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51:18

아부 사이드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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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칸국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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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 사이드 바하두르 칸의 궁정
1. 개요2. 생애
2.1. 위기와 극복2.2. 추판 가문의 반란2.3. 친정2.4. 붕어
2.4.1. 사후의 대혼란
3. 기타

1. 개요

페르시아어, 아랍어 ابو سعید بهادر خان
몽골어 Бусайд баатар хаан / ᠪᠦᠰᠠᠢ ᠪᠠᠬᠠᠲᠦᠷ ᠬᠠᠨ
영어 Abu Sa'id Bahadur Khan

생몰 1305년 6월 2일 ~ 1335년 12월 1일
재위기간 1316년 12월 16일 ~ 1335년 12월 1일

일 칸국의 제9대 칸.

11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여 일 칸국의 전성기를 이어나갔다. 특히 추판을 이용해 내우외환을 극복한 후, 지나치게 강대해진 추판 가문 역시 숙청하는 정치적 노련함을 보이며 올제이투 칸 이래로 분권화가 가속화되었던 제국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외교적으로도 맘루크 왕조와 종전협정을 맺는 등 공존과 평화를 지향했다. 하지만 1335년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로 요절하면서 일 칸국은 내전과 함께 빠르게 붕괴되고 말았다.

2. 생애

1305년 타브리즈 인근의 우잔에서 올제이투 칸과 핫지 하툰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막내아들이었기에 계승 가능성이 낮았지만 형들이 연이어 요절하면서 후계자로 선정되어 1315년 위구르 귀족 아미르 세빈츠의 후견하에 호라산과 마잔다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1316년) 부왕이 붕어하자 아부 사이드는 세빈츠의 손에 이끌려 수도인 솔터니예로 돌아왔는데, 세빈츠와 대장군(아미르 울루스) 추판 사이의 대립으로 인해 대관식은 1317년 여름에야 치러질 수 있었다. 어린 아부 사이드 칸은 세빈츠의 갈망에도 불구하고, 추판의 대장군직을 유임시켰고, 여동생인 사티 베그와의 약혼을 성사시켰다.[1] 아부 사이드 칸은 (《집사》의 편찬자) 라시드 앗 딘 함다니와 타즈 앗 딘 알리 샤 길라니를 재상으로 선임했는데,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다. 결국 1317년 10월 라시드 앗 딘이 해임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2.1. 위기와 극복

이듬해(1318년) 1월에는 후견인이었던 세빈츠가 사망하여 추판의 권력이 더욱 확고해졌다. 추판은 라시드 앗 딘 함다니를 재차 기용했지만, 재상 길라니가 함다니의 아들 이브라함 이즈 앗 딘이 올제이투 칸 독살에 있어 잔을 바치는 등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고 기소했다. 그리하여 함다니 부자는 수도 솔터니예와 카즈빈 사이의 압하르에서 처형되었다.(1318년 7월) 다만 이로써 궁정 내에서의 추판의 영향력은 강화되었다. 그러던 1319년 킵차크 칸국의 우즈베크 칸이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했다. 동시에 올제이투 칸에 복속했던 차가타이 칸국의 왕자 야사우르도 이에 호응하여 호라산의 바드기스에서 거병한 후, 마잔다란의 아미르 야사울을 암살하고 그곳을 공격했다. 아부 사이드 칸은 아미르 후세인 잘라이르를 보내 야사우르를 막게 했고, 자신은 친히 우즈베크 칸에 맞섰다. 추판의 지원으로 아부 사이드 칸은 킵차크군을 격파했고, 반란을 일으켰던 야사우르는 1320년 (일전에 자신이 배신했던) 차가타이 칸국의 케베크에게 살해되었다.

전후 추판은 아부 사이드 칸을 돕지 않은 아미르들을 처벌했는데, 그들 중 전 디야르바크르 총독이자 올제이투 칸의 장인이며, 테구데르 칸의 사위였던 아미르 이린진과 테구데르 칸의 사위 알리나크 노얀의 아들이었던 조지아 총독 쿠루미쉬가 반란을 일으켰다. 케레이트족에 속했던 두 사람은 부족을 중심으로 40,000명의 대군을 모아 거병했고, 2,000명의 호위대와 함께 조지아에 있었던 추판 부자는 무방비 상태로 반란군과 조우하자 타브리즈로 도주했다. 추판의 보고를 들은 아부 사이드 칸은 진압군을 이끌고 타브리즈와 잔잔 사이의 미야네로 나아가 반란군을 격파했다.(1319년 6월) 이 승리를 통해 아부 사이드 칸은 몽골어로 '영웅'을 뜻하는 '바가투르' 칭호와 아랍어로 '정의로운 군주'란 뜻인 '앗-술탄 알-아딜'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반란 진압 이후 이린진과 쿠루미쉬를 포함한 36명의 아미르, 테구데르 칸의 딸이자 이린진의 부인이었던 쾬체크를 포함한 7명의 하툰, 이린진의 아들들이 처형되었고, 쿠루미쉬의 아들 압둘라흐만은 킵차크 칸국의 우즈베크 칸에게 망명했다.

2.2. 추판 가문의 반란

아미르들의 반란 이후 추판은 1319년 9월 약혼녀였던 사티 베그와 결혼했다. 그리고 추판의 아들들인 티무르타쉬, 샤이크 마흐무드, 하산, 데마스크 카자는 각각 아나톨리아, 조지아, 호라산, 아제르바이잔의 총독에 봉해졌다. 이로써 추판 가문은 사실상 일 칸국의 영토 대부분을 사유화하게 되었다. 그러던 1322년 티무르타쉬가 '마흐디'를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추판이 손수 토벌에 나서 아들의 항복을 유도했고, 아부 사이드 칸으로부터 총독의 재임명까지 받아냈다. 한편 아부 사이드 칸은 추판의 딸인 바그다드 하툰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이미 하산 잘라이르와 결혼한 유부녀였기에 추판은 칸에게 사랑을 포기하도록 설득했지만 소용없었다. 1325년 아부 사이드 칸은 추판에게 딸과의 결혼을 요구했지만 추판은 이를 거절하고 그녀와 하산 잘라이르 부부를 카라바흐로 보냈다.

그리고 1326년 추판과 그의 아들 하산은 마침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한 우즈베크 칸과 호라산을 침공한 차가타이 칸국의 알라 앗딘 타르마쉬린에 맞서기 위해 출정했다. 그 틈에 아부 사이드 칸은 추판의 막내아들이었던 데마스크 카자가 올제이투 칸의 부인들 중 한 명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처형했다.(1327년 8월) 이 소식을 들은 추판은 분노하여 칸에게 복수하기 위해 출정했고, 카즈빈 인근에 주둔했다. 셈난의 셰이크 알라 앗 다울라가 주재한 협상이 결렬되자 추판은 약탈을 자행하며 라이 방면으로 나아갔다. 아부 사이드 칸의 진영과 하루 거리인 쿠하에 이르렀을 무렵, 칸의 숙부인 무함마드 베그를 포함한 상당수의 아미르들이 추판에게서 이탈하여 30,000여 명의 병력과 함께 아부 사이드 칸에게 귀순했다. 추판은 잔여 병력과 함께 도주했고, 사베흐에서 부인 사티 베그를 아부 사이드 칸에게 보낸 후, 타바스를 거쳐 카르트 왕조헤라트로 피신했다.

카르트의 군주 기야스 웃 딘은 추판을 환영했지만, 그해 10월 아부 사이드 칸의 명령이 하달되자 (명예로운 방식인) 교살로 처형했다. 이후 아부 사이드 칸은 사랑하는 바그다드 하툰을 하산 잘라이르와 이혼시킨 후, 그녀와 결혼했다. 바그다드 하툰은 부친인 추판의 주검을 무함마드 가문과 사하바들이 매장된 메디나의 알바키 묘원에 안장했다. 처형당한 추판의 아들들 역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먼저 데마스크 카자에 이어 조지아 총독 샤이크 마흐무드가 타브리즈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아나톨리아 원정 중이었던 티무르타슈[2]맘루크 왕조로 망명하여,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환대를 받았으나 점차 갈등을 빚은 끝에 일 칸국에 망명한 맘루크 인사의 처형을 대가로 1328년 8월 처형되었다.[3] 가즈니에서 차가타이군을 격퇴한 하산만이 부친 추판의 처형 소식을 듣고, 파르스-케르만 총독을 맡고 있었던 아들 탈레스와 함께 킵차크 칸국의 우즈베크 칸에게 귀순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2.3. 친정

파일:아부사이드 동전.jpg
아부 사이드 칸의 은화

큰 대가를 치르고 사랑을 이룬 아부 사이드 칸은 하산 잘라이르에게 NTR의 보상으로 추판이 맡고 있었던 대장군 직을 하사했다. 내정에 있어 아부 사이드 칸은 일전에 숙청된 라시드 앗 딘의 아들 기야스 앗 딘을 재상으로 기용하고, 추판 가문 숙청에 공을 세운 키토부카의 손자인 나린 타가이와 숙부 알리 파드샤를 각각 호라산과 바그다드의 총독으로 봉했다. 다만 기야스 앗 딘의 중앙집권화정책은 지방 아미르들의 반발로 이어졌고, 1329년 나린 타가이가 총독위를 사임하고 재상에 반대하는 움직임에 나섰다. 알리 파드샤와 미스르 카자 등의 아미르들도 그를 지원했으나, 나린 타가이는 결국 그해 여름 처형당했다. 외교에 있어 아부 사이드 칸은 1320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무역협정을 맺고 일 칸국 전역에 예배당을 세울 수 있도록 허가했다. 1322년에는 맘루크 왕조와 평화협정을 맺어 50여 년 넘게 이어진 양국 사이의 대립을 매듭짓고 서아시아 교역을 활성화시켰다. 그외에 북인도 델리의 투글루크 왕조와도 종종 교류했다.

한편 추판의 사후 왕비 바그다드 하툰과 재상 기야스 앗 딘이 칸의 총애를 두고 다투었는데 후자는 바그다드 하툰이 전남편인 대장군 하산 잘라이르와 함께 반역 모의를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때문에 1331년 하산 잘라이르가 체포되었으나 그 모친이자 칸의 고모였던 올제테이가 탄원하여 처형 대신 에르진잔 서쪽의 케마 성채에 감금되었고, 이후 무혐의가 밝혀지자 룸의 총독으로 봉해졌다. (1332년) 다만 아부 사이드 칸은 이듬해(1333년) 바그다드 하툰과 이혼하고, 그녀가 데리고 있었던 데마스크 카자의 딸 딜샤드 하툰과 결혼했다.[4] 1334년 아부 사이드 칸은 아미르 무사파르 이나크를 쉬라즈 총독에 봉했는데, 이에 대해 추판 가문의 숙청 이후 파르스를 지배하고 있었던 샤라프 앗딘 마흐무드샤 인주가 반발했다. 마흐무드샤는 무사파르를 추격하다가 아부 사이드 칸의 막사에까지 이르는 불경을 범했고, 칸의 목숨을 위협한 반역죄로 투옥되었다.

2.4. 붕어

1335년 킵차크 칸국의 우즈베크 칸이 또다시 침공하자 아부 사이드 칸은 친정에 나섰으나, 11월 30일과 12월 1일 사이의 밤에 카라바흐에서 붕어했다. 그의 시신은 솔터니예의 왕실 영묘에 안장되었다. 당대인인 이븐 바투타에 의하면 아부 사이드 칸은 권력과 사랑을 잃고 질투심에 가득차있었던 바그다드 하툰에 의해 독살당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 소문의 영향인지 바그다드 하툰은 후임 칸인 아르파 케운에 의해 살해되었고, 투옥되어 있었던 마흐무드샤 역시 처형되었다. 다만 흑사병이 사인이었다는 설도 있다.

2.4.1. 사후의 대혼란

파일:이란 일칸국.png
아부 사이드 칸은 아들을 남기지 못한데다가 후계자를 선정하지 못하고 요절한 탓에 그의 사후 일 칸국은 급격하게 붕괴되었다. 재상 기야스 앗 딘은 일전에 망명한 아리크 부카의 고손자인 아르파 케운을 칸으로 추대했으나, 바그다드 총독 파드샤 알리는 아부 사이드 칸의 과부였던 딜샤드 하툰을 옹위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아부 사이드 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던 딜샤드 하툰이 이듬해 왕녀를 출산하자 실망한 파드샤 알리는 아부 사이드 칸의 8촌이었던 무사를 새로운 칸으로 추대했다. 이어진 내전에서 아르파 케운 칸은 패배하고 피살되었는데, 무사 칸 역시 같은해 아부 사이드 칸의 9촌인 피르 후세인을 무함마드 칸으로 옹립한 하산 잘라이르에게 패배하고 도주했다.

하지만 무함마드 칸 역시 1338년 이집트에서 돌아온 추판의 손자인 하산 쿠차크에게 패배하여 전사했고, 쿠차크는 아부 사이드 칸의 누이이자 추판의 과부였던 사티 베그를 꼭두각시 칸으로 추대했다. 이러한 양상의 내전이 20년 동안 이어지면서 일 칸국은 붕괴되었고, 이란은 지방 총독들이 독립한 군웅할거시대로 접어들었다. 서쪽에서는 추판 왕조잘라이르 왕조가 꼭두각시 칸을 두고 대립하는 동안 동쪽에서는 인주 왕조무자파르 왕조가 흥기했고, 카르트 왕조가 자립했으며 호라산에서는 수피 계열의 사르바다르 운동이 일어났다. 1327년 이란을 지났던 이븐 바투타는 20년만에 제국이 무질서의 도가니가 된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3. 기타

이븐 바투타에 의하면 아부 사이드 칸은 '가장 아름다운 신의 피조물' 중 하나로, 문화 군주였으며 일 칸들 중 유일하게 시를 지으며 작곡을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아부 사이드 칸과 하산 잘라이르 사이의 혼인 관계는 동서 관계로 얽혀 있었다. 먼저 하산 잘라이르가 추판의 딸 바그다드 하툰과 결혼했는데, 아부 사이드 칸이 강제로 이혼시킨 후 칸 자신이 바그다드 하툰과 결혼했다. 그리고 추판은 죽였다 여기서 끝났으면 깔끔했을 걸 하지만 아부 사이드 칸은 6년만에 바그다드 하툰과 이혼하고, 추판의 10대 손녀였던 딜샤드 하툰과 재혼했는데, 3년만에 요절했다. 칸의 사후 바그다드 하툰은 아르파 케운 칸에게 피살되었고, 하산 잘라이르는 (아부 사이드 칸의 딸을 낳은) 딜샤드 하툰과 재혼하여 잘라이르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샤이크 우와이스를 낳았다.


[1] 추판은 일찍이 아부 사이드 칸의 누나인 도울란디 하툰과 혼인했으나 1314년에 사별한 바 있었다[2] 아피욘카라히사르를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리고 있었으나 추판의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 카이세리를 거쳐 시바스로 회군한 뒤, 아부 사이드 칸에 대한 항복을 고려했으나 형제들이 연이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 그해 12월 카라만을 거쳐 병력 1,000명과 함께 맘루크 왕조로 망명했다. 베스니에 이르러 티무르타슈는 다마스쿠스 총독 탄키즈의 영접을 받았고, 이듬해 1월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의 환대를 받으며 알렉산드리아 총독위까지 제안받았다. 2월에는 사촌인 샤힌샤가 합류했다. 한편 아부 사이드 칸은 아나톨리아에 남은 티무르타슈의 부관 에레트나 대신 오이라트계 삼촌인 아미르 무함마드를 총독으로 봉했다. 또한 아부 사이드 칸은 카이로로 사절을 보내 티무르타슈의 처형을 요구했으나 술앗 나시르는 거절했다.[3] 술탄과 티무르타슈의 우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카라만 베이 이브라힘 1세와 하미드 후국의 베이 나즘 앗 딘 이샤크가 티무르타슈의 무슬림들에 대한 악행을 고발하고, 이집트 내에서 티무르타슈의 위상이 점차 높아지자 앗 나시르가 경계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결국 1328년 6월 티무르타슈는 트리폴리의 사자 성채에 감금되었고, 다음달 일 칸국의 사절이 재차 당도하여 1312년 올제이투 칸의 시리아 원정때 귀순했던 알레포 총독 카라순쿠르 (아크순쿠르)의 인도를 대가로 티무르타슈의 처형을 제안했다. 아크순쿠르는 일 칸국에 귀화한 후, 아바카 칸의 딸이자 전 조지아 왕비였던 올자타이와 결혼했고, 마라게의 태수가 되었다.(함께 귀순한 트리폴리 총독 알 아프람은 하마단의 태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부 사이드 칸은 티무르타슈의 처형을 위해 아크순쿠르를 처형했다. 사후 티무르타슈의 수급은 아부 사이드 칸에게 보내졌고, 몸은 카이로에 있었던 파리스 앗 딘 아크타이의 옆에 매장되었다.[4] 추판 가문 출신의 두 여인은 모두 부친 혹은 남편을 죽인 칸과 결혼하는 기구한 운명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