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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제국 플랑드르 왕조 제 2대 황제 앙리 드 에노 Henry de Hainaut | |||||
이름 | 앙리 드 에노(Henry de Hainaut) | ||||
출생 | 1174년 | ||||
프랑스 발랑시엔 | |||||
사망 | 1216년 6월 11일 (향년 41~42세) | ||||
그리스 테살로니키 | |||||
가문 | 플랑드르 가문 | ||||
가족 | 보두앵 5세 드 에노(부친) 마르그리트 달자스(모친) 이자벨 드 에노(누나) 필리프 드 에노(형) 욜랑드 드 에노(누나) 피에르 드 쿠르트네(매형) 보두앵 6세(형) 몬페라토의 아그네스(전처) 보니파시오 델 몬페라토(전처의 장인) 불가리아의 마리아(후처) 칼로얀 로마녹토노스(후처의 장인)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재위기간 | 1205년 8월 20일 ~ 1216년 6월 11일 | ||||
참전 | 4차 십자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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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두앵 황제의 동생이자, 라틴 제국의 2대 황제로 라틴 제국의 황제들중(섭정 제외)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황제로 재위 기간내내 니케아 제국 황제 테오도로스 1세를 여러번 물먹이며 견제했고 불가리아 제2제국 황제 칼로얀도 적절히 이용해 라틴 제국이 명맥을 유지하는데 영향을 끼친 황제이지만 동시에 일찍 죽어서 이후 라틴 제국은 섭정을 제외하면 유능한 황제가 나오지 않게되며 순식간에 몰락하게 된다.2. 생애
보두앵 1세는 처형 당시 34살이었으나, 후사가 없어서 그의 아우 앙리가 뒤를 이었다. 앙리는 형 보두앵과 함께 제4차 십자군에 참가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고 라틴 제국을 세우는데 공을 세웠다. 1205년 보두앵 1세가 불가리아의 차르 칼로얀과의 전투에서 포로가 되자 라틴 제국의 섭정이 되었고, 형이 처형되자 그해 8월 20일 황제가 되었다.앙리는 현명한 군주여서 그의 치세에 강력한 라이벌인 불가리아의 차르 칼로얀과 니케아 제국의 테오도로스 1세와의 세력균형을 교묘히 이용했고, 비교적 성공적으로 라틴 제국을 방어했다.
1207년, 보니파시오 델 몬페라토의 딸이자 아내인 아그네스가 자식 없이 죽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앙리를 불가리아의 칼로얀의 딸 마리아와 강제로 결혼시켰다.
1209년, 앙리는 룸 술탄국의 술탄 카이쿠스로와 동맹을 맺고 칼로얀의 딸을 후처로 받아들이는 등 외교적으로 니케아 제국을 압박했고, 1211년 10월에 소아시아의 린다쿠스 강변에서 테오도로스 1세의 니케아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이 때 불가리아 차르국의 압박으로 더 이상 진격하진 못했다. 1214년, 테오도로스와의 조약을 통해 라틴 제국은 소아시아 북서 해안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후 앙리는 그리스에 유화적인 정책을 취하고, 테살로니카 왕국을 수립한 보니파시오 델 몬페라토를 복속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1216년 6월에 41살의 나이로 테살로니키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1] 그는 두 번의 결혼에서 모두 후사가 없었으므로, 라틴 제국의 귀족들은 앙리의 누나인 욜랑드 드 에노의 남편 피에르 드 쿠르트네를 황제로 선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