었지만 자신들끼리 빨치산을 만들어 일본군에게 저항하기도 했다.

또 군인 출신들이 항일 빨치산을 조직해서 지휘하거나 붉은 군대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 군인 출신에는 대한제국군 출신도 있었고 1차 세계 대전 때 제정 러시아군에 장교나 사병으로 참전한 군인도 있었다. 1차 세계 대전 참전자 출신으로 붉은 군대 장교로 활약한 사람 중에는 헤이그 특사의 한 사람인 이위종(李瑋鍾) 선생이 있다. 1차 세계 대전 출신으로 항일 빨치산을 조직하거나 지휘하거나 참가한 사람에는 한창걸, 최 니콜라이, 박그레고리, 오하묵, 채동순 등이 있다. 일본 육군 군사 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 참령을 하였다가 항일 운동에 뛰어든 유동열도 있으며 서간도에서 훈련받은 청년들이 연해주, 시베리아 연해주로 건너오기도 했다.[16]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으로 들어가 일본군과 싸운 사람들은 당시 항일군에서 별로 비중이 없었다고 하며 1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군인 출신들 중에는 항일 활동을 거부하고 백군 측에 선 사람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 항일 진영이 백군 측에 들어가 항일군을 만들려는 시도가 나타나자 한인 장교들이 거부한 경우도 있다. 장교만 따지면 오히려 붉은 군대 편이나 빨치산에 들어가 항일 활동을 하던 한인이 소수였으며 항일 활동을 거부하고 백군 편에 들어간 사람이 다수였다.[17] 나중에는 제5보병사단(당시에는 제5여단) 최초 지휘관인 김상겸도 백군 기병 대장으로 싸웠다.

당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하거나 붉은 군대에 들어가서 활동한 조선 사람들은 군사 활동에 굉장히 적극이었고 의욕이 넘쳤다. 이런 점은 붉은 군대 측뿐만 아니라 백군 측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붉은 군대 측에선 이렇게 증언했다.
「조선인 부대는 규율과 성실과 그들의 대의에 대한 헌신에서 훌륭한 예를 보여주었다.… 조선인들 중에서 추태는 말할 것도 없고 명령 불복종이나 과업 미완수의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이 모든 점에서 그들은 모법적 공산주의자의 전사들이다.」[18]
「플로로프카라는 촌락에서 조선인 빨치산 부대는 러시아 부대보다 더 충실하게 의무를 수행했다.[19]

백군 측에선 이렇게 증언했다.
「한인들은 적군의 제일 믿음직한 부분이었고(저자는 적군과 빨치산을 구분하지않았다 - 필자)[20], 규율이 제일 엄격했는데, 그것은 강력한 ‘민족적 항일 선전’으로 설명된다」[21]

그뿐 아니라 한인 사회에서도 항일 분위기가 흘렀고 많은 사람들이 항일 운동에 참여하거나 동조했다. 일본 제국은 한인 사회를 통제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1918년 가을 일본 총영사 키쿠치 기로(菊池義郎)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신한촌을 시찰했으며 한인 학교에 200루블을 기증했다. 여자 교사는 그 돈을 받자 찢어 버리고 불속으로 던져 버렸다. 이후 서울 총독부의 고위 관리인 시노다 지사쿠가 시찰하러 왔다. 1919년 3월 1일에 학교를 방문했고 이틀 후에는 대한 국민 의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부 의장인 한용헌을 만났다. 한용헌은 시노다에게 일본 제국주의자가 아시아의 평화를 돕지 않는다면서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했고 한민족은 일본에 폭력을 쓰지 않으면서도 줄기차게 저항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사쿠는 1919년 3월 4일에 다시 학교를 방문했다. [22] 그 뒤 참모 부장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신한촌은 지금 러시아 당국의 통제 밖에 있으며, 안드레이 한과 그의 추종자들 밑에서 완전 통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자이며 극단적 반일주의자인 그는 자신의 생각을 널리 선전하고 있다. 이들을 무마하고 제국의 통치 아래로 끌어들이는 것은 긴급하게 필요하나 쉽지 않은 일임을 확신한다. 」[23]

1919년 3월 한반도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 조선 사람들은 일본 제국의 지배에 종속되면서 지배자들에게 접근을 차단당했고(서발턴) 그 때문에 쌓였던 분노를 3.1 운동에서 터트렸다. 이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살던 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1919년 3월 11일 일본 총영사 키쿠치 기로는 시위를 엄격하게 통제하라고 블라디보스토크 요새 사령관과 연해주의 콜차크 정부 위원에게 요구했다. 백군 당국은 이 요청에 곧바로 동의했다.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에 손상을 끼칠지도 모르는 어떠한 행위」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대한민국 의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부는 해산을 명령받았다. 하지만 한인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했다.[24]

예레멘코는 일기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3월 17일 ~ 18일,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은 국기와 붉은기로 장식되었다. 오늘은 조선인들의 축제일, 즉 조선 독립을 위한 시위가 있는 날이다. 집회가 열렸다. 조선인들의 시위가 한인촌으로부터 시의 중심으로 옮겨갔다. '대한 독립 선언문'이라는 제목의 전단이 질주하는 자동차에서 도로에 뿌려졌다.… 조선인 특별 대표단이 각 국의 영사들에게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조선어로 인쇄된 '선언문'을 전달하였다. 일본 헌병들은 조선인들의 가옥을 배회하며 전단을 찢어버리는 등 철저한 감시를 하였다.」[25]

3.1. 연해주 4월 참변

자세한 건 연해주 4월 참변 문서 참고.

시베리아에서 일본 육군은 지속적인 파괴와 학살을 벌이면서 연해주를 장악했는데 자신들이 주둔한 지역에서 모든 한인 민족주의 조직과 사회주의 조직을 해산시키면서 미리 짜 둔 계획에 따라 친일 단체들을 세우고 직접 통제했다.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제독은 참모장인 우에하라 장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내용이 담겼으며 일본 육군은 이후 2년 반 동안 연해주 남부에 주둔했다.[26]

4. 시베리아 내전의 종료

4.1. 시베리아 백군의 패배와 가이다 봉기

시베리아 연해주에서 백군은 사회 혁명당 및 멘셰비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편을 맺었고 연합군에게서 지원을 받았다. 더더욱 일본군이 가장 적극적으로 백군을 지원하면서 시베리아 전쟁을 주도했다. 결국 백군은 적군을 몰아내고 시베리아를 점령했다. 1918년 7월 11일 옴스크에서 시베리아 정부를 수립했는데 이 정부는 집정관 5명으로 체제를 운영하였다. 그해 11월 중순 집정관 중 한 명인 육해군 장관 콜차크 해군 중장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전러시아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서쪽은 레닌의 적색 군사 독재 정권, 동쪽은 콜차크 제독의 백색 군사 독재 정권이 장악한 정세가 됐다.[27]

그러나 콜차크 정부는 사회 혁명당, 멘셰비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게 점점 지지를 잃어 갔다.

1919년 4월 백군은 볼가 강에서 적군과 접전을 벌이다 패배했고 백군은 점점 무너져 갔다. 유럽 러시아에서 위력을 떨치던 유데니치 장군, 러시아 남서부에서 위력을 떨치던 데니킨 장군의 병력은 1919년 하반기에 크게 패배하고 말았으며 이런 흐름은 시베리아까지 퍼졌다. 콜차크 제독의 시베리아 정부는 1919년 11월 14일, 소비에트 붉은 군대에게 옴스크를 내줬다. 콜차크 제독의 정부는 이르쿠츠크로 퇴각했다.[28]

191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백색 정권과 맞서 싸우기로 했다. 1919년 11월 17일 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백색 정권에 반대하며 봉기했다(가이다 봉기). 이때 봉기를 주도한 사람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총사령관 라돌라 가이다였다. 가이다는 육군 소위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제정 러시아 육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1918년 시베리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봉기했는데 가이다 장군은 이때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총사령관이 됐다. 1920년 기준으로 28세인 젊은 장교였다.[29]

이 봉기에는 한창걸의 항일 빨치산 부대가 참가하기도 했는데 한창걸은 기관포 대장으로 참가했다.[30]

그러나 봉기는 실패하고 가이다 측은 일본군과 백군 진영에게 진압됐다. 진압 후 일본군과 백군은 사로잡은 봉기군 측 군인 400명을 늘어놓았다. 일본군과 백군은 포로들에게 대포와 기관포를 쏘아 처형했다.
「흰파와 일군들은 미국 군대에서 탐조등으로 폭동자를 환하게 비추어주어서 대포와 기관포로 100여명을 전방에 총살하고 400여명을 전투 후에 총살하고 포로놈들을 혹독하게 취조하였다」[31]

한창걸 부대도 결국 일본군에게 체포를 당했고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한창걸 선생은 이렇게 증언했다.
「왜 붉은 한인 빨치산 부대가 가이다 장군의 부대에 합류했는가? 그것은 이 부대가 콜차크에 반대하기 때문이었다. 단지 우리가 미워하는 콜차크 전복을 지향한다는 것 뿐, 우리는 물론 모든 사회당도 미래를 예견할 수 없었다. 가이다 봉기는 실패했으며 우리 부대는 모두 포로가 되었다. 나는 한창걸이 아니라 조선 신민이라고 가장했다. 포로가 된 후 한인 빨치산 부대는 일본 측으로부터 잔인한 고문을 받았다. 이 고문들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다. 이렇게 하여 1920년 1월까지 한인 빨치산 부대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1920년 1월 30일 나는 다른 포로들 틈에 끼어 탈출했다.」[32]

가이다 장군도 결국 체포당했고 곧 체코슬로바키아로 추방당했다.[33] 가이다 장군은 체코로 돌아가면서 상하이에 잠시 머물렀는데 이때 안창호, 여운형 같은 항일 운동가 선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34] [35]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가면서 필요없게 된 총기와 탄약 등 무기를 조선 항일단체에 싼 값에 매각했는데 이 무기들이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도 콜차크 정부에게 등을 돌렸다. 콜차크 정부의 군대는 결국 붉은 군대에게 패배했다. 콜차크 제독은 1919년 12월 27일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혁명 위원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20년 2월 총살됐다.[36] 1920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토크 백색 정권이 무너졌다. 볼셰비키,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은 연합해서 연해주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세르게이 라조를 수반으로 한 군사 소비에트가 조직됐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실제 권력은 볼셰비키에게 넘어갔다. 세르게이 게오르기예비치 라조(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Лазо)는 1916년 군대에 징집됐고 모스크바 알렉세예프스크 보병 학교를 졸업했으며 1916년 12월 장교가 돼서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배치됐다. 당시 라조는 장병들을 상대로 사회혁명당 좌파 사업을 전개했다. 1918년 초 러시아 사회 민주당에 가입했고 자바이칼 전선군 지휘관이 됐다. 1919년 봄부터 연해주 빨치산 부대를 지휘했고 그해 12월에는 연해주 군사 혁명 사령군 사령관이 됐다.[37]

일본 육해군은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이 1922년 10월 25일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고 나서야 떠났다.

5. 참고 문헌

연구 자료
  •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운동 1905년 ~ 1922년」,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년
  • 엔.아. 부쩨닌 저, 엔.데. 부쩨닌 저, 알틴벡 쿠르만바예프 번역, 러시아 내전에서의 한인들의 참전, 역사 문화 연구 24, 2006년
  • 반병률, 「4월참변 당시 희생된 한인 애국지사들 -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 역사 문화 연구 제26집, 2007년
  • 박환, 최재형 시베리아 한인 민족 운동의 대부, 역사 공간, 2008년, 101쪽 ~ 128쪽
  • 반병률,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4월 참변과 한인 학살」, 충남 대학교 충청 문화 연구소, 『제노사이드와 한국근대』, 2009년
  • 반병률 潘炳律, 제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 지역 항일 무장 투쟁, 2009년
  •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 후지와라 아키라 저, 서영식 역, 일본군사사 상, 제이앤씨, 2013년
  • 박환, 러시아 지역 한인의 삶과 기억의 공간, 민속원, 2013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55176&cid=51289&categoryId=51289


[1] 일본군 철수 시기는 1922년 10월[2] 반병률 潘炳律, 제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 지역 항일 무장 투쟁, 2009년 :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3] 나리타 류이치, 다이쇼 데모크라시, 어문학사, 2012년, 99쪽[4] 소비에트 붉은 군대[5]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30쪽[6] 후지와라 아키라 저, 서영식 역, 일본 군사사 상, 제이앤씨, 2013년, 201[7]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36[8] 후지와라 아키라 저, 서영식 역, 일본군사사 상, 제이앤씨, 2013년, 201[9] 16세기 보헤미아 왕국의 왕위가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넘어간 이래 체코인들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10] 슬로바키아는 헝가리 왕국 성립 이래 1000년간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성립 이후에도 헝가리 왕국에 속해있었다.[11]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31 ~ 36[12]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36쪽 ~ 41쪽[13]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 운동 1905년 ~ 1922년」,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년, 15쪽 ~ 18쪽;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90쪽; 후지와라 아키라 저, 서영식 역, 일본군사사 상, 제이앤씨, 2013년, 203 ~ 204[14] 후지와라 아키라 저, 서영식 역, 일본군사사 상, 제이앤씨, 2013년, 204[15] 후지와라 아키라 저, 서영식 역, 일본군사사 상, 제이앤씨, 2013년, 204쪽에서 재인용[16]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59 ~ 60, 66, 63 ~ 64[17]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ㅡ 59 ~ 60. 71 ~ 78[18] N.II'iukhov and M. Titov, Partizanskoe dvizhenie v Primor'e, 1918년 - 1920년 gg. (Lenungrad, 1928년), 82쪽, 84쪽.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 운동 1905년 ~ 1922년」,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년, 27쪽에서 재인용. 이 증언에선 조선인 부대를 공산주의 전사라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소비에트 문학에서는 빨치산 운동에 대한 공산주의의 영향이 과도하게 평가되었다. 빨치산 운동은 무엇보다 일본이 선두에 선 간섭군에 반대하는 민중 운동"이라고 분석한다. 엔.아. 부쩨닌 저, 엔.데. 부쩨닌 저, 알틴벡 쿠르만바예프 번역, 러시아 내전에서의 한인들의 참전, 역사 문화 연구 24, 2006년, 96쪽[19] Iaremenko, "Dvenik kommunista", 262쪽,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 운동 1905년 ~ 1922년」,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년, 27쪽에서 재인용.[20] 필자 서술 부분은 러시아 우수리스크 국립 사범 대학 역사학부 교수가 덧붙힌 설명이다.[21] Гутман А.Я. Указ. Соч. С.121, 엔.아. 부쩨닌 저, 엔.데. 부쩨닌 저, 알틴벡 쿠르만바예프 번역, 러시아 내전에서의 한인들의 참전, 역사 문화 연구 24, 2006년, 98쪽에서 재인용.[22]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 운동 1905년 ~ 1922년」,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년, 24쪽 ~ 25쪽[23] 시노다, "블라디보스토크 신간선 시찰 보고",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 운동 1905년 ~ 1922년」,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년, 25쪽에서 재인용[24]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 운동 1905년 ~ 1922년」,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년, 26쪽[25] A.N.Iaremenko, "Dnevnik kommunusta", Revoliutsiia na Dal'nem Vostoke (Moscow-Leningrad, 1923),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 운동 1905년 ~ 1922년」,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년, 26쪽에서 재인용[26]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 운동 1905년 ~ 1922년」,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년, 32쪽 ~ 33쪽[27]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31쪽[28]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87쪽[29]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87쪽 ~ 88쪽[30]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100쪽[31] "힌파와 일軍들은 미국 군대에서 탐조등으로 暴動者을 환하게 비처주워서 大砲와 긔관砲로 100여명을 전방에 총살하고 400餘명을 전투 후에 총살하고 포로者들을 혹독하게 취조하였다"(이인섭, 수찬지대 빨찌산대 , 이인섭 친필 노트 7권,17쪽 - 24쪽,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88쪽에서 재인용)[32] Хан Чан Гер,Там же(한창걸, 극동 내전에 한인 노동자들의 참여에 대한 회상 ),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100쪽에서 재인용.[33]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87쪽[34]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 운동 1905년 ~ 1922년」,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년, 28쪽[35] 가이다 장군은 그 뒤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가서 총참모장을 지내게 되었지만 1926년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을 받아 파시스트 활동을 하였다.[36]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31쪽[37] 윤상원, 박사 학위 논문 :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 (1918년 - 1922년), 2009년, 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