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규 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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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출생과 어린 시절3. 커리어
3.1. 데뷔 전3.2. 1집 Songs In A Minor (2001)3.3. 2집 The Diary Of Alicia Keys (2003)3.4. 라이브 앨범 Unplugged (2005)3.5. 3집 As I Am (2007)3.6. 4집 The Element Of Freedom (2009)3.7. 5집 Girl On Fire (2012)3.8. 6집 HERE (2016)3.9. 7집 ALICIA (2020)3.10. 8집 KEYS (2021)3.11. 9집 Santa Baby (2022)
1. 개요
앨리샤 키스의 활동을 정리한 문서.2. 출생과 어린 시절
이탈리아계 미국인와 아일랜드계 미국인 또는 스코틀랜드 혈통의 엄마, 중국계 미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혈통의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다. 앨리샤는 1살 때 아빠와 헤어지고 싱글맘이 된 엄마의 품에서 자랐는데, 그녀는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앨리샤에게 피아노 레슨은 꼬박꼬박 시켜줬다고 한다.무법천지인 뉴욕의 게토 헬스키친에서 자란 앨리샤는 어린 시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총을 휴대하고 다녔다. IQ가 154나 되고 공부도 매우 잘한 그녀는 미국의 아이비 리그 중 하나인 컬럼비아 대학교에 이미 16살 때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지만 학교에서의 교육이 음악가로서 창조성을 해친다고 판단해 중퇴하였다고 한다.
3. 커리어
3.1. 데뷔 전
그러다 앨리샤 키스는 1996년에 컬럼비아 레코드과 계약을 맺고 맨 인 블랙 OST에 참여하며 메이저에 데뷔하였다. 그러나 선배 디바들과 같이 보컬을 강조한 디바로 키우려 했던 레이블과 달리 그녀는 스스로 작곡을 하는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었다.[1]레이블 담당자가 그녀가 만든 Fallin'을 빼앗아 다른 신인 가수에게 주려 하자 앨리샤 키스는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클라이브 데이비스[2]가 설립한 J 레코드의 첫 번째 아티스트로 계약했다.3.2. 1집 Songs In A Minor (2001)
이어서 2001년에 첫 앨범 Songs in A Minor를 발표하며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본래 앨범의 제목은 'Soul in A Minor'이었지만, 메인스트림 라디오에서 그녀의 음악을 틀어주지 않을 것을 의식해 현재와 같은 타이틀로 변경됐다. 앨범이 발매되기 전 동료가수였던 인디아 아리[3][4] 등과 함께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했는데, 여기에서 부른 Fallin'이 미국 시청자들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신인 가수임에도 스스로 작사, 작곡, 프로듀싱까지 해내는 그녀의 천재성은 언론과 대중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낸다. 오프라쇼에 출연한 이후 1집 앨범의 선주문이 3배 이상 증가했으며, 발매와 동시에 235,000장의 판매고로 1위로 데뷔했다. 그리고 입소문은 더욱 퍼지며 둘 째주에는 4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린다. 이후로도 그녀의 성공은 탄탄대로였다. 그래미 어워즈에서도 올해의 노래와 신인을 비롯해서 5개 부문을 거머쥐며 전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다.
3.3. 2집 The Diary Of Alicia Keys (2003)
키스는 1집의 대성공으로 2집 앨범을 작업할 때 큰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소포모어 징크스를 가볍게 날려 버리며 2집 앨범도 대히트를 한다. 그녀가 일기를 쓰듯 매우 자전적인 내용을 담았으며 기존의 알엔비 소울의 기반을 유지하되, 60~70년대의 복고적인 감성을 더한 앨범이다. 2003년 12월에 발매된 2집 앨범인 The Diary of Alicia Keys은 엄청난 반응을 일으키며 첫주에 미국에서 618,000장을 팔아치웠다. 미국에서 5플래티넘[7] 전 세계에서 900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다. 앨범 뿐만 아니라 싱글도 성공적이었는데, You Don't Know My Name(3위)[8], If I Ain't Got You(4위)[9], Diary(8위), Karma(20위)가 모두 빌보드 차트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특히 If I Ain't Got You는 그녀를 대표하는 히트곡이자 2000년대를 상징하는 알엔비 발라드가 됐다. 수 많은 유명가수들이 이 곡을 커버했으며, 미국 현지에서도 데뷔곡 Fallin'과 함께 오디션 프로그램에 단골로 등장한다.[10] 국내에서도 가장 유명한 팝송중에 하나일 것이다.[11] 평단의 평가도 전작보다 더 찬양일색이었으며, 그래미 어워즈에서는 이번에도 4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빌보드 뮤직 어워드 7개부문을 석권했다. 키스의 대중적 인기가 정점에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최고의 남자가수였던 어셔와 염문을 뿌리며 큰 주목을 받았다. 함께 노래를 부른 My Boo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빌보드 핫 100 정상에 올랐다. 이듬해에 키스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내한콘서트를 열었다. 당시에는 최전성기의 팝스타가 내한해 콘서트를 여는 경우가 드물었다 보니[12]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거미(가수)[13]가 오프닝 공연을 맡았다.
3.4. 라이브 앨범 Unplugged (2005)
2005년 MTV 언플러그드 공연을 담은 자신의 첫 라이브 앨범 Unplugged를 발표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음악 채널인 MTV는 유명 가수와 함께 라이브 앨범을 줄곧 발매해왔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음악시장의 판매고가 저조해 더이상 발매를 하지 않다가 10년 만에 앨리샤 키스와 손을 잡았다. 하늘을 찌르던 그녀의 인기에 힘입어 정규 앨범이 아님에도 빌보드 200 1위로 데뷔하는 기염을 토했다.[14] 미국에서 1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전세계에선 200만장이 판매되었다. 기존의 히트곡들과 몇 곡의 신곡을 더한 앨범으로 그래미어워즈에서 4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당시 If I Ain't Got You로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많이 오른 상황이다 보니, 케이블 채널인 M.net과 mtv 등에서 라이브 앨범의 DVD 영상물을 자주 틀어주곤 했다.[15]
3.5. 3집 As I Am (2007)
Unplugged 이후 2년의 공백[16]을 가진 그녀는 2007년 말 3집 앨범을 발표한다. As I Am은 그녀의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통일성 있고 대중적인 음반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부터 그녀의 음악을 팝적인 성향이 짙어지기 시작했고 U2 등의 영감을 받아 록을 접목시키기도 했다.[17]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대박을 기록했다. 특히 히트 싱글인 No One은 빌보드 5주 1위를 기록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18] No One은 앨리샤의 노래 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히트곡이며 2000년대 결산 6위, 2013년 빌보드 55주년 기념 최고의 100곡에서 역사상 48번째로 성공한 노래)[19]로 선정되기도 하며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As I Am은 발매 첫주에 75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20] 전작의 초동을 뛰어넘었다. 미국에서 4x 플래티넘[21], 빌보드 연말결산 1위를 차지했고 전 세계적으로 65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당시에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그녀는 이듬해 그래미 어워즈에서 오프닝공연을 비롯, 3곡을 열창해 언론으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에이미 와인하우스, 리오나 루이스 등을 제치고 007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다.[22] 본 앨범으로 그래미 어워즈도 3개를 추가했다.[23] 키스는 이듬해, 한국에서 2번째 콘서트를 열었다. 태양(BIGBANG)이 오프닝 공연을 맡았다.
3.6. 4집 The Element Of Freedom (2009)
전작에서 2년의 공백을 가진 앨리샤는 2009년 12월 마지막 주 4집 The Element Of Freedom을 발표한다. 기존의 3집과 비슷한 음악을 이어갔지만 이번에는 얼터네이티브 록음악을 접목했다. '모든 장벽과 한계를 제거한 자유로움'을 컨셉으로 한 앨범으로 특별한 보정없이 그녀의 보컬을 있는 그대로 녹음했다.[24] 그녀의 인기가 정점에서 다소 내려온 시기이다. 첫 싱글인 Doesn't Mean Anything이 충공깽의 뮤직비디오와 함께 앨리샤 키스 싱글들 중 가장 망하는 바람에 싱글들이 전체적으로 묻히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앨범은 잘 팔렸다. 불황임에도 미국에서 첫주에 42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2x 플래티넘[25], 영국에선 110만 장이 팔렸고 전 세계적으로 4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26] 앨리샤의 연속 1위 기록은 이 앨범에서 깨졌다. 영국에서는 앨범이 발매되기 전에 엑스펙터에 출연해 히트곡 메들리를 열창했는데 대중으로부터 굉장히 큰 주목을 이끌었다. 이에 힘입어 1집 이후 처음으로 영국에서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며 대박을 터뜨렸다.[27] 이 시기에 제이지에 피쳐링을 해준 'Empire State Of Mind'도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며 그녀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줬다.[28] 그래미 어워즈에서 2개 부문을 수상했다.[29]
3.7. 5집 Girl On Fire (2012)
2012년 5번째 정규앨범 Girl On Fire를 발표하였다. 일렉트로 소울과 힙합에서 락, 레게 등 다양한 시도를 했으며 앨범의 프로듀싱은 미니멀을 추구했다. 키스는 애정관계, 그리고 신에 대해 가사를 썼다. 몇몇 곡은 그녀의 결혼, 그리고 엄마로서의 삶과 같은 개인적인 내용을 담았다. 첫 싱글인 동명 타이틀의 Girl on Fire가 전 세계적으로 높은 인기를 누렸으며[30] 앨범도 첫 주에 16만 장의 판매고로 1위로 데뷔하였다. 현재까지 미국에선 플래티넘[31], 전 세계에서 18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오랜 싱어송라이터 활동으로 전작에서 매너리즘을 느끼기 시작한 그녀는 본작에선 자신의 영향력을 줄이고 영국의 흑인 뮤지션인 에밀리 산데와 싱어송라이터 브루노 마스등 외부의 뮤지션들과 공동작업을 늘리기 시작했다. 타이틀곡을 비롯한 상업적인 곡도 실렸지만 앨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다소 실험적이고 마이너하다는 팬들의 의견이 많았다. 이에 따라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저조한 차트 성적을 냈지만 망해가는 음악시장에서는 여전히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 있다. 그래미어워즈에서 '알엔비 앨범' 부문을 수상하는 등 좋은 평가를 받은 앨범이다. 키스는 앨범 홍보를 위해 그래미 어워즈, VMA, NBA 올스타전, 아메리칸 아이돌, 엑스 팩터 등에 출연했으며 수퍼볼에서 미국 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한국에선 앨범수록곡 Tears always win이 음원차트를 중심으로 소소하게 인기가 있었다. 가온차트의 팝부문에서 2주 연속 1위를 지켰다. 카페나 레스토랑 등에서 자주 틀어준 편이니 들어보면 익숙할 수도 있다.[32]
3.8. 6집 HERE (2016)
2015년에는 자신이 운영하는 자선 단체인 Keep A Child에 100만달러를 기부하고, 전 세계의 고통받는 어린이들, 여성들, 동성애자 등의 인권을 대변하기 위해 We Are Here를 발표했다. 2016년에 11월 8일 자정, 6집 앨범 HERE을 발표했다. 리드싱글로 In Common을 공개했다. 하향세 와중에 4년이란 긴 공백 탓에 주목도는 많이 떨어진 듯하다. 퀄리티가 상당했으나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33] 그러나 기존의 잔잔한 발라드 스타일에서 벗어나 전자음을 더한 트로피컬 사운드가 매우 신선하다는 호평이 많았다.[34] 여성의 인권 증진을 위해 더이상 메이크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팬들을 깜짝 놀래키기도 했다. (..) [35] 인기가 없었고 앨범의 분위기와 맞지 않아서인지 In Common은 디럭스버전의 보너스트랙으로만 포함됐다.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킬링트랙을 앨범에서 제외한 것은 다소 의아하다는 팬들의 의견이 많았다. 통일성에 맞지 않아서 제외된 듯 하다. 메이크업을 지워버린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한 컨셉을 추구하며 프로모션이 평소보다는 제한적으로 이뤄졌다.[36] 그래도 대표적인 R&B가수답게 그래미 어워드, The Voice, 엘렌 쇼, 챔피언스 리그 및 BET 어워드 등 굵직굵직한 쇼에는 대부분 초대됐다. 앨범을 위해 10일 만에 30곡을 썼다는 그녀는, 본작에 가난한 흑인 커뮤니티의 현실비판, 자전적인 재혼가정 등 다양한 사회적 메세지를 가사에 담았다. 화려하게 치장한 상업성보단 음악 자체에 집중해서인지 평론가 평점은 전체적으로 우수한 편이다.[37] 발매 첫주에 5만 장(실판 4만 2천장)으로 빌보드 200 2위로 데뷔했다.
결론적으로는 데뷔 후 그녀의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망한 음반이라 할만하다. 스트리밍이나 유튜브 순위 등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 하는 음악도 올드스쿨 소울이 기반인 데다가 분명히 예쁜데도 이상하게 나이들어보이고 촌스러워 보이는 스타일링이나 뮤직 비디오 컨셉에 4년간의 공백기까지 겹쳐서 고루한 이미지가 생겨버린 것. 그러나 뮤지션으로서 그녀의 브랜드와 음악이 완전히 쇠퇴한 것은 아니다. 앞에 서술한 바와 같이 6집은 음악적으로도 굉장히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또한 저명한 언론지인 타임즈에서는 2005년에 이어서 2017년에 다시 한번 그녀를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 100인 중에 하나로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 최고 권위의 그래미 어워즈에도 계속해서 공연자로 초대받고 있다. 이미 12년이나 넘게 인기를 누린 뒤, 상업적으로 점점 하향세를 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38] 미국에서도 앨리샤 키스가 현재 핫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음악성을 갖춘 좋은 싱어송라이터로 평가하고 있다.[39]
3.9. 7집 ALICIA (2020)
2019년과 2020년 연속으로 그래미상 단독 호스트로 선정됐다. 진행에 상당한 호평을 얻었다.
리드 싱글로 공개되었던 알앤비 발라드 "Show Me Love"가 빌보드 핫 100 90위를 기록했다. 알앤비 남성보컬 미겔과 듀엣을 한 곡이다. 이어서 그래미에서 공연을 선보인 "Underdog" 역시 잘빠진 곡이 빛을 발하며 빌보드 핫 100 69위를 기록하는 등 차트 하위권이지만 그녀의 최근작치고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2012년 "Girl on Fire" 11위 이후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것이다. "Underdog"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헌정곡으로 모두가 쉽게 따라 부르도록 캐치하고 간단한 멜로디로 구성되었다. 두 싱글 모두 골드(50만장) 인증을 획득했다. 앨범 발매 직전 칼리드와 부른 미디엄 템포 알앤비곡 So Done과 팝사운드 느낌의 Love Looks Better가 공개되었다. 9월 18일 일곱 번째 정규 앨범 ALICIA가 발매되었다.
첫주 초동은 스트리밍 합산 6만 3천장으로(순판 5만 1천장) 빌보드 200 4위를 기록 하였다. 전작 Here과 비교해봐도 팬덤은 크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유지된듯하다. 하지만 그래미 같은 굵직한 시상식에서 호스트로 활약한 것은 아쉽게도 화제성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보긴 힘들듯. Here에선 핫 100에 진입시킨곡이 한곡도 없었지만 이번 앨범에선 선공개한 싱글(Show me love(90위) Underdog(69위)들을 하위권이지만 그래도 핫 100에 짧게나마 진입하면서 약하게나마 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성면에서는 굉장히 크게 호평받으며 메타크리틱 점수 77점을 부여받았다. 이는 전작 Here(76점)보다 높은 점수이며 1집 Song in A Minor(78점)에 이어 앨리샤 키스의 커리어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의 앨범이다.
3.10. 8집 KEYS (2021)
3.11. 9집 Santa Baby (2022)
[1] 당시 소니 뮤직 산하 레이블에 최전성기의 머라이어 캐리와 셀린 디옹이 소속되어있었고, 둘다 음반을 3000만장 가까이씩 팔면서 소니뮤직을 먹여살리고 있었다... 토미 머톨라가 이를 이을 디바들을 발굴하던 시기였다.[2]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유명한 CEO이다. 휘트니 휴스턴 등을 직접 키운 아리스타의 전사장으로 유명하다. 미국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인 아메리칸 아이돌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그가 친딸과 같이 유독 예뻐한 아티스트가 딱 2명 있는데, 하나는 휘트니 휴스턴이고 다른 하나는 앨리샤 키스이다. 반면 켈리 클락슨과는 음악적 견해의 차이로 갈등이 상당히 깊었다.[3] 데뷔 초 앨리샤 키스와 라이벌 구도를 이뤘던 흑인 여성 싱어송라이터이다. 특히 2002년 그래미어워즈에서 7개 부문이나 후보에 오르며 언론에 크게 화제가 되었지만, 단 하나의 수상도 하지 못하며(..) 앨리샤에 판정패를 당한다. 이후에 인디아 아리 역시 4개의 그래미를 수상하긴 했다.[4] 두 사람 다 좋은 평가를 받는 훌륭한 음악가이지만, 대중적인 인기와 스타성에 있어서는 앨리샤의 압승이었다. 두 사람 다 네오 소울, 여성, 흑인, 싱어송라이터에 똑같은 2001년에 데뷔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단, 인디아가 6살 연상이다. 앨리샤는 아주 빠르게 데뷔했고 인디아는 조금 늦게 데뷔한 것.), 이후 빌보드 핫 100에서 top10 싱글을 10곡이나 만들어낸 앨리샤와는 달리 인디아의 싱글차트 최고 순위는 47위다. 즉 앨리샤에게는 확실히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곡을 뽑아내는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보컬 역시 부드러운 중저음 그루브를 중시하는 인디아에 비해 진성 벨팅으로 고음을 지르는 앨리샤가 확실히 어필하기에 좋았다. 앨리샤가 엄청난 미인인 것도 인기에 한몫 했고.[5] 사운드 스캔에서 640만장이 집계되었으나 소니BMG사운드클럽에서 따로 발매돼 100만장이 더 팔렸다. 음반시장이 컸던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까지는 이런식으로 앨범이 따로 발매되었다.[6] 특히, 국내의 정상급 여성 알엔비 가수인 거미와 임정희의 초창기 음악과 컨셉은 앨리샤 키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도 많았다. 그밖에 휘성과 세븐 등은 직접 방송에서 앨리샤의 음반을 홍보해주는 등 그녀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7] 500만장 인증, 실판 480만장+[8] 11주간 Top 10에 머물러 있었다.[9] 1위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엄청난 롱런으로 2004년 빌보드 핫 100 연말 차트에서는 3위를 차지했다.[10] 하지만 원곡이 워낙 유명한데다 노래의 맛을 살리기 힘들어서 곧 잘 망하는 곡이다.[11] 워낙 오랫동안 사랑받은 곡이다보니 앨리샤를 몰라도 이 곡은 알 것이다.[12] 90년대까지만 해도 인기가 떨어지면 한국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덜해도 여전히 이런 성향의 팝스타가 은근 있다.[13] 당시 한국의 앨리샤 키스..[14] 첫주에 20만장이나 팔렸다.[15] 앨리샤는 흑인음악팬들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크게 유명하다 할 순 없지만, 이 시기는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다. 이 때는 팬카페 회원수도 1만 5천명이 넘었고 활동도 활발했다.[16] 정규 앨범으로는 무려 4년의 공백이다...[17] The Thing About Love나 Go Ahead 등이 대표적이다.[18] 2위도 7번이나 했다. 앨리샤 키스는 1위도 많이 했지만 유독 2위도 많이 했다. Fallin'도 1위를 6번했지만 2위도 5번이나 했다. 본 3집 앨범 역시 4주간 1위를 했지만 조쉬그로반의 캐롤음반과 경쟁하며 2위를 7번이나 했다.[19]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가 49위인 걸 감안하면 차트에서 얼마나 성공했는지 알 수 있다.[20] 흑인 여성 가수 역사상 최다 판매고이다.[21] 400만장 인증, 실판 390만장+[22] 이에 심기가 불편했는지,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키스의 음악이 매우 지루하다며 디스하기도 했다. 에이미 인성수준[23] 본작의 수록곡인 No One과 Superwoman으로 2년 연속 알엔비 여성 보컬을 수상한 것이 특이하다.[24] 보통 팝가수들은 마디마다 끊어서 앨범을 녹음한다. 가장 잘된 것을 이어 붙이는 식이다.[25] 200만장 인증, 실판 160만장+[26] 하지만 대진운이 나빠서 무려 40만 장이 넘는 판매고로도 2위에 그쳤다. 당시에 오디션 신드롬을 일으켰던 수잔보일의 데뷔 음반이 1위를 차지했다.[27] 영국에서 1집은 120만 장, 2집은 60만 장, 3집은 40만 장, 4집은 110만 장, 5집은 25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4집은 음반시장이 많이 축소된 시기에 발매되었기 때문에 1집보다 더욱 큰 상업적인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28] 이 곡에서 가장 유명한 그녀의 코러스 파트는 키스가 직접 작곡했다.[29] 그녀의 커리어 중 유일하게 알엔비 이외의 장르에서 그래미 어워즈를 수상한 곡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알엔비 아티스트인 그녀는 올해의 노래, 신인상을 받은 Fallin'과 올해의 랩과 피처링 부문을 수상한 Empire State Of Mind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알엔비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주로 활동한 2000년대 초중반에는 빌보드 핫 100 30위 안에 20곡이 흑인 음악이었을 정도로 매우 경쟁이 치열하였다.[30] 빌보드 핫 100 11위에 그쳤지만 굉장히 꾸준히 사랑을 받으며 미국에서 600만장 인증을 받았다. 당시 높은 디지털 싱글 판매고와 라디오 방송횟수로 차트 상위안에 드는 것이 당연한 인기였지만 빌보드가 갑작스레 룰을 변경해 유튜브 조회수를 적극 반영하며 결국 톱텐에도 들지 못하고 말았다. 그 밖에 유럽 전역과 남미, 아시아 일부에서도 히트했다. 브라질에서는 인기 드라마 주제가로 삽입돼 티비에서 지겨울 정도로 나왔다고 한다.[31] 100만장 인증, 실판 80만 장+[32] If I ain't got you처럼 메가히트한 것은 아니라 모를 수도 있다.[33] 사실, 업계의 판도가 바뀐 4집 앨범 이후 싱글이 망하는 게 팬들에게 익숙하긴 하다.[34] 전작의 When It's All Over 등 앨범 수록곡에서는 꾸준히 시도한 스타일인 듯하다.[35] 지미 키멜 쇼에 출연했을 때, 지미 키멜이 "당신은 화장을 안 해도 그렇게 이쁘니깐 지울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사실이긴 하다.[36] 앨리샤는 평소 앨범이 발매되면 극악의 프로모션 일정을 소화해왔다. 하지만 커리어가 쌓이며 예전보다는 활동이 느슨해진 감이 있다.[37] 메타크리틱 76점으로 그래미를 수상한 전작보다도 점수가 훌륭한 편이다. 퀄리티는 좋지만 사실상 대중의 관심은 받지 못했다고 해두자.[38] 이 음반을 냈을때 이미 1집 이후 16년차였다.[39] 우리 나라에서 자우림이나 이소라 같은 가수를 현재 멜론차트에서 못 뜬다고 퇴물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드물것이다. 애초에 앨리샤 키스는 이런 가수들처럼 상업적으로도 대성공했지만 기본적으론 음악성에 기반을 둔 싱어송라이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