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영국군의 장성급 지휘관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원수 Marshal / Admiral of the Fleet | |
육군 원수 | 버나드 로 몽고메리 | 아치볼드 웨이벌 | 해럴드 알렉산더 | 존 베레커 | |
해군 원수 | 앤드루 커닝엄 | 더들리 파운드 | 존 토베이 | 찰스 포브스 | |
공군 원수 | - | |
대장 General / Admiral | ||
육군 대장 | 클로드 오킨렉 | 윌리엄 슬림 | |
해군 대장 | 루이 마운트배튼 | |
공군 대장 | 아서 해리스 | 휴 다우딩 | 트래퍼드 리맬러리 | 키스 파크1 | |
중장 Lieutenant-general / Vice-admiral | ||
육군 중장 | 아서 퍼시벌 | |
해군 중장 | - | |
공군 중장 | - | |
소장 Major general / Rear admiral | ||
육군 소장 | 오드 윈게이트† | |
해군 소장 | - | |
공군 소장 | - | |
준장 Brigadier / Commodore | ||
육군 준장 | - | |
해군 준장 | - | |
공군 준장 | - | |
※ 문서가 있는 인물만 종전 당시 계급으로 서술 ※ 윗 첨자 † : 전사 1. 종전시에는 임시 계급이었으나 이후 정식 진급 | }}}}}}}}} |
<colbgcolor=#000038><colcolor=#fff> 알프레드 더들리 픽맨 로저스 파운드 Alfred Dudley Pickman Rogers Pound GCB OM GCVO | ||
출생 | 1877년 8월 29일 |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와이트 섬 벤트너 | ||
사망 | 1943년 10월 21일 (향년 66세) |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런던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군인 | |
복무 | 영국군 (1891~1943) | |
최종 계급 | 원수 | |
경력 | HMS 콜로서스 함장 HMS 리펄스 함장 전투순양함 편대 사령관 지중해함대 사령관 제1해군경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팔레스타인 독립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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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프레드 더들리 파운드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모두 참전한 대영제국의 해군 지휘관이다.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었고, 지휘 능력에 많은 의심을 받으며 일선 지휘관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했다.2. 생애
2.1. 초기 생애
이튼 칼리지에서 교육 받은 바리스터[1]인 알프레드 존 파운드와 그의 아내인 보스턴 출신의 엘리자베스 픽맨 로저스 사이에서 태어난 더들리 파운드는 서식스의 이스트그린스테드에 있는 폰트힐 학교(Fontheal school)에서 교육받았었다.2.2. 초기 군 생애
1891년 1월, 왕립 해군의 장교후보생(Cadet)으로서 훈련선 HMS 브리타니아(1860)에 배정된 파운드는 1893년 1월에 소위(midshipman[2])으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HMS 로열 소버린(1891)에 배정되었다. 이후 그는 HMS 언다운티드(1886)과 HMS 칼립소(1883)에 차례로 배정되었었다. 1896년 8월 29일, 중위(sub-lietenant)로 진급한 파운드는 이듬해 10월 HMS 오포섬(1895)에 배치되었고, 1898년 1월에는 HMS 마그니피센트(1894)에 배치되었다.파운드는 1898년 8월 29일에 대위로 진급했고, 1899년 10월 HMS 버넌(HMS Vernon) 어뢰 학교[3]에서 어뢰 교육을 받고 이듬해 12월 어뢰 전문가 자격을 받았다. 그후 그는 HMS 그래프톤(1892)의 어뢰 장교로 복무하다가 1905년 1월, 대서양 함대의 HMS 킹 에드워드 7세로 재배치되었고, 그 다음에는 1907년 3월에 지중해 함대의 HMS 퀸(1902)으로 배치되었다.
1909년 1월, 파운드는 해군성의 군수품부 장교로 합류했고, 그해 6월 30일에 중령으로 승진한다.1911년 3월, 그는 본토함대의 HMS 수퍼브(1907)에 배치되었고, 1913년 초에 왕립 해군 전쟁 대학의 장교로 합류한 뒤, 1914년 4월, 본 함대의 HMS 세인트 빈센트로 재배치되었다.
2.3.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12월 31일, 대령으로 진급한 파운드는 제1해군경의 해군 보좌관이 되었다. 1915년 3월, 그는 HMS 콜로서스를 지휘하여 유틀란트 해전에서 독일의 경순양함 비스바덴을 격침시키는데 기여하는 등의 큰 성과를 거두었다.1917년 7월, 그는 해군성으로 복귀하여 계획 담당 부국장이 되었고, 이후에는 작전과 국장이 되어 지브뤼헤 급습 작전의 계획 수립에 크게 관여하였다. 그는 왕립해군 D.C.B. 부서[4]에서 진행중이던 무선 조종 선박 계획에도 관여했었다.
2.4. 전간기
파운드는 1919년 생일 수훈식에서 3급 바스훈장(CB)을 수여받았고, 1920년 10월, HMS 리펄스의 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923년 6월에는 영국 해군 본부의 작전과장으로 임명되었다.1925년 1월 1일, 왕의 해군 보좌관(Aide-de-Camp)이 된 파운드는 그해 5월 지중해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1926년 3월, 그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1927년 4월, 해군장교부국장(Assistant Chief of the Naval Staff)이 되었다. 1929년 5월, 그는 전투순양함 편대 지휘관이 되었고, 이듬해 5월, 중장으로 진급한다. 그리고 1932년 8월, 제2해군경 겸 해군인사과장(Second Sea Lord and Chief of Naval Personnel)로 임명되었다. 1930년 왕의 생일 수훈식에서, 파운드는 2급 바스훈장(KCB)를 수여받는다.
1933년 1월 16일, 파운드는 대장으로 진급하고, 지중해 함대의 참모장이 되었다. 그리고 1936년 3월, 그는 지중해함대의 사령관이 된다. 그리고 1939년 새해 수훈식에서, 파운드는 1급 바스훈장(GCB)를 수여받았다.
1939년 6월, 파운드는 제1해군경으로 임명되었고, 1939년 7월 31일에 해군 원수로 진급한다. 당시 그는 건강 문제가 의심되고 있었지만 다른 대장급 장교들은 더 심한 건강 문제가 있었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2.5.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세계대전 당시 파운드는 제1해군경의 임무를 담당했고, 1941년 10월에는 왕의 일등보좌관(First and Principal Naval Aide-de-Camp)으로 임명되기도 했다.1942년 3월, 그는 합동참모의장(Chairman of the Chiefs of Staff)직을 내려놓았고, 1942년 7월, 찰스 케네디 퍼비스 대장이 제1해군경 대리를 맡았다.
파운드는 작위 수여(peerage)를 거부했으나, 1943년 9월 3일 메리트 훈장(OM)을 수여받았다.
2.6. 말년
파운드는 엉덩관절 골관절염으로 인해 만성적인 수면부족이 있었고, 이로 인해 회의에서 종종 조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43년 7월, 그의 아내가 죽자, 그의 건강은 확연히 안좋아졌는데, 퀘벡 회담에서는 2차례의 뇌졸중을 겪으며 마비증세를 호소했고, 뇌종양이 빠르게 자라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결국 1943년 9월 20일, 파운드는 공식적으로 제1해군경에서 사임했다.그는 뇌종양으로 인해 1943년 10월 21일, 런던의 병원에서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솔런트 해협에 묻혔다.
3. 평가
심각한 건강 문제와는 별개로, 파운드는 그의 판단력 때문에 종종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적지 않은 장성급, 영관급 장교들이 파운드를 "탁상공론만 하는 사람(back seat driving)"이라고 비난했고, 특히 찰스 포브스와 존 토베이 등의 본토함대 사령관들과 큰 마찰이 있었다.
파운드는 윈스턴 처칠의 해군 작전 수립에 많이 관여했는데, 이 때문에 "처칠의 앵커(Anchor)"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반면에, 그는 전쟁 초기 발트해로 함대를 파견한다는 처칠의 케서린 계획을 무산시키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교활한 늙은 오소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말레이 해전에서의 대참사가 발생했을 때, 해군 책임자로서 비난을 받기도 했고, 유럽에서는 샤른호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감시망을 피해 영국해협을 빠져나가게 나둔 것에 대해 질책을 받았다. 또, 대서양 호송선단 PQ 17의 해산 명령으로 인해 35척의 상선이 호위 없이 U보트의 공격에 노출되어 24척이 침몰하고 153여 명이 사망하게 된 것 때문에 또 비난을 받았다.
다만 결과적으로 U보트를 격퇴하고, 대서양 해전에서의 승리를 이끌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