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8 17:48:12

안진생

1. 개요2. 생애3. 여담4. 가족관계

[clearfix]
파일:1681983434807.jpg
맨 왼쪽의 인물이 안진생
출생 1916년 1월 28일[1]
러시아 제국 하바롭스크
사망 1988년 12월 24일 (향년 72세)
서울특별시 서울보훈병원

1. 개요

대한민국외교관이자 조선공학자.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조카이자 안정근의 아들이며, 한국인 최초의 조선공학박사이다.

2. 생애

1916년 1월 28일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과 이정서의 2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러시아 혁명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홍콩, 마카오 등지에서 생활하였고, 홍콩 화런 천주교 학교, 마카오 웨하 초등학교 및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북평 보인대학을 졸업하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제노아 대학교[2]를 졸업하고 1946년 2월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였다. 이탈리아 유학 시절 재이탈리아 중국인 유학생 회장을 맡기도 하였고, 이탈리아 레시스텐자에 가담해 반 무솔리니 활동을 하기도 했다.

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으로 건너가 회사원으로 근무하다가 1953년 대한민국 해군에 복무하였고, 인천공작창장 등을 지내다 1958년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 5월 15일 대한조선공사 부사장으로 부임하였고, 1962년 주 이탈리아 대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했다.[3] 1964년 외무공무원교육원에서 근무했고, 1965년 주 프랑스 대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하였고 1966년 9월 2일 주 프랑스 공사로 승진하였다. 10월 25일에는 김활란을 수석대표로 한 유네스코 총회 교체 수석 대표로 참석하였다.

1969년 주 네덜란드 대리대사로 임명되었고, 1970년 12월에는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묘소를 정비하고 기념비 및 흉상을 세웠다. 1971년 주 자이르 대사에 임명되었고, 1973년 주 콜롬비아 대사, 1975년 초대 주 버마 대사에 임명되었다. 1978년 5월 20일 대만 장징궈 총통 취임식에 대표로 참석하였다. 1979년 5월 귀국해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으로 근무하였고,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직되었다. 그 후 뇌경색으로 와병하다가 1988년 12월 24일 서울보훈병원에서 사망하였다.

3. 여담

주 네덜란드 대리대사로 근무할 당시 주일본 네덜란드 대사인 후지사키 마사토[4]이토 히로부미의 증손녀 후지사키 후사코의 남편이었다. 안진생 대사가 부임인사차 일본 대사관 방문 당시 안중근의 조카임을 밝히자 후지사키 대사 역시 자신의 처가 이토 히로부미의 증손녀임을 밝힌 후 서로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고한다. 후지사키 대사는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잊고 협조해 나가자."고 했으나 하이네만 서독 대통령이 네덜란드에 방문, 나치의 침략을 사과하자 안진생 대사가 "하이네만 서독대통령의 방문이 양국의 원한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는 말을 하여 서먹해지기도 했다고 한다.해당기사에 따르면 안진생 대사를 안춘생 전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잘못 표기하였고, 정정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4. 가족관계

  • 큰아버지인 안중근, 아버지 안정근, 숙부인 안공근을 비롯해 40여 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이 중 15명이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을 받았다.
  • 안원생은 해방 후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였고, 6.25 전쟁 전 한국보이스카우트 연맹 부회장, 대한축구협회 임원 등을 지내다 미국으로 이주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 여동생 안미생은 김구의 장남 김인의 아내이며, 해방 후 김구의 비서로 활동하였다. 1947년 9월 모종의 이유[5]로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국공내전의 전황이 악화되자 미국으로 건너가 2008년 그 곳에서 사망했다. 2022년 안미생의 미국 이주 이후 생애를 공개한 기사가 발표됐다. 그 후 2022년에는 안미생의 딸과 연락이 닿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2024년에 백범김구기념관에 기증되었다.


[1] 음력 1915년 12월 24일[2] 제노바 대학교라고도 한다.[3] 5.16 군사정변 후 이탈리아에서 어업차관을 받아야했던 박정희정권에서 이탈리아어에 능통한 사람을 수소문하여 이탈리아 대사관 근무를 제안하였다. 당시 국내에서 이탈리아어에 능통한 사람은 안진생 뿐이었다고 한다.[4] 전 주일본 미국대사 후지사키 이치로의 아버지[5]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에 따르면 중국 내 한국인군대를 편성해 국공내전에 참여시키는 문제에 대해 장제스, 쑹메이링과 협상을 하기 위한 대표로 파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