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9 06:10:41

에디 베일리

파일:Eddie Baily.jpg
이름 에드워드 프랜시스 베일리
Edward Francis Baily
출생 1925년 8월 6일
런던 클랩튼
사망 2010년 10월 13일 (향년 85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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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인사이드 포워드
신체조건 170cm | 69kg
소속팀 선수 토트넘 홋스퍼 FC (1946~1956)
포트 베일 FC (1956)
노팅엄 포레스트 FC (1956~1958)
레이턴 오리엔트 FC (1958~1960)
지도자 토트넘 홋스퍼 (1963~1974 / 수석코치)
국가대표 9경기 5골 (잉글랜드 / 1950~1952)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사생활5. 수상
5.1.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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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베일리는 1938년에 토트넘과 유스 계약을 맺었고 이 당시의 그는 크리켓 경기도 하면서 인쇄 회사와 주식 중개 회사에서도 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베일리는 왕립 스코틀랜드 소총병대 소속으로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등에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나고 베일리의 소속팀 토트넘은 베일리가 실종된 줄 알고 베일리의 선수 등록을 취소했다. 그러나 베일리는 멀쩡히 살아있었고 그는 자신이 소속된 팀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첼시와 아마추어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베일리는 후에 토트넘의 감독이 될 지미 앤더슨과 우연히 만난 후 토트넘이 첼시에 양해를 구해 다시 토트넘의 선수가 될 수 있었다.

1947년 1월 19일, 베일리는 웨스트 브롬위치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고 1949-50 시즌에 토트넘이 2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승격하고 다음 해에 1부 리그 첫 우승을 달성할 때 베일리는 토트넘의 푸시 앤드 런 전술의 주축 선수가 되어 있었다. 1952년 4월 2일에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열린 허더스필드 타운전에서 베일리는 심판을 맞춰 코너킥을 얻어내는 행위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51년의 우승 이후 토트넘의 순위는 내리막을 탔고 1954-55, 1955-56 시즌에는 강등권에 위치했다. 베일리의 토트넘 생활은 1956년 1월에 끝났고 그는 포트 베일에 7천 파운드로 이적했다. 베일리는 포트 베일에서 27경기 8골로 나쁘지 않은 기록을 남겼지만 그의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포트 베일에서 오래 있지 못했다. 그는 같은 가격으로 그해 10월에 노팅엄 포레스트로 재판매되었고 그해 노팅엄의 1부 리그 승격에 힘을 보탰다.

노팅엄은 1958년에 10위를 기록하며 1부 리그에 성공적으로 안착했고 베일리는 노팅엄에서 14골을 넣었다. 하지만 그는 1958년 12월에 레이턴 오리엔트로 팀을 옮겼고 그곳에서 은퇴했다.

2.1.2. 국가대표

베일리는 1950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마지막 경기였던 스페인전으로 데뷔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스페인을 2골차 이상으로 이겨야 결선 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스페인에 0:1로 패배, 결선 리그 진출에 실패했다.

베일리는 대표팀에서 9경기 출전, 5골을 기록했다.

2.2. 이후

베일리는 1963년부터 1974년까지 선수 시절 친정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동료이자 토트넘 역대 최고 감독으로 평가받는 빌 니콜슨 감독을 도와 코치로 일했다. 그는 엄격하고 강인한 코치로 평가받았지만 니콜슨이 토트넘 감독을 그만 두고난 다음달에 그도 팀을 나왔다.

그 이후 베일리는 첼시웨스트햄에서 일했는데 웨스트햄 시절에는 수석 스카우터로 있었다. 베일리는 1992년까지 웨스트햄에서 스태프로 일하다 축구계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베일리는 당대 최고급의 인사이드 포워드로 평가받았으며 눈부신 기술과 예리한 패스, 생각과 움직임이 매우 빠르다는 평이 있었다.

4. 사생활

베일리는 1952년 12월 엘시와 결혼, 아들 그레이엄과 딸 제인을 두었다.

5. 수상

5.1. 클럽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