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9:52:37

아돌프 다슬러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아돌프 다슬러
Adolf Dassler
파일:2GIYxz6.jpg
출생 1900년 11월 3일
독일 제국 바이에른주 헤르초게나우라흐
사망 1978년 9월 6일[1] (향년 77세)
서독 바이에른주 헤르초게나우라흐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직업 기업인
가족 아버지: 크리스토프 다슬러
어머니: 파울리네 다슬러
형:프리츠 다슬러, 루돌프 다슬러
부인: 케테 다슬러
아들:호르스트 다슬러
조카: 아르민 다슬러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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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기업인. 아디다스의 창립자이다.

2. 생애

1900년, 아돌프 다슬러(이하 아디)는 독일 바이에른 주 헤르초게나우라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신발 공장의 봉제 기술자였고 어머니는 세탁소를 운영했다. 이런 가정 환경에서 아디 다슬러는 섬유 가공, 신발 세탁, 제단, 제본 등을 자연스럽게 터득했다. 당시 독일의 신발 산업은 하향세였기에 아버지는 아들이 제빵사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1920년 운동에 대한 열정이 강하고 자신 역시 운동 선수였던 아디 다슬러는 너무 쉽게 닳아버리는 운동화 대신 내구성이 강한 운동화를 만들고 싶어 스무 살 때부터 어머니의 세탁실에서 혼자 트레이닝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설립자 아디 다슬러는 형 루돌프 다슬러(이하 루디)와 함께 1924년, 뉘른베르크 인근 헤르초게나우라흐에 위치한 자택에서 축구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디는 뛰어난 손재주를 이용해 질 좋은 축구화를 만들어냈고, 외향적인 성격의 루디는 그런 동생이 만든 축구화를 팔기 위해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며 축구화 생산 주문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집에 돌아온 형 루디 다슬러는 동생의 신발 사업에 동참해 둘은 같은 해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Gebrüder Dassler Schuhfabrik)’을 설립했다. 훗날 아디다스의 전신이 된 이 회사는 아디 다슬러의 가족을 포함한 12명의 사람들이 매일 50켤레의 운동화를 제작하는 가내 수공업 형태였다. 아디는 조용하고 꼼꼼한 신발 개발자였고, 형 루디는 외향적인 성격의 세일즈맨이었기에 둘은 서로의 장점을 살려 회사를 운영했다. 아디 다슬러는 자신이 만든 제품들을 선수들이 착용하기 전에 늘 테스트를 직접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가장 좋은 제품을 선수들에게 제공하겠다던 그의 신조(Only The Best For The Athlete)는 지금도 아디다스 브랜드 철학으로 자리잡고 있다. 본인 역시 열정적인 운동 선수였던 아디는 선수들과 그들의 요구에 늘 귀를 기울였다.

1924년 다슬러 형제의 운동화 공장 창업 후, 다슬러 형제는 운동 선수들을 위한 최적의 신발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특히 아디 다슬러는 보다 더 가벼운 신발을 만들기 위해 저울을 들고 다니며 원단을 찾아 다녔고, 선수와 트레이너들을 직접 만나 자신이 만든 신발의 성능을 직접 테스트했다. 그 결과, 그는 딱딱한 가죽 대신 부드럽고 가벼운 고무 원단으로 대체해 운동화 제작에 사용했다. 이 고무 운동화는 아디다스 스포츠화의 효시였다. 1925년, 아디는 직접 손으로 스파이크를 박은 러닝화와 가죽 징을 박은 축구화를 개발해 특허권을 갖게 되었다. 이 신발들은 트랙과 필드에서 뛰어난 성능을 과시했는데, 특히 아디의 스파이크 러닝화가 처음 빛을 본 것은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였다. 리나 라드케(Lina Radke)가 이 신발을 신고 여자 800m 달리기에서 세계 최고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한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아서 요나스(Arthur Jonath)도 이 신발을 신고 남자 100m에서 동메달을 따면서 다슬러 형제가 만든 신발은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1933년에 형제가 나치당 당원이 되면서 사업은 더욱 번창했다.[2] 다슬러 형제의 나치 경력과 관련해서는 대체로 루디가 나치의 사상에 공감한 반면, 신발 밖에 관심이 없던 아디는 그저 신발 장사의 수단으로 나치당에 가입한 측면이 강하다고 한다.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독일 국가대표 선수들 대부분이 아디 다슬러가 만든 운동화를 신었고, 독일 올림픽 위원회는 다슬러 형제의 신발을 신겠다는 선수들의 요구에 따라 다슬러 형제 신발 공장에서 스포츠화를 공급받았다. 아디는 이 당시 최고의 육상 스타이자 흑인 선수인 미국의 제시 오언스(Jesse Owens)에게 자신의 운동화를 보여주기 위해 바이에른에서 베를린에 있는 선수촌까지 직접 차를 몰고 찾아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디 다슬러는 제시 오언스에게 자신의 스파이크 러닝화를 보여주며 경기에서 신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결국 제시 오언스는 이 스파이크 러닝화를 신고 남자 100m, 200m, 400m 계주와 멀리뛰기 종목에서 모두 금메달을 획득해 베를린 올림픽 최고의 스타가 됐다. 제시 오언스가 신은 다슬러 형제의 신발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흑인이 올림픽에서 우승하는 것을 싫어한 아돌프 히틀러를 엿먹인 제시 오언스에게 자신의 신발을 제공함으로서 그 우승에 일조하기도 하였다.[3] 이때부터 세계 각국의 선수들이 다슬러 형제의 운동화를 신길 원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39년까지 다슬러 형제는 매년 20만 켤레 이상의 운동화를 판매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전쟁이 길어지자 형제의 사업 여건은 점점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형제는 회사의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충돌하기 시작했다. 특히 루디는 아디의 아내가 회사의 경영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루디는 군대에 끌려갔지만 아디는 징집되지 않았기에 루디는 아디와 제수가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수를 썼다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1945년 7월에 루디는 미군에게 잡혀 SS로 오해 받아 포로수용소에 1년 동안 감금된다. 루디의 소속 부대가 패전에 즈음하여 재편성되면서 SS에 배속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루디는 독일의 패전을 직감하고 탈영하여 고향에 돌아왔으나, 이 때문에 게슈타포에게 끌려가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끌려가던 중 독일의 패전을 맞이하게 되고, SS의 최후의 발악으로 인해 총살당할 뻔 하였지만 독일군 트럭 운전사의 기지로 미군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 미군에게 다시 체포된다. 루디는 이 모든 일이 동생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석방되자마자 아디를 나치 협력자로 밀고했지만 아디는 유대인계 시장(市長)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벌을 받지 않았다.[4]

결국 루디는 집에서 나와 강건너의 다슬러 공장을 차지했고, 그를 따르는 사원들을 데리고 독립했다. 아디는 자신의 이름과 성에서 글자를 따서 아디다스를 만들었고, 루디는 푸마를 만들었다. 이렇게 다슬러는 아디다스푸마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두 회사간의 화해는 200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이루어지게 되었다.[5] 여담으로 둘 다 본사가 처음에 사업을 시작한 헤르초게나우라흐에 있다.[6]

사업가적 기질을 가진 루디와 달리, 아디는 기술자적 자질이 있었기에 아디다스 설립 후 아디의 부인 캐테 다슬러가 아디다스의 경영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아디의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는 멜버른 올림픽에서 수완을 발휘한 이후 아디다스 프랑스의 매니저를 맡게 되는데 그는 야심가로서 보수적인 경영을 추구하던 부모와 충돌이 잦았고 독일의 아디다스 본사와 프랑스의 지사는 독립적으로 제품을 개발하거나 판매하여 사업상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다.[7]

1949년, 프라이부르크(Freiburg) 제화 회사를 대신하여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식 납품업체가 된 아디다스는 1954 스위스 월드컵에서 또 한 번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8] 서독 대표팀은 아디 다슬러가 만든 축구화를 신고 출전했다. 서독 대표팀은 조별 리그 2차전에서 당시 세계 최강이던 헝가리 팀에게 3대 8로 대패했다. 터키와 플레이오프를 치르며 힘겹게 8강에 오른 뒤 서독유고슬라비아오스트리아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헝가리가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서독의 우승을 점치는 이들은 드물었다. 하지만 경기 당일 변수가 생겼다. 경기가 벌어진 베른에 폭우가 쏟아진 것이다. 경기 시작 이후 연속 두 번의 골을 넣어 주도권을 잡은 팀은 헝가리였지만, 폭우로 인해 그라운드가 진흙탕으로 변해가면서 축구화 바닥의 스터드(Stud, 징)를 교체할 수 있는 축구화를 신은 서독이 힘을 내기 시작했다.[9] 전반이 끝나고 스터드를 교체한 서독의 경기력은 후반으로 갈수록 더 살아났다. 2대 2 동점이었던 후반 39분, 헬무트 란이 결승골을 넣으며 헝가리를 무너뜨렸다. 이 승리는 서독의 승리이자, 아디다스 기술의 승리였다. 패전국으로 의기소침하게 살아가던 독일 국민들에게 대표팀의 월드컵 우승은 희망을 안겨주었다.[10] 후에 이 일화는 베른의 기적(The Miracle Of Bern)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영화에는 아디 다슬러가 축구화의 스터드를 교체할 수 있다는 걸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월드컵을 통해 아디다스는 축구 전문 브랜드로 급성장하게 되었고 독일 대표팀이 신은 아디다스의 징 박힌 축구화(Sports Shoe With Screw-In Studs)는 전 세계적으로 주문이 쇄도해 한 해 45만 켤레 넘게 생산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아디다스는 스포츠 의류 분야로도 사업을 확장했고, 1963년에는 축구공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디다스의 텔스타(Telstar)가 공인구로 사용되면서 아디다스 축구공은 모든 FIFA 월드컵의 공인구로 채택됐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아디다스는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지 않으면 일류 선수가 아니다’는 말이 선수들 사이에서 나올 정도로 스포츠 용품 분야에서 독주했다. 1978년, 심혈관질환으로인해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1] 자신의 78번째 생일을 2개월도 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평소 앓고있던 심혈관질환으로 인해 사망했다[2] 나치는 유럽 정복을 위한 병역 자원을 마련하고자 젊은이들의 체력 및 협동심을 기를 스포츠를 장려했고, 스포츠 용품 업자인 다슬러 형제는 그 수혜자가 된 것이다.[3] 이때 당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히틀러제시 오언스와의 악수를 거부했다는 썰이 있는데 이건 그냥 국가 수반이 사적으로 초청하는 것은 IOC 의정에 위반되기에 첫 번째 메달 수상자를 제외하곤 그와 만나볼 기회가 없었다. 오히려 오언스히틀러가 본인을 친근히 대해줬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본인을 냉대했다고 깠다.[4] 아디는 전쟁 말기 자신의 직원들을 향토방위군 훈련에서 열외시키기 위해 훈련 시간마다 초과 근무를 시켰다는 일화도 있다.[5] 1974년 루디의 사망 당시 전화통화를 통해 아디가 형을 용서하겠다고 하며 형제간의 화해가 있었다고는 한다. 그러나 루디의 장례식 당시 아디 본인은 참석하지 않고 딸 한 명이 가족 대표로 참석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두 회사 모두 다슬러 집안의 손을 떠났다. 하지만 역사적으론 같은 가문이다.[6] 참고로 ADIDAS의 뜻이 국내에선 'All day I Dream About Sports'라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잘못된 사실로 실제 의미는 창립자 아디 다슬러 별명인 “Adi(Adolf)”와 성인 Dassler의 앞글자 “Das”의 6글자를 합친 것이다. 미국의 유명 뉴메탈 밴드 Korn의 대표곡 중 'A.D.I.D.A.S.(All Day I Dream About Sex)'가 있어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브랜드명을 혼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아디다스는 독일 기업인데 영어로 약어를 지었을 리가 없다.[7] 가족회의를 통해 조정되고 최종적인 결정은 어머니 캐테를 거치긴 했다. 물론 호르스트는 겉으로는 따르는 척 하면서 뒤로는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켰다. 캐테는 종종 아들 때문에 힘들어요하면서 하소연했다고 한다.[8] 현재까지도 아디다스가 독일 국가대표팀을 후원한다. 시간이 흘러 아디다스는 독일 태생 장기 후원 브랜드이기에 아디다스가 아닌 타국의 브랜드 유니폼을 입는다면 그건 팀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행위라는 평도 생겼다.[9] 당연히 세계 최초의 스터드 교체형 축구화다.[10] 훗날 독일 대표팀이 메스암페타민을 복용하고 경기를 뛰었다는게 밝혀지며 평가가 많이 하락했다. 당시 축구에서 약물 복용이 규정 위반은 아니었지만 암묵적으로 신사의 스포츠라 불리던 축구에선 불명예적인 행위였다. 그래도 독일인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는 점과 아디다스 축구화가 독일 대표팀에 어느정도 기여했다는건 부정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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