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아돌프 우어반 (Adolf Urban) |
생년월일 | 1914년 1월 9일 |
사망년월일 | 1943년 5월 23일 (향년 29세) |
국적 | 나치 독일 |
출신지 | 독일 제국 겔젠키르헨 |
포지션 |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
신체조건 | 172cm | 74kg |
소속팀 | FC 샬케 04 (1934-1943) |
국가대표 | 21경기 11골 (1935-1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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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전 남자 축구 선수2. 생애[1]
2.1. 출생
원래 우어반의 부모는 동프로이센 지방에서 살았지만 우어반이 태어날 무렵엔 겔젠키르헨에 거주했다. 우어반은 1926년부터 FC 샬케 04의 유소년팀에 합류했다.2.2. 선수 생활
2.2.1. 클럽
1934년부터 우어반은 FC 샬케 04의 성인팀에서 뛰게 되었다. 데뷔할 때의 포지션은 라이트 윙 하프였지만 에밀 로타어트(Emil Rothardt)의 부상으로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로 우어반을 옮겨 뛰게 했는데 더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우어반의 포지션은 아웃사이드 레프트로 옮겨졌고 에른스트 쿠초라, 프리츠 스체판, 루돌프 겔레슈 등과 함께 샬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우어반도 샬케의 독일 축구 챔피언십 6회 우승, 1937년 샬케의 독일 축구계 첫 더블 등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우어반은 1935년부터 독일 국방군의 군인으로도 복무했는데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우어반도 클럽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샬케는 6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와의 1940년 챔피언십 결승전에서만 우어반을 사용 가능했고 1941년에는 완전히 엔트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1942년 챔피언십 결승 피르스트 비에나 FC전에서 2대0으로 승리를 거두고 6번째 챔피언을 차지한 것이 우어반의 마지막 결승전이었다. 그리고 1943년 봄, 우어반은 70,000명의 관중 앞에서 헤르타 BSC와의 경기를 치렀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2.2.2. 국가대표
우어반은 팀 동료 루돌프 겔레슈와 함께 1935년 8월 18일의 룩셈부르크전에서 독일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우어반은 1936년 올림픽에 독일 국가대표로 참가했고 룩셈부르크를 상대로 해트 트릭을 기록했지만 독일은 8강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1938년 월드컵 본선에는 무릎 반월판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했지만 1938 FIFA 월드컵 지역 예선 핀란드전에서는 득점을 기록했다.
2.3. 사망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쟁중에 우어반은 스타라야 루사(Старая Русса)에서 머리 부상과 가슴에 입은 총상으로 사망했다.그의 유해는 카르포보 군인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사망한 지 70년이 지난 2013년 11월에야 고향 겔젠키르헨의 샬케 공동묘지에 돌아올 수 있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다재다능하고 열정적인 윙어.4. 뒷이야기
- 우어반은 알라(Ala)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그의 이름 아돌프를 폴란드식으로 부른 것이다.
- 우어반이 독일 대표팀에서 치른 경기 중 덴마크를 8대0으로 깨뜨린 경기도 있었다. 이 브레슬라우 엘프의 주전 멤버 중 유일하게 전사한 인물이다.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2]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우승 6회: 1934, 1935, 1937, 1939, 1940, 1942
- 차머포칼 우승 1회: 1937
- 가우리가 베스트팔렌 우승 10회: 1933-34, 1934-35, 1935-36, 1936-37, 1937-38, 1938-39, 1939-40, 1940-41, 1941-42, 1942-43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준우승 2회: 1938, 1941
- 차머포칼 준우승 4회: 1935, 1936, 1941,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