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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feeee,#114f4f><colcolor=#000,#e5e5e5> 룩셈부르크 나사우 왕조 초대 대공 아돌프 Adolphe, Groussherzog vu Lëtzebuerg | |||
출생 | 1817년 7월 24일 | ||
나사우 공국 비브리히 성 | |||
사망 | 1905년 11월 17일 (향년 88세) | ||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호헨부르크 성 | |||
재위기간 | 나사우 공작 | ||
1839년 8월 20일 ~ 1866년 9월 20일 | |||
룩셈부르크 대공 | |||
1890년 11월 23일 ~ 1905년 11월 17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afeeee,#114f4f><colcolor=#000,#e5e5e5> 가문 |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 | |
이름 | 아돌프 빌헬름 카를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Adolph Wilhelm Carl August Friedrich) | ||
아버지 | 나사우 공작 빌헬름 | ||
어머니 |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루이제 | ||
형제자매 | 테레제, 마리 | ||
배우자 |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미하일로브나 여대공 (1844년 결혼 / 1845년 사망) | ||
안할트데사우의 아델하이트 마리 (1851년 결혼) | |||
자녀 | 기욤 4세, 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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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사우 공작이자 룩셈부르크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초대 대공.2. 생애
2.1. 나사우 공작 시절
나사우의 공작 빌헬름(Wilhelm I. von Nassau 1792~1839)과 작센-힐트부르크하우젠의 루이제(Luise von Sachsen-Hildburghausen 1794~1825)[1]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1세와 맞섰던 독일왕 아돌프의 직계 후손이다. 아버지를 이어 22살에 나사우 공작이 되어, 비스바덴을 공국의 수도로 삼고 통치했다. 1844년 니콜라이 1세의 조카딸 옐리자베타 미하일로브나[2]와 결혼했으나 딸을 사산한 채 사망, 1851년 안할트데사우의 아델하이트 마리 공녀[3]와 재혼해 슬하에 5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성인기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기욤 4세를 포함한 1남 1녀 뿐이었다.1848년 혁명이 터지자 '나사우인의 9개조 요구'를 받아들였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자유주의적 관점을 취소하고 강경 보수 성향으로 돌아섰지만, 그럼에도 인기 있는 통치자였다. 그렇게 27년간 재위하다가 1866년에 벌어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을 지원했다가 프로이센 왕국의 눈 밖에 나, 오스트리아가 패하면서 바로 멸망당해 프로이센에 합병되어, 그 해 9월 20일 49세의 나이로 폐위당했다. 아돌프는 그 대가로 1867년 9월 28일에 1,500만 굴덴과 4개의 성채 소유권을 보장받았다. 그 후 주로 빈과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바이에른 왕국 등에서 머무르며 여행과 사냥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2.2. 룩셈부르크 대공 즉위 이후
나폴레옹 전쟁 전후 처리였던 빈 회의에서 네덜란드 왕국은 룩셈부르크 대공국과 동군연합을 이루었으나 네덜란드 국왕이었던 빌럼 3세의 장남과 삼남이 미혼인 상태로 아빠보다 일찍 사망해서[4], 1890년에 외동딸 빌헬미나 여왕이 즉위하는데... 네덜란드는 여왕 즉위가 가능해도 룩셈부르크는 살리카법인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빌럼 3세의 머나먼 친척인 아돌프가 대공위를 잇게 됐는데 아돌프는 남계로 빌럼 3세의 37촌 조카였다.[5] 이때 그는 이미 73세의 노인이었고, 평생 독일에서 생활해 룩셈부르크 정치는 전혀 몰라 그날그날의 정무에서는 손을 뗐고, 사실상 당시 총리대신 폴 아이셴[6]이 정무를 대행하게 된 것이 이후 관례로 내려오게 됐다.[7] 1902년 아들 기욤을 섭정으로 세웠으며 1905년 바이에른의 여름 별장에서 별세했다.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기욤 4세 (William IV, Grand Duke of Luxembourg) | 1852년 4월 22일 | 1912년 2월 25일 | 포르투갈의 마리아 아나[8] 슬하 6녀[9] |
1녀 | 바덴의 대공비 힐다 (Hilda, Grand Duchess of Baden) | 1864년 11월 5일 | 1952년 2월 8일 | 프리드리히 2세 |
4. 기타
- 아돌프 대공 즉위 130여년 뒤에 영국 국왕으로 즉위한 찰스 3세도 73세로 즉위했는데, 즉위한 2022년 당시 세계 최고령 왕세자이자 즉위자였다. 아돌프 대공의 즉위는 두말 할 것도 없는 고령의 즉위였는데 15년이나 재위하고 88세로 사망하며 룩셈부르크 대공들의 장수 유전자를 보이기 시작했다. 병으로 생을 마감한 아들 기욤 4세와 손녀인 마리아델라이드를 빼고 룩셈부르크 대공가는 다들 장수했다.
- 원래 다스리던 나라가 망하고 세월이 지나 다른 나라의 군주로 즉위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현재도 룩셈부르크 대공은 아돌프가 나사우 공작에서 폐위되기 전까지 실존했던 나사우 공작위를 명목상 겸임한다.
[1] 바이에른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1세의 왕비인 테레제의 여동생이다. 따라서 아돌프는 루트비히 1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2세, 오톤, 루이트폴트 등과 이종사촌간이며, 루트비히 2세는 아돌프 대공의 오촌 조카가 된다.[2]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파벨 1세의 막내아들)과 뷔르템베르크의 샤를로테의 차녀.[3] 덴마크의 샤를로테 공주의 외손녀(차녀 마리 루이제 샤를로테의 첫째딸)로 프레데리크 8세, 영국의 왕비 알렉산드라, 요르요스 1세, 러시아의 황후 마리야 표도로브나, 하노버의 왕세자비 티라, 발데마르 왕자의 이종사촌이다.[4] 요절한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차남만 요절했고, 장남과 삼남은 30대에 사망했다.[5] 이 분야 세계기록이다. 빌럼 3세와의 공통 조상이 나사우 백작 하인리히 2세로, 당시 기준 700년 전 사람이다. 아돌프의 조상(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이 장자 계열이고, 빌럼 3세의 조상(오라녜나사우 가문)이 차자 계열이다.[6] Paul Eyschen, 1888년부터 1915년 사망시까지 27년간 재임하면서 기욤 3세부터 마리아델라이드까지 4명의 대공을 모셨다.[7] 여담으로 영국이 입헌군주국이 된 것도 비슷한 이유이다. 하노버 왕조의 개창자인 조지 1세는 본래 신성 로마 제국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하노버 선제후로 군림하고 있다가 50세에 영국 국왕으로 추대되어 즉위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영국에 대해 아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때문에 일 잘하는 신하들에게 정무를 대행하도록 했고 이 것이 관례가 되어 오늘 날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8] 미겔 1세의 5녀.[9] 룩셈부르크 여대공 마리아델라이드, 룩셈부르크 여대공 샤를로트 등[10] 아돌프의 증조할머니는 빌럼 1세의 아버지 오라녀 공 빌럼 5세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8촌이다. 그렇기에 불과 5개월 차이가 나는 것.[11] 과거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형제 승계라면 그렇게 고령에 즉위하는 사례가 흔하지만 유럽 기준으로는 매우 늦었다. 똑같이 73세에 즉위한 찰스 3세의 사례를 괜히 특이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