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38><colcolor=#fff> 아서 윌리엄 테더 Arthur William Tedder | ||
GCB | ||
출생 | 1890년 7월 11일 | |
스코틀랜드 글렝귄 | ||
사망 | 1967년 6월 3일 (향년 76세) | |
잉글랜드 반스테드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군인 | |
복무 | 영국 공군 (1913~1951) | |
최종 계급 | 원수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
서훈 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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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군인으로, 제1대 테더 남작으로도 불린다.왕립항공대의 조종사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전간기에는 영국 왕립 공군의 상급 장교로 복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그는 영국 공군 중동 사령부의 공군 장교로써 지중해와 북아프리카의 공중 작전을 총괄했다. 여기에는 크레타 전투에서의 철수와 북아프리카에서의 크루세이더 작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폭격 전술은 테더 융단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전쟁 후기에 그는 지중해 항공 사령부의 사령관 직을 맡았고, 그 역할은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및 연합군의 이탈리아 침공의 계획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프랑스 탈환 작전이었던 오버로드 작전이 계획단계에 있을 때 아서 테더는 연합원정군 최고사령부의 부사령관으로 지명되어 아이젠하워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영국 공군 참모총장직을 수행한 그는 영국 공군 전투기 사령부의 크기를 2배로 늘리고 1948년 베를린 봉쇄를 방해하는데 성공했다.
2. 초기 생애
테더는 아서 존 테더 경과 에밀리 샬롯 테더의 아들로 글렝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늙은 몸에 관세 회의의 담당자로 인정받았다. 그의 아버지의 직업은 어린 테더가 1895년부터 1898년까지 셰틀랜드 제도의 러윅에서, 그리고 1899년부터 1901년까지 엘긴에서 영국 제도의 다양한 부분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1902년 가족은 서레이의 크로이든에서 이사하고, 테더는 그가 캠브리지 대학에 갈 때까지인 1909년까지 휘그피트 학교에 참석했다. 테더는 그의 대학교 생활을 1909년부터 1913년까지 마그다레네 학교에서 보냈으며 그는 여기서 역사를 공부했다. 그는 1912년 여름 동안 베를린에서 독일어를 공부하였다.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자 그는 마그다레네 학교로 돌아와 그 스스로 군인으로써의 경력을 쌓을 준비를 했다. 1913년 9월 2일, 테더는 도스세셔 여단의 소위의 직위를 부여 받았다. 대학에서 테더는 간부 후보생으로써 중령 수업에 참여했고, 피지의 행정부에서 일하기 위해 1914년 2월 영국을 떠났다. 그는 식민지 생활에서 그와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했고,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일반적인 육군에 지원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다.하지만 보병 장교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에 부상을 입게 되었고, 군 생활을 그만둘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조종사를 지원해 중앙비행학교에서 조종 교육을 받은 뒤 제25비행대(No. 25 Squadron RFC)에서 브리스톨 스카웃 정찰기를 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