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지역을 연고로 하는 축구단에 대한 내용은 FC 아우크스부르크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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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행정 구역|바이에른의 현 |
아우크스부르크 Augsburg | |||||
깃발 | 문장 | ||||
아우크스부르크의 위치 | |||||
행정 | |||||
국가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
시간대 | (UTC+1/+2) | ||||
주 | 바이에른 | ||||
현 | 슈바벤 현 | ||||
인문환경 | |||||
면적 | 146.84km² | ||||
인구 | 303,150명(2023년 12월) | ||||
인구밀도 | 2,064명/km² | ||||
홈페이지 | |||||
정치 | |||||
시장 | 에바 베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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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erlach Tower와 Lech Town Hall
지도
독일 남부 바이에른에서도 남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아욱스부어크"가 현지 독일어 발음에 더 가깝다. 주 내에서 뮌헨, 뉘른베르크에 이어 세번째로 큰 도시이다. 한국인 축구 팬들에게는 지동원, 구자철, 홍정호, 천성훈[1][2]이 뛰었던 축구구단 FC 아우크스부르크로 친숙하며, 종교개혁 당시 루터교회와 가톨릭 세력이 서로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가 체결된 곳으로 세계사에 이름을 남겼다.
2. 인구
- 아우크스부르크/인구 참조.
현재 인구수는 약 30만여명 정도이다.
3. 역사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로, 그 기원은 기원전 15년 아우구스투스[3]의 명령에 의해 게르마니아를 로마의 속주로 만들고자 시도했던 티베리우스가 세운 군사 기지이다. 도나우 강과 알프스산맥 사이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라는 중요성을 일찌감치 인지한 로마 측에서는 이 곳을 라이티아 속주의 주도로 삼는다. 이후 중세 시기에 훈족과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에게 연달아 도시가 약탈당하는 불운을 겪기도 하지만 13세기 후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자유도시[4]로 지정받으면서 이탈리아 반도에서 독일로 넘어오는 로만틱가도[5]라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잡아 상업 및 수공업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그에 따라 바이에른 근방에서 가장 세련된 도시이자 활기찬 도시로 승승장구하였다. 마르틴 루터의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종교 개혁이 한창이던 1555년 양 측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후대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라고 부르는 양 측의 협상이 이 곳에서 열렸고 그 덕에 전 유럽이 종교를 놓고 피로 물들던 와중에도 평화롭게 지내나 싶었는데... 1618년 30년 전쟁이 터지면서 모든게 수포로 돌아갔다. 전쟁이 한창이던 1634년 스웨덴군이 아우크스부르크 외곽에 주둔하자[6] 이에 발끈한 구교 측이 아우크스부르크를 포위하고 공격했던 것. 그 덕에 포위전 기간 동안 성 안에서는 아사자 및 병사자[7]가 속출하면서 인구가 기존의 7만 명에서 1만 명 가량으로 급감하고 말았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이미 인구 수만 명을 보유한 도시였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1683년에도 인구가 20,000명[8]으로 엄청나게 줄어 있었다. 165년과 1690년에는 황제선거를 개최하기도 했다.이후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고 빈 회의를 통해 새로운 유럽의 질서가 결정되는 와중에 아우크스부르크는 자치권을 상실하고 바이에른 왕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이 당시였던 1804년에는 인구가 30,000명[9]으로 증가해 있었지만 전쟁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후에는 산업혁명을 맞이하면서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풍부한 수력을 이용하여 공업, 특히나 섬유산업의 중심지로 자리잡았으며 바이에른 왕국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프로이센 왕국 주도의 독일 제국에 가입하면서 아우크스부르크도 독일 제국의 일원이 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과 제3제국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4. 여담
-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 축구선수 베른트 슈스터가 이곳 출신이다.
- 2차 대전 당시 나치당의 2인자였던 루돌프 헤스가 2차대전 중 영국으로 의문의 비행을 갔을 때 이륙한 장소가 이 곳이라고 한다. 또한 다하우 수용소의 부속 시설이 이 곳에도 있었다고.
- 대항해시대3에서도 등장하는 도시이다. 유럽지역이라 플레이어가 찾아나서지 않아도 이미 발견이 되어있는 상태이다.
- 독일의 상용차 제조사인 MAN의 합병 전 회사 중 하나인 Maschinenfabrik Augsburg AG가 이곳에서 세워졌다. 비록 지금 MAN의 본사가 여기 있는 건 아니지만, 이 때문에 MAN의 A가 여전히 아우크스부르크를 뜻하고 있다.[10]
- 아우크스부르크 중앙역을 중심으로 철도망이 상당히 잘 깔려 있다.
- 독일 대도시들 중에서는 거의 최초로 2020년부터 시내 대중교통 요금이 무료가 되었다. 물론 도시 전체가 아니라 시내 한가운데 구역에서만 적용된다. 독일 다른 도시들에서도 대중교통 무료화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실제 시행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모범적인 사례 중의 하나이다.
[1] 재미있게도 이 넷은 K리그에서 만나게 되었다.[2] 천성훈은 주로 FC 아우크스부르크 II에서 주로 뛰어 아우크스부르크 본 팀에서는 유명하지 않았다.[3] 아우크스부르크와 아우구스투스가 발음이 비슷한 것으로도 알 수 있지만, 아우구스투스에서 유래된 지명이다.[4] 봉건영주에게 소속되지 않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직속으로 소속된 도시를 말한다...라고 하지만 황제의 권한은 시간이 지나면서 제국자유도시에서도 유명무실해졌고, 실제 자유도시 국정은 시민 참사회에서 이끌었다.[5] 이탈리아에서 알프스를 넘어온 후 독일 바이에른을 가로지르는 길로, 퓌센에서 출발해서 아우크스부르크를 지나 뷔르츠부르크로 향하는 통상로이다. 로만틱가도라는 이름은 말그대로 로마인의 길이라는 의미이다.[6] 아우크스부르크는 신교도가 당시 더 많았기 때문에 신교측에 우호적이었다.[7] 티푸스가 유행했다.[8] 아우크스부르크/인구 참조.[9] 아우크스부르크/인구 참조.[10] 나머지 M은 Maschinenfabrik, 즉, 기계 공장을 뜻하고 N은 뉘른베르크의 머릿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