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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시기인 기원전 198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아오이 스테나 협곡에 주둔하고 있던 마케도니아군을 격파한 전투.2. 배경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듬해에 고대 카르타고와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 공화국은 발칸 반도로 눈길을 돌렸다. 당시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 5세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주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맺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전쟁을 선포한 뒤 밀레투스를 공략하고 페르가몬 왕국을 공격했으며, 뒤이어 아테네와 로도스를 침략했다. 이에 페르가몬 왕국과 아테네, 로도스가 로마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호소했다.로마 정부는 이들 국가들이 자기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에 외면할 수 없었고, 지난날 필리포스 5세가 한니발 바르카와 손잡고 이탈리아로 쳐들어가려 했던 전력이 있었기에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기원전 200년 신임 집정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는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선포하는 안건을 민회에 제출했다. 한니발과의 전쟁으로 인해 극도로 피폐해진 생활에 지쳐있던 로마 시민들이 강력하게 거부하자, 갈바는 이렇게 설득했다.
"우리가 사군툼을 구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한니발이 로마를 괴롭게 하였소. 이제 피로스보다 강한 적이 헬라스를 정복하도록 방관한다면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오."
이에 민회는 재투표를 벌인 끝에 갈바의 안건을 통과시켰다. 이후 로마의 사절이 필리포스 5세의 궁정에 찾아가서 페르가몬과 로도스에 대한 보상을 하고 헬라스 도시국가들과의 전쟁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지만 묵살당했고, 양국은 정식으로 전쟁에 착수했다. 갈바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참전 용사들을 포함한 2개 로마 군단과 이에 상응하는 라틴 동맹군, 1,000명의 누미디아 기병과 전투 코끼리 부대를 조직했다.
갈바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일리리아에 도착한 뒤, 아테네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켄토에게 20척의 함선과 1,000명의 병력을 줘서 아테네를 구원하게 하였다. 여기에 루키우스 아푸스티우스 풀로에게 또다른 병력을 맡겨 마케도니아 서부 해안을 약탈하게 했다. 풀로는 마케도니아 서부 해안의 다사레타, 안티파트레자, 코드리온, 크니도스 등 여러 해안 도시를 공략했다. 마케도니아 장군 아테나고라스가 현지 부족들을 이끌고 로마군 수송부대를 공격했지만, 그들이 버티는 사이에 군단병들이 구원하러 오자 패퇴했다. 한편 아테네 성벽을 포위 공격하고 있던 필리포스 5세는 로마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카이아 동맹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회답을 받지 못하자 본국으로 물러났다.
갈바는 일리리아에 도착한 뒤 1년간 별다른 군사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그가 이 시기에 질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 대신, 그는 마케도니아를 공격할 연합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마케도니아와 오랜 세월 갈등을 벌였던 이민족인 일리리아, 다르다니아, 아파마니아인들과 손을 잡았고, 아이톨리아, 페르가몬, 로도스와도 사절을 교환했다. 그는 연말에 아폴로니아 부근의 겨울 숙영지에 군대를 배치했다. 기원전 199년, 새 집정관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가 그를 대신하여 마케도니아 전쟁을 맡기로 했다. 그러나 타풀루스가 이탈리아에서 지연되는 동안, 갈바가 전군을 이끌고 마케도니아로 진군했다.
갈바는 여러 방면에서 마케도니아를 침공하기로 했다. 서쪽에서 군단병들을 이끌고 진격하고, 로마와 연합한 일리리아인과 다르다니아인은 마케도니아 북쪽에서 공격하며,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때 로마를 도와 필리포스 5세에 대항했던 아이톨리아 동맹은 테살리아로 북상하며, 로마-로도스-페르가몬 함대는 마케도니아 해안 지대 및 섬들을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톨리아 동맹은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종결 후 마케도니아와 맺은 동맹을 파기하고 자신들과 손잡으라는 로마의 제안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기원전 199년 12월, 나우팍토스 회의에서 며칠간 토의한 끝에, 그들은 로마와 마케도니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기로 결의했다.
갈바는 실망했지만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하고 일리리아 해안에서 출발해 산악 지대를 거쳐 마케도니아 영토로 진입하여 프레스판스킬레와 리크니티스에 도착했다. 이때 리크니티스 호수 인근에서 로마 기병과 마케도니아 기병이 최초로 맞붙어서 로마 병사 35명과 마케도니아 병사 40명이 전사했다. 필리포스 5세는 이에 대응해 유격부대를 파견하여 로마군 식량 수송 부대를 급습하게 했으며, 기병대에게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려 하는 로마 병사들을 습격하게 했다. 갈바는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이 행진해 닷사레티스와 펠라고니아를 휩쓸고, 륀코스와 에오르다이아의 중간 지점까지 진군했다. 그러다 에오르다이아 고개 근처에서 필리포스 5세가 이끄는 적군과 맞주쳤다.
양측은 몇 차례 소규모 전투를 치렀는데, 한 번은 로마군이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마케도니아군은 퇴각하는 적을 추격했다가 갑작스러운 측면 공격을 받아 퇴각하였고, 필리포스 5세는 그 과정에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후 필리포스 5세는 휴전을 요청하기 위해 갈바에게 사절을 보냈다. 갈바는 결정을 다음날까지 미루었지만, 필리포스는 그날 밤중에 조용히 전장을 빠져나갔다. 다음날 적군이 홀연히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갈바는 며칠간 그곳에서 머물다가 플루비나로 진군하여, 필리포스가 진을 치고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오스파고스 강변에 진을 쳤다. 그는 여기서 여러 마을을 공략하면서 필리포스가 전투에 응하도록 유도했으나, 필리포스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급이 부족해지자 가을에 아폴로니아로 돌아갔다. 당시 양측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아이톨리아 동맹은 로마군이 우세를 점하자 그들과 연합하여 필리포스 5세를 협공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타풀루스는 기원전 198년 여름이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아풀로니아에 상륙했지만 그 직후 병사들의 봉기에 직면했다. 2,000명의 참전 용사들이 오랫동안 이탈리아에서 복무하며 한니발 바르카와 맞서 싸웠는데 또다시 마케도니아를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전역을 요구한 것이다. 그는 병사들에게 명령에 다시 복종한다면 나중에 전역시켜주겠다고 약속해 가까스로 분란을 종식했다. 이러느라 시간을 허비했기에 군사 작전을 펼치지 못하고 겨울 숙영지로 이동했다. 기원전 197년, 갈바로부터 지휘권을 인계받은 타풀루스는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원정을 개시했다.
그러나 필리포스 5세가 에페이로스에서 마케도니아에 인접한 테살리아 평원으로 진입하는 진군로를 가로지르는 아오스 강변의 아오이 스테나 협곡에 자리를 잡고 농성하자, 그는 고민에 빠졌다. 갈바처럼 산길을 통해 마케도니아로 진군한다면 적의 연이은 보급부대 습격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아오이 스테나에 주둔한 적 주력부대가 퇴로를 끊어버릴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오이 스테나의 적군을 상대하자니 방어에 특화된 지점을 장악한 적을 상대했다가 막심한 피해를 입을 소지가 다분했다.
그러던 중 신임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발칸 반도에 상륙하여 지휘권을 양도받으려 한다는 소식이 타풀루스에게 전해졌다. 발레리우스 안티아스는 그가 그 전에 군공을 세우기 위해 무리한 공세를 펼치다가 대패했다고 기술했지만,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 등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타풀루스가 별다른 작전을 수행하지 않다가 플라미니누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줬다고 밝혔다. 타풀루스가 플라미니누스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를 맡은 것을 볼 때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는 쪽이 사실에 근접할 것으로 보인다.
3. 전투 경과
신임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는 주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퇴역병으로 구성된 로마 보병 3,000명, 로마 기병 300명, 라틴 보병 5,000명, 라틴 기병 500명을 모집한 뒤 발칸 반도로 건너가서 타풀루스로부터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그는 아오이 스테나를 돌파하여 테살리아로 진출하기로 마음먹고, 군대를 이끌고 그 쪽으로 향했다. 이후 양군은 한 달 동안 대치했지만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에페이로스인들이 양측에 평화 협상을 중재하겠다고 제안하자, 필리포스 5세와 플라미니누스는 아오스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면서 협상했다. 필리포스 5세는 전쟁 중에 정복한 지역을 돌려줄 의향이 있다고 밝혔지만, 플라미니누스가 테살리아를 포기하라고 요구하자 "그 땅은 150년 동안 왕국의 소유였으니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라며 단호히 거부했다.결국 평화 협상은 깨졌고, 플라미니누스는 군단병을 협곡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바위 위에 설치된 투석기와 투석병, 궁수들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고, 고개의 가장 좁은 지점에 자리잡은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와 충돌하면서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결국 플라미니누스는 강행돌파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군을 철수시켰다. 그러던 중 에페이로스의 친로마파 인사인 카롭스가 플라미니누스를 찾아와서 마케도니아군의 후방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산길을 아는 현지인을 소개했다. 이에 플라미니누스는 야밤에 4,000명의 군단병을 선발해 현지인의 안내를 받으며 그 길로 진군하게 했다. 그러면서 벨리테스를 적지 앞으로 보내 투석 무기를 퍼부어서 적의 시선을 잡아끌게 했다.
로마군이 아오이 스테나에 도착한 지 40일째 되는 날, 플라미니누스는 군대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경무장한 측면 부대는 언덕 꼭대기를 점령하러 진군했고, 중앙의 군단병들은 고개를 강행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고개 위에 자리잡은 마케도니아 경무장 부대와 투석기들이 강력하게 반격했고, 중앙의 군단병들 역시 팔랑크스들을 쉽사리 뚫지 못했다. 그러던 중 적 숙영지 뒷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사전에 플라미니누스가 파견한 군단병들이 적군을 후방에서 급습했다. 여기에 카롭스가 통솔하는 에페이로스 부족군이 마케도니아군의 우익 측면과 후방에 위치한 능선에 올라 공격을 퍼부었다. 마케도니아군은 2,000명의 사상자를 입고 패퇴했고, 로마군은 마침내 아오이 스테나 협곡을 돌파했다.
4. 이후
아오이 스테나 협곡을 돌파한 뒤 테살리아 평원으로 진입한 플라미니누스는 갈바, 타풀루스와는 달리 마케도니아로 직공하지 않고 그리스로 이동해 팔로리아 시를 기습 점령하고 더 많은 도시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아트락 포위전에서 적군의 맹렬한 저항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포키스로 이동하여 겨울을 보냈다. 이 시기에 형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지휘하는 함대는 로도스와 페르가몬의 함대와 연합하여 에레트리아를 점령하고 코린토스를 포위했다. 아카이아 동맹이 로마군의 약진을 보고 필리포스 5세와 관계를 끊고 로마와 손을 잡기로 하면서, 상황은 로마에게 좀더 유리해졌다.필리포스 5세는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플라미니누스에게 평화를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플라미니누스는 니카이아 인근 해안가에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대표단도 참석하는 조건으로 회담을 열었다. 이리하여 로크리스에서 플라미니누스와 그리스 대표들, 그리고 필리포스 5세가 만나 평화를 논의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그리스, 일리리아, 카라아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고 로마와 손잡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제시한 여러 요구 사항을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필리포스는 부분적으로 받아들였지만, 150여 년간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지였던 테살리아에서 완전 철수하는 것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에 테살리아 완전 포기 조항은 삭제하고, 나머지 조항은 부분 합의하기로 했다.
이후 그리스 연합 대표단과 플라미니누스의 사절단, 그리고 마케도니아 사절단은 기원전 198년 12월에서 기원전 197년 1월 사이에 원로원에 도착하여 평화를 위한 최종 협상을 하였다. 그리스 연합 대표단은 칼키스, 코린토스, 데메트리아스가 마케도니아 왕국에 있는 한 그리스의 자유는 불가능하며, 이를 두고 다른 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은 당장의 곤경을 벗어나기 위한 술수라고 지적했다. 마케도니아 사절단은 그 세 도시에서 물러날 거냐는 물음에 지시받은 바 없다고 대답했다. 결국 원로원은 평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사절단을 돌려보냈다. 플라미니누스는 전직 집정관으로서 마케도니아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필리포스 5세는 보이오티아 동맹 및 스파르타를 끌여들어 로마에 대항하려 했지만, 두 세력 모두 얼마 안가 로마에게 돌아섰다. 다급해진 필리포스 5세는 로마 본국으로 강화를 요구하는 사자를 보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원전 197년 6월, 플라미니누스는 테살리아 동남부 지역의 펠라이 마을에 이르렀다. 이 시기 필리포스 5세도 마케도니아군을 이끌고 테살리아에 침입한 로마군을 격퇴하려 했다. 이후 양자는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