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튼 FC 관련 문서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27448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373A3C,#DDDDDD | <colbgcolor=#274488><colcolor=#ffffff> 산하 구단 | 에버튼 FC|에버튼 FC 위민|에버튼 아카데미 |
역사 | 역사|유니폼 | |
선수단 | 스쿼드|스쿼드(간략)|임대 명단|U-21 | |
역대 시즌 | 2008-11|2011-12|2012-13|2013-14|2014-15|2015-16|2016-17|2017-18|2018-19|2019-20 /리그|2020-21 /리그|2021-22 /리그|2022-23 /리그|2023-24 /리그|2024-25 /리그 | |
주요 인물 | 역대 감독|역대 주장 | 역대 올해의 선수|레전드 | |
더비 매치 | ||
구단 시설 | 구디슨 파크(~2024-25)|에버튼 스타디움(2025-26~) | |
관련 인물 | 댄 프리드킨 구단주|데이비드 모예스 감독 | 케빈 텔웰 풋볼 디렉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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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버튼 FC 역사에 대한 문서이다.2. 창단 그 이후 역사
에버튼 F.C.는 1878년, '세인트 도밍고 교회'의 신자들이 창설하여 '세인트 도밍고(St. Domingo's)'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원래 이 팀은 크리켓 팀이었으나, 크리켓이라는 경기가 여름철에만 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어서 구단은 겨울철에도 할 수 있는 스포츠 팀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별도의 축구팀을 만들게 되면서 St. Domingo's Football Club이 에버튼 축구 클럽의 시초가 된다. 그리고 1년 후에 인기가 많아지면서, 지역의 이름을 따 에버튼 FC(Everton FC)로 명칭을 변경하게 된다.에버튼의 초창기 구장은 '스탠리 파크'로 관중석이 없는 일반 공원에서 경기를 했었다. 그러다 보니 인근의 많은 인파가 몰렸고, 항상 소음이 끊이지 않아 소음 문제를 야기시켰다. 또한 제대로 된 구장이 있어야 풋볼 리그에 정식 프로 축구 클럽으로 등록될 수 있었기에 에버튼은 새 홈 구장을 물색해야 했다. 이에 구단은 스탠리 파크 바로 옆의 안필드 부지를 찾게 되었다. 당시 안필드는 초대 회장인 존 하울딩의 동료 양조업자 존 오렐의 소유 부지였고, 에버튼은 1884년 안필드를 임대해 축구 구장으로 개장하게 되면서 안필드 스타디움의 첫 주인이 된다. 에버튼은 안필드에서 정식 프로 축구 클럽으로 발돋움하여 1888-89 시즌 풋볼 리그의 원년 멤버로 참가했고, 이후 1890-91 시즌 사상 첫 번째 풋볼 리그 우승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1885년, 존 하울딩이 안필드 부지를 직접 매입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에버튼의 회장이자 안필드 소유주였던 하울딩은 에버튼의 이사회와 다양한 방면에서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가장 큰 갈등 요소는 안필드의 임대료 인상이었다. 1889년에 에버튼은 하울딩에게 안필드 임대를 위해 연 100파운드의 임대료를 지불했으나, 하울딩은 경기 수입이 늘어남에 따라 임대료를 계속해서 인상하는 방식을 취하여 1889-90 시즌부터는 250파운드, 이후 370파운드까지 임대료를 인상했다. 또한 에버튼은 경기장의 시설 보수 및 증축 비용을 별도로 부담해야 했다.[1] 또한 하울딩은 안필드에 자신이 운영하는 양조장의 맥주를 독점적으로 들여왔고, 에버튼 선수들이 그의 소유인 샌든(The Sandon) 호텔을 경기 전후에 사용하도록 만들면서[2] 에버튼 이사회와 계속해서 충돌을 야기했다.[3]
이렇게 갈등이 심화되던 와중에, 인접한 토지 소유주이자 안필드의 전 주인 존 오렐과의 토지 분쟁까지 얽히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1891년, 에버튼 이사회는 안필드 경기장 내 새로운 스탠드를 건설했는데 이 스탠드가 오렐이 소유한 옆 토지를 침범하며 지어졌고,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스탠드가 도로로 사용될 예정이었던 오렐의 땅을 가로막아버렸던 것이었다. 당시 안필드 옆 오렐의 부지는 안필드의 일부 구역을 도로로 사용하지 않고는 접근이 불가능한 땅이었기에 반드시 안필드 부지를 지나야만 하는 도로가 필요했다. 이에 오렐과 하울딩 사이에는 이와 관련한 토지 이용 조항이 안필드 부지 매매 계약 당시부터 존재했으며, 이 조항에 따르면 안필드 부지의 특정 구역이 도로로 사용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에버튼 이사회는 해당 부지가 온전히 구단의 것이라 믿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스탠드를 세운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오렐은 에버튼 측이 토지 계약 내용을 모르고 있었을 리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스탠드 철거를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울딩은 오렐과의 계약 내용을 구단 이사회에게도 알려줬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사건은 단순한 토지 문제를 넘어 하울딩과 에버튼 이사회 사이의 불신이 증폭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하울딩과 에버튼 이사들 간의 관계가 완전히 파국으로 치닿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결국 1891년 9월 15일, 하울딩은 급히 경기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단을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오렐의 부지를 완전히 매입할 자금을 모으자는 안건을 이사회에 올렸다.[4] 그러나 자유당 정치이자 후에 에버튼 회장이 되는 조지 마흔[5]을 필두로 한 다수의 이사들은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하울딩이 제안한 방식에 강하게 반대의사를 밝혔다.[6] 이후 합의를 위해 하울딩측과 마흔측은 많은 협상을 벌였지만 1892년이 밝을 때 까지 합의는 도출되지 못했다. 결국 마흔은 부지 문제가 엮인 하울딩의 안필드를 떠나기 위해 새로운 경기장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2년 1월 25일, 쇼 스트리트(Shaw Street)에 위치한 옛 리버풀 칼리지(Liverpool College) 건물에서 특별 총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하울딩의 제안은 다시 한 번 부결되었고, 마혼은 미어 그린(Mere Green)[7]의 임대 계약서를 제출하며 에버튼이 새로운 경기장으로 떠나자는 안건을 올렸다.[8] 결국 다수 의결에 의해 에버튼은 안필드를 떠나게 되었고 하울딩은 에버튼 이사회로부터 축출되게 되었다.[9]
이로서 에버튼은 1892년 3월 15일 안필드를 떠나 현재의 구디슨 파크인 미어 그린(Mere Green)으로 옮겨왔다. 1892년에 지어진 구디슨 파크는 잉글랜드 역사상 처음으로 지어진 축구 전용 구장이기도 한데, 개장 이후 영국 왕 조지 5세가 방문하면서 더 인지도를 높이게 된다. 한편, 에버튼이 나간 안필드에는 하울딩이 새 축구 클럽을 창단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리버풀 FC이다. 그리고 이러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에버튼과 리버풀 사이의 축구경기는 머지사이드 더비로 불리며 이피엘에서 유명한 더비 매치 중 하나가 되었다.
새 출발을 하게 된 에버튼은 이후 풋볼 리그 초창기부터 강세를 나타내며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리그와 FA컵을 각각 1개씩 들어올렸고 빠르게 역사를 쌓아나가기 시작했다. 팀 역사상 첫 전환기는 1925년에 트란미어 로버스에서 스트라이커 딕시 딘을 사면서부터였다. 1927-28 시즌 중반까지 당시 리그 최고 득점 기록은 59골이었는데, 딘은 어마어마한 페이스로 득점을 쌓아나가기 시작했고, 딘은 해당 시즌 단 한 경기를 남겨놓고 57득점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경기에서 아스날 FC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해 리그 최고 기록인 60골을 달성했으며, 그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29-30 시즌 당시에는 22팀 중 꼴찌로 강등됐지만 딘은 팀에 꿋꿋이 남아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1시즌만에 1부 리그로 팀을 재승격시켰고, 1931-32 시즌에는 리그 우승까지 들어올리는 경이로운 활약을 보였다.
딕시 딘 시대가 끝난 뒤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전력을 잃으며 1940년대에 리그 하위권으로 처졌고, 1950-51 시즌에 22위를 차지하여 다시 강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 시기가 에버튼 역사상 최저의 암흑기인데, 에버튼은 3시즌 동안 2부 리그에 있다가 1953-54 시즌 2위를 차지하여 빠르게 1부 리그로 승격하게 된다.
1960년대는 에버튼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로 손꼽히는데, 당시 에버튼은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경기 스타일로 인해 '스쿨 오브 사이언스(School of Science)'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1961년에 팀의 중앙 공격수 출신인 해리 캐터릭이 감독으로 취임하여 전원 수비, 전원 공격을 앞세운 '토탈 풋볼'을 적용시켜 로이 버논과 알렉스 영, 조 로일 등의 활약으로 1962-63, 1969-70 시즌에 각각 리그 우승을 했고, 1965-66 시즌에는 FA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트로피를 수집했다.
이후 1970년대 들어서는 꾸준히 리그 중상위권을 유지해왔으나 1960년대 중반부터 전성기를 이룩하기 시작했던 로컬 더비 라이벌 리버풀에 가려 별다른 빛을 보지 못했다. 심지어 리버풀이 유러피언 컵을 연패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던 70년대 후반에는 강등권으로 내몰리는 수모를 당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화려하게 부활하며 1983-84 시즌 FA컵 우승에 이어 1984-85 시즌에는 통산 여덟 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해 기지개를 폈고, 구단 역사상 최초의 유럽 대항전 우승인 UEFA 컵 위너스컵까지 같은 시즌에 제패하여 리그-유럽 대항전 더블의 쾌거를 이룩했다. 1979년부터 부임한 필립 카터 회장이 1980-81 시즌 도중에 '캐터릭의 아이들' 시절 멤버이던 하워드 켄달을 감독으로 데려온 것이 주효했던 것. 그렇게 1985년에 구단 역사상 최고점을 찍으며 우승의 영광과 함께 다시금 전성기를 누릴 찰나, 1985년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헤이젤 참사가 터진다.
1985년의 리그 우승은 에버튼에게 새로운 전성기의 시작을 알리는 상승세의 조짐과도 같았고, 구단 역사상 최초의 유러피언컵 진출이 그 다음 시즌에 예정되어 있었으나, 불운하게도 에버튼은 헤이젤 참사로 인해 다른 잉글랜드 클럽들과 마찬가지로 5년간 유럽 대항전에 참가할 수 없었다. 라이벌 팀 리버풀 팬들에 의해 일어난 헤이젤 참사는 에버튼의 상승세에 제동을 걸었고, 설상가상으로 에버튼은 리버풀과의 막판 경합을 이겨내지 못해 그 다음 시즌인 1985-86 시즌 리그 준우승에 머무르는 분루를 삼켰다. 이에 머지사이드 더비 라이벌 리버풀에 대한 적대감이 이 시기부터 굉장히 강해졌다.
유럽 대항전에 나가지 않는 리버풀은 리그에서 계속해서 지배력을 발휘했고, 리버풀과 계속해서 경쟁하며 198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이어갔지만, 에버튼은 1986-87 시즌 마지막 리그 우승을 차지한 이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해 중위권과 하위권을 전전하며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하락세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이어져 매년 강등권을 가까스로 빠져나오는 '대탈출'이 이어진 데다 머지사이드 더비에서도 매번 리버풀에 밀려 팀 사정은 암울함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1995년에 FA컵을 한 차례 더 들어올리는 성과를 냈다.
그러던 2001-02 시즌 막판에 프레스턴 노스 엔드 감독이었던 데이비드 모예스를 영입하게 되는데, 이 영입이 구단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부임 초기부터 모예스는 15위로 팀을 리그 잔류에 성공시킨 뒤, 2002-03 시즌엔 신동 웨인 루니의 활약으로 리그 7위까지 뛰어오르게 된다. 그러나 블랙번 로버스보다 승이 많은데도 결정적으로 순위에서 밀려 UEFA컵엔 출전하지 못했고, 이후 모예스 감독은 다소 부실한 재정에도 가격 대비 성능비가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하고 유소년 선수들을 대폭 기용하면서 팀의 전력을 차차 상승시켜 갔다.
그러나 2003-04 시즌에선 한 시즌 만에 강등을 걱정할 정도까지 경기력이 나빠지면서 17위로 순위가 급격히 추락했고, 이후 설상가상으로 2004-05 시즌을 앞두고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유로 2004에서 4골을 터뜨려 대회 득점 2위에 오른 신성 웨인 루니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팔면서 전문가들 사이에 강등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모예스는 마법을 부리듯 잉글랜드 정통 축구의 맥을 고수하며 리그에서 폭풍을 일으켜 4위를 달성, 꿈에 그리던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따낸다.
그러나 해당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이스탄불의 기적을 이룩하며 우승을 차지한 팀이 다름 아닌 라이벌 리버풀이었는데, 리버풀이 이 시즌 리그에서 에버튼에 밀려 5위를 차지해 버리면서 문제가 생겼다. 대회 디팬딩 챔피언이 다음 시즌 대회에 나오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기에 리버풀을 2005-06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 출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고, 그렇게 된다면 4위로 마지막 챔피언스 리그 티켓을 얻은 에버튼은 리그 당 배분된 티켓 수에 따라 챔피언스 리그 진출이 좌절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UEFA의 특별 조치로 리버풀을 에버튼과 별개로 특별히 챔피언스 리그 예선에 진출시키기로 합의가 되면서 1985년의 아픔을 에버튼은 씻을 수 있었다.[10][11]
이후 모예스는 2010년대 초반까지 계속해서 중상위권을 안정적으로 마크하며 팀을 잘 이끌어 나갔다. 이 당시 라이벌 리버풀의 암흑기가 시작되며 2011-12 시즌에는 리버풀에 리그 순위가 앞서기도 하는 등 괜찮은 성적을 구가했다. 그러나 2012-13 시즌이 끝난 후, 모예스는 알렉스 퍼거슨의 후임으로 지목되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였고, 로베르토 마르티네스가 부임하게 되었다. 마르티네스는 에버튼을 첫 시즌에 프리미어 리그 5위로 이끌며 좋은 출발을 했다. 당시 에버튼은 승점 72점으로 27년 만에 최고 승점 기록을 세웠다. 마르티네스는 그 다음 시즌인 2014-15 시즌에 UEFA 유로파리그에서 16강까지 진출했지만 디나모 키이우에게 패하며 대회를 마감했고, 프리미어 리그 11위에 머무르며 다소 아쉬운 결과를 냈다. 2015-16 시즌에는 리그컵과 FA컵에서 모두 준결승에 진출하는 성과를 냈지만 두 번 모두 패배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결정적인 결과물을 내지 못한 마르티네스는 시즌 결국 경질되었고, 에버튼은 12위로 추락했다.
이후 2016년 여름엔 로널드 쿠만이 부임했다. 첫 시즌에 쿠만은 유로파 리그 진출에 성공했지만, 2017-18 시즌에 부진하게 출발하더니 9경기 만에 강등권으로 추락했고, 쿠만은 아스날전 5-2로 패배 이후 경질되었다. 그 뒤엔 샘 앨러다이스가 급하게 투입되었지만 결국 시즌이 끝나고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보여주지 못하고 사임하고 말았다.
그 뒤 마르코 실바가 2018년 5월 감독직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규칙 위반으로 에버튼은 유소년 선수들과 2년 동안 계약하지 못하는 징계를 받았고, 실바는 그런 악재 속에서도 첫 시즌을 8위로 이끌었다. 하지만 다음 시즌 실바 체제는 부진한 스타트를 끊으며 다시 팀이 강등권으로 처지게 만들었고, 결국 2019년 12월 5일에 안필드에서 리버풀에게 5-2로 패한 후 실바도 경질되었다.
그리고 전 에버튼 선수였던 던컨 퍼거슨이 임시 감독을 잠깐 수행한 후, 명장 카를로 안첼로티가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첼로티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리그 10위의 성적만을 기록했고, 결국 2021년 6월에 클럽을 도망치듯이 떠나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합류했다.
이후엔 충격적이게도 전 리버풀 감독 라파엘 베니테스가 선임되었다. 베니테스는 에버튼과 리버풀의 초대 감독 윌리엄 바클레이 이후 리버풀과 에버튼을 모두 감독한 두 번째 인물이 되었지만, 부임 초기부터 라이벌 구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팬들에게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2022년 1월까지 13경기 동안 9패를 기록한 후 경질되었고, 이후엔 전 첼시 감독 프랭크 램파드가 선임되었다. 하지만 램파드 또한 이후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고 2023년 1월에 경질되었다.
결국 에버튼은 계속되는 사령탑 실패를 맛보다가 션 다이치를 선임했고, 다이치 또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2022-23 시즌 프리미어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본머스를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며 가까스로 강등을 면했다.
그리고 2023-24 시즌 도중인 11월 17일, 에버튼은 프리미어 리그의 수익 및 지속 가능성 규정(PSR)을 위반하여 즉시 효력이 발생하는 10점 승점 삭감 징계를 받아 엄청난 위기에 처했다. 이는 프리미어 리그 역사상 가장 큰 승점 삭감 조치로[12], 에버튼은 처벌이 과도하고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항소장을 제출했다. 이후 항소가 받아들여져 2024년 2월 26일 총 6점 승점 삭감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2024년 4월 8일 프리미어 리그 수익성 및 지속 가능성 규칙 위반 혐의로 인한 2차 청문회에서 추가로 2점이 더 삭감될 예정이라고 발표 되었다. 이에 총 8점이 삭감되었다. 에버튼은 다시 항소했으나 잔류를 자력으로 지었고, 승점 반환으로 순위 싸움에 유의미한 변동이 있을 가능성도 낮아서 항소를 취소했고, 결국 잔류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2024-25 시즌, 다시 에버튼은 매우 부진한 경기력을 보이며 강등 싸움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결국 2025년 1월 9일, 다이치가 경질되었다. 그리고 과거 좋은 평가를 받았던 데이비드 모예스가 다시 복귀하였다. 모예스 복귀 이후 귀신같이 경기력이 되살아나며 연승가도를 달리기 시작했고, 강등권을 벗어나는 중이다. 그 와중에 에버튼 스타디움의 신축으로 구디슨 파크에서 열리는 마지막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제임스 타코우스키가 98분 극장 동점골을 뽑아내 자존심까지 지켰다.
3. 구단의 전성기
1888년 창립된 '더 풋볼 리그(The Football League)'의 공식 창설 멤버인 에버튼은 1890-91시즌 클럽 역사상 최초의 우승으로 리그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다. 1906년에는 첫 FA컵 우승을 달성한 에버튼은 1914-15년 다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고, 한동안 축구 경기가 중단되면서 구단의 상승세도 한 풀 꺾이게 된다.한동안 잠잠하던 에버튼은 1925년 클럽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로 평가받는 딕시 딘을 영입하면서,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다. 1927-28 시즌 39경기에서 무려 60골을 넣은 딘은 에버튼의 세 번째 리그 우승의 일등 공신이 된다. 이 시즌에 작성한 딕시 딘의 득점 기록은 여전히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한 시즌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 있다. 메시도 이 기록은 깨지 못했다.
에버튼은 이후 예상치도 못한 구단 내분이 발생하며 뜬금없이 2부 리그로 강등되었으나 그 다음 시즌 부진을 만회하는 엄청난 호성적을 거두고 바로 1부 리그로 재승격한다. 1부 리그로 돌아온 직후인 1931-32 시즌 기세를 탄 에버튼은 리그 4번째 우승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 다음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두 번째 FA컵 우승을 차지하고, 1936년에 토마스 H. 매킨토시가 사망한 뒤 시오 켈리 비서가 비공식적으로 팀을 지휘한 1938-39 시즌에는 팀 역사상 다섯 번째 리그 우승까지 차지한다. 그리고 20년 넘게 부진이 이어진다.
에버튼의 두 번째 전성기는 해리 캐터릭 감독이 부임한 1961년에 찾아왔다. 캐터릭 감독의 에버튼에서의 두 번째 시즌인 1962-63 시즌 에버튼은 25년여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고, 1966년에는 FA컵을 우승한다. 1968년 다시 FA컵 우승에 도전했지만, 아쉽게 준우승에 그친 에버튼은 2년 후 리즈 유나이티드에 승점 9점을 앞서며 리그 우승을 거뒀다. 한편 이 기간, 에버튼은 잉글랜드 축구 팀 역사상 최초로 5년 연속 유럽 대항전에 출전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1961-62 시즌~1966-67 시즌).
1980년대 에버튼 구단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는 1980/81 시즌 도중에 새로 부임하는 하워드 켄달 감독과 함께 찾아왔다. 에버튼은 1984년 FA컵에서 우승하고, 1984-85 시즌, 1986-87 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85년 에버튼은 UEFA 컵 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하는데 이는 구단 역사상 유일한 유럽 대항전 우승 기록이다.
4. 역대 시즌 요약
1878년 세인트 도밍고스 풋볼 클럽(St. Domingo's Football Club) 이라는 이름으로 창단되었고 1879년에 에버튼 FC로 이름을 바꾸었다. 본래는 홈 구장으로 안필드를 사용했으나 구단 회장이었던 존 하울딩이 안필드를 매입하면서 임대료를 올리는 등 지속적으로 구단 이사회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갈등 끝에 구디슨 파크로 구장을 옮겼다. 에버튼이 구장을 옮긴 이후 안필드에서 새롭게 창단된 구단이 바로 리버풀 FC이다. 덕분에 리버풀과는 전통적으로 라이벌 관계이며 두 팀의 경기는 머지사이드 더비라고 불린다.가난한 노동자들의 스포츠 정도로 귀족들이나 기득권들에게 무시당하던 프로 축구를 제대로 인식하게 한 구단이기도 하다. 1916년 구디슨 파크에 영국 왕세자 일행이 처음으로 보러 와서 인식을 다르게 만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리그와 FA컵을 각각 1개씩 따기도 했다.
팀 역사상 첫 전환기는 1925년에 트란미어 로버스에서 딕시 딘을 사면서부터였다. 1927/28 시즌 중반까지 최고 기록은 59골이었고 그가 57골을 기록했을 때는 단 한 경기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기록을 깨려면 해트트릭을 기록해야 했는데 하필이면 상대가 아스날이라 모든 사람들이 최다 골 기록을 깨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그는 해트트릭을 기록해 리그 최고 기록인 60골을 기록했으며, 그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29/30 시즌 때 22팀 중 꼴찌로 강등됐지만 그는 팀에 꿋꿋이 남아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1시즌만에 선두로 1부 리그에 재승격시켰고, 1931/32 시즌에 리그 우승까지 차지하는 경이로운 활약을 보였다.
1937년에 딘이 팀을 떠난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재정난, 주축 선수들의 이탈로 부침을 겪다가 1961년에 팀의 센터포워드 출신인 해리 캐터릭이 감독으로 취임하여 전원 수비, 전원 공격을 앞세운 '토탈 풋볼'을 적용시켜 로이 버논과 알렉스 영, 조 로일 등의 활약으로 1962/63 및 1969/70 시즌에 각각 리그 우승을 했고, 1965/66 시즌에는 FA컵에서 우승을 했다.
1970년대 내내 꾸준히 리그 중상위권을 유지해왔으나, 라이벌 리버풀 FC의 패권 장악으로 만족할만한 성적을 못 냈다. 1979년부터 부임한 필립 카터 회장은 1980/81 시즌 도중에 '캐터릭의 아이들' 시절 멤버이던 하워드 켄달이 감독으로 취임하여 1985년에 리그 우승과 UEFA 컵 위너스컵에 우승시킴으로써 또 전성기를 누릴 찰나, 헤이젤 참사로 인해 잉글랜드 리그가 유럽대회에 출전금지를 당해 에버튼의 3번째 유로피언 컵 출전은 그렇게 물건너가고 말았다. 1986/87 시즌 우승 뒤 잦은 감독 교체와 재정난, 트레이드 실패 등이 겹치면서 이렇다 할 활약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1995년에 FA컵 우승과 커뮤니티 실드 우승을 이루어냈으나 그때뿐이었고, 하락세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이어져 매년 강등권을 가까스로 빠져나오는 '대탈출'이 이어진 데다 머지사이드 더비에서도 매번 리버풀에 밀려 팀 사정이 암울했다. 1993/94 시즌과 1997/98 시즌에는 최종전 직전까지 강등권에 위치해있다가 최종전에서야 간신히 강등을 모면하기도 했다.
특히 1994년에 카터 회장으로부터 팀을 산 피터 존슨 회장이 1998년 11월에 에버튼 타투를 새길 정도로 팀을 사랑하던 팀의 간판 공격수 던컨 퍼거슨을 감독 몰래 뉴캐슬로 이적시키면서 팬들이 존슨 회장을 쫓아냈고, 공연 프로듀서 빌 켄라이트가 팀을 산 후 전임 회장 필립 카터를 회장직에 다시 불렀다. 같은 시기에 스코틀랜드 레인저스의 명장이던 월터 스미스 감독이 팀을 지휘했음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2001/02 시즌 막판에 프레스턴 노스 엔드 감독이었던 데이비드 모예스를 영입하였는데, 이 영입이 구단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부임 초기부터 15위로 리그 잔류에 성공시킨 뒤 2002/03 시즌에 신동 웨인 루니의 활약으로 7위를 찍었으나, 블랙번 로버스보다 승수가 많은데도 UEFA컵에 출전하지 못했다. 모예스 감독은 적은 돈으로 가격 대비 성능비가 뛰어난 선수들을 영입하고 유소년 선수들을 대폭 기용하면서 팀의 전력을 차차 상승시켰다.
그러나 2003/04 시즌에선 한 시즌만에 강등을 걱정할 정도까지 가면서 17위로 순위가 급격히 추락했고, 설상가상으로 2004/05 시즌을 앞두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유로 2004에서 4골을 터뜨려 득점 2위에 오른 신성 웨인 루니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팔면서 전문가들 사이에 강등 유력 후보로 거론됐으나, 잉글랜드 정통 축구의 맥을 고수하며 리그에서 폭풍을 일으켜 4위를 찍어 챔피언스 리그까지 갔다. 다만 2005/06 시즌 챔스에선 본선 32강도 못가고 3차 예선에서 비야레알에게 2패로 허무하게 탈락했다.[13] 게다가 UEFA컵 1라운드에서도 디나모 부쿠레슈티에 원정에서 5:1 대패를 당하면서 여기서도 광탈당했다. 리그에선 초반 엄청난 부진에 빠지며 8경기 1골 1승7패로 꼴찌까지 떨어졌으나 첼시와의 홈경기에서 첼시의 개막 10연승을 저지한 뒤 다행히 반등에 성공하여 11위로 마감했다. 이후 2007-08 시즌 칼링 컵 4강, 2008-09 시즌 FA 컵 준우승 등 가시적인 성과가 계속 나오고 있으며 리그에서는 꾸준하게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2013-14 시즌부터 로베르토 마르티네즈 감독이 부임하여 새로운 첫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최다 리그 승점과 함께 5위를 기록하여 미래가 밝아보였으나, 2014-15 시즌에는 11위로 순위가 곤두박질쳤다. 그 다음 시즌인 2015-16 시즌에도 상위 10위권 진입에 실패하면서 시즌 최종전을 앞두고 경질되었으며 로날드 쿠만 감독이 2016-17 시즌부터 지휘봉을 넘겼다. 부임 첫 시즌에 루카쿠의 맹활약을 비롯해 좋은 경기를 몇 차례 선보이며[14] 팀을 7위로 올려놓으며 유럽대항전 진출 티켓까지 확보해 2시즌간 망가졌던 에버튼의 명성을 되찾는 듯했으나...
2017-18 시즌 엄청난 돈을 써가며 선수를 가열차게 영입했음에도 어이없는 경기력으로 리그와 유로파를 가리지 않고 털려대며 초반에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 로날드 쿠만 감독은 여러 변명을 둘러댔지만 팀의 경기력은 몇 주째 형편없는 날들의 연속이었고 결국 파하드 모시리 구단주와 빌 켄라이트가 직접 구디슨 파크를 찾은 9R 홈경기 아스날전에서 2-5로 다시 한번 패배했다.[15] 아스날전을 치른 뒤 24시간 만인 2017년 10월 23일부로 로날드 쿠만은 전격 경질되었다.
일단 대체 감독으로 U-23 팀의 감독인 데이비드 언스워스가 몇 경기 대행을 맡은 뒤 2017년 11월 30일 프리미어리그 대표 공무원 중 하나인 샘 앨러다이스가 새로운 사령탑 자리에 올랐다. 1년 반 계약기간으로 단기소방수 롤로 온 것으로 보이는데 그 당시 중하위권을 맴돌던 에버튼의 순위를 어느 정도는 끌어올리면서 그의 역할을 수행하기는 한 것 같았지만 핵심 윙어 아론 레넌을 당시 7위 경쟁팀인 번리 FC에 팔아넘기는 기행을 저지르는 것은 물론이고 팀 훈련에도 일주일에 3~4번 이상은 지각 또는 결근하기 일쑤였다. 사실 순위는 8위로 마감했지만 실질적으로 전적은 쿠만 경질 시즌 때와 별 차이는 없었고 최종전적도 13승 10무 15패로 패가 더 많았다. 정확하게는 에버튼보다 아랫순위의 팀들이 꽤 부진하면서 어부지리로 8위로 올라간 셈. 게다가
2년만의 리빌딩에 돌입한 에버튼은 빠른 시일내에 마르코 실바라는 젊고 유망한 감독을 새로운 사령탑에 앉혔다. 이 때문에 마르코 실바의 전 소속팀이었던 왓포드와 갈등을 빚고 있고 2018-19 시즌 초반 현재도 갈등이 진행중. 잡음이 있긴 했지만 어찌됐든 모시리 대주주는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그를 데려온 듯하며, 그도 모시리의 철학에 동의했다. 더불어 네덜란드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풋볼 디렉터인 마르셀 브랜즈를 새로운 단장으로 영입했다.
그 다음 시즌인 2019-20 시즌, 마르코 실바는 졸전을 거듭한 끝에 강등권까지 추락했고, 리버풀과의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5:2라는 스코어로 패배한 끝에 경질되었다. 감독대행은 과거 팀의 간판 스트라이커였고 은퇴 후 코치로 계속 에버튼에 남아 있었던 던컨 퍼거슨.
이후 에버튼은 21일(한국시간),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 부임을 발표했다. 계약기간은 2023-24 시즌까지. 하지만 계약기간 중이었던 2020-21시즌 종료 후 안첼로티는 레알 마드리드 CF의 부름을 받았다는 이유로 에버튼과의 계약을 해지해버리고 레알에 가 버렸고, 갑작스러운 변수를 맞은 보드진은 지역 라이벌팀의 레전드 감독으로 추앙받던 라파엘 베니테즈를 그 대체자로 세우는 충격적인 결정을 했다.
[1] 이에 에버튼 이사회는 하울딩에게 불만을 표하며 임대료 고정을 요구했으니 하울딩은 초기 자본이 부족했던 구단 대신 자신이 직접 안필드 부지를 매입하였고 구단이 수익을 만들기 이전까지 무상으로 경기장을 임대해줬던 것을 지적하며, 응당한 금액을 받아야겠다며 요구를 거부했다.[2] 당시 경기장엔 제대로된 라커룸이 없었기에 사실상 라커룸 혹은 드레싱룸의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었다.[3] 하울딩은 보수당 소속의 자본가였던 반면, 에버튼 이사회에는 자유당 정치인들이 많았으며, 성공회 교인들도 다수 있어 양조업자였던 하울딩과는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4] 당시에는 구단이 주식회사 형식으로 운영되는 것이 드물었기에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축구단은 보통 회원들이 연회비를 지불하는 '스포츠 클럽'의 형식으로 대부부 운영되었다. 이 제안은 초대 감독이자 하울딩의 절친한 친구였던 윌리엄 바클레이를 비롯한 회장 측근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후 바클레이는 리버풀 FC의 초대 감독이 된다.[5] 이사회 내에서 하울딩과 계속해서 부딪혀왔던 인물이다. 리버풀 지역 지방 선거에서 정치적으로도 충돌한 적이 있었다.[6] 하울딩이 제안한 안건은 12,000주의 주식을 발행하여 이사회 멤버들이 1주씩을 나눠 가지고 나머지 주식은 일반 대중 및 이사회 멤버들에게 판매하자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자본가인 하울딩과 측근들이 지분을 모으기 유리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마흔은 총 500주의 주식만 발행하고 어떤 개인도 10주 이상 소유할 수 없도록 제한을 두며,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주식을 보유해야 한다는 원칙을 주장했다. 당시 에버튼은 수많은 주주들의 결의에 의해 의사 결정을 해왔는데, 회장이던 하울딩은 그런 다수 의결 방식이 발전을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안필드의 소유권을 가진 후 갈등을 벌여온 것도 권력을 잡아 운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였다. 사실상 내부 운영 방식의 관점을 보인 두 집단의 정치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7] 구디슨 파크의 이전 이름[8] 당시 마흔이 경기장 이전 안건을 올리자 한 이사회 멤버가 "구장을 못찾을 것이다"라며 비아냥거렸고, 마혼은 주머니에서 미어 그린의 임대 계약서를 꺼내 보이며 "내 주머니에 경기장이 있다!"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9] 당시 이 사건은 리버풀 지역 내에서도 정치적으로 큰 사건이었다. 자유당 성향의 리버풀 데일리 포스트(Liverpool Daily Post)는 하울딩을 축출한 사건을 두고 "암적인 존재를 제거한 것"이라며 에버튼의 결정을 긍정적으로 보도했고, 보수당 성향의 리버풀 이브닝 익스프레스(Liverpool Evening Express) 등은 익명의 기고문을 통해 마혼을 공격하는 기사를 다수 내보내는 등, 하울딩을 지지하며 에버튼 이사회를 강하게 비판했다.[10] 그러나 이와 별개로 리버풀과는 지독한 악연을 반복할 뻔 했다.[11] 이후 아예 UEFA는 챔피언스 리그에 직전 대회 우승팀을 직행 시키는 개정안을 만들게 되었다.[12] 2010년 포츠머스가 9점 승점 삭감을 받은 바 있다.[13] EPL 빅4 체제 하에서 2009-10 시즌 토트넘 핫스퍼가 리그 4위로 진출하여 챔피언스 리그 8강까지 간 것에 견주는 경우도 있다.[14] 홈에선 맨체스터 시티를 4-0으로 대파하는 명경기를 선보인 바 있다.[15] 마지막 골을 먹힌 뒤 모시리와 켄라이트의 참담한 표정이 잡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