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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빈 헤이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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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 로키츠 No. 44 | |
엘빈 어니스트 헤이즈 Elvin Ernest Hayes | |
출생 | 1945년 11월 17일 ([age(1945-11-17)]세) |
루이지애나 주 레이빌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휴스턴 대학교 |
신체 | 206cm (6' 9") / 107kg |
포지션 | 파워 포워드 / 센터 |
등번호 | 11번 - 워싱턴 위저즈 44번 - 휴스턴 로키츠 |
드래프트 | 1968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 샌디에이고 로키츠 지명 |
소속 팀 | 샌디에이고-휴스턴 로키츠 (1968~1972) 볼티모어-워싱턴 불리츠 (1972~1981) 휴스턴 로키츠 (1981~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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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웨스 언셀드와 더불어 워싱턴 불리츠(현 위자즈)의 최전성기를 책임진 파워포워드. 1978년 프랜차이즈의 유일한 우승기록의 멤버이기도하다. 볼티모어와 워싱턴 뿐 아니라 휴스턴이라는 도시와의 인연도 깊은 선수로 불리츠와 로키츠 양 구단의 영구 결번을 받았다.현재까지 NBA 통산 득점 11위 워싱턴 위저즈 팀 내 득점 1위를 지키고 있다.
2. 커리어
소심한 성격이었던 헤이즈는 8살 처음 농구를 시작, 고교 결승전에서 45포인트 2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끈다. 1966년 휴스턴 대학교 농구부에 흑인으로서 최초로 들어가게된 헤이즈는 1966년과 1967년 팀을 결승전으로 올려놓고 1968년 UCLA를 꺾고 우승을 차지. 올해의 대학 스포츠 선수로 지명되는 영광을 누린다. 헤이즈의 재적 당시의 휴스턴 대학교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고 헤이즈의 44번은 이후 영구결번이 된다.드래프트를 신청한 헤이즈는 ABA의 휴스턴 매버릭스와 NBA의 샌디에이고 로켓츠의 지명을 받고 샌디에이고를 선택. NBA에서 데뷔한다. 1968-69 루키시즌에는 경기당 28.4득점, 17.1리바운드를 기록 올 루키팀에 이름을 올렸으며 이 기록은 역대 5번째로 높은 신인의 기록이다. 이 시즌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서 54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1971년 로켓츠가 휴스턴으로 연고이전을 하면서 헤이즈는 의도치않게도 대학시절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헤이즈는 샌디에이고/휴스턴 로켓츠에서의 4년 동안 무려 27.4득점 16.3리바운드의 괴랄한 활약을 펼쳤다. 가히 고대괴수 중 한명으로 언급되기에 손색이 없는 기량을 영건일 때 부터 보여준 것. 더 놀라운 것은 저러고도 그 4년 동안 All-NBA 팀 무관에 그쳤다! 헤이즈는 파워포워드로 많이 알려졌지만 로켓츠 시절에는 센터로 활약했는데, 이는 68-69 시즌부터 71-72 시즌까지 올느바 센터 자리를 언셀드(MVP)-리드/리드(MVP)-자바/자바(MVP)-리드/자바(MVP)-체임벌린이 채울 정도로 5번 자리에서 우주 대전쟁이 벌어졌기 때문. 당시 퍼스트팀 센터 = NBA MVP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1], 나머지는 한자리를 두고 경쟁하니 괴물같은 기록으로도 수상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1972년 헤이즈는 로켓츠에서 볼티모어 불릿츠로 트레이드 되었고 웨스 언셀드와 콤비를 이루어 팀의 전성기를 이끈다. 1974년에는 평균 18.1 리바운드를 잡아내며 골밑에서 언셀드와 단단히 팀을 수비해냈다. 헤이즈와 언셀드 콤비는 70년대 센터 전성기에도 강력했고 NBA 파이널을 3번 진출(1975, 1978, 1979)하여 1번의 우승을 해낸다.
비록 1978 파이널 MVP는 언셀드에게 돌아갔으나 당시 팀내 최고의 선수는 헤이즈였다는 시각이 많은데, 그는 언셀드의 두배 가량 되는 득점을 해내면서 리바운드와 수비는 비슷하게 해내는 선수였기 때문. 77-78 플레이오프에서 이 둘의 기록은 21.8득점 13.3리바 vs 9.4득점 12.0리바로 헤이즈가 언셀드를 말 그대로 압도하였고, 이는 22.5득점 12.5리바 vs 9.0득점 11.7리바를 기록한 파이널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1981년 언셀드가 은퇴하고 워싱턴의 전성기도 저물어가자 헤이즈는 고향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하기를 원한다고 팀에 요청, 다시 휴스턴 로켓츠로 돌아간다. 하지만 헤이즈의 몸은 이미 커리어 막바지라 팀에 많은 도움을 주지는 못했고 휴스턴은 탱킹 체제에 들어가게된다. 헤이즈는 1984년 로켓츠에서 은퇴하였으며 이 탱킹으로 1픽을 차지한 휴스턴은 하킴 올라주원이라는 걸출한 신인을 뽑으면서 이후 2번의 우승을 경험하게 된다.[2]
3. 은퇴 이후
은퇴한 헤이즈는 휴스턴 대학교로 다시 복학하여 마지막 남은 30학점을 따고 졸업한다. 그 후 텍사스에서 자동차 대리점을 운영하며 라디오 방송 분석가로 활약했다.
1990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이후, 휴스턴 대학교의 코치 가이 루이스가 입성할 때까지 명예의 전당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고 2013년 가이 루이스가 입성하자 비로소 그를 축하하러 다시 헌액식에 참가했다.
샌디에이고에서 뛴 기간은 짧지만 샌디에이고시에서 활약한 농구 선수들을 기념하는 전당에도 등록되어있다.
4.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NBA 파이널 우승 (1978) NBA 올스타전 12회 (1969-1980) NBA 퍼스트팀 3회 (1975, 1977, 1979) NBA 세컨드팀 3회 (1973, 1974, 1976) NBA 올디펜스 세컨드팀 2회 (1974, 1975) NBA 올 루키 퍼스트팀 (1969) NBA 득점왕 (1969) NBA 리바운드왕 (1970, 1974) 워싱턴 위자즈 영구결번 NBA 위대한 50인 휴스턴 대학교 영구결번 |
5. 이모저모
- 지금 뛰어도 모자람이 없을 신장과 탄탄한 웨이트, 괴물같은 신체능력과 체력으로 대표되는 당대 최고수준의 하드웨어를 가진 선수였다. 다만 자신의 공격력을 과신하여 블랙홀 기질이 상당히 있었고, 때문에 뛰어난 득점원인 한편 이기적이라는 평가도 따라다녔다.
- 그는 정확히 50,000분을 뛰고 평균 21득점, 12.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매시즌 최소 80경기를 뛸 정도로 강철몸이었으며 리바운드에서 윌트 체임벌린, 빌 러셀, 카림 압둘자바에 뒤이어 4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 워싱턴 위저즈 역사에서 웨스 언셀드와 함께 가장 뛰어난 선수로 기억되지만, 샌디에이고(3y)-휴스턴(4y) 로케츠 프랜차이즈에서도 도합 7시즌을 보냈고 휴스턴 대학을 나온 로컬 보이라는 점에서 휴스턴과의 인연도 나름 깊은 선수이다.
- 기록이 다는 아니라지만 우승 시즌에 플옵~파이널에 걸쳐 언셀드를 압도하는 득점력과 언셀드 못지 않은 보드장악력으로 팀을 캐리했고[3], 실제로 파이널 MVP 표 5장 중 두장은 헤이즈의 것이었기에 지금까지도 언셀드가 헤이즈를 제치고 수상을 차지한 것에 대해 이견이 적지 않다. 당시 파이널 6경기 도합 133득점을 기록했으나 그 중 4쿼터 득점은 19득점에 그칠 만큼 중요한 순간에 활약하지 못했던 측면이 있고, 그 외에도 이타적이고 희생적이며 팀의 간판이자 성골이었던 언셀드와 달리 플레이가 자기중심적이고 코트 내외에서 멘탈 이슈를 달고다니던 헤이즈가 표심에서 불리한 측면도 있었을 것.
- 한편으로는, 헤이즈가 기량면에서 분명 더 뛰어난 선수였음에도 대외적으로나 팀 내에서나 언셀드가 더 위대한 선수로 존중받고 그것이 수상으로까지 이어진 것은 이 둘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언셀드가 팀의 정신적 지주이자 희생, 헌신, 열정으로 대표되는 선수라면, 헤이즈는 상기했듯이 자신의 공격을 중요시하여 팀원들을 살려주는 플레이를 도외시했고 커리어 내내 한명의 팀원으로써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4] 어떤 의미로는 윌트 체임벌린과 빌 러셀의 같은 팀 ver.이었던 셈.
[1] 사실 50~70년대는 전체가 그러하다. 예외는 파워포워드 밥 페팃, 가드인 밥 쿠지와 오스카 로버트슨 정도. 그 외에는 센터인 빌 러셀이 MVP를 수상하고도 올느바에선 체임벌린에게 밀려 센터로 떨어진 경우가 존재한다.[2] 1픽 하킴 올라주원, 3픽 마이클 조던 등 1984년 NBA 드래프트는 지금도 최고의 드래프트로 손꼽힌다.[3] 14-15 파이널에서 안드레 이궈달라가 르브론을 상대로 보여준 호수비로 스테판 커리를 제치며 파엠을 수상하기도 했으나, 헤이즈는 디펜팀을 두번이나 수상했을 정도로 수비가 좋은 선수였다.[4] 예시로 그는 휴스턴에서의 말년에 팀 내 최고의 유망주였던 랄프 샘슨의 멘토가 되었는데, 정작 감독은 샘슨에게 헤이즈 말을 듣지 말라고 언질을 주었다고 한다. 커리어 후반기에 스스로 원해서 자신의 고향팀으로 복귀하였음에도 팀에 자신을 맞추지 못했던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