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12:01:24

여름의 끝에 피는 꽃/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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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프롤로그3. 1장4. 2장5. 3장6. 4장7. 5장8. 6장9. 7장

1. 개요

Midnightworks의 비주얼 노벨 게임인 여름의 끝에 피는 꽃의 스토리를 정리한 문서.

2.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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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기억은 조각나 파편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 조각난 파편들 속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조각들이 있다.
흔히 추억이라 불리는, 그런 조각들 말이다.
손을 뻗어 붙잡은 추억 두 조각이, 한여름 밤의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몇 광년은 족히 떨어져 있을 두 별처럼 아득하면서도, 한쪽에서 손을 뻗으면 금세 닿을 것만 같은 그 추억의 조각들이.
내 안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름의 끝에 피는 꽃

3. 1장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시작되려는지, 그날의 하굣길은 유난스럽게도 더웠다.

무더운 여름, 주인공은 반 친구 유미와 크레페를 먹으면서 길을 걷는다. 크레페라면 안질리고 매일매일 먹을 수 있다는 푸념을 하는 유미에게 주인공은 디저트 가게에 같이 온 것도 오랜만이라며 무슨 이유라도 있는지 묻자 유미는 머쓱한 웃음을 짓고는 갑작스레 요새 자기가 살 좀 찌지 않았냐는 질문을 한다. 주인공은 예전처럼 생각없이 긍정했다가는 며칠 동안 시달릴까봐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하면서 질문을 철회해달라는 무언의 요구를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고민에 빠진 주인공은 무심코 살 찐 쪽이 예뻐 보인다는 궤변으로 답해버렸고, 유미는 당황하더니 지금 취향 물어본게 아니라고 하고는 이내 늘어난 몸무게에 대해 투정을 부리다가 화제를 돌렸다.

곧 있을 여름방학인데 뭐 할 거냐고 묻고, 주인공은 작년 여름방학에는 정말 여러므로 바빴었는데 이번 방학에는 모르겠다고 독백한 뒤 유미에게 뭐 생각해둔 게 있냐고 되묻고, 유미는 후배들의 멘토링과 봉사활동 쪽으로 계획을 잡고 있고, 방학 끝나고 있을 학예제 준비도 해야 한다고 하자, 주인공은 유미다운 미래지향적인 계획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은 뭘 해야할지 고민하던 와중에, 유미가 생각해둔 게 없으면 같이 봉사활동 하러 가는 게 어떻냐고 제안한다. 주인공은 생각 좀 해보겠다고 애매하게 대답하고, 유미는 너도 슬슬 대학 진학 걱정해야 할 시기인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고 지적하는데, 주인공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 이제 발걸음을 떼어야 하는 시기인건지 고뇌한다.

그러던 중 유미는 주말에 성적표 받지 않았냐며 결과를 묻고, 50등 정도라고 대답하자 작년 2학기때는 아슬아슬하게 두 자릿수대였는데 많이 올랐다고 기뻐하며 다음 학기에도 성적이 올라서 30등까지 오르면 겨울방학에 같이 여행을 가는 게 어떻냐고 제안한다. 주인공은 단 둘이 가는거냐며 당황하지만 일단 다음학기에 성적 나오면 다시 이야기하자고 넘어가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그새 유미의 손에 쥐어져 있던 크레페는 어렴풋이 남은 향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고, 유미는 동아리 활동은 잘 되가냐고 물으면서 자기가 유령부원 꽂아주느라 고생했으니 방학때 동아리 보고서 완전 잘 내야 한다고 엄포를 놓는다. 주인공의 동아리는 다름아닌 오컬트부. 현대 과학 기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현상을 연구하는 동아리라고 알려져 있는데, 유미는 요즘 시대에 오컬트가 웬 말이냐며 불평하지만, 주인공은 유령부원 뿐인 오컬트부니까 충분히 오컬트스럽다는 농담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주인공의 오컬트부는 부원이 일곱 명 뿐인데, 그마저도 두 명을 제외하면 모두 유령부원인 허울뿐인 동아리지만, 학생회 부장인 유미가 신경써 준 덕분에 명목이라도 유지할 수 있던 것이었다.

어느새 크레페를 다 먹은 주인공은 버릇처럼 손에 묻은 슈가 파우더를 바람에 날려보내며 이곳은 관목 한 그루도, 여름이면 지겹도록 들을 수 있던 매미들의 울음소리도 존재하지 않고, 그 빈자리는 태양광 패널과 안내로봇이나 순찰로봇들이 대신하고 있었고, 크레페의 딸기와 초콜릿도 실험실 배양 접시에서 만들어졌을 것이고, 어디를 둘러보든, 내리쬐는 태양 외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고 독백하며 이 세계를 인조미에 물든 세상이라고 표현한다.

유미는 그런 주인공의 옆에서 너무 덥다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어하고, 주인공이 다이어트 한다 하지 않았나고 지적하지만 유미가 이정도로 땀 흘렸으면 살도 빠졌을거라는 궤변을 내놓자, 주인공은 과학도 잘하는 애가 이럴 때만 왜 이렇게 이성적이지 못하나 어이없어하며 함께 횡단보도를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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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주인공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스쳐지나가는 소녀를 바라본다.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주인공을 바라보던 소녀는 돌연히 반대 방향으로 급히 뛰어가고, 그 순간 유미가 손목을 붙잡고 주인공을 건너편으로 끌고 나온다. 아슬아슬하게 신호가 바뀌고, 유미의 잔소리가 이어지자, 주인공은 멋쩍게 웃으며 이 상황을 넘기려 하는데, 유미는 지나가는 길에 이상형이라도 봤냐며 뭐에 홀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고 째려보며 또 호버크라프트에 치이면 어쩌려고 그렇냐며 조심하라고 경고하자 주인공은 조심하겠다고 사과하고, 유미가 그 일도 벌써 1년 넘게 지났다는 말에 주인공은 유미와 처음 만난 날을 회상하게 된다.
파일:여름꽃2.jpg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1년 전 여름, 주인공은 횡단보도 위에 쓰러져 있다가, 한 여학생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어떻게 된 건가 싶은 와중에 여학생은 주인공이 지나가던 호버크라프트와 부딪혔다고 설명해주고, 주인공은 가볍게 감사인사만 하고 빠져나오려고 했는데, 이질감이 느껴지는 주변 풍경을 보고는 발걸음을 멈춰 세울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풍경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에서도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쩌다 자신이 여기 있는지 기억을 더듬어봐도 기억나는 건 없었고, 여학생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돌아온 말은 백석시 A구역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혼란에 빠진 주인공은 자신을 붙잡으려는 여학생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황급히 자리를 벗어난다.

백석시 A구역. 주인공 자신이 있던 곳은 백석시가 아니었음은 물론, A구역이라는 도로명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난데없는 복잡한 상황에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려는 순간 주인공은 이상한 점을 하나 더 발견하고야 말았다. 가느다랗게 변한 손목과 자신의 손이 아닌 듯한 양손, 몸의 골격마저도 눈에 띄게 변해있는 주인공의 몸은 원래 자신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섞인 통증은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 짧은 순간, 마음속으로 '말도 안돼'라는 말을 수 백번쯤 되뇌었던 그때, 머릿속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대로 주인공은 뇌 정지 상태, 즉 생각하는 것을 멈추어 버렸다. 그때, 아까 봤던 여학생이 자신을 쫒아와 백석 고등학교는 그쪽이 아니라고 말해주는데, 주인공은 아직 중학교 3학년일 터라 의문을 느낀다. 재차 여학생이 주인공에게 백석 고등학교 신입생이 아니냐고 묻자, 주인공은 그제서야 뇌가 주인이 바뀌었다는 걸 눈치챈 듯 뇌 정지 상태에서 깨어났고, 자신과 그녀의 교복이 같다는 사실을 눈치챈 주인공은 맞다고 대답한다.
"잘 됐다! 나도 백석 고등학교 신입생이거든. 내 이름은 유미라고 해."

유미는 주인공의 이름을 묻고, 이에 주인공은 "내 이름은 세...."라고 말하려다 명찰에 적힌 이름을 말해준다.[1] 이름을 들은 유미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잘 부탁한다며 악수를 건네고, 무언가에 홀린 듯 주인공도 유미의 손을 잡으며 잘 부탁한다고 말하지만, 진심이 담긴 말은 아니었다. 유미의 손은 비단결처럼 부드러웠지만, 지금의 주인공에게는 밤송이를 만지는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영화나 만화에서나 보던 몸이 바뀐다는 현실을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한 주인공이었지만, 그런 주인공의 불편한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미는 주인공을 백석고등학교로 안내하기 시작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공은 그저 유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입학식이 두근거리지 않냐는 유미의 말에 주인공은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유미를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고, 유미는 입학식이라고 너무 긴장한 거 아니냐고 어깨를 쿡쿡 찔러댄다. 입학식 정도의 긴장감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주인공에게는 그정도의 자극으로 긴장이 풀릴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유미의 말로 인해 주인공은 놓치고 있던 부분을 뒤늦게야 파악할 수 있었다. 분명 주인공은 여름 방학이 끝나고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터인데, 아직 겨울이 가시지 않은 쌀쌀한 바람과 유미의 입학식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자신의 몸만 바뀐 게 아닌, 시간 또한 바뀌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학생이었을 주인공은 졸지에 시간 여행자이자 유체이탈 경험자가 되어 있었다. 일단 주인공은 정말 긴장한 것 같다고 둘러대며 최대한 당황스러운 티를 억누르고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미가 그러니까 자신도 긴장된다며 반 배정이라도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주인공은 다소 무심하게 행운을 빈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유미가 진심이 느껴지는 감정을 가득 담아 행운을 빈다는 말을 전해주자, 주인공은 확실히 불공정한 감정 교환이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이라도 든 듯 심장이 무거워진 듯한 기분을 느낀다.

심장이 무거운 느낌은 그저 기분 탓이 아닌 모양이었는지, 학교로 향하던 도중 주인공은 교복 안주머니에서 휴대용 태블릿을 발견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디자인의 특이한 태블릿이었고, 태블릿을 켜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자꾸 불안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태블릿에 적힌 날짜는 3월 3일. 대규모 몰래카메라라도 아닌 이상 주인공은 시간여행을 했다는 건 확실한데, 중요한 건 자신이 어느 시간대로 시간여행을 했느냐였다. 잠금 화면에는 올해가 몇 년도인지는 표시되지 않았는데, 잠금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잠금화면이 저절로 해제되었다. 얼마 안가 홍채 인식으로 잠금이 풀린 걸 깨달은 주인공은 다시 한번 자신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일단 태블릿에는 몸의 주인에 대한 정보 같은 것들도 제법 들어있을테니 이 상황을 풀어나갈 정보를 태블릿에서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주인공은 태블릿의 날짜 탭을 누르는데, 그 순간 유미가 백석 고등학교에 도착했다며 말을 걸어온다. 유미를 따라 입학식이 열리는 강당으로 향하며 주인공은 방금 봤던 숫자를 다시 곱씹어 보았다. 2019, 2020, 하다못해 2032정도의 숫자면 유체이탈도 했는데 시간여행이라고 못할 건 없으니 납득했을 것이고, 차라리 3000이나 4000정도의 숫자면 대규모 몰래카메라 정도로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다시 한번 태블릿을 켜 확인한 년도는 136이라는 영문 모를 숫자였다.

입학식이 끝나고 주인공이 배정받은 반은 A반.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학생들은 저마다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주인공은 그럴 겨를도 없이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앉아서 태블릿을 뒤지며 이 상황을 풀어나갈 실마리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유미가 나타나 당연하다는 듯 주인공의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유미는 주인공이 반 배정 잘 되게 해달라고 한 게 효과가 있었다고 말하며 뭘 그렇게 보고 있냐고 묻는데, 주인공은 먼 곳에서 학교를 배정받아서 조사해보고 있었다고 둘러댄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몸의 원래 주인은 집에서 꽤나 먼 곳으로 학교를 배정받은 모양이라 학교에 아는 사람도 없어 보였고, 무엇보다 부모님과 떨어져 자취생활을 하게 된 듯했다. 그리고 주인공은 이 정보를 토대로 그를 흉내내는 수밖에 없었다.

본의 아니게 주인공의 행동에 당위성이 부여된 덕분에 유미는 의심을 지우고 그래서 그렇게 헤매고 있었겠다며 이해해줬고, 사실 유미 역시 먼 곳에서 학교를 배정받아서 아는 사람이 없다며 친하게 지내자고 미소를 짓는다. 마치 대답은 정해져 있으니 넌 그 말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것 같은 순수한 미소였다.

그 이후로 유미는 주인공과 항상 붙어다니게 되었다. 학교에서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도 언제나 함께였다. 처음에는 부담스럽기도 했고,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거리를 두려고 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럴때마다 유미와 주인공의 거리는 좁혀져만 갔다.

이 세계는 자연적인 것들이 모습을 감춰, 농장에서 딴 신선한 과일, 여름이 되면 푸르게 물들던 관목, 지겹게 들리던 매미 울음소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을 모색해보고, 자고 일어나면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136이라는 숫자가 137로 바뀔 동안에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과거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와중에도 주인공은 유미의 도움으로 새로운 세계에서의 생활도 제법 빠르게 적응해갔다. 유미는 모든 일이 서툴던 주인공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자기 일처럼 도와줬고, 그렇게 유미와 둘도 없는 사이가 된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원래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점점 희미해져 갔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던 이유는 무의식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돌아가야 한다는 무언의 아우성 때문이었다.[2]정체 모를 무의식의 아우성을 주인공은 연어의 회귀 본능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주인공과 유미는 지금에 이르렀고, 주인공은 문득 여태껏 실례가 될 것 같아 묻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유미에게 왜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신경써줬냐는 질문을 한다. 유미는 혹시 싫었냐고 되묻고, 그런 건 아니라는 대답에 미소녀 여학생이 챙겨주는데 싫을 리가 있겠냐며 으스대고, 주인공이 영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화를 내지만 그것도 잠시, 인공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빤히 바라보고는 대답을 해준다.
유미: "......그냥, 그러고 싶었어."
주인공: "별다른 이유도 없이?"
유미: "그럼, 다른 이유가 필요해?"
유미: "원래 가슴이 시키는 일에는 이유가 없는 법이라구."

주인공에게는 그 이유가 딱히 와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유미답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고, 어느새 사거리에 도착하여 유미와 헤어진다. 유미와 헤어지고 태블릿을 확인하자 시간은 오후 네시 반. 학교가 끝났을 시점인 30분 전에는 이메일 하나가 와 있었다. 발신인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보냈는지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메일을 보낸 사람은 오컬트부 후배인 현지. 사이트를 확인해 달라며 URL 몇 개를 보내 왔고, 집에 도착하면 확인하겠다며 답장하자, 몇 초만에 특이한 이모티콘들과 함께 답장이 돌아왔다. 이에 주인공은 자기는 30분만에 메일을 보냈는데, 어떻게 저런 이모티콘을 일일이 넣으면서도 빠르게 답장을 보낼수 있나 하고 감탄한다.

마침 초록불로 신호가 바뀌자 태블릿을 집어넣고 길을 건너려는 그때, 주인공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고는 주변을 돌아보자 아까 횡단보도에서 마주쳤던 그 소녀를 발견한다. 소녀는 주인공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반대쪽 골목길로 사라졌고, 무언가에 홀린 듯 소녀를 쫒아가는 주인공. 쫒아가던 도중 골목길까지 들어섰지만 이미 소녀는 사라진 뒤였고, 한참 찾아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왜인지 자신에게 무엇가를 말하고 싶다는 눈동자를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갈지 계속 소녀를 찾을지 선택지가 주어진다.[3][4]

그런데, 어디선가 인기척과 함께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시선이 느껴졌다. 묘한 긴장감을 느낀 주인공은 그 인기척을 따라 발걸음을 향하자 나온 사람은 다름아닌 유미. 혹시 자신의 뒤를 밟았냐고 묻자 유미는 어색한 톤의 목소리로 우연히 지나가던 길이었다고 해명하지만, 유미의 어설픈 연기와 이마의 맻힌 땀을 보고 자신이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부터 뒤를 밟았다고 예상한 주인공은 어디 가고 있었냐고 물어보면서 챙겨주는 건 고맙지만 이렇게 미행까지 하는 건 찜찜하다고 느끼며 얀데레인가 뭔가 하는 거 초기 증상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유미는 길을 잘못 들었다며 둘러댄다. 주인공이 영 미덥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자 유미는 집에 간다고 해놓고 어디 가고 있었냐고 지적하자 주인공은 잠시 횡단보도에서 봤던 소녀를 쫒고 있다 말하면 유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하고는 비밀로 하기로 결정한 뒤 유미에게는 비밀로 할 게 하나 더 늘었다고 독백한다.

일단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 없으니 주인공은 늦었는데 이만 돌아가자고 말하며 대답을 회피하고,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유미와 주인공이 처음 만났던 날보다 더 서먹서먹한 분위기였다. 해가 지기 시작할 때 쯤에야 사거리에 도착해 유미와 헤어진 주인공은 며칠 치의 특이한 일들을 오늘 하루 만에 다 겪은 기분이고, 며칠 치 운동을 오늘 다 했다며 피곤해한다. 그렇게 주인공은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주인공이 교실에 도착했을 때 유미는 교실 뒤편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리로 향하는 주인공을 발견하자 유미는 어제 일은 다 잊은 듯 하이 텐션을 유지하며 주인공에게 아침인사를 건네고, 뒤이어 유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현지도 주인공을 발견하고는 오랜만이라며 인사를 건넨다. 주인공은 현지가 여긴 웬일이냐고 묻자 현지는 유미 언니가 이야기할 게 있다고 해서 왔다고 대답하고는 주인공도 봤으니 이만 가보겠다며 돌아간다. 주인공은 유미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보지만 여자들만의 비밀이라며 대답을 피했다. 이에 주인공은 나중에 현지에게 커피라도 사주면서 물어보면 말해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름방학을 앞둔 교실의 시간은 어영부영 흘러간다. 유미처럼 이 와중에도 생산적인 활동에 시간을 쏟는 학생도 더러 있지만, 주인공에게 해당되는 경우는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하교할 시간이 되어 유미와 같이 돌아가려던 차에, 유미가 오늘은 학생회 회의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먼저 돌아가라고 하자, 현지에게 아침의 이야기도 물어볼 겸 현지를 찾으러 1학년 C반으로 향하지만 현지는 먼저 하교했는지 보이지 않자 결국 혼자 집으로 돌아간다.

무더위 속에서 홀로 쓸쓸하게 집에 돌아가던 중,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소란스럽게 사람 몇 명이 모여있자, 호기심에 다가가본 주인공은 흔히 보이던 안내로봇들이 단체로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비틀대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1년 전 이맘때쯤에도 이런 일이 있지 않았나 싶었지만 아무튼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한 주인공은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길을 걷고 있는 한 소녀를 발견한다. 소녀의 주변에는 여름답지 않은 서늘함이 느껴졌고, 주인공은 곧 그 소녀가 어제 봤던 여자애임을 눈치챈다. 그러나 반대편 길목으로 소녀가 사라질때까지 주인공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고, 소녀가 사라지자 로봇들이 다시 제 기능을 되찾아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모여있던 사람들도 화젯거리가 사라지자 하나둘씩 흩어져갔다.

이 상황을 본 주인공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기에는 어제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다. 이에 주인공은 소녀가 사라진 골목을 따라 그녀를 뒤쫒아가기 시작한다. 어제처럼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자 길 한 쪽에서 소녀를 발견했지만, 소녀는 주인공을 수상쩍게 여겼는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도망쳤고, 이번이 아니면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든 주인공은 열심히 소녀의 뒤를 따라가며 소녀에게 왜 처음 자신을 보고서 그렇게 놀랐으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그리고 아까 일어난 일은 뭔지 물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소녀가 지나간 골목길의 모퉁이를 돌려는 순간, 주인공은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5] 오른쪽 팔을 부여잡으며 일어나려던 그때, 주인공의 앞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낸다.
"제가 보이나요?"

주인공의 눈앞에는 그토록 찾아 해매던 소녀가 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건넨 뜻밖의 말에 주인공은 소녀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녀는 주인공의 시선을 눈치채자 주인공이 자신을 볼 수 있다고 결론지었고, 주인공이 몸을 일으키자 왜 계속 자신을 쫒아왔는지 묻는다. 주인공이 어제 소녀가 계속 자신을 지켜봤던 사실을 말하자, 소녀는 그것도 그렇다며 순순히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주인공은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아 안도한다.

이윽고 소녀는 주인공의 정체를 묻는데, 어째서 주인공이 자기를 볼 수 있는지, 그리고 왜 주인공의 눈에서는 죽음이 보이지 않는지를 물어본다.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던 차에, 소녀는 주인공도 자신처럼 유령이냐고 질문을 바꾼다. 주인공은 자신은 그냥 학생이며 멀쩡히 살아있다고 부정하자, 소녀는 하긴 그렇겠다며 수긍하지만 그런 소녀의 표정에서는 허둥지둥하는 기색이 잔뜩 묻어있었다. 주인공은 대뜸 설명도 없이 이해하기 힘든 질문을 해서 유령이 말주변이 없다고 판단하고 역으로 유령이라는 게 무슨 뜻이냐며 질문하자, 소녀는 눈 앞에 보이는 자신은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이라고 설명한다.

주인공이 간단히 그렇구나라며 납득하자, 오히려 소녀 쪽에서 자기 앞에 나타나 다리를 건 사람이 대뜸 자신을 유령이라 소개하는데 왜 반응이 그렇냐며 당황하고, 주인공은 평소에 그런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유령이 있을거라 생각했다고 해명하면서 유체이탈도, 시간여행도 있는데 유령이 없겠냐며 유령이랑 마주쳐도 별 감흥이 없다는 독백을 내뱉는다.

소녀는 주인공의 무덤덤한 반응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번 쯤 사람 앞에 설 각오는 하고 있었다며 뭔가 의심해주기를 바라는 듯한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두 번째 질문으로 주인공이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소녀는 유령의 능력인지, 동질감을 갈구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다른 사람의 죽음이 보인다고 설명한다. 주인공은 죽음이 보인다는 걸 상상해보지만, 잘 와닿지 않자 남은 수명이 보인다거나 그런 걸 말하는건지 묻는데, 소녀는 그런 게 아니라 사람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이 죽는 장면이 보이고, 그 죽음의 순간에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색으로 나타나 보인다고 말한다.

주인공이 무서운 능력이라고 독백하며 잠시 침묵이 찾아오자, 소녀가 갑자기 주인공의 손목을 붙잡고 골목길 밖으로 이끌었고, 그런 소녀의 손에서는 유령이라는 말에 걸맞게 싸늘함이 느껴졌다. 소녀는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중년 남자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는데, 남자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소녀 입장에서는 주인공에게 자신이 유령이라는 걸 증명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신호가 바뀌자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대로 반대편으로 걸어갔고, 반대편에 다른 사람이 다가오자 소녀는 다시 주인공의 손목을 붙잡고 인적 드문 골목길 속으로 숨어들었다. 골목길 안으로 숨고 난 뒤 소녀는 주인공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저 사람은 병으로 죽게 되고, 다행히 평범한 장면이라며 허무하리만치 새하얀 색이라는 감상을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소녀가 이제 자신이 유령이라는 게 확실해졌냐고 묻자 주인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생각에 빠진다. '다행히'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 주인공은 아무리 유령이라도 사람이 죽는 장면만 계속 보면 괜찮을지 걱정하고, 소녀도 아까 그 남자처럼 평범하게 죽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수긍하고는,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는다. 소녀는 무섭다고, 사람이 죽는 장면도 보고 싶지 않고, 영혼처럼 떠돌아다니고 싶지도 않다며 울먹이는데, 그런 소녀의 모습에서 주인공은 중학생 정도의 앳된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기운을 느끼며 자신은 소녀가 느꼈던 감정을 가늠할 수 없을거라 독백한다.

소녀는 주인공의 눈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건 처음이라 밝힌다. 처음 봤을 때는 주인공도 유령인 줄 알았지만 옆에 있던 유미의 눈에서 죽음의 색이 보이자 그때서야 주인공도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주인공은 유미가 죽는다는 게 지금으로서는 와닿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그래서 도망쳤냐고 소녀에게 묻자, 소녀는 인정하고는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이후로 쭉 주인공을 지켜봤다고 한다. 소녀의 그늘진 눈동자가 주인공을 향하자, 주인공은 자신을 도와달라는 무언의 호소가 들려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분명 소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신에게 무언의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주인공은 지낼 곳이 있냐고 소녀에게 묻지만,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령인걸요."

짧지만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없는 대답이었다. 주인공은 집에 다른 사람도 없고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나을테니 소녀에게 갈 곳이 없다면 당분간 자기 집에서 지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고, 소녀가 재차 확인하자 주인공은 너만 괜찮으면 된다고 혼쾌히 수락하자 주인공의 제안을 받아들인 듯 몸을 천천히 일으킨다. 하지만 그 전에 주인공은 잠깐 챙겨올 것이 있다며 학교에 들렀다 가자고 제안하고, 소녀는 따라갈테니 먼저 앞장서달라고 하며 주인공의 뒤를 조용히 따라간다. 주인공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서 마치 그림자가 뒤를 따라오는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낀다.

길을 걷던 중, 문득 생각이 난 주인공은 주인공은 유령이라도 사람을 건드릴 수는 있나보다며 소녀에게 말을 걸자, 눈에 안 보이는 것만 빼면 배도 고프고, 덥기도 하고, 졸리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보면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만 빼면 살아있을 때랑 똑같은 것 같다고 한다. 주인공이 거기에 온기도, 인기척도 안 느껴졌다고 덧붙이자, 소녀가 의문스러워하고, 주인공은 아까 소녀가 자신의 손목을 잡았을 때 엄청 차가웠다고 말해준다. 소녀는 그건 처음 알았다며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려고 하지만, 주인공은 전혀 기분 안나빴다며 뒤를 돌아 소녀를 살펴보는데, 소녀는 여전히 고개를 땅에 파묻은 것처럼 푹 숙인 채 길을 걷고 있었다. 잠깐 봤을 때는 몰랐지만 이렇게 보니 너무 안쓰럽다고 생각한 주인공은 그렇게 걷다 사고 나겠다며 소녀의 손을 잡는데, 소녀가 잠시 놀라자 주인공은 아래만 보고 걸으면 위험하다고 하는데, 소녀는 안절부절못하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주인공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머쓱해진 주인공은 기분 나쁘다면 놓아도 된다고 하지만, 소녀는 짖궃다는 한마디만 하고 주인공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붙잡는다. 따뜻하다는 소녀의 한 마디. 소녀는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주인공이 소녀와 함께 도착한 곳은 오컬트부실. 여태껏 바닥을 향해 얼굴을 파묻고 있던 소녀는 드디어 고개를 들고 오컬트부실이 신기한 듯 주변을 살펴본다. 주인공이 꾸민 오컬트부실은 다른 교실과 달리 제법 아날로그틱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소녀는 쌓아둔 인형들을 가리키며 여기 있는 인형들은 뭐냐고 묻자 주인공은 학예제 때 쓰려고 모아둔 거라고 말해준다. 평범한 인형들은 아니고 주인공과 현지가 부두인형과 테루테루보즈[6]라고 만들어둔 인형이었는데, 소녀는 그 인형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가 학예제에 대해 묻자, 여름 방학 끝나고 학교에서 열릴 축제인데, 꽤나 규모가 큰 행사라 이것저것 많이 하고, 올해에는 불꽃놀이도 한다고 설명해주지만, 소녀는 재밌겠다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다시 인형들로 관심을 돌렸다. 하나 가져가도 되냐고 물어보자 주인공이 이유를 묻는데, 소녀는 마음에 들어서라고 대답한다. 무덤덤한 반응이었지만 분명 소녀의 목소리에는 아이같은 면모가 묻어있었고, 어울린다 해야 할지 안어울린다 해야 할지 고민하며 주인공은 혼쾌히 허락하고, 진열장에 놓인 인형들을 빤히 보던 소녀는 이내 테루테루인형 하나를 품에 안는다. 문득 궁금해진 주인공은 주인공은 소녀가 인형을 들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이냐고 물어보자 소녀는 자신이 들고 있는 물건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보이는 것 같다고 하는데, 주인공은 아마 영체화[7]라는 현상이라고 들어본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이고, 소녀는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생명체가 아닌 물건에만 일어난다고 덧붙이면서 지금 이 상황이 우스운 듯 슬며시 실소에 가까운 헛웃음을 터뜨리지만,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소녀는 품에 안은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자신은 살아있었을 때 오컬트같은 건 믿지 않았겠다고 중얼거리는데, 주인공은 그랬을 거 같아 보이긴 하다며 딱히 부정하지 않는다. 소녀가 주인공에게 어쩌다 오컬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묻는데, 주인공은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며 대충 얼버무리고, 소녀는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려 파일로 묶어 정리해둔 자료들이 있는 책장들을 바라보며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주인공은 요즘 종이가 사용되는 곳은 잘 없으니 그렇긴 하다고 긍정한다. 자신이 구시대의 망령임을 살짝 티라도 내보고 싶은 듯한 발언이었지만, 소녀는 거기까지 눈치채지는 못한 듯했다. 소녀가 어디서 구한 거냐고 묻자 주인공은 오컬트 관련 잡화점에서 부적을 만드는 용도로 쓰이길래 구했다고 설명해주며 좀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분위기가 있다 말하고,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소녀는 오컬트부실 특유의 아날로그틱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 뒤로도 찬찬히 주변을 살펴봤고, 그동안 주인공은 도시 괴담이나 구전 설화같은 유령, 귀신과 관련된 자료들을 챙긴다. 자료들을 태블릿에 연결시키려던 와중에, 소녀가 부실 구석에 놓여있던 전자레인지 크기 정도의 물체를 보고는 이건 뭐냐고 물어보고, 주인공은 텔레이도스코프라는 동아리에서 만들고 있는 물건인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사실 주인공도 잘 몰라서 그렇게 대답했던 거지만.

태블릿에 연결한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주인공은 죽음을 볼 수 있고, 1년동안 여기를 떠돌아다녔다고 했었는지 재차 질문을 하던 차에 뭐라고 말해야 할지, 이런 말을 해도 되는건지 살짝 머뭇거리던 그때, 소녀가 먼저 주인공을 돌아보더니 도리어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저를 없애주세요."

주인공이 미처 말할 틈도 없이 소녀는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했고, 꺼림칙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건 알지만 부탁한다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다고 간청한다. 주인공은 소녀가 바라는 것이 '성불(成佛)'인거 맞냐고 묻자 소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주인공은 일단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선 모니터를 확인한다. 정말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소녀를 성불시키는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 유령이 구전 설화나 도시 괴담에서 알려진 이야기처럼 삶의 미련이 남아서 그런거라면 적어도 소녀의 대한 정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저렇게 어린 나이에 죽었다면 나도 미련이 안 남고는 못 배기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질문이 실례인 건 알지만 무슨 일로 소녀가 죽었는지 물어본다.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 직설적으로 물었던 탓인지 주인공은 사과하면서 조사에 꼭 필요할 것 같다고 허둥대자, 자신이 유령이라는 걸 인지시키려고 하려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죽음의 색에 대해 설명해 준 이후 두 번째로, 소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소녀는 이름이 뭔지도, 어떤 학교에 다녔는지도, 가족관계가 어땠는지도, 친구가 누가 있었는지도, 심지어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전부 기억이 안난다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주인공은 최대한 괜찮아 보이는 표정을 지으려 애쓰면서 언제부터 기억을 잃었는지 물어보자 소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유령이 되고 나서부터였을거라고 대답하고는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겠다며 고개를 숙이자, 주인공은 명색이 오컬트부 부장인데 한번 해봐야한다며 여기를 떠돈게 1년 정도였냐고 다시 물어보자, 소녀는 이게 두 번째 여름이니 맞다고 대답한다. 이에 주인공은 나와 비슷하구나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주인공은 소녀의 겉모습을 다시 한번 훑어보면서 소녀의 외모와 복장으로 보아 중학생 정도라고 추정하는데, 주변에서 저런 형태의 교복을 본 기억은 없었고 근처 중학교 학생이 아니었던 건지 추측해보지만 소녀의 교복에는 이름표도, 학교 이름도, 심지어 학교를 나타내는 앰블럼 같은 것도 없어서 소녀가 다니던 중학교를 추측할 만한 단서가 없었다. 짙은 녹색 옷깃의 블라우스와 치마를 보면서 어딘가 익숙한 색이라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곧장 기억해내기엔 너무 흐릿한 기억이었다. 그렇다고 수십 개나 되는 백석시의 중학교를 다 찾아볼 수는 없기에, 현지가 도시 괴담 조사를 위해 만들어 둔 근 몇년간 일어났던 모든 사건 사고를 정리해놓은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이곳의 시간으로 135년 6월과 8월 사이에 발생한 12세~15세 사이의 여성 사망자를 검색해 태블릿에 옮겨 두었다. 자료는 집에서 확인하자며 돌아가려던 찰나, 소녀가 오른팔에 넘어졌을 때 생긴 상처를 발견하고 놀란다. 그제서야 주인공은 오른팔에 피가 묻어있던 걸 눈치채고, 소녀에게 또 괜찮다는 말을 하고는 핏자국을 씻고 오기 위해 부실 밖으로 나선다. 주인공은 발걸음을 옮기며 얼마나 정신없었길래 팔에 피가 난 것도 눈치 못챘는지 스스로도 어이없어했고, 소녀와 손을 잡은 반대쪽이라 눈치채는 게 늦은 건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한다.

오컬트부실 옆 화장실에서 핏자국을 닦아내고 복도를 걸어오던 주인공은 부실 앞에서 익숙한 사람을 발견한다. 같이 하교하려고 했을 때는 보이지 않던 현지가 부실 앞에서 자신의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며 오컬트부실 문 앞을 서성이고 있던 것이다. 주인공이 아직까지 학교에 남아있었냐고 묻자 그런건 아니라고 부정하는데, 그런 현지의 머리카락에서 땀방울이 묻어있는 걸로 보아, 현지 역시 주인공처럼 어딘가를 돌아다녔던 듯 했다. 현지가 부실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고 하자, 주인공은 현지를 막아서려 하지만 그런 외침이 무색하게 현지가 부실 문을 열어버렸다.

주인공은 급히 현지를 가로막고 오컬트부실 안을 살피지만,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주인공이 현지에게 여기 있던 여자애 본 적 없냐고 묻자 현지는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의아해한다. 주인공이 부실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어도 소녀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는데[8], 부실 책상 아래에서 소녀가 쪼그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주인공은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바로 괜찮냐며 소녀의 안부를 물었고, 소녀의 대답 대신 현지가 지금 누구랑 이야기하냐며 당황한다. 잠깐 있던 일이 너무 현실감 있어서 그랬는지 소녀가 자신의 눈에만 보인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던 것이다. 현지의 목소리가 가까워지자 소녀는 허둥지둥하는 기색을 보이며 급히 부실 모퉁이로 기어가듯 숨어서 벽과 마주한 채 거친 호흡을 반복했다. 소녀가 저 사람은 누구냐고 묻지만 주인공은 말을 잇질 못하고, 저 사람에게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거라고 하자 일단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주인공은 현지에게 나가서 이야기하자고 요청하고, 현지는 이상하다는 눈치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내 주인공을 이해한다는 표정과 함께 부실 밖으로 자리를 옮긴다. 현지가 나가자 주인공은 조심스레 소녀에게 오컬트에 대해 잘 아는 후배라며 잠시 이야기 하고 오겠다고 말을 건네고, 소녀는 알겠다고 하지만 대답을 하고서도 여전히 몸을 떨고 있었다. 주인공이 자신을 제외한 오컬트부원이고, 다른 사람이 찾아올 일은 없으니 이제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소녀를 안심시키려 하자, 소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지만, 여전히 마음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는지 일어날 생각은 하고 있지 않았다. 일단 소녀를 뒤로 한 채, 주인공은 현지를 따라 부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복도에서 주인공을 기다리던 현지는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부실에 아무도 없는거 아니었냐고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않자, 주인공은 그렇긴 하다고 말하는데, 현지가 귀신이라도 들렸냐 묻는다. 형식적인 말이었겠지만 날카로운 질문이었기에 주인공은 이게 오컬트 소녀의 직감인가 생각과 함께 현지에게 이 시간에 부실에 왜 왔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현지는 글쎄요라는 말로 얼버무리며 주인공이 먼저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자신도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혹은 설명을 해주더라도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는 표정을 짓고, 커피 한잔이면 되냐고 꼬드기자 근처 카페로 가서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한다.

카페에 도착한 현지의 앞에는 사주기로 한 카라멜 마끼아또 외에도 쇼트케이크 하나가 놓여 있었다. 현지가 문득 주인공은 왜 항상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시냐고 묻자, 주인공은 그저 맛있어서라는 대답을 하고, 현지는 특이한 취향이라는 반응을 보인다.아아가 특이취향인 미래세계 현지가 케이크를 먹는 동안 주인공은 얼음을 씹으면서 치킨을 먹을 때 목이 제일 맛있다며 다리를 자신에게 주던 부모님의 심정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생각한다. 현지가 그래서 부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현지가 말한 대로 귀신이 있었다는 대답을 해준다. 그 말을 듣고 평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당혹스러워하는 현지. 주인공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더 빨아들이고 난 뒤 여태껏 있었던 일을 적당히 설명해주자, 현지는 그날 주인공이 현지에게 비밀을 털어놨을 때처럼 알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지는 남은 쇼트케이크를 입에 털어넣으며 생각에 잠기고, 주인공 역시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아들이며 침묵이 오가던 도중, 주인공이 평소에는 집으로 곧장 돌아갔을텐데 왜 오컬트부실에 왔냐고 물어보자, 현지는 유미가 아침에 부탁을 해서 그랬다고 한다. 바로 방과 후에 주인공이 이상한 곳으로 가면 뒤를 밟아달라는 부탁이었는데, 너무 아무렇지도 말하길래 그냥 넘어갈 뻔하다가 유미가 미행에 이어 미행교사까지 한다는 사실에 당황하고, 애초에 왜 현지가 그런 부탁을 덜컥 받아들였는지 의아해하며 그제서야 아까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땀방울이 맻혔는지 이해한다. 현지의 말에 의하면, 유미는 아마 주인공이 오래된 여자친구라도 숨기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고 한다. 왜 그런 추측이 나왔나 어이없어하자, 현지는 주인공이 유미에게 고등학교 입학 전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어서 그랬을거라고 추측한다. 주인공은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미행을 시킨 것도,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이상하다며 지적하자, 현지는 나중에 밥 사준다고 하길래 덥석 받아들였고, 주인공이 현지에게도 과거 이야기를 잘 안해줘서 궁금했다고 밝힌다. 이에 주인공은 전에도 말했듯이 자신도 기억이 잘 안 나서 말하기가 좀 그렇다는 반응을 보이며 얼음 하나를 더 우작거린다. 미적지근한 주인공의 반응과 달리 입안에서 부서지는 얼음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현지는 어쨌거나 주인공의 목적은 그 유령을 도와 성불시키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주인공은 성불을 시켜주는 게 맞는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사라지게 해줘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긍정한다. 그와중에 현지는 살아있을 때 기억이 하나도 없는 유령이라니 신기하다고 하고, 주인공도 도시 괴담을 봐도 이승을 떠도는 유령이 살아 생전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일은 별로 없었다며 동감한다. 이에 현지는 여기 있다고 검지로 주인공을 가리키는데, 주인공은 자신은 일단 귀신은 아니고 기억도 일부만 못할 뿐이라며 부정하면서도, 정작 제일 중요한 걸 기억하지 못하고 있고,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떠올리지 못하는 그 순간과 장면이 자신이 여기 온 이유를 밝혀줄 열쇠는 아닐까 생각한다. 현지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유체이탈도 영적인 것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으니 유령 소녀와 주인공이 연관이 있을까 생각한다. 현지는 물론, 주인공에게 있어서 어려운 이야기였다. 애초에 오컬트란, 이런 거니까.

현지는 이론적인 무언가로 설명하긴 어려울지도 모른다며 단순히 어떤 현상이라고만 생각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면서 해답을 찾는 건 일종의 퍼즐 맞추기 같은 거겠다고 비유한다. 주인공이 그렇다고 하기엔 아직 퍼즐 조각 없이 퍼즐판만 있는 거라고 하자,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을 것 같다며 유령 성불 프로젝트는 지금 당장 시작하는 건지, 주인공의 유체이탈 건은 어쩔지 묻고, 주인공은 일단 자신보다는 그 유령 여자애가 더 급할 테니, 자신의 유체이탈보다는 유령 성불 프로젝트부터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현지는 알겠다고 하면서 그래도 조사하다보면 뭔가 연관이 있는 게 생길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데, 주인공이 긴가민가하는 반응을 보이자 유령이 하필 오컬트 현상 그 자체인 주인공에게만 보인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고 지적한다. 주인공은 단순히 우연이라면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연과 필연 모두 어색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슬슬 일어나려는 현지에게 주인공은 소녀와 함께 돌아가겠다며 현지를 먼저 돌려보내려 하고, 현지는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문득 주인공을 바라보며 유령이 우리 또래 나이의 여학생이었는지 다시 묻는데, 주인공이 중학생 정도로 보였다고 말하자 주인공을 바라보던 현지의 동그란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변했다. 주인공이 그 눈빛은 뭐냐고 묻자 현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도 역시 오컬트와 로맨스는 잘 안 어울리겠다는 말을 하고, 주인공이 유령이랑 로맨스라니 으시시하단 반응을 보이지만 현지는 뭐 어떻냐며 괜찮다고 주장한다. 주인공이 그런 류의 소설을 읽냐고 묻자 현지는 어떻게 알았냐며 독심술을 쓸 줄 아냐는 농담을 한다. 주인공은 부정하고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애를 무사히 사라지게 하는 건데 너무 친해지기도 뭐하다고 난색을 표하고, 현지는 냉정하다고 평가하며 주인공이 유미를 제외하면 다른 친구가 없는 이유가 그런 거라고 말하다가 냉정한 게 아니라 친절한 거라고 해야하나 고민하자, 주인공은 그건 아닌 것 같다며 일축한다. 현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는다. 웃음의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악의가 깃든 웃음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오컬트부실로 돌아왔을 땐, 소녀의 모습을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유령 소녀는 부실 한편의 의자에 앉아, 테루테루인형을 품에 안은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주인공은 피곤했던 거 같다면서 문득 유령도 꿈을 꾸는지에 대해 고민이 들었지만, 일단 소녀를 깨우기 위해 소녀의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잠에서 깨어난 소녀는 화들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인형을 움켜쥐었지만, 이내 주인공이라는 걸 깨닫고는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깜빡 잠들어 버렸다는 소녀에게 주인공은 집으로 가고, 피곤하면 거기서 자자며 부실 밖으로 나오려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가 머뭇대며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우물쭈물하면서 소녀는 주인공에게 말했다.
"손, 잡아 줄 수 있나요?"

4. 2장

어제는 집에 도착했을 때쯤 피어올랐던 저녁놀이, 오늘은 벌써 하늘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주인공은 소녀의 부탁대로 소녀의 손을 맞잡고는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낯간지러움이 누군가와 손을 잡고 나란히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얼굴을 간지럽혔다. 자신이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걸었던 적이 있나 생각해보지만, 잘 모르겠다. 감상을 지워버리려 주인공은 소녀에게 유령도 배가 고픈지 물어보자, 소녀는 그렇다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녀 역시 충동적으로 손을 잡아달라 부탁한 게 꽤 낯간지럽게 느껴졌는지 테루테루인형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공은 그럼 집에 가서는 저녁식사부터 준비해야겠다고 어색하게 중얼거린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들어서면서도 소녀의 시선은 테루테루인형에 고정된 그대로였지만, 그러면서도 손을 놓기는 싫었는지 주인공을 잡고 있는 소녀의 손에는 묘하게 힘이 실려 있었다. 미묘하디 미묘한 감각이, 주인공의 손을 타고 전해진다. 주인공이 저녁으로 먹고 싶은 게 있는지 묻지만, 소녀의 대답은 아무거나 괜찮다는 평범하디 평범한 대답이었다. 소녀가 끌어안고 있는 인형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소녀의 무덤덤한 얼굴과 겹쳤지만, 어울리는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도착한 소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오컬트부실에서 그랬듯이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집에 아무도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고 한 뒤 소녀를 침대로 안내한다. 그 후 부엌에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려는데, 뒤에서 소녀가 오컬트부실과 비슷한 분위기라며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을 건넨다. 어떤 분위기인지 묻자 소녀는 으스스한 걸 좋아하는 것 같다며 귀신이 나와도 전혀 안 이상할 것 같은 분위기라는 돌직구를 날린다. 주인공은 소녀의 말에서 악의를 느끼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쓰라림을 느끼며 저녁 준비해오겠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주인공은 고교생 홀로 1년 넘게 자취생활을 하면 남는 건 으스스함뿐일 거라고 독백하며 어릴 적 어머니가 청소하란 잔소리와 함께 방에서 귀신 튀어나오겠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었는데, 진짜 집에 귀신이 들린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하실지 궁금해한다.

주인공이 가져온 식사는 데운 냉동 새우맛 필라프. 냉장고에 남은 게 이런 것 밖에 없다며 소녀의 눈치를 살피지만, 소녀는 무덤덤한 반응으로 저녁을 먹는다. 젓가락질하는 소리만이 공부방 겸 침실을 메우고, 혼자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과 다름없이 느껴지는 침묵이 식탁을 메운다. 그나마 찰기 없는 필라프가 소녀의 젓가락에서 자꾸 흘러내리는 모습이 주인공과 소녀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는데, 주인공은 어쩐지 목이 메어왔다. 새우맛 필라프가 퍼석퍼석한 것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문득 주인공이 소녀에게 평소에 식사는 어떻게 했는지 묻자, 소녀는 대충 해결했단 말만 하고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젓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음울해보이기만 하던 소녀의 얼굴에서는, 아주 살짝이지만 편안함이 느껴졌다.

마지막 젓가락질을 끝낸 소녀는 따뜻한 음식은 오랜만이었다며 잘 먹었다는 인사를 건넨다. 주인공이 접시를 정리하려 하자, 소녀가 갑자기 손을 뻗으면서 설거지는 자신이 하겠다며 나서는데, 주인공은 손님이기도 하고 피곤했을테니 침대에서 쉬기를 권유했지만 소녀는 앞으로도 신세 질 거라며 주인공의 손에서 접시를 뺏어들고 그대로 부엌으로 향했다. 급히 소녀를 막아서려 했지만, 이미 소녀는 부엌으로 발걸음을 내딛은 뒤였다. 소녀가 싱크대에 잔뜩 쌓인 접시를 한 번 바라보고 자신을 따라온 주인공을 한 번 바라본다. 뻘쭘해진 주인공은 며칠동안 바빴다고 변명하지만, 소녀는 괜찮다는 한 마디만 하고 그대로 물을 틀어 설거지를 시작했다. 주인공이 도와줄지 묻자 소녀는 앞으로도 이런 일은 자신이 할테니 할 일 하라고 거절하고, 제법 능숙한 솜씨로 접시를 씻어냈다. 생전에 중학생 정도였을 소녀가 어째서인지 자취 1년 차인 주인공보다 집안일이 익숙해 보였다. 주인공이 익숙해 보인다고 하자 소녀는 그런거 같다는 남 일 말하는 듯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주인공은 방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태블릿을 연결한 뒤, 책상 위에 아까 챙겨온 자료들을 펼쳐놓고 훑어보기 시작한다. 그 후 데스크탑에 옮겨진 자료들을 살펴보려는데, 어느새 소녀가 인기척도 없이 주인공의 옆에 나타나 모니터 화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주인공은 화면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자료의 양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본다. 의심 가는 기간 동안 일어났던 사망 사고는 총 열여덟 건. 주인공이 모르는 사이 백석시의 외곽지역에서는 제법 빈번하게 이런 사고가 일어났던 모양이다. 이 중에서 소녀와 연관이 있는 사건이 있을지 고민하며 주인공은 그중에서도 맨 위에 정렬되어있던 폴더를 열어보는데, 작년 겨울에 E구역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었다. 대충 내용을 훑어보던 주인공은 소녀의 눈치를 살피며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려다 말고 커서를 멈춘다. 소녀에게 그렇게 부담스레 볼 것까진 없다며 뭔가 떠오르는 거라도 있는건지 묻지만, 소녀는 그런 건 아니라며 손사례를 친다. 이런 끔찍한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으면 귀신이 되도 이상하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이렇게 무거운 생각에 얽메이기도 싫었던 주인공. 거기에 이 사건은 범행 동기와 범인이 누구인지도 알아내지 못한 미제 사건이었다. 일단 이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 뒤로 미루고 싶어서였는지, 주인공은 소녀가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는 동안 다음 자료로 페이지를 넘겼다.

두 번째 자료의 내용은 B구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작년 겨울에 일어난 화재 사고였다. 주인공이 소녀에게 이건 혹시 생각나는 게 있는지 묻지만, 소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주인공은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짓는데, 소녀가 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어서 떠올리지 못하는 건지, 이 자료만으로는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기에는 역부족인건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던 주인공의 머릿속에 문득 괜찮은 방법 하나가 떠올랐다. 가져온 자료들 중에는 가상현실과 커넥팅 가능한 데이터가 있었기 때문에 VR 헤드셋이라는 기기를 통해 소녀가 직접 사건 당일의 현장을 살펴보게 하는 방법이었다. 주인공에게 VR 헤드셋을 받아 든 소녀는 주인공과 헤드셋을 번갈아 살펴보는데, 아무래도 소녀는 사용 방법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주인공은 소녀에게 직접 헤드셋을 씌워 주며 걸어 다니면서 혹시 기억나는 게 있으면 이야기해 달라고 했지만, 소녀는 헤드셋을 낀 채 주위를 둘러보다 말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헤드셋을 만지작거렸다. 이내 소녀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말하는데, 주인공이 소녀에게서 헤드셋을 빼내고 자신이 직접 써 보자, 정말로 눈앞에는 가상현실 대신 노이즈 섞인 화면만이 보일 뿐이었다. 의아해하는 주인공에게 소녀는 자신이 유령이라 이 기계가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일단 자료들로만 조사를 해본 결과 소녀가 기억하는 것은 없었고, 결국 주인공은 도시 외곽지역이긴 해도 직접 찾아가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주인공은 소녀가 애써 잊고 있던 끔찍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행동이 아닐까 하며 걱정하지만, 소녀는 이미 상처는 잔뜩 입었고, 이 일의 목표가 자신을 없애는 일인 만큼 걱정하는건 소용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주인공은 오컬트부실에서 왜 그렇게 놀랐냐고 물어보고, 소녀는 현지의 눈에서 본 죽음은 한 번도 본 적 없던 끔찍한 색이어서 그랬다고 답한다. 주인공은 죽음의 색이 뭐냐고 물어보자, 색보다는 빛에 가까우며, 죽음의 장면이 가시광선과 비슷한 빛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자료를 찾아보다 자정을 넘기자, 주인공은 자신은 바닥에서 이불 깔고 잘테니, 소녀에게 침대에서 자라고 하지만, 소녀는 귀신에게 너무 많은 호의를 베푼다며 거절한다. 그래도 결국 소녀가 침대에서 자기로 한다. 어둠 속에서도 소녀의 시선이 계속 느껴지자, 주인공은 화제를 돌리고자 서로 이름도 모르고 있다고 하자, 소녀는 자기 이름은 자신도 모른다고 하고, 이에 주인공은 자기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도 괜찮을 거라며, 이름을 말해준다.[9] 소녀는 혼자 이름을 알고 있으니까 빚을 진 것 같다며, 자신의 이름을 알아내고 싶다고 한다.

새벽에 목이 말라 눈을 뜬 주인공은, 물을 마시고 돌아오자 침대에서 내려와 이불 옆에 쪼그려서 자고 있는 소녀를 발견한다. 소녀가 악몽을 꾸는지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어께에 손을 올리자, 소녀가 깼고, 물을 한잔 가져다준다. 소녀가 잠들 기색이 보이지 않자 불을 켜고 태블릿을 켜서 함께 도시 괴담을 조사한다.

학교 갈 시간이 되자, 씻은 뒤 아침을 간단하게 차려먹고, 주인공은 집에 소녀 혼자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내일이 방학식이니 하루 정도면 괜찮겠다 생각하고 소녀에게 늦을 수도 있다 당부한 뒤 집을 나선다.

학교에 도착하자, 유미가 방학때 함께 봉사활동 하자고 한 건 생각해 봤냐고 묻는데, 소녀의 성불 때문에 동아리에서 갑자기 할 일이 생겼다고 거절한다. 유미는 방학 때 자주 못 만나겠다고 아쉬워하며, 학교 끝나면 영화를 같이 보자고 제안한다. 주인공이 바로 대답을 못하자 숨겨둔 여자친구라도 있냐고 떠보고, 주인공이 바로 아니라고 대답하자 농담이었다며 웃는다. 현지가 상황을 잘 둘러대 줬다고 생각해 안심한 주인공은, 영화 한 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같이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한다.

영화관에 도착하자,[10] 상영 시간표를 보면서 영화를 고르고, 며칠 전에 개봉한 영화를 보기로 한다. 상영관에 앉으면서 갑자기 왜 영화관에 오자고 했냐 물어보자, 유미는 영화 보고 싶은 날이 있는데 혼자 오기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주인공은 자기 말고 밤에 가족이랑 오면 되지 않냐 묻자 가족이랑 오면 부모님이 몸에 안좋다고 팝콘을 안사줘서 싫다고 한다.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영화가 시작되는데, 스크린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영화에서 사용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듯이, 원형의 틀을 갖춘 무대에서 배우가 직접 연기하듯 홀로그램이 솟아오르고, 상영관 전체가 영화의 배경이 된다. 관객들은 그런 영화관 안에서 아주 잠시동안 유령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이런 모습의 나라도 사랑해 줄 수 있을까?
그는 이런 모습의 나라도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하늘은 금세 새빨간 석양이 펼쳐져 있었고, 유미는 영화 주인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물어본다. 영화의 내용은 사랑하던 이를 죽여버린 사람 셋을 죽임으로서 복수하는 뻔하다면 뻔한 내용. 특이한 점이라면 영화 주인공이 사랑하던 이가 사람이 아니라 AI라는 것이다. 주인공은 영화라 감정을 조금 격하게 표현한 것 같다고 대답하지만, 유미의 생각은 달랐다.
"왜? 자기가 사랑하던 존재가 억울하게 죽어버렸는데, 그럴 수도 있지 않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법의 도움을 받지도 못하니 영화의 주인공에게 충분히 당위성이 있다 주장하는데, 이에 주인공은 사람도 아니고 AI인데, AI를 죽였다고 사람을 죽인 게 정당화 될 순 없다는 대답에 유미는 AI는 사람이 될 수 없는 쪽이냐고 다시 물어보고, 주인공은 AI에게 감정이 생기는 게 상상이 안 간다고 한다. 이에 유미는 사람의 감정은 결국 뇌의 화학적 반응에 불과한데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그런 식으로 감정을 덧씌울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려고 하자, 유미는 이야기를 조금 바꿔서 인공지능이든 뭐든, 좋아하는 이가 다른 사람에 의해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면 그 복수는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고, 주인공은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한다.
"그런 건 싫어."

영화에서 AI가 남긴 마지막 메세지도 그렇고[11], 복수도 미완성으로 끝났기에 주인공은 실제로 그런 일이 있더라도 복수는 원치 않는다는 의견을 낸다.

영화 이야기는 그쯤에서 끝났고, 길을 조금 더 걷다 유미와 헤어진 뒤, 주인공은 소녀의 저녁을 챙겨주기 위해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들고 집에 돌아간다. 어제보다는 더 활기를 띄는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은 내일부터 방학식이라며 주말부터 사건이 일어난 현장들을 찾아가 보자고 제안한다. 그러면서 소녀가 너무 맛있게 밥을 먹자, 너무 늦게 돌아온데다 점심도 못먹었을 것을 생각하며 사과하는데, 소녀는 사라져야 할 존재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며, 앞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아줬으면 한다고 말한다. 밤에 잘 때도 어제와는 달리 결국 주인공이 침대 위에서 자기로 결정이 되었고, 주인공은 소녀의 시선때문에 부담스러울 것 같아했지만 익숙하리만치 그리운 느낌이라 느끼며 빠르게 잠이 든다.

다음 날, 방학식을 맞이한 덕분에 정오가 되자 학교가 끝이 났다. 유미는 방학 멘토링으로 인해 함께 집에 가지 못하고, 대신 현지와 함께 하교하게 되었다. 현지는 유령 성불 프로젝트에 대한 일을 꺼내며, 예전에는 현지 자신이 그런 부탁을 주인공에게 받았었는데, 이제는 주인공이 반대로 그런 부탁을 받았다며 신기하다고 평한다. 또 유령 소녀가 자기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다는 말을 듣자, 주인공도 처음에 자기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며 주인공과 비슷하다 생각한다. 그러면서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신경 안 쓸 수 있냐고 덧붙인다.

또 현지는 며칠 전에 근방에서 로봇들이 통신 불량이 된 뉴스를 언급하면서, 백석시에서 1년 전부터 로봇들과 관제 센터 사이의 통신이 끊어져 로봇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유령 소녀가 이곳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한 시점과 맞아떨어진다며, 폴터가이스트 현상처럼 소녀가 로봇들을 건드린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주인공은 소녀를 찾은 곳이 이 근방이긴 하지만, 소녀는 오히려 로봇들을 피해다녔다며 부정한다. 또한 1년 전은 자기가 이곳으로 온 시간임과 동시에, 자신의 기억이 온전한 마지노선인데 이것도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현지는 그렇다면 유령의 존재 자체가 전파 혼선을 일으키나 추측하고, 주인공은 앞으로 같이 다니다 보면 알게 될 거라고 답한다. 현지는 대답에 납득하며, 알아낸 게 생기면 연락을 달라고 당부하며 헤어진다.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소녀가 화장실 안에서 샤워를 하는 소리를 듣고, 주인공이 돌아온 것을 눈치챈 소녀는 당황하며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다. 주인공은 난감한 상황을 얼버무리려고 유령도 샤워를 해야 하는 줄 몰랐다고 농담을 건네지만, 소녀는 그건 기분의 문제라고 향변한다. 일단 점심을 먹고 난 뒤, 주인공은 B구역에서 세 군데 정도를 돌아볼 계획이라고 설명해주고, 소녀는 그러면 오늘은 일찍 자 둬야겠다고 말하는데, 이를 들은 주인공은 마치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게 소녀의 소멸을 위한 여행이라 생각하니 그리 유쾌하진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소녀는 이미 죽어 영원한 안식을 가졌어야 할 유령인데 어째서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나 자신에게만 보이는지, 소녀의 영혼을 해방해줘야 한다면 왜 그 역할을 자신이 맡게 된건지 의문을 가지면서 이 일이 끝날 때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를 바란다.

다음 날 아침, 터미널에서 한시간 반 정도를 열차로 달려 B구역에 도착하고, 소녀는 B구역의 거리를 걸으면서 원래 있던 곳보다 많이 허름한 곳이라는 감상을 내놓고, 주인공도 마치 십 년 정도를 거슬러 온 것 같다고 생각한다. 목적지인 화재가 났던 상가 건물에 도착하자, 불이 건물 전체로 번진 탓에 싸늘한 분위기의 로비가 둘을 맞이한다. 6층으로 가야 했기에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주인공이 갑자기 폐소공포증 증세를 보인다. 소녀는 깜짝 놀라 3층에서 급히 내린 뒤 주인공을 밖으로 부축했고, 결국 계단으로 가기로 한다. 주인공은 유미와 영화관이나 레스토랑에 갈 때도 계단으로 올라갔기에 눈치를 못챘는데, 예전에는 이런 증세가 없었다면서, 이 몸의 주인이 가지고 있던 증상인가 추측했지만,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다.

우여곡절 끝에 비상구를 통해 5층까지 다다랐을 때, 소녀가 갑자기 죽음이 보인다고 말한다. 소녀는 미래의 죽음뿐만이 아닌, 사망 현장에서 과거의 죽음도 볼 수 있었던 것. 화재의 진원지였던 6층 사진관에 도착하자, 소녀는 마치 의사의 처방처럼 사진관에서 죽었던 남매의 상황을 읇조린다. 그러면서 이런 기분이 처음이 아닌 것 같다고 하는데, 소녀의 죽음이 화재와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한 주인공은 경로를 바꿔 C구역에 있는 다른 화재 현장을 먼저 가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두 시간에 걸쳐 도착한 것이 무색하게, 그곳에서는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했다. 이에 주인공은 마찬가지로 C구역에 있는 상점가로 향하고, 마침 주변에 있던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기로 한다. 소녀의 몫까지 2인분을 시키면 소녀를 못보는 주인장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식당 주인장인 노파[12]는 아무런 동요 없이 주문을 받는다. 음식이 나올때까지 조용히 소녀와 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노파가 음식을 내오면서 자신의 손녀인 민주의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주인공은 둘러대기 위해 중학교 때 친구였고, 멀리 전학을 가는 바람에 소식을 들으러 온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주인공은 계산대 한쪽에 놓여있는 민주의 사진을 보면서, 덧없어 보일 정도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13]

5. 3장

식사를 마치고 주인 할머니에게 거짓말을 해서 죄책감을 느낀 주인공은 이러다 지옥 가겠다며 중얼거리고, 소녀는 자신도 공범이니 그러면 자신은 지옥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대꾸한다. 주인공은 그 주인 할머니의 손녀가 화재 사건의 피해자였을 줄 몰랐다고 하고, 소녀도 하마터면 난처해질 뻔했다며 공감한다. 주인공이 그 할머니가 많이 쓸쓸해 보였다고 하자, 소녀는 좋은 곳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고, 주인공도 마음속으로 행운을 빌어준다. 소녀는 문득 자신의 가족도 그 할머니처럼 자신을 여전히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해하자, 주인공은 분명 그럴거라며 장담하고, 소녀는 그렇겠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아서 왠지 쌀쌀한 기분이라는 감상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상점가에서 30분 정도를 걸어 주택가 쪽으로 향한 주인공. 화재가 번진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무언가 정겨운 구석이 있다고 느끼는 주인공.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들어가면 수상해 보일까 싶어서 소녀만 혼자 집안으로 들어가고, 주인공은 밖에서 기다린다. 소녀를 기다리면서 부모님은 잘 지내실지, 본래 자신의 몸은 어떻게 되었을지, 빈 껍데기만 남아서 죽은 건 아닐지 걱정하며 과거를 회상하는데, 불길 속에서 누군가의 손을 붙잡아 끌고 나가는 기억이었다.

소녀가 들어갔던 집에서는 별 소득을 얻지 못하고, 다른 집에 한번 들어가보는 사이에, 주인공은 소녀가 들어간 집의 명패를 보고는 그을음을 지워내면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싶어 명패로 손을 뻗는데, 중학생 정도로 추정되는 한 여학생이 말을 걸어온다.[14] 여학생이 수상하게 여기자 주인공은 식당에서처럼 이 집에 살던 여학생과 중학생 때 친구였다고 거짓말을 하는데, 여학생은 그 이야기를 듣자 하기사 여기 수상한 사람이 올 리 없을 거라며 의심을 풀고, 주인공이 여기 살던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자 미나 언니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다고 말해준다. 어디로 갔는지를 물어보지만 비밀이라고 대답하고는 바빠서 가보겠다며 떠나간다. 여학생이 자신과 미나가 각별한 사이였다고 생각해서 선의의 거짓말을 해준거라 생각한 주인공은 미나가 좋은 곳으로 이사갔기를 빈다.

소녀가 상당히 오래 있다가 돌아오자, 주인공은 여기가 아니라 옆집이 화재가 났던 곳이라고 말해주는데, 소녀는 이미 기억이 났다며 더 확인해 볼 것이 없다고 한다. 돌아가는 길에 소녀는 죽음의 색을 보면서 자신은 화재 때문에 죽지 했고, 화재 현장에서 본 죽음의 색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기억이 떠올랐다고 한다. 중학교에 막 들어갔을 때 즈음, 밤에서 새벽 사이에 집에 불이 났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줬으나, 다른 가족들은 그러지 못했고, 자신이 기억해낸 죽음의 흔적들은 자신이 아닌, 가족들의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가족이 죽은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며, 자신을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고 자조하고, 주인공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주인공은 돌아오자마자 씻고 잠자리에 드나, 잠에 들지는 못한다. 소녀는 주인공이 잠자리에 들고 한참 뒤에야 씻으러 욕실로 향하는데,[15] 그때가 돼서야 주인공은 잠에 들 수 있었다. 잠에 든 주인공은 아무도 없는 거리를 혼자 걷는 꿈을 꾼다.[16]

잠에서 깨어나 시간을 보자 새벽 세 시.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온 주인공은 혹시 에어컨 온도 때문에 잠에서 계속 깨나 싶어 온도를 조금 올리고, 소녀가 집에 온 첫날처럼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물을 한잔 가져왔지만 피곤해서인지 소녀는 깨어나지 못했고, 설령 깨운다고 해도 소녀가 다시 잠들때 악몽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란 보장도 없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주인공은 소녀의 옆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금은 존재하지 않을 오래된 팝송 하나[17]를 흥얼거린다. 기억 속의 멜로디가 다 연주될 즈음에 소녀는 악몽에서 벗어나 편히 잠든 듯 했다.

이후 다시 잠든 주인공은 정오가 다 될 때 쯤에야 깨어난다. 식사를 준비하려고 냉장고를 열자 그제서야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했고, 소녀에게 지금 냉장고에 남은 게 없다고 말하고 급히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뒤 마트로 향한다. 마트에 도착하여 늘 사던 음식들을 카트에 담는데 전부 냉동식품이나 즉석식품 같은 영양가 없는 음식들이라는 것을 깨닫자 소녀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찾아볼까 싶어 카트를 다른 쪽으로 돌리려던 순간 쇼핑 중이었던 유미와 마주친다. 방학임에도 교복 차림이었기에 어디 갔다 오는 길이냐고 물어보자 유미는 첫 멘토링 날이라 아침에 애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답해준다. 유미는 주인공을 보자마자 피곤해 보인다면서 방금 막 일어나자마자 마트에 왔다는 것을 눈치챘고, 주인공은 계산대에 도착할 때까지 유미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주인공은 유미에게 멘토링은 어땠냐고 물어보고, 유미는 가르치는 데 소질을 느꼈다며, 장래에 선생님이나 할까 생각 중이라고 한다. 다만 장래희망에는 연구원이라고 썼고, 부모님도 그쪽으로 전공을 가지길 바라는데다가, 요즘 교사한다고 하면 뜯어말리기도 해서 고민 중이라며, 주인공이라면 어땠을거 같냐고 의견을 물어본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렇게 말해도 나는 네가 아니라며 답을 주질 못하고, 뻔한 대답이지만 너가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다며,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에게 있어 엄청 특별한 거라고 말해준다.

유미와 헤어지고 소녀와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주인공은 유미와의 일, 현지와의 일, 소녀와의 일 모두 고민이 깊지만, 먼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며 피곤함을 참고 데스크탑을 켜서 두번째로 가볼 사건현장을 조사한다. 그 전에, 소녀가 식사를 하고 난 뒤에는 침대 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양 쭉 침대 위에서만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당히 피로가 쌓일 테니 찾아갈 장소의 범위를 줄여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소녀에 대해 힌트가 조금 더 필요했다. 소녀를 흘긋 보면서 소녀의 교복을 언젠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그 언젠가가 언제인지, 어디선가가 어디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고, 소녀의 출신 중학교를 알면 접근이 쉬워지겠지만 소녀의 교복에는 교표도, 이름표도 없는데다가 웹 페이지를 아무리 뒤져봐도 소녀의 교복과 일치하는 학교는 없었기에 결국 처음처럼 사망사고가 일어난 현장을 직접 찾아가 봐야 한다는 결론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가 떠오른 주인공은 소녀에게 사진을 찍어본 적이 있냐고 물어보고, 소녀의 교복이 어느 학교의 교복인지를 알아보려 한다고 설명하며 태블릿의 카메라 기능으로 소녀의 모습을 찍어보려고 했으나 역시 소녀의 모습은 찍히지 않았다. 소녀는 결과를 확인하고는 허탈한 듯 침대로 돌아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문득 시간을 보자 시간은 여섯 시. 주인공은 평소 같았으면 소녀가 아니라 자신이 저 침대에 누워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텐데 유령 소녀 덕분에 성실한 척을 하고, 소녀가 아니더라도 유미나 현지같이 주변에 자신을 성실한 척 연기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하던 도중, 본인이 다른 사람을 연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어쩌면 이 말도 안 되는 세상이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해도, 나는 그리 놀라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갤러리에 저장된 사진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한 시간 정도를 더 조사하던 주인공은, 자신의 감에 따라 B구역에 있는 중학교에서 일어난 자살 사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는 생각으로 소녀에게 내일 나갈 장소를 보여준다. 소녀는 다른 곳은 생각 안 해봤냐고 물어보고, 주인공은 속으로는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제 너무 많이 걸었더니 피곤해서 내일은 여기만 갈거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끝나자 주인공은 여전히 엉성하지만 살짝 나아진 2인분짜리 저녁을 차렸고, 그렇게 방학의 첫 주말을 보내며, 이런 신기한 주말을 얼마나 더 보낼지, 그리고 이런 주말이 끝나면 자신은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생각한다.

다음 날, 주인공과 소녀는 토요일보다는 늦고 일요일보다는 이른 시간에 일어나 열차를 타고 B구역으로 향했다. 목적지를 향해 걷던 중 소녀는 중학교에서 어쩌다 사람이 죽었냐고 물어보고, 주인공은 옥상에서 투신자살했다고 대답해준다. 소녀가 예상대로 "그런가요"라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자, 주인공은 소녀가 자신을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대입하길 바랬는지 조금 주저하면서도 소녀에게 자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고, 소녀는 자신이 생전에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몰라도, 그리 멀리 있지는 않은 느낌이라고 대답한다. 이런 무거운 분위기와는 달리, 도착한 학교에서는 학교간의 친선 야구 경기가 열리고 있어 밝고 활발한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주인공은 중학교도 방학을 했을거라 생각해서 왔으나, 예상 밖의 상황을 보고 이래서는 학교에 들어갈 수 없으니 당황한다. 머쓱한 표정을 지은 채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학생의 모습을 보는데, 익숙한 느낌의 운동장과 그 전경이라고 생각한다. 소녀는 그저 공허한 시선으로 운동장을 바라보는데, 주인공은 그 모습을 보며 무언가를 떠올리는데, 바로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여름. 여느 때보다 치열하고 간절한 순간이었건만 어째서인지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 막연한 감정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 흐릿한 기억을 움겨쥐려 애쓰자 마치 수천 년 전의 기억같은 일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던 자신과, 그런 자신을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한 사람. 하지만 불완전하게 구성된 흐릿한 추억은 말 그대로 흐릿한 감상만을 남길 뿐이었다.

애타게 흐릿한 추억을 떠올리던 주인공을 본 소녀는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냐 묻고, 주인공은 뜬금없이 저기서 공 던지는 학생이 멋있어 보이지 않냐는 생뚱맞은 말을 한다. 소녀가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냐고 하자 옛날에 야구를 좋아했고 잘하기도 해서 물어봤다고 답한다. 일단 지금 들어가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태블릿을 열어 시간을 확인해보니[18] 아직 오후 1시. 수업이 끝나려면 적어도 4시는 되어야 하니 주인공은 소녀에게 주변을 돌아다녀 보자고 권했고, 소녀도 별 군말 없이 받아들인다.

정처없이 거리를 걷다가 '체스트넛'이라는 한 디저트 카페에 도착하자 주인공은 소녀에게 여기서 시간을 떼우다 가자고 권유하고, 소녀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지만 사람만 없으면 괜찮겠다고 승낙한다. 주인공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이 자신에게 하는건지 소녀 자신에게 하는건지 생각하며 가게 안을 들여다보고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손님들이 몰려올때쯤에 학교로 가자며 가게로 들어간다. 점원이 맞이하며 몇 명이냐고 물어보자 주인공은 고민하다 한 명이라고 답하면서 두 명같은 한 명이 이런 경우인가 생각한다. 디저트 카페에 남자 한 명이 오는 게 드문 일이라서 그랬겠지만, 점원은 마치 소녀의 존재를 인정해주려는 듯 재차 한명이 맞나 질문했고, 주인공은 바로 '네' 하고 답하고는 인적 드문 자리를 찾아 앉았다. 점원이 메뉴판을 건네자 주인공은 소녀에게 곁눈질로 한번 골라보라는 제스쳐를 취했고, 소녀는 몽블랑과 쇼트케이크를 고른다.

몽블랑과 쇼트케이크, 거기에 소프트드링크 두 잔을 주문하고 점원이 자리를 뜨자 주인공은 소녀에게 몽블랑 먹어본 적 있냐고 물어보고, 소녀는 영화나 책을 고를 때처럼 그냥 이름이 예뻐서 골라봤다고 대답한다. 소녀가 주변을 둘러보며 이런 곳에 자주 왔냐고 물어보자, 주인공은 자주까진 아니어도, 친한 애가 종종 같이 가자고 해서 몇 번 따라가 봤다고 대답한다. 굳이 디저트 카페 앞에서 멈춰선 것도 유미가 좋아하던 곳이고, 유미의 취미가 현지와는 달리 보통 여학생과 비슷하니 소녀도 이런 곳을 좋아할 것이라 생각해서 왔던 건데, 소녀도 몽블랑을 맛보고는 마치 본인이 살아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맛이라고 좋아한다. 이에 주인공은 지금까지 자기가 차려준 음식은 죽어있다고 확신하게 만드는 맛이었다고 자조하자, 소녀는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고 당황하고, 서로 큭큭 웃어댄다. 금세 접시를 비우자 주인공은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는 드립을 치며 먹고싶은 음식이 있다면 더 골라보라고 권하고, 소녀는 평소와는 달리 행복해하며 하나를 더 고른다.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카페에 들어서자, 점원의 따가운 시선을 뒤로하고[19] 거리로 나오자, 거리에도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소녀의 시선이 골목길에 있는 한 게임 센터로 향하고, 소녀의 관심이 인형뽑기 기계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자, 주인공은 어차피 어두워지기 전에 학교로 가면 경비원에게 의심을 받는다며 조금만 더 시간을 낭비하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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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뭘로 뽑아줄까 하고 묻자,[20] 소녀는 기계 아랫편의 흰색 곰인형을 골랐고, 기세등등하게 나선게 무색하게 주인공은 번번히 인형뽑기에 실패하고, 결국 자존심의 영역까지 넘어가 밤이 되어서야 겨우 인형을 뽑는다.

인형 하나에 얼마를 썼냐며 나무라는 소녀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경비의 눈길을 피해서 학교 안으로 들어갈 최적의 장소가 어딜지를 물색하다가, 학교 주차장과 연결된 담자락을 발견하고 바로 넘어간다. 소녀는 담 넘는 게 엄청 능숙해 보인다며 불량학생이라고 타박하지만, 주인공은 소녀도 능숙해 보인다며 대꾸하고, 소녀는 기분 탓이라며 부정한다. 학교 안은 교사들까지 모두 퇴근했는지 텅 비어 있었고, 발소리를 죽이며 옥상으로 올라가려 하지만, 옥상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자살 사건도 있었으니 잠궈둘만도 했고, 먼지가 수북히 쌓여있는 것으로 보아 잠군지 시간이 꽤 오래 지난 듯했다. 원래같으면 돌아가야겠지만, 주인공은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 소녀에게 교무실에서 열쇠를 찾아와 달라고 부탁한다.

몇분 뒤, 소녀가 열쇠를 찾아와 옥상 문을 열고 주변을 살핀 뒤 옥상으로 들어선다. 옥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익숙한 바람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난간 쪽으로 걸어가 철제 난간에 팔을 기대며 다시 익숙하다는 감각을 느낀다.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지도 잊은 채 익숙한 감각을 느끼며 왜 평소답지 않은 선택을 연발했는지 알 거 같다고 생각하던 중, 소녀가 이야기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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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당신에게 '죽고 싶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땐 어쩔 건가요?"

주인공이 "글쎄"라는 무미건조한 대답을 내놓자, 소녀는 허무한 목소리로 이런 얘기를 자신과 해봤자 의미가 없겠다며 자조하고는, 이곳에서 떨어진 여학생은 죽기 전까지도 자기가 누군가에게 건넨 '죽고 싶다'에 대한 대답을 되새겼던 것 같다고 말한다. 무슨 대답을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여학생이 내린 결론은 아무래도 '나는 죽어도 괜찮다'였던 것 같다면서.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주인공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이라며 조금만 더 시간을 낭비하다 가자고 부탁하고, 주인공은 매번 옥상에 앉아있으면 외계인이 교신하듯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며 계속 익숙한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이번에는 점점 또렷하게 목소리가 들려오며 익숙한 선이 이어지기 시작했고, 그 선은 소녀에게 도착했다. 소녀와의 이어짐에서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중학교 3학년이던 주인공. 당시 주인공은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겠다는 일념만으로 공을 던졌고, 그 해의 여름은 마치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 했으며, 유미에게서 느껴지던 기분좋은 두근거림이, 자신에게서도 느껴졌다. 무언가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공을 던졌고, 결승까지 올라갔던 것 같은데, 귓가에 멤도는 익숙한 시선과 응원 소리를 들었지만 그 음성은 따뜻했던 기억에 뒤섞여 사라져갔다. 몇 분 정도를 그렇게 난간대에 기대어 있다가 소녀가 난간에서 팔을 떼자, 그대로 서로를 이어주던 실도 툭 끊어져 버렸다.

계단을 내려가며 돌아가던 중, 소녀가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며 말을 꺼낸다. 하지만 그게 누군지 묻는 주인공의 대답에는 말 그대로 기억나는 사람이 있을 뿐이라는 애매한 말만 하고는 주인공의 손을 잡는다. 역에 도착할 때까지는 그저 침묵만이 이어졌고, 역에 도착해 A구역으로 돌아가는 호버크라프트를 기다리던 도중 소녀가 이름도 생김새도 기억나지 않지만 '있었다'는 것만큼은 기억나는 누군가가 있다고 다시 말을 잇는다. 다른건 몰라도 그사람의 온기만큼은 기억나며, 자신은 그 온기를 무척 좋아했던 것 같다며,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환경 미화 로봇이 소녀 주변으로 다가왔고, 로봇이 소녀에게 20cm 가까이 근접했을 때, 로봇이 갑자기 고장난 것처럼 불규칙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녀는 자기 주변으로 다가온 로봇들은 모두 저렇게 되어버렸다며,[21] 살아있을 때 자기를 피하던 길고양이 같다고 평했다. 주인공은 다른 건 기억이 안나도 고양이가 자기를 피하던 건 기억이 나는 거냐며 농담하고, 소녀는 그렇다고 웃으며 고양이를 만지려 할 때마다 정전기가 일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로봇들이 이렇게 되는 것도 자기 몸에서 정전기 같은 게 나서 그럴 수도 있다며 추측한다.

그 이후에는 잡담을 하면서 집에 돌아갔고, 주인공은 소녀가 말한 소중한 사람이 누굴까 신경쓰면서, 소녀가 이곳을 떠돌게 된 것도 그 사람과 관련이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하지만, 소녀의 성불에 대한 힌트 이상으로 신경을 쓰면서 자료를 조사하면서도 소녀가 이야기했던 존재에 대해 곱씹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료를 찾던 중, 현지에게서 알아낸 게 있냐는 문자가 도착한다. 주인공이 '조금'이라는 한마디를 보내기가 무섭게, 현지의 알아낸 게 있으면 곧바로 연락을 주기로 하지 않았느냐는 항의 문자가 돌아온다.[22] 현지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바로 문자 대신 전화가 걸려오고, 연락이 늦은 것에 대한 가벼운 항의와 함께 만나서 이야기 할 게 있으니 내일 한 시에 학교 옥상에서 만나자는 약속이 잡힌다. 주인공이 굳이 학교 옥상에서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나 물어보지만, 현지의 장소가 신경쓰이냐는 말에 조용히 한숨을 쉬고는 오후 한 시에 옥상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유령 근처에서 로봇들이 오작동한다는 정보를 전해주는데, 현지는 이미 알고 있다는 뉘양스를 보였고,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는걸로 하게 되었다.

다음 날, 주인공은 10분 먼저 도착하여 옥상 난간에 팔을 기대며 현지를 기다리는데, 여러므로 익숙한 장소라는 감상과 함께 몇달 전의 과거를 회상한다. 다만 지금과의 차이점이라면 그당시에는 주인공이 팔을 얹은 정도가 아니라 온몸을 떠맡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신경 쓰지 마."

현지가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는 주인공을 발견했을 때, 주인공이 가장 먼저 했던 말이다. 말로는 떨어지진 않는다고 했으나, 마음속으로는 떨어져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현지는 위험하다며 마음을 졸이고 있는 와중에, 주인공은 이렇게 해야 잘 들린다는 궤변을 내놓고, 뭐가 들리냐는 현지의 물음에는 외계인이 부르기라도 하는건가라며 얼버무린다. 실제로는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무언의 아우성을 듣고 있었고, 작년에 비해 줄어들긴 했지만 가끔씩 들려오면서 스쳐 지나가는 모호한 과거의 감각들이 숨이 막히도록 답답했고, 그럴 때마다 주인공은 난간에서 이러고 있던 것. 현지가 옥상 입구에서 난간쪽으로 조금씩 다가오자 본인이 원래 감정 기복이 심하다며 내일쯤 괜찮아지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지만, 현지는 계속 난간에서 내려오자고 설득했고, 이에 주인공이 내려오려고 자세를 바꾸는 순간, 갑자기 바람이 불어 몸의 균형을 잃어버렸고, 그대로 건물 아래로 떨어지려는 순간...

주인공이 떨어진 곳은 건물 아래가 아닌, 현지 위였다. 다행히 현지와 주인공 모두 다친 곳은 없었고, 주인공에게 들리던 무의식의 외침도 가라앉았다. 상황이 어느정도 수습되자, 주인공은 현지에게 옥상에 왜 올라왔냐고 묻자, 현지는 오히려 자기가 묻고 싶은 말이라고 대답한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서인지 주인공은 더 캐묻지도 않고 유미에게 이 일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고는 내려가려는데, 현지는 매몰차게 거절한다.[23] 그러면서 부탁을 하고 싶다면 자신의 부탁도 들어달라는데, 현지의 단호한 눈빛을 보아하니 다른 길이 없다 생각한 주인공은 현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정하고 다시 난간으로 향해 난간에 등을 기대고는 현지에게 과거에서 미래로 온 이야기, 계속 과거로 돌아가려고 시도했으나 진전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제 부탁을 들어줬으니 유미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했지만 현지는 하나만 부탁한다고는 안했다며 하나의 부탁을 더 들어주라고 요구한다.
"앞으로는 '신경 쓰지 마' 라는 말, 하기 없기예요."

매번 말 걸려고 할 때마다 그랬는데 같은 동아리 부원인데 너무하다며 이제 사정도 알게 되었으니 신경 써도 받아주라는 뜻이었다.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지만 주인공은 별 수 없이 받아들였고, 집에 가는 길이 같다며 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현지가 과거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에 주인공은 그렇다고 대답하자, 현지는 이렇게 말했다.
"저, 그 일 도와줄 수 있어요."

6. 4장

회상이 끝날때쯤 현지가 도착했다. 방학 중임에도 교복 차림의 현지를 보고는 복장에 대해 질문하려 하나 편해서라는 답이 돌아올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어 대신 왜 옥상에서 만나자고 했냐는 질문을 한다. 현지는 그야 여기가 아니면 안된다며 전자레인지 정도 크기의 텔레이도스코프라는 이름의 기계를 건네며 옥상 위의 안테나와 이걸 연결시켜야 한다고 한다. 텔레이도스코프와 안테나를 연결하자, 텔레이도스코프를 작동시키는데, 뭐를 하는 거냐는 주인공에 질문에 현지는 시간은 아날로그 형태의 정보이므로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 신호로 변환하고 있다고 대답하고, 전혀 이해하지 못한 주인공은 그저 현지가 시키는대로 텔레이도스코프의 조정을 도왔다. 조정이 끝나자 현지는 VR 헤드셋을 개조한 것 같은 헤드셋을 하나 건넸고, 주인공이 헤드셋을 쓰자 텔레이도스코프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헤드셋에서 들려오던 전자음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며 몸에서 자기 자신이 떨어져나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고, 마치 주마등이나 파노라마같은 기억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재생된 과거는 현지가 오컬트부에 입부 신청서를 넣었을 때였는데, 얼떨결에 2학년이 되어 오컬트부 부장을 맡게 된 주인공은 부원을 모집중이었고, 당시 현지는 급히 신청서만 내밀고는 사라졌다. 이후 현지가 부실을 둘러보면서 주인공과 이야기를 하던 중, 다른 부원들은 언제 오냐는 질문에, 주인공은 부원은 이게 전부고, 5인 이하인 동아리는 폐부되지만 유령 부원이 있어서 명목상의 유지는 가능하고, 마음에 안 들면 다른 동아리로 옮겨도 된다고 다른 동아리를 권유하지만, 유령 부원뿐인 오컬트 동아리라 마음에 든다면서 현지는 그대로 오컬트부에 눌러앉는다. 현지가 연구 테마를 물어보자 주인공은 OBE라고 대답하고, 논문이라도 내냐는 현지의 기대 섞인 대답에 주인공은 아니라고 하고는 말을 꺼낸다.
"직접 해보고 싶어서, 유체이탈이라는 거."

여기서 이때의 기억은 끊기고, 다음 장면이 필름처럼 움직이며 방학식 일주일 전의 기억이 출력되는데, 학예제에서 판매할 인형들을 만드는 기억이었다. 어차피 생산적인 활동을 할 것도 아니니, 돈이라도 벌면 좋다는 현지의 주장에 따라, 수익금은 반반씩 나눠갖기로 하고 만들던 것이었는데, 현지가 바느질을 하다 여러번 손을 찔리자, 엄마 손은 약손 미신처럼 현지의 손을 만져주는 기억이었다. 완성된 인형들을 올려두고 '생각보다 그럴싸하게 생겼네'라는 말과 함께 다음 기억으로 넘어간다.

이번에는 3개월 전쯤의 일로, 현지에게 비밀을 털어놓은 다음 날의 기억이었다. 현지는 주인공의 비밀을 들은 다음 날부터 텔레이도스코프라고 이름붙인[24]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고, 주인공은 쓰임새도 모른 채 제작을 돕고 있던 것.

회상이 순식간에 지나가며 시간 개념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는데, 현지가 다급하게 주인공을 부르자 뭔가를 떠올릴 새도 없이 공간이 일그러지며 희미해졌던 감각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헤드셋을 벗고 어떻게 된거냐고 묻자 현지는 주인공이 텔레이도스코프를 작동시킨 50초 뒤의 미래로 유체이탈한 것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50초치고는 너무 긴 시간이었던 것 같다고 의아해하는데, 그 50초동안 자신이 시간 개념을 잃어버렸다고 판단한다. 현지가 50초 뒤의 미래로 오는동안 무엇을 봤냐고 묻자, 주인공은 그냥 주마등처럼 기억이 휙휙 지나갔다고 답하는데, 이에 현지는 기억을 회상한 게 아니라, 주인공이 정말 그곳에 있었던 거라고 설명한다. 다만 지금은 이동한 시간의 간격이 너무 짧아 진동이 순식간에 끝난 것 뿐이라고 한다. 아직 수식이 완성되지 않아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이렇게 짧은 시간뿐이라고 말하고는, 주인공에게 기억난 게 있는지 물어본다. 주인공은 현지와 처음 만나고, 인형이나 텔레이도스코프를 만들었던 기억을 말해주고, 하나는 기억이 잘 안난다고 말하자, 현지는 주인공의 진술을 기록하고는 50초로 5개월 정도의 진동이 가능하다며, 첫 구동치고는 만족스럽다는 평가를 내린다.

이렇게 되면 주인공은 현지를 처음 만났을 때 말한 유체이탈을 하고싶다는 소원을 이룬 셈이 되는데, 유체이탈도, 시간여행도, 유령도 있고, 자신 앞의 여학생은 시간여행이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지금 자신이 서있는 곳이 꿈만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현지에게 이걸 어떻게 만들었냐고 묻자, 로봇 이야기를 했을 때 유령의 주변에서 전기 신호가 간섭을 받을 것 같다는 가설을 세웠고, 유령이 3차원 이상의 존재라 눈에 보이지 않고, 3차원 좌표로 나타내지 못하는 제 3의 파동이 전기장, 자기장에 수직하게 진동을 하여 로봇의 전자기장에 간섭을 하는데, 반대로 생각하면 그 전자기장이 미지의 파동에 간섭할 수 있으니, 그 간섭된 파동을 타고 주인공의 영혼이 50초 뒤의 미래로 날아온 것이라고 한다. 즉 영혼은 시간축을 따라 진동하는 새로운 파장이고 슈뢰딩거 방정식에서 파동의 위상이 변하는 방향이 반대가 될 수 있으므로, 미래에서 과거 방향으로 영혼이 흐르는 것(=주인공 기준으로는 유체이탈을 통한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소리다.

주인공은 여기가 오컬트부인지 양자역학 연구부인지 헷갈리기 시작했으나,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듣고도 내릴수 있던 결론은 딱 하나,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다. 다만 현지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할 뿐, 생각할 게 많아서 아직은 안된다고 한다. 완벽하게 시간여행이 가능해질 때가 언제인지도 아직은 불명. 현지는 그렇게 말하며 옥상 바닥에 누워서는 주인공에게 유령과 진전이 있냐고 묻는다. 주인공이 어느 정도는 그렇다고 하자 그것도 여태까지 자기한테 비밀로 했다며 섭섭해한다. 그러면서 배고프다며 텔레이도스코프를 회수하여 부실에 돌려놓고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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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현지에게 튀김우동 한그릇을 사주며 그런 기계를 어떻게 만든거냐며 감탄을 내놓았는데, 현지는 주인공이 조사해준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서 주인공이 없었으면 못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주인공은 겸손하다고 말하고는 완성되면 과거로 갈 수 있는거냐고 묻자 아직 생각해둬야하는 가설이 있다고 한다. 유령 상태로 유체이탈을 해서 시공간을 이동하면 주인공이 과거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불가피하게 기억 상실이 일어나는 듯하고, 주마등을 통해서 기억을 되찾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나, 대신 여기에서의 기억을 잃을수도 있다고 한다. 주인공이 어느정도냐고 묻자. 현지의 대답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아마도 거의 다요."

아마 유체이탈이 끝나면 미래세계에 있었다는 사실 정도만 어렴풋이 기억할테고, 지금으로서는 해결 방법도 없다고 설명한다. 거기에 주인공의 영혼이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한다고 해도, 그 영혼이 들어갈 몸을 찾는 게 문제라고 한다. 최악의 경우 주인공이 원래 자기 몸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으니 이 상황도 가정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고민한다. 주인공이 만약 유체이탈을 해서 과거로 가면, 여기있는 몸은 어떻게 되냐고 묻자, 그 문제도 있었다며 당황한다.시체 치우는건 확실히 그렇겠다며 말하자 점심먹는데 시체가 뭐냐며 핀잔주는건 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현지가 재미있는 문제를 내겠다며 우리가 지금 몇 차원에 있는건지 물어본다.[25][26]정답은 4차원. 주인공은 3차원 너머의 차원이 너무 모호하다며 그게 무슨 소린지 묻는다.

현지는 1차원은 말 그대로 직선이고 따라서 1차원에 존재하는 어떤 두 점에 대해 한 직선 위에 있다는 말이 유의미하지 않지만, 2차원은 평면이고 한 평면 위에 서로 다른 두 직선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임의의 두 점이 한 직선 위에 있다는 사실이 유의미해지게 되고, 마찬가지로 3차원에서도 두 점이 한 평면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유의미해지고,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은 무의미해진다고 답한다. 이에 주인공은 우리가 사는 우주를 하나의 공간좌표계로 본다면 우리는 모두 같은 공간에 존재하게 되고, 따라서 우리는 3차원에 사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고, 현지는 주인공에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더니 혹시 4차원이라는 말을 들어봤냐고 묻는다. 주인공은 우리가 존재하는 공간좌표계에 시간축을 더한 게 4차원이 아니냐고 묻고, 현지는 긍정하며 그럼 지금의 선배가 30분 전의 선배가 있던 곳으로 갈 수 있냐고 물으며 만약 주인공이 같은 공간에 존재했다면 갈 수 있어야 한다며, 30분 전의 주인공과 지금의 주인공은 다른 공간에 위치하고 있고 따라서 우리가 사는 세계는 4차원의 시공간이며, 마찬가지로 같은 시공간에 있다는 사실은 무의미하지만 5차원에 존재한다면 같은 시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유의미해지고 5차원의 존재는 유령처럼 시간을 움직일 수 있다고[27] 덧붙인다. 그러면서 현지는 지금 우리가 사는 차원이 4차원이기에 같은 시공간에 있다는 사실은 무의미하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사실은 유의미하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니까, 같은 공간에 있는 건 언제나 의미 있는 일이에요. 이 세계가 3차원이었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선배와 제가 같이 식당에 있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거라고요."

결론이 뜬금없긴 했지만, 괜찮은 결론이라고 생각하며 마침 현지가 식사를 마치자 주인공은 현지와 식당을 나와 다음번에는 알아낸 게 생기면 꼭 연락을 주라고 당부하고 헤어진다. 그리고 주인공의 머릿속에는 현지가 내렸던 결론이 좋은 울림으로 남으며 마음속에서 계속 멤돌았다.

그 이후, 주인공은 며칠동안 소녀와 함께 계속 리스트에 적힌 곳을 찾아다녔다. 죽음을 마주하는 비일상적인 일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있었고, 리스트에는 취소선이 늘어났으나 상황은 계속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나마 알아낸 것은 소녀가 말한 그 따뜻한 사람은 소녀 또래 나이의 학생이라는 점과 소녀가 자신의 손을 잡는 데에 완전히 익숙해졌다는 점 정도.

어느 날에는 D구역에 있는 소각장을 찾아갔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도착했건만 이번에도 소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온종일 걸어 땀에 젖은 주인공과는 달리, 소녀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는데, 소녀의 말에 의하면 덥다는 건 느껴도 땀을 흘리는 일은 없으며, 유령이 되면 아예 생리활동 자체가 멈춰버리는 모양이라고 한다. 그렇게 잡담을 하며 터미널로 돌아온 와중에, 막차 시간을 헷갈리는 바람에 A구역으로 돌아가는 막차가 15분 전에 떠나버렸다. 잠을 잘만한 장소를 찾기에도 최근에 식비, 교통비 등으로 인해 지출이 늘어나는 바람에 열차표 살 돈밖에 없는 상황. 내일 용돈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오늘은 별수없이 역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 역에서 음료수를 뽑아 마시면서, 주인공은 소녀에게 궁금한 게 하나 있다며 물어본다. 유령은 생리활동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유령은 눈물을 흘리나 궁금해진 것. 소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런 적이 없던 것 같다고 답한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역에 불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하고, 주인공이 태블릿을 꺼내는데 하루종일 GPS를 켜두는 바람에 태블릿이 방전되어 버렸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주인공은 소녀에게 사라지게 된다면 그전에 하고싶은 일이 있냐고 물어보고, 소녀는 생각해본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생각해볼수는 있겠다며 잠시 생각하더니 하고싶은 일들을 늘어놓기 시작하고, 주인공과 소녀는 그중에서도 가장 하고싶은 일을 고르기 시작한다. 소녀는 이러니까 유언장을 쓰는 것 같다고 평하고, 자신이 생전에 유언같은 것을 남겼을지 궁금해한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소녀가 정한 소원은, '누군가와 함께 아름다운 것을 보며 사라지고 싶다'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마도 예전에 말한 그 '따스함'의 주인공. 그러고는 소녀가 이번에는 주인공의 유언을 듣고 싶다고 한다. 그러자 주인공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노부부의 모습을 회상하며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이고 싶다' 정도가 될 거 같다고 결정한다. 소녀는 낭만적이라는 감상을 내놓고는 점점 잠에 들기 시작하는데, 점점 침묵이 이어지다가 주인공이 소녀에게 소녀가 사라지면 자신이 그 온기의 주인공이 될수는 없어도, 아름다운 것을 함께 볼수는 있을까하며 묻자, 소녀는 그런 이야기는 뭐냐며 딴청을 피우며 웃는다.

그러던 중 캔에 든 음료를 다 마시자, 주인공이 캔을 던져서 쓰레기통으로 정확히 넣는다. 소녀가 야구를 잘했다고 한건 거짓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하자, 머쓱해하며 야구에 관심이 있냐고 물어보고, 글쎄요라는 대답과 함께 몸을 쭈그리고 고민하며 잠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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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자신의 어께에 기대 잠든 소녀를 보며, 그동안 가지고 있던 동질감같은 감정이 아닌 다른 감정을 느꼈으나, 소녀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존재라며 감상을 지워버리고는 잠을 청하려 한다. 하지만 소녀가 잘때 늘 지니고 있던 인형이 없어서인지[28] 소녀가 다시 악몽에 시달리며 주인공의 팔을 붙잡는다. 잠들기도 힘들어진 주인공은 예전처럼 팝송을 흥얼거렸고, 소녀는 얼마 안가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대신 주인공이 밤을 새긴 했지만.

다음 날, 소녀가 깨기 전에 표를 끊어온 주인공은 그대로 소녀와 함께 첫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고, 씻는 것도 잊은 채 집에 오자마자 잠들었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깨어난다. 하루종일 먹지 않아 배고팠던 주인공은 냉장고를 열어보지만 텅 비어있었고, 별수없이 다시 자고 일어난 뒤에 마트를 다녀오기로 한다. 일어난 뒤 마트에 가려 하자 소녀가 같이 가기를 원한다. 죽음의 색이 보이기 때문에 평소에 소녀가 밖에 나가기를 꺼렸고, 사건현장 조사 이외의 일로 나가는건 처음이었기에 의아해하면서도 같이 나가기로 한다.

마트에 도착하자 소녀는 자신이 장을 봐도 되냐고 묻고, 얼떨결에 주인공이 승낙하자, 소녀는 주인공을 이끌고 식료품 코너 쪽으로 간다. 이 시대는 요리를 직접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기에 사람이 별로 없는 코너였다.[29] 소녀의 흐름에 따라 장을 다 보고 나자, 식비가 많이 절약될 수 있다는 말에 주인공은 소녀가 자신이 역에서 돈이 부족하다는 말을 신경쓰고 있었기에 같이 마트에 온건가 하는 생각을 한다. 슬슬 돌아가려던 중, 장을 보던 유미와 다시 마주친다.

유미에게 유령 관련 이야기는 하려고 하지 않았기에, 그새 뭐하고 지냈냐는 유미의 질문에 주인공은 그럭저럭 지냈다고 얼버무린다.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지던 중에, 유미가 카트에 담긴 물건들이 많이 달라졌다면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 적당히 둘러댈 말을 찾지 못해 당황하던 차에, 유미가 혹시 집에 가족이라도 오는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거 같으니 집에 다른 사람이라도 있다거나 하는거 아니냐고 정곡을 찌르고, 결정적으로 집에 다른 여자라도 있냐고 묻는다. 주인공은 최대한 당황한 티를 숨기며 강하게 손사례를 치고, 유미는 농담이라며 웃어넘긴다. 그러면서 만약 그랬으면 지금도 같이 있었겠다는 말에 주인공은 또 당황하며 소녀의 눈치를 살핀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계산을 끝내고 밖으로 나서자,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난감해하던 주인공에게 유미는 자기는 부모님이랑 같이 쓰면 된다면서 자신의 우산을 빌려줬고, 다음에 보자며 2층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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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유미가 떠나자 감이 좋은 여자라고 말하고, 주인공과 함께 우산을 쓰고 돌아간다. 돌아가던 도중 소녀의 팔이 젖는 게 신경쓰여서인지 주인공은 우산을 소녀 쪽으로 더 기울였고, 소녀는 우산을 그렇게 쓰고있으면 바보 취급 받지 않겠냐며[30] 걱정하지만, 주인공은 어쩔 수 없다며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와 어께를 맞댄 채 빗속을 걸어가는 순간이 이상하리만치 그립게 느끼는 주인공. 이렇게 누군가와 우산을 쓰고 가는건 오랜만이라고 하자, 소녀가 그때도 이렇게 우산을 씌워줬냐고 한 물음에는 오히려 반대였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비에 젖은 탓인지 싸늘했어야 할 소녀와의 접촉은 따스하게 느껴지는 착각을 느끼는데, 그 따스함이 분명 언젠가, 어디선가 존재했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떠올린다.

집에 돌아오자 소녀는 주인공이 훨씬 많이 젖었으니 먼저 씻고 있으라고 하고는, 식사 준비를 하겠다고 한다. 소녀를 먼저 씻게 하려고 했지만 어쩔수 없다는 생각과 함께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소녀가 식사 준비를 거의 끝내고 있었다. 주인공이 어쩌다 요리할 생각을 하게 되었냐고 묻자 소녀는 갑자기 레시피가 떠올랐을 뿐이라고 답한다. 소녀는 맛있을지는 잘 모르겠다고 걱정하지만 주인공은 마치 자신을 위해 딱 준비된 레시피로 만들어진 요리같다고 느끼며 맛있게 먹는다. 나중에 혼자서라도 만들고싶다며 레시피를 알려줄 수 있냐고 묻자 소녀는 다음에 시간날때 알려주겠다고 한다.

식사 후 뒷정리까지 마친 뒤 소녀가 샤워를 하고 돌아오자, 빗줄기는 점점 더 거세져 있었다. 소녀는 빗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면서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다고 한다. 비가 오는 날에는 항상 누군가가 곁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에 주인공은 레인 맨 같다는 말을 한다. 소녀가 의아해하자 주인공은 아마 여기서는 통용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기억 속의 수호천사 같은 게 있다며 둘러댄다. 그런데 소녀는 언제 들어본거같은 포근한 단어라고 느끼자 잘 안쓰이는 말이라 아마 아닐거라고 부정한다.

장마는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고 그에 따라 소녀의 기억 찾기도 잠정 중단이 되어버렸다. 그 사이 집에서 소녀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등 함께 일상을 보내게 된다. 현지가 문자를 보내기도 했지만 텔레이도스코프 완성도 딱히 진전이 없었고, 그렇게 비일상과 일상의 사이에 끼여버린 단조로운 일상을 주인공은 익숙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며칠 뒤, 강하게 내리꽂던 빗줄기는 부슬비 정도로 약해졌고, 주인공은 이참에 기분 전환이라도 할 겸 산책이나 나가기로 한다. 서머 카디건 하나를 걸치며 나가려는 채비를 하자 소녀가 자기도 여지껏 심심했다며 같이 나가려고 하는데, 그런 소녀를 보며 유령의 얼굴에서 생기가 느껴진다는 착각을 하며 평범한 일상의 색이 덧씌워진 소녀의 모습에선[31]유령의 흔적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독백한다.

2인용 우산을 쓰고 나오면서 주인공의 눈에 물웅덩이 너머로 우산을 쓴 자신의 모습이 비춰진다. 투명한 물웅덩이에서도, 가게 유리창에서도 비치지 않는 소녀의 모습이 왜 자신의 눈에만 새겨지는 걸까 생각하던 차에, 소녀가 비가 와서 안 좋은 점이 하나 있단 말을 꺼낸다. 손을 잡지 못해서라는 대답을 듣자, 주인공은 말 그대로의 의미 이상을 갖지 않다는걸 알면서도 어색한 얼굴색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소녀가 어디로 가는지 질문하자, 주인공은 기분 전환을 위해 나왔으니, 그럴 수 있는 곳으로 간다고 말하며, 맨 처음 유미와 왔던 크레페를 파는 노점에 도착한다.

소녀는 크레페를 맛보자 따라오길 잘했다며 만족스러워하고, 주인공은 내심 뿌듯해하면서 묘한 감정이 선을 이루는 것을 느꼈고, 그 감정선이 미묘한 종착지를 향해 가고 있음을 실감하나, 자신과 소녀의 감정선이 이루는 종착지가 정반대 지점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애써 크레페를 먹으며 감정을 지워버리려 한다. 그렇게 크레페를 먹으면서 걷던 도중, 소녀가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고는 비가 그쳤다고 하자, 주인공은 우산을 접는다. 크레페를 다 먹었을 때쯤, 주인공의 옆으로 네댓 살 정도의 나이차가 있어보이는 남매가 스쳐지나갔고, 그때쯤 소녀가 비도 그쳤다며 다시 주인공의 손을 잡는다. 그러자 서로 부끄러운 듯 고개를 치켜들었고, 바라본 하늘에는 작은 무지개가 떠올라 있었다. 주인공과 소녀는 그렇게 가로등마다 펼쳐진 무지개를 따라 걷는다. 주인공에게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무지개를 연달아 본 것도, 위를 향해 치켜든 소녀의 모습을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장마는 끝이 나고 잠잠했던 더위도 다시 얼굴을 들이밀어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렸다. 하지만 소녀의 죽음을 찾는 일은 슬슬 끝을 보이고 있었다. 주인공과 소녀는 열차로 네 시간 정도를 달려 F구역에 도착했고 버스로 갈아타서 한 시간 정도를 더 달린 뒤 30분 정도를 걸어 한 다리에 도착했다. 시체가 발견된 곳이 이 다리 아래였는데, 문제는 사실상 여기가 확인이 가능한 마지막 장소였다. 두 군데가 더 남아있긴 하지만 그 두 곳은 발전소 화재로 폐쇄된 E구역에 있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 소녀는 죽음의 색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고, 주인공은 다리 난간에 기대어 흘러가는 강물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학교 옥상 안테나로는 텔레이도스코프의 출력이 부족해서 한 번에 좀 더 많은 전자기파를 송신할 장소가 필요해 한번 찾아봐달라는 부탁 때문이었다. 자기에게 부탁해도 별 소득은 없긴 하겠지만 찾아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현지가 한마디를 더 덧붙인다. 유령 소녀를 텔레이도스코프로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문제는 이것도 출력 문제가 해결되어야 가능했다.

아무튼 더 알아낸 게 있으면 문자를 달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자, 소녀가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소녀는 여기서 죽음의 색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시체가 발견된 곳이 여기긴 하지만, 죽은 뒤 여기로 떠내려왔다는 추측 아래 소녀는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보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상류로 향하면서, 소녀는 여학생의 사인을 물어보는데, 주인공은 사고사이며, 아마 익사인 것 같다고 대답한다. 소녀가 다른 정보는 없냐고 물어보자, 자살이 아닌가 추측했지만, 경찰에서는 사고사로 결론이 났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강의 중상류쯤에 올라오자 쉬면서 기사로 사건을 좀 더 조사해보는데, 여학생의 사망 추정일은 8월 16일, 발견날짜는 8월 22일로, 시신이 물에 심하게 불어 있어 부검은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8월 16일부터 20일 사이에 폭우가 내려서 실족사했다고 결론이 났다고 하는데, 소녀는 그렇다면 지금쯤 죽음의 색을 발견했을 거라며 이상해한다. 그러면서 세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하는데, 첫 번째는 여학생이 죽은 장소가 이곳이 아니라는 것, 다시말해 이곳은 누군가가 여학생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곳일수도 있다는 추측이었다. 두 번째는 여기서 발견된 시신이 소녀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 자기 자신의 죽음의 색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 가능성은 바로 위의 두 가지 가능성이 동시에 만족하는 것. 가설을 정리하자면 소녀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해 강에 버려졌고, 시신이 뒤늦게 발견되어 조사가 시작되었으나 진범을 찾지 못해 사고사로 처리되었다. 그래서 소녀는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못한 게 원한이 되어 이곳을 떠도는 유령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인데, 소녀는 그저 가능성이라고 일축한다. 주인공은 이 가설이 맞다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하고, 진범을 찾아야 하냐고 하자 소녀는 단호하게 그런 위험한 일은 생각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막는다.
"......그치만, 억울하겠죠?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는데, 그 사람은 죗값조차 치르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다면."

하지만 그러면서도 감정을 숨기지 못한 소녀는 그런 질문을 하고, 주인공은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아마 그럴거라고 답한다. 주인공은 이때는 알지 못했다. 이 질문이 그토록 중요한 질문이었을 줄은. 이야기가 끝나고 소녀가 벤치에서 일어나려 하자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이고, 주인공은 걱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더 걷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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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40분 정도를 더 걸어 수원지까지 도착해버렸고, 수원지는 풀도, 나무도 없이 칙칙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적당히 앉을 만한 평평한 바위를 찾아 앉아서 잡담을 나누며 쉬던 차에, 소녀가 검은 길고양이를 발견한다. 주인공은 미래로 넘어온 뒤로 길고양이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소녀에게 고양이가 소녀를 볼 수 있나 물어보고, 소녀가 고양이에게 다가가 손을 흔들어 보이지만, 고양이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소녀는 고양이를 안아 올렸고, 이번에도 고양이는 별 반응이 없었다. 푹신푹신한 줄 알았는데 약간 까슬까슬하다면서, 살아있을 때는 항상 도망갔는데, 이렇게 만질 수 있게 되자 유령이 되어서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주인공이 소녀와 고양이에게 다가가려 하자, 고양이가 갑자기 반응을 보이며 소녀의 품에서 떨어져 나가 어디론가 향했고, 소녀와 주인공은 고양이를 따라가보기로 한다. 주인공은 소녀가 멈춰설 때까지만 해도, 이 길목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같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7. 5장

고양이를 뒤쫒아 도착한 곳은, E구역으로 향하는 경계 구역이었다. 원래는 철조망 때문에 넘어갈 수 없지만, 사람 한 명이 지나갈 만한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아마 고양이도 이 구멍을 통해 넘어간 듯 했다. 주인공은 아무도 없을 테니 들어가 보겠냐고 제안하고, 소녀는 잠시 고민하다 E구역으로 향한다. E구역으로 들어가자,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도시가 맞이했고, 주인공은 종말을 맞이한 세계에 불시착한 것 같은 느낌을, 소녀는 며칠 전에 본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를 떠올리며 영화 세트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주인공은 내일 세계가 멸망하면 이런 모습일까 하고 추측하고, 소녀는 어쩌면 머나먼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며, 이런 곳에 혼자 들어오면 견디지 못했을거라고 말한다. 왠지 예행연습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면서.

길을 걷다가 소녀가 아까 말했던 E구역에서 말한 사건들은 어떤 사건들이었냐고 묻자, 주인공은 둘 다 연쇄 살인 사건이었다고 말해준다. 범행 현장을 다 태워 버리는 바람에 신원도 거의 밝혀지지 못했고, 범인도 아직 수배중이라고 덧붙이자, 소녀는 어쨌든 범행 현장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며 찾아보자고 요청한다. 하지만 태블릿을 켜보자 여기는 역외권이라 사용이 불가능했고, 일단 현지가 말한 텔레이도스코프를 설치할 장소를 찾기로 한다. 그러던 중 아까 쫒던 고양이를 발견하고, 고양이를 다시 따라가보자 폐쇄된 낡은 운동장이 있었다. 무언가가 자신을 안쪽으로 이끈다는 느낌을 받은 주인공은 운동장 안으로 들어가고, 이곳이 야구장이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소녀는 피칭 머신 쪽에서 발견한 고양이에게 다가가고, 그러는동안 주인공은 그라운드 전경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주인공은 오랜만에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나를 부르고 있었다.
발걸음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지만, 그 소리는 착각처럼 나의 귀를 멤돌았다.
한 걸음, 발걸음을 내딛자 흙바닥과 신발 밑창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해져 있던 기억 중 하나가 빛을 되찾으려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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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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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뜨자 그 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정적에 휩싸여 있었고, 이대로 있다가 막차를 놓칠 것 같다는 생각에 주인공은 소녀가 있는 쪽으로 향한다. 소녀에게 가보자 소녀는 꽃이 피어 있다며 감탄하고 있었다. 막차까지는 두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에, 주인공과 소녀는 고양이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는 조금 급하게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는데, 그라운드 밖으로 나오자 거리에는 가로등 하나 켜져있지 않았고, 역외권이라 지도도 작동하지 않아 태블릿의 빛에만 의존해 헤메다가 결국 길을 잃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여기서 더 헤메다가는 날이 밝아도 길을 못 찾을 수도 있으니 오늘은 여기서 잘 곳을 찾아보기로 한다.

십여 분 정도를 찾다가, 근처의 마을 회관 하나를 발견했고, 내부에는 휴식 공간으로 추측되는 깔끔히 정돈된 방이 하나 있었다. 자가 발전기를 이용하는지 의외로 불도 들어왔고, 이불도 있었다. 주인공은 두 사람 몫의 이부자리를 깐 뒤, 텔레이도스코프를 설치할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 잠깐 밖에 나갔다 오기로 한다. 밖에 나오자 누가 흩뿌려놓기라도 한 듯한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넋 놓은 채 별들을 감상하고 있자, 소녀도 어느새 밖에 나와 같이 별을 구경한다. 소녀는 길을 잃지 않았다면 이런 예쁜 풍경도 못봤을거라며 다행이라고 말한다. 다시 텔레이도스코프를 설치할 장소를 찾으려 하자, 소녀도 같이 가자고 하고, 주인공은 피곤하지 않냐며 만류하지만 주인공이 걱정되기도 하고, 혼자 있으면 좀 그렇다며 같이 가기로 한다.

얼마 안가 회관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4층짜리 폐전신국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태블릿의 빛에만 의존한 채, 내부를 둘러보면서 소녀가 다른 귀신이라도 찾냐고 물어보자, 주인공은 오컬트부실에서 본 기계를 설치할 장소가 필요해서 찾는다고 말해주고, 소녀가 기계의 용도를 물어보자 원리는 잘 몰라도 소녀를 소멸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찾으면서 소녀는 꼭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고 하고, 주인공은 소녀가 그런말을 하니 좀 이상하다고 향변한다. 그러는 사이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하고, 문이 잠겨 있나 걱정하지만 다행히 문이 열려 있어 그대로 옥상으로 올라간다.

옥상에서 소녀가 밤하늘을 둘러보던 사이, 주인공은 옥상의 구조와 안테나의 상테를 사진으로 찍어둔다. 이참에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가기로 하고 쉬던 도중, 소녀는 주인공에게 자신이 유령인 걸 알고 있었는지 물어본다. 주인공은 그날 소녀를 본게 처음이라 몰랐다고 간단히 답한다. 소녀는 이에 부실에서 본 기계가 유령을 소멸시키는데, 그렇다면 예전부터 이런 일이 있을거란 걸 알고 있었지 않느냐 반박하지만, 주인공은 설명하긴 좀 복잡해도 그건 아니라고 답한다. 소녀는 간단히 수긍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실은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혹시나 이 세계가 끊없이 타임리프를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구요.
당신은 이전에도 몇 번이고 저를 구원하려 했었고, 그래서 저를 만나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제가 유령인 걸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그래서 미리 그런 기계를 만들고 있던 게 아닐까. 저만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이 말을 들은 주인공은 그럴 리가 없다고 반박하고, 소녀도 그렇겠죠? 라며 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여지껏 있던 일이 꼭 운명 같았다고 말했고, 주인공은 운명이라는 단어를 한없이 막연하게 느끼며 왜 하필 소녀를 볼 수 있던 게 자신이었을까 모르겠다고 말하고, 소녀는 평범했던 일상을 자신이 깼다며 자책한다. 주인공은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고, 그냥 소녀와 아무런 접점도 없었을 자신이 왜 소녀를 볼 수 있었는지 궁금했을 뿐이라고 해명한다. 그러면서 그땐 짚이는 게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고 하자, 소녀는 그걸 궁금해했지만 주인공은 화제를 돌리며 왜 소녀가 덜컥 자신을 믿으려 했는지 묻는다. 소녀는 그때도 운명이라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고 답하며 주인공의 어께에 몸을 기댄다.

주인공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전에도 느낀 감각이 심장으로부터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다시 무언의 아우성을 듣는다.[32] 소녀는 그저 편히 주인공에게 기대며 바람을 만끽하고 있었고[33], 더 있다가는 심장 박동 소리를 소녀에게 들킬 것 같아 소녀를 일으켜 세우고는 돌아가자고 한다.

회관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심장 박동은 가라앉질 않았고, 마치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그와중에 소녀는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지 않기로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그 약속을 어기게 되었다며 허탈한 투로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잊혀질 거라는 소녀의 독백에, 주인공은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려 하나, 기억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무언의 아우성처럼, 언젠가는 소녀를 잊게 되리라는 현실을 자각하고는 결국 말하지 못한다. 그래도 짤막한 추억 하나정도는 괜찮을 거라는 소녀의 말에, 주인공은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고 대답하고, 어느덧 회관으로 돌아와 잠을 청한다.

다음 날 7시 30분에 일어난 주인공은 어렵지 않게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고, 그렇게 터미널로 돌아가 열차를 타고 집에 돌아갔다. 소녀의 점심으로 허기를 채우면서, 귀신이라도 씌였는지 어떻게 내 입맞에 딱 맞는 음식만 만드나 감탄하고,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현지에게 "텔레이도스코프를 설치할 만한 장소를 찾은 것 같아"라고 문자를 보낸다. 그러면서 내일 시간 있냐는 문자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던 중 묘한 위화감을 느끼는데, 그 사이 현지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현지는 하루만에 어떻게 이런 장소를 찾았냐며 경악하고, 이런 곳이면 충분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다. 주인공이 내일 같이 가보자며 장소를 보내주자, 현지는 여긴 출입 금지 구역 아니냐며 놀라면서 그런 곳을 들어갔던 거냐고 추궁한다. 일단 아침 열 시쯤에 터미널에서 보자고 한 뒤 전화를 끊는다.

E구역에 가게 되었으니 연쇄살인사건 현장에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사건이 사건인만큼 지금까지의 죽음의 색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끔찍할테니 주인공은 소녀에게 괜찮겠냐고 물어보고, 소녀는 잠깐이니 괜찮다고 말하고는 통화한 사람이 누군지 물어본다. 주인공은 전에 봤던 후배 여학생이라 말해주자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그 기계 때문이냐고 물어본다. 살인 사건도 덤덤한 표정으로 보던 소녀건만, 현지 얘기만 나오면 이런 반응이었는데, 우려한 주인공이 그러면 내일 안 따라와도 된다고 하자 문제 없다며 손사례를 친다.

다음날 10시, 현지와 합류해 터미널로 향하던 도중, 소녀가 주인공의 팔을 붙잡으며 매우 떨린 기색을 보였다. 소녀가 현지에게서 대체 무엇을 봤기에 감을 잡지 못하던 와중, 소녀를 못 보는 현지는 누구와 이야기하는거냐고 묻고, 주인공은 당연히 유령이라 대답하자 유령이랑 같이 나온다는 소리는 없었다며 난감해한다. 일단 열차 시간에 늦겠다며 빨리 터미널로 들어가고는 방학 끝나고 있을 학예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등 가벼운 주제로 화제를 돌리며,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열차를 타고 F구역으로 도착해 고양이를 쫒아갔을 그때처럼 강의 수원지로 향하여 좁은 길목으로 들어가고, 현지는 정말 비밀 통로 같은 분위기라며 감상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E구역에 도착하자 현지는 폐도시를 신기하게 둘러보았고, 폐전신국으로 향한다. 폐전신국 옥상의 안테나를 둘러보며,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다고 하면서, 전력이 끊겼으니 발전기도 켜고, 주파수도 맞춰야 하므로 같이 내려갔다 오기로 한다. 학교에서 가동했을 때는 주파수 같은거 맞출 필요 없었다는 말에 그때는 학교의 보안이 허술하니 미리 주파수를 맞춰놔서 그랬던거라고 하고는 훔치는 게 아니라 빌리는거라 나쁜 짓이 아니라는 논리에, 주인공은 현지의 '나쁜 짓'에 대한 기준을 궁금해하고, 거짓말부터는 아슬아슬하게 아웃 같다고 대답한다. 먼저 텔레이도스코프에 케이블을 모두 연결한 뒤, 현지와 주인공은 1층으로 내려가고, 주파수 조정에는 두시간은 걸린다고 하자, 그 사이 주인공은 소녀와 연쇄 살인 사건의 장소를 찾아가보기로 하고, 현지는 조정이 끝나면 옥상에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현지에게서 떨어지자 소녀의 상태가 약간은 나아졌고, 주인공은 대체 현지의 눈동자에서 무엇을 본 건지, 정말로 악마라도 본건 아닐까 걱정한다.[34] 일단 전신국에서 30분 정도를 걸어 한 골목길로 접어들자 드문드문 불에 그을린 흔적들이 보이며 사건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골목길 안쪽 벽에 도착하자 소녀가 가만히 벽을 응시한다. 그러자 갑자기 헛구역질을 하면서 주저앉아버렸고, 주인공이 다가가자 소녀는 벌벌 떨고 있었다. 소녀가 이런 반응을 보인 건 처음이었기에 주인공은 소녀의 공허해진 눈동자를 바라보며 당황한다. 소녀는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색이었다며 죽기 직전의 순간을 상상해 본 적 있냐고 묻고, 인간의 뇌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거부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본 사람들은 스스로 옥상에서 몸을 던져도, 불길 속에서 타인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어도, 아무리 죽음을 각오한 사람도 모두 죽음이 코앞에 닥치면 그 공포에 어쩔줄 몰라 했는데, 그 공포가 너무 압도적인 감정이라 그런지 고통, 분노, 증오, 원망, 슬픔과 같은 다른 감정을 모두 상쇄시켰다고 한다. 마치 마취제처럼. 그런데 방금은 아니었다. 그 여학생은 불길 속에서 지금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마취도 받지 않은 채 수술을 시작하듯이 공포를 느낄 새도 없이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35] 범인의 얼굴도 흐릿하게 보였는데, 30대 정도의 왼쪽 눈에 흉터가 있는 키 큰 남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무언가를 하나 더 말하려다 말고, 나머지 한 곳이 어딘지 물어보며 어서 다음 장소로 가자고 재촉한다.

10분 정도를 더 걸어, 다음 장소에 도착했다. 주인공은 불길에 그을린 골목길을 걷다가 뒤에서 들려오던 발걸음이 멈추자 뒤를 돌아보는데, 소녀가 입술을 질끈 깨문 채 서 있었고, 주인공은 그 모습을 보며 처음 보는 동요와 혼란을 느끼며 소녀에게 다가가는데, 소녀에게 다가가는 그 짧은 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소녀: "......연쇄 살인범이라고 했었죠."[36]
(한 걸음.)
소녀: "두 명을 죽였다고 했었죠."
(그리고 두 걸음.)
소녀: "만약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가 실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고 한다면, 어떡할 건가요?"
(마지막 걸음을 내딛으려다 말고, 나는 가만히 숨을 멈췄다.)
소녀: "기억났어요. 저, 사람을 죽인 것 같아요."

소녀는 갑자기 자신이 사람을 두 명, 어쩌면 세 명이나 죽인 살인자인 것 같다고 토로한다. 기억이 정확하게 돌아온 건 아니지만 소녀의 무의식 속에는 누군가를 죽였다는 감각이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그러면서 감정이 메마른 듯 누군가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르겠다며 자학한다. 주인공은 감정이 메마르지도 않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다는 것도 충분히 부정할 수 있는 거짓말이지만, 마치 잉크 한 방울에 새하얀 물이 물들여지듯이, 소녀의 모든 기억이 사람을 죽였다는 기억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주인공은 소녀를 진정시키려 하지만, 소녀는 가끔 붉은색으로 물든 이상한 곳에 서 있는 악몽을 꿨는데, 그때 본 자신의 모습이 정말 살의에 물든 괴물같았다고 한다. 그러고 그건 꿈이 아닌, 정말 자신의 모습이었고, 진짜 자신의 모습이 뭔지 혼란스러워한다. 주인공은 지금 이 모습이 진짜 소녀의 모습이라 말하지만, 소녀는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런 성격을 연기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살인자가 아직 잡히지 않았는데, 그 연쇄 살인범이 이곳에 숨어있다 죽은 것이라면, 그 연쇄 살인범이 자신인 건 아닐지 두려워하고, 주인공은 아까 살인범은 30대 남자라고 말하지 않았냐며 부정하려 하지만, 소녀는 자신이 생전에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며 자기가 죽인 사람의 중 한 명의 모습을 하고, 영원히 타인의 죽음을 먹으며,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는 벌을 받은 거라고 단정한다. 주인공은 일단 돌아가서 차분히 생각해보자고 설득하고, 소녀가 거부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소녀의 이마에 손을 갖다대며 단도직입적으로 소녀는 그 연쇄 살인범일 수 없다고 부정한다. 소녀가 어째서 그렇게 간단히 이야기 할 수 있냐며 항의하자, 너의 곁에는 네 또래 정도의 남학생이 있지 않았냐며, 그저 지금은 지금 본 죽음의 색에 다른 기억들이 압도당했을 뿐이니 돌아가서 이야기하자며 달랜다. 소녀는 '죽였다'라는 감각이 느껴지기에 자신이 사람을 죽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라며 일축하고, 주인공은 반드시 기억을 되찾아 주겠다며 반강제로 소녀를 데리고 돌아간다.

폐전신국 근처에 도착하자, 소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방금 봤던 죽음의 색이 처음 본 것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였는데, 주인공이 어디서 봤냐고 묻자, 현지에게서 그 색을 봤었다고 대답한다. 주인공이 여기를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사람이 없어서' 였는데, 만약 연쇄 살인범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이런 생각이 미치자, 주인공은 소녀에게 여기서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는 미친듯이 폐전신국으로 달려나간다. 그리고 현지는 연쇄 살인범이 쫒아와 옥상으로 도망친 상태였고, 버티고 있던 옥상 문이 뚫려 현지와 살인범이 대치 상태가 되자 결국 초조해하던 주인공은 현지에게 받아줄테니 4층에서 뛰어내리라고 외친다.

현지를 받은 충격으로 건물 외벽에 세게 부딪힌 탓에 이후 주인공의 기억은 뚜렷하지 않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눈앞에서 현지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고, 죽을 때는 되지 않았는지 무섭기보다는 아팠다는 생각이 계속 든 정도. 원래도 자신의 몸이 아니긴 했지만, 몸이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움직이지 않자 주인공은 현지에게 자기를 버려두고 도망가게 시킨다. 현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30대 후반 정도의, 눈가에 흉터가 있는 키 큰 남성이 눈앞에 나타났고, 그 남자는 무표정한 눈동자로 주인공은 관심도 없다는 듯 주변에 기름을 뿌려 주변을 불태우려 한다. 남자가 기름이 든 통을 던지고는 주머니를 뒤적여 라이터를 꺼내려는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붉은색이 번쩍이며 남자가 쓰러졌고, 주인공은 자신의 뺨에 누군가의 손이 닿자 따뜻함을 느끼며 이름은 몰라도 따스한 손길을 가졌던 누군가를 떠올리며 기억이 끊어진다.

마치 이명처럼 들려오는 빗소리에 정신을 차린 주인공. 비 오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빗줄기 소리에서 어딘가 그리운 향기를 느낀 주인공은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찰나 등 뒤에서 목소리를 듣는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미안, 오늘 보충 수업이 있어서 경기 못 보러 왔어."[37]

고개를 돌리자, 목소리의 주인이 활짝 웃는 얼굴과 함께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고 주인공은 그리운 목소리고, 그리운 얼굴이라고 독백하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누군가를 떠올린다. 새까만 우산 하나를 펼치며 우산 아래로 들어오라는 그녀의 손짓에 주인공은 우산을 들어주려 손을 뻗자, 오른쪽 어깨 아래로 따끔거리는 통증을 느낀다. 그녀는 이미 주인공이 느끼는 통증을 알고 있다는 듯 우산을 주인공 위로 씌워준다. 주인공은 익숙한 목소리라고 다시 독백하며 어디서 들어봤나 생각에 잠기며 비 오는 길을 걷는데, 그녀가 내일은 경기가 없냐고 묻는다. 한여름의 빗내음과 그녀의 향기가 주인공의 기억을 자극하며, 그녀의 목소리가 마침내 주인공의 기억에 닿는다. 무의식 속에서 들려오던 자신을 애타게 찾던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지금 자신의 옆에 있었다. 내일은 같이 있을 수 있겠다며 웃는 그녀를 보며, 주인공은 한 송이 꽃 같다고 느끼고, 이런 예쁜 기억을 갖고 있었는데 어째서 잊어버린 것인지 의아해하며 한 걸음을 더 내딛자, 이번엔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란도란하게 식탁에 앉아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하며, 마지막 경기까지 얼마 안남았다며 헤실헤실하게 웃음짓는 그녀. 내일 영화 보러 가자고 이야기하면서도 바로 피곤하면 쉬어도 된다며 손사례를 치고, 밖에 비가 오자 내일도 비가 올거라며 일기예보를 중얼거리고는, '레인 맨'이라는 영화를 아는지 물어본다. 그녀와 처음 말을 텄던 날, 그녀는 거실에서 혼자 이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상상 속에 존재하던 사람이 짜잔 하고 모습을 드러냈고, 처음 보는 사람도 아닌 여태껏 알기만 했던 사람이라며 영화의 내용을 이야기하다가 스포일러라며 말을 자른다. 주인공은 소녀가 이야기한 따스함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따뜻함을 그녀의 손짓 하나, 말 한 마디에서 느낀다. 그녀는 자신도 상상 속에만 있을법했던 사람이 바로 옆에 있었다며, 비가 오니까 좋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마지막 여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생각하던 순간, 마지막 경기가 있던 날, 경기 끝나면 할 말이 있으니 운동장 뒷편에서 보자고 말하고는 무슨 말을 전하려 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이야기였는지, 그녀가 누구인지도 잘 기억하지 못하며 이야기를 전하지 못한 건지 알지 못한 채 기억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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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병원에서 다시 눈을 뜬다. 해가 졌는지 병실은 어두침침했고, 침대 오른편에서는 짓누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엎드린 채 잠들어 있는 사람이 유미라는 걸 주인공은 바로 눈치챘고, 분명 살인마가 자신을 죽이려 했을텐데 어떻게 살아있는지 의문을 가지며 몸을 움직이려 하자 고통을 느끼며 짤막한 신음을 내뱉었고, 그 소리에 유미가 눈을 뜬다. 유미는 눈앞에 얼굴을 마주하고는 왜 그런 거냐고 묻고, 주인공은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지 갈팡질팡하다가 그때가 돼서야 비로소 유미에게 숨긴 것이 너무 많았음을 깨달아버렸다. 유미는 여태껏 있던 일을 전부 다 현지에게 들었다고 말한다. 과거에서 왔다는 것도, 과거로 돌아갈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주인공이 유령 여자아이를 도와주고 있다는 것도. 주인공은 뭐라 이야기해야 할까 생각하다 유미에게 사과부터 하고, 유미는 자신도 솔직하게 이야기를 못했다며 괜찮다고 하며 운명이었던 거라고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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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현지는 어디 있냐고 묻자 방금까지 있었는데 잠깐 나간 것 같다는 대답에 현지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심하던 순간, 잠깐 마실 걸 사온 현지가 들어오고, 주인공이 일어난 모습을 보자마자 음료수를 떨어뜨리고는 그대로 달려와 품에 안기고는 얼굴을 파묻는다. 죽는 줄 알았다며 울먹이자 주인공은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며 당황하고, 현지는 충격을 받으면 유령이 반응해서 다른 시공간으로 날아갈 수도 있고, 그러면 다시는 못 만나서 걱정했다고 한다. 계속 자기 잘못이라며 자책한다. 유미는 주인공이 이틀 동안이나 쓰러져 있었고 부모님의 연락처도 몰라서 쭉 병원에 대신 있었다고 하고, 살인범은 어떻게 됐냐고 묻자 유미는 주인공을 F구역에서 여기로 데려왔을 뿐이라며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현지는 주인공을 찾으러 갔을 때는 없어져 있었고, 근처가 다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고 말하고, 현지는 그 연쇄 살인범은 또 도망쳤을 거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주인공은 살인범이 라이터를 떨어뜨리려던 순간 뒤에서 봤던 살기를 회상하며, 확신할 수 없지만, 도망친 게 아니라 정말로 사라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지는 계속 미안하다고 자책하고, 주인공은 미안할 게 뭐가 있냐고 달래자, 현지는 텔레이도스코프를 설치할 장소가 필요하다는 말은 거짓말이었고, 사실 다 완성되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바로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갈까봐 거짓말을 했다고 다 털어놓는다. 사실 현지는 주인공이 텔레이도스코프를 설치할 장소를 못 찾거나, 찾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고, 자신의 재미없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주인공밖에 없어서, 좀 더 주인공과 오래 있고 싶어서 텔레이도스코프를 설치할 장소를 찾아다니는 걸 빌미로 좀 더 친해지려 했었다고 토로하고, 얼마 안가 그대로 잠들어 버린다. 유미는 현지가 이틀 밤낮을 꼬박 지새웠다고 말해주고, 주인공은 미안해야할 사람은 자신이라며 자책한다.

유미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제 어떡할 거냐고 묻고, 주인공은 천천히 생각해봐도 되고, 여차하면 그냥 여기 남아도 된다고 말하자, 유미는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이내 주인공의 몸이 내상이 너무 심해서 움직이는 게 신기할 정도라는 말을 꺼낸다. 주인공은 4층 높이에서 떨어진 사람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지만, 유미는 이 일이 있기 전부터 몸이 고장나 있었다고 정정한다. 그러자 주인공은 아까부터 느낀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감각을 더 실감하고, 유미는 의사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고 했다며 정말 몰랐냐고 묻고, 주인공은 다친 적도 없었다며 지금까지의 기억을 회상하다가, 유미와 처음 만났을 때 당했던 교통사고 때문인 것 같다고 추측한다. 유미는 조금 당황한 기색만 보였을 뿐 멀쩡해 보였다고 말하고, 주인공은 그때는 정말 가벼운 타박상이라고 생각했고 아프기보다는 다른 사람 몸에 들어와있는 느낌이 더 강했다고 회고한다. 어쨌든 유미의 말을 근거로 정리하자면 우연히 자신의 영혼이 마침 호버크라프트에 충돌해 영혼이 분리되어 껍데기만 남은 몸에 들어가게 되었기에 이 몸에 들어갔다고 설명이 되는데, 이게 정말 우연인지는 의문스러워한다.

주인공은 여태까지 괜찮았다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유미는 덜컥 몸이 움직이지 않게 되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걱정하고, 몸은 죽었는데 정신만 깃든 상태면 영원히 이 모습 그대로 있을 수도 있다며 우려한다. 그렇다는 건 주인공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지만, 일단 생각을 더 해보기로 한다. 유미는 내일 학교 멘토링과 학예제 관련 학생회 회의 때문에 학교에 가야 한다며 퇴원할 때까지 몸조심 해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고 돌아가고, 주인공은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며 잠에 든다.

잠에서 깨어나자, 현지가 주인공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고, 주인공이 일어나자 현지는 캔커피를 건넨다. 하지만 캔커피를 마시려고 팔을 뻗어도 팔이 움직이지 않았고, 결국 현지가 캔커피를 마시게 도와준다. 그리고 현지도 주인공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는지 돌아가야 하는 거냐고 묻고, 주인공이 급한 건 아니라고 하자 서둘러 돌아가지 않으면 위험하지 않냐고 걱정하자 지금껏 괜찮았으니 괜찮을 거라고 넘긴다. 그러고는 텔레이도스코프로 유령을 사라지게 할 수 있냐고 태연히 묻자 현지는 주인공의 몸이 못 버틸 정도로 오래 걸릴 거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자신 없이도 혼자 만들수 있지 않냐고 묻자 현지는 주인공 없이는 혼자서 못 만든다고 일축한다.

일주일 뒤, 병원에서 주인공은 병원에서 퇴원한다. 퇴원하는 날에는 늦여름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듯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여태껏 간호하던 현지와 함께 우산을 쓰고 돌아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인공이 비 오는 날을 좋아하냐고 묻자, 현지는 습기도 차고 이래저래 귀찮다며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현지가 똑같은 질문을 하자 주인공은 좋아한다고 단정하려다가 좋아하는 것 같다고 애매하게 대답하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냐고 묻자 대답을 못하고, 현지는 자기도 모르게 좋아하게 되었다 정도로 이해한다.

그렇게 현지와 헤어지고 집에 들어오자, 역시 소녀는 집에 없었다. 소녀가 남긴 흔적이라고는 냉장고에 붙어있던 레시피 뿐이었고, 주인공은 그 레시피에 맞춰 식사를 준비한다. 하지만 소녀가 만들었을 때와는 달리 그저 그런 맛이었고, 식사가 끝나자 침대에 누워 열흘 가량밖에 남지 않은 여름방학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집에서 빗소리를 듣는 동안,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가 연기처럼 사라졌고, 과거의 기억 어딘가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듣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소리는 머릿속에서 계속 변하여 소녀에게로 이어지고, 아무런 연관도 없는 두 감각이 얽히는 것은 자신의 머릿속에 소녀가 흔적이 가득 남아있다는 증거였다고 주인공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너머에 있을 우연의 우연까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비는 그렇게 사흘 정도를 더 내렸고, 주인공은 그 사이 세 가지를 깨닫는다. 첫째, 자신은 소녀의 레시피에 적힌 음식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둘째, 자신은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자신이 좋아한 건 그러던 사이 곁에 있어준 소녀라는 것. 비가 그친 거리는 더위가 완전히 걷혀 명목상으로만 여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개학까지는 열흘 정도 남았지만, 학예제 준비와 텔레이도스코프의 확인을 위해 주인공은 학교로 향했다. 주인공이 병원에 있는 동안 현지가 학예제 준비를 다 마쳐둔 덕분에, 부실 단장은 이제 마무리 단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 현지는 유령은 아직도 옆에 있냐고 묻자, 주인공은 없다고 대답하고는 사라져서 집에 돌아와도 안 보이고, 아마 E구역에서 자신과 떨어지기로 결심한 것 같다고 말한다. 현지가 거기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고 묻자, 주인공은 소녀가 자신은 살인자였음이 틀림없다고 이야기했고, 연쇄 살인범이 발견되지 않은 것도 소녀가 시체를 처리해서라고 추측한다. 그래서 이제 텔레이도스코프로 유령을 없애는 일은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부스가 완성되자 부스가 예쁘다며 칭찬한다. 그러면서 인형 판매 부스를 보고는 인형은 자신이 만든 게 더 예쁘다고 하자, 현지는 발끈하고는 더 잘 판사람이 진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걸로 내기하자고 제안한다. 그러자 주인공은 왜이렇게 내기를 걸려고 할까 의아해하며 그냥 그만두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내기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러자 현지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안 꺼낸다고 말하고, 그럼 왜 자신한테만 내기를 거냐고 하자 비밀이라고 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래야 다음에도 자연스럽게 말을 걸 수 있으니까ㅡㅡㅡ"

아무튼 내기는 없던 일로 하고는, 주인공은 학예제가 끝나면 저녁이나 한 번 사겠다며 약속하고 부실을 나선다.

8. 6장

현지와 함께 부실을 나와 복도를 걷던 중, 복도 저편에서 유미가 급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유미는 학교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라며 반가워하고, 주인공이 바빠 보인다고 말하자 매번 그렇다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이지만, 그런 유미의 얼굴에서는 껄끄러운 표정이 덧대어져 있었다. 현지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유미는 학예제 폐회식에 있을 불꽃놀이를 담당할 불꽃부에 문제가 생겨 새로 불꽃놀이를 맡을 사람이 필요해졌다고 한다. 불꽃 자체는 다 만들어져 있어서 큰 문제는 아니지만 불꽃놀이 진행 순서와 불꽃 관리를 할 사람이 필요해서 그 역할을 유미가 떠맡게 되었다고 한다. 유미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복도 너머로 사라지고, 현지는 유미 언니가 많이 피곤해 보인다며 걱정한다. 주인공도 걱정하지만, 그저 복도를 걷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현지와 함께 집에 돌아가던 중, 현지가 남은 방학을 어떻게 보낼 생각이냐며 말을 꺼내고, 주인공이 생각 안 해봤다고 대답하자 유령은 다시 찾을 생각이 없냐고 물어본다. 하지만 주인공은 찾을 방법이 없다며 한탄하고는, 왜 자신의 눈에만 유령이 보였나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러면서 그저 우연이었다고 말하지만, 현지는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이에 주인공이 여기 온 것도 운명인지 묻는 말에는 글쎄요라고 대답하면서도, 우연이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사람은 우연과 필연을 구분하지 못하니까요. 그러니까 우연이든, 필연이든 모두 소중한 거 아닐까요."

그 말에 주인공은 현지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현지의 눈동자에서는 그저 눈동자일 뿐, 죽음의 색이라던가, 인간의 운명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은 어쩌면 우연과 필연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현지에게 유령이 현지의 눈에서 강렬한 죽음의 색이 보인다고 말한 걸 기억하냐고 묻자, 현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인공이 이미 죽었어야 할 자신을 구해줬다고 말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현지가 위험에 빠진 건 자신 때문이며, 자신이 아니었다면 텔레이도스코프를 만들 일도 없었을 거라며 부정하고, 현지는 반대로 생각해보면 주인공이 현지의 운명에 휘말렸을수도 있다고 향변한다. 그 말에 주인공은 자신의 눈에서 소녀가 왜 죽음의 색을 볼 수 없었는지 깨닫는다. 주인공의 눈동자에는 운명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주인공은 운명이라는 태엽이 다 풀린 인형에 깃든 소라게같은 존재였고, 그 인형은 현지의 운명 속에 휘말려버린 것이었다.

현지는 소녀가 자신의 눈에서 본 것은 유령이 기겁할 정도의 끔찍한 운명이었을 것이고, 자신의 운명에 없던 사람이 나타나, 운명의 마지막 페이지가 바뀌어버린 것이라고 추측한다. 주인공은 우연이라고 말하고, 현지도 동의한다. 현지는 그 유령이 돌아오지 않을거라 생각하냐고 묻고, 주인공이 긍정하자, 주인공이 그 유령을 만난 건 우연일거 같냐고 다시 묻는다. 주인공은 우연과 필연을 구분하지 못하는 게 사람 아니었냐고 향변하지만, 현지는 구분은 못해도, 추측은 할 수 있고,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우연은 필연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현지는 유미가 아마 운명같은 이야기를 별로 안 좋아할거같다는 이야기를 꺼내는데, 주인공은 의외로 여린 애니까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현지에게 유미와는 언제 친해졌냐고 묻고, 현지는 주인공과 같은 동아리라 유미가 이것저것 챙겨줘서 어쩌다 친해졌다고 대답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현지와 헤어지고 그날 밤, 주인공은 침대와 탁자 사이에 떨어진 인형 하나를 발견한다. 주인공이 만들었다가 소녀가 부실에서 가져갔던 테루테루인형이었다. 탁자 위에 인형을 올려두고 멍하니 인형을 바라보면서, 주인공은 아마 소녀도 이 인형처럼 어딘가에 홀로 남겨져 시간을 죽이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내일도, 모레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런 생각이 닿던 차에, 태블릿에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이 시간이면 현지일까 생각하며 문자를 확인하지만, 보낸 사람은 유미였다. 지금 학교로 와 줄 수 있냐는 부탁이었는데, 이런 시간에 유미가 자신에게 이런 부탁을 건넨 것에 신기해하면서도 학교로 갈 채비를 하며 유미에게 이유를 묻는 답장을 보내는데, 학예제 비품 정리를 하다가 창고에 갇혔다고 한다.

조금 서두르며 길을 걷고 있었는데, 금방 가겠다는 문자를 보낸 뒤로 답장은커녕 문자를 확인조차 못하고 있자, 좀 더 서둘러 학교로 향한다. 십여 분 정도를 뛰어 학교에 도착한 주인공은 교무실에서 창고 열쇠를 찾아 곧장 1층의 비품 창고로 향했다. 유미는 놀래켜주려고 했는데 벌써 왔다며 능청거리고, 걱정하던 주인공은 그래서 문자도 안봤냐고 허탈해하자, 유미는 그건 아니고 그때 태블릿이 방전됐다며 태블릿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걱정 끼친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겠다며 유미가 무사해서 안심하고는 그대로 그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고, 유미는 밖엔 누구 없었냐고 물어보며 주인공 옆에 같이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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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시간인지라 주인공은 퉁명스럽게 아무도 없었다고 말하자, 유미는 그럼 여기에는 우리 둘밖에 안남은 거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꺼낸다. 어색한 침묵이 계속 감돌자 슬슬 나가봐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유미가 창고 문을 닫고는 주인공에게 다가온다. 유미가 무슨 말을 꺼내려 하지만 주인공은 엘레베이터에 탔을 때처럼 블랙 아웃 증상을 보이며 숨이 가빠져 왔고, 여기에는 숨쉴 공기마저 남아있지 않은건가 싶은 생각이 들던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고 있을게."

그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소녀가 있었다. 주인공이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소녀는 그 한마디를 끝으로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고, 소녀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정신을 차린다. 유미가 왜 그러냐고 걱정하자, 주인공은 폐소공포증이 있다고 말하고, 유미는 그런 줄도 몰랐다며 사과한다. 마음을 가다듬고 밖으로 나오면서, 주인공은 왜 그때 소녀가 나타났는지, 기다리고 있겠다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건 무슨 의미인지 당혹스러워한다. 밖에 나온 주인공은 이 시간까지 학교에 있었냐고 묻고, 유미는 너무 할 일이 많아서 그랬다고 대답한다. 둘만 남은 복도에 적막감이 감돌던 차에, 어디선가 꼬르륵대는 소리가 들렸다. 여태까지 유미는 저녁도 먹지 않았던 것인데, 마침 주인공도 저녁을 먹지 않아서 주인공은 유미와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하고, 유미가 파스타가 먹고 싶다고 하자, 단번에 메뉴가 결정됐고, 학교에서 몇 분 정도를 걸어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밤이 깊어서 그런지 손님은 주인공과 유미뿐이었고, 창가 쪽을 찾아 자리에 앉는다. 메뉴를 정하지 못해 메뉴판을 확인하던 도중, 유미가 와인잔을 만지작대며 와인 한 잔 안하겠냐는 제의를 한다. 주인공은 우리는 학생인데 시키지도 못한다고 하자, 유미는 주인공이 교복도 안 입고 있어서 학생처럼 안보인다며 주인공이 시키게 하려 하는데, 주인공이 진심이냐며 당황하자, 유미는 사고만 안 치면 된다고 태연하게 말한다. 불안해하는 주인공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국 주인공은 와인, 콜라와 함께 메뉴를 시킨다. 의외로 주인 아주머니는 별 말 없이 주문을 받고는 주방으로 향했고, 주인공은 한숨 돌리며 다음부터는 이런 거 시키지 말아달라며 당부하고, 유미는 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콜라는 왜 시켰냐며 따지고, 주인공은 자기는 와인을 마시지 않겠다며 철벽을 친다. 유미는 재미없다며 불만 가득한 얼굴로 주인공을 바라보는데, 주인공은 그런 유미의 얼굴에서 알게 모르게 피로감을 감지한다. 피곤해보인다며 비품 창고 정리는 언제부터 했냐고 물어보자, 유미는 주인공, 현지와 헤어진 뒤부터 계속 했다고 한다. 주인공은 피곤할만하다며 놀라지만, 유미는 괜찮다고 넘긴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창밖을 바라보자, 반쯤 감긴 달이 하나, 듬성듬성 빛을 발하는 별이 손에 꼽을 만한 수로 하늘에 매여 있었다. 유미는 분위기 있다며 별만 조금 더 많았으면 좋았겠다고 푸념하고, 주인공은 언젠가 E구역에서 본 그 별빛을 유미에게도 보여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가볍게 웃음을 흘린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유미는 사진을 찍고는 와인병을 열고, 주인공이 진짜 마실거냐고 하자 이런 곳에 오면 꼭 와인같은 걸 마셔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유미는 그대로 와인을 따르고는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이게 어른의 맛인가 하며 감상을 내놓자, 주인공은 무슨 맛이냐고 묻지만, 유미는 궁금하면 너도 마셔보라고 답할 뿐이었다. 주인공은 단칼에 거절하고, 유미는 그저 웃으며 파스타와 함께 와인도 빠르게 비워내고 있었다. 주인공이 괜찮겠냐고 걱정하자, 와인 한 병으로 취하겠냐고 하지만, 주인공은 이미 취한 것 같다고 우려하고, 유미는 신경쓰지 않고 와인을 한 잔 더 마신다. 유미는 이제 반도 안남았다며 다시 와인을 주인공에게 권하지만, 주인공은 재차 거절하고, 유미는 겁쟁이라며 타박을 주며 나도 그렇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또 와인을 한 잔 비우고는 붉게 변한 얼굴을 주인공에게 가까이 가져댄다.
"나도 겁쟁이라서, 용기가 없어서 맨정신에는 하고싶은 이야기도 제대로 못하거든."
.......
"난 왜 이렇게 겁이 많은 걸까? 하고 싶은 이야기도 제대로 못하고......."[38]

주인공은 완전히 취한 것 같다며 계속 걱정하지만, 유미는 아랑곳않고 와인을 향해 또 팔을 뻗었고, 보다못한 주인공은 와인병을 낚아채 유미에게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둔다. 유미는 그 와인 다 마시기 전까지는 안 나간다며 떼를 쓰고, 이대로 공주님 안기로 집까지 바래다 주는건 어떠냐는 능청까지 떤다. 결국 유미가 더 마시면 위험할 것 같고, 그렇다고 유미의 고집을 꺾지도 못한 주인공은 유미 대신 남은 와인을 마신다. 두 잔을 마시자 와인병은 텅 비었고, 주인공이 멀쩡한 기색을 보이자 유미는 재미없다며 실망하고는 여태껏 술 마셔본 적 있냐고 물어본다. 주인공은 없다고 대답하고, 유미는 그럼 이번이 처음인거라고 말하고는 어쨌거나 이제 공범이라고 좋아한다. 주인공은 나쁜 짓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냐며 뜨악하고, 유미는 그치만 나쁜 짓 잔뜩 하고 싶은 기분이라고 한다. 주인공이 슬슬 일어나려고 하자 유미는 아까 한 말 기억하냐며 맨 정신으로 못하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 싶다고 한다.
유미: "있지, 나 말이야, 너를ㅡㅡㅡ"

***: "있지, 나 말이야, 너를ㅡㅡㅡ"
소녀: "기다리고 있을게."

그 말과 함께, 주인공의 눈 앞에는 알코올의 영향인지 허상이 펼쳐졌고, 모호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유미의 말과 자신의 기억이 어우러져 이내 소녀의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로 이어진다. 주인공은 어째서 소녀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건네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서 손을 뻗어 기억의 조각을 붙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어째서 기억의 조각이 소녀를 가리키는지는 알지 못했고, 소녀에 대한 미련인가 생각하고 고개를 가로저으려는 순간, 허상에서 깨어난다. 유미는 벌써 취했냐며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면서 화내지만, 주인공은 돌아가면서 이야기하자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주인공은 유미가 휘청거리며 걷는 게 위험해보여 부축해주고, 유미도 군소리없이 부축을 받지만, 거리로 나오는 내내 주인공의 어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유미는 한 별을 가리키며 저 별이 되게 특이하지 않냐고 하고는, 쌍성 같다는 말을 꺼낸다. 유미는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며 좋아한다. 주인공은 가만히 그 별을 응시하지만, 주인공의 눈에는 그저 별 하나만이 놓여 있는 걸로 보였고, 많이 취한 것 같다며 우려한다. 집까지 유미를 데려다 주던 차에, 유미는 어느샌가 주인공의 등에 업혀 자고 있었고, 유미의 집 앞에 도착하자 유미를 깨운다. 유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휘청거리고, 꿈 속을 걸어다니는 것 같다며 신기해한다. 주인공은 꿈이 아니라며 일축하고, 이에 유미는 꿈이었다면 지금 바로 말했을거라며 아쉬워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유미를 집에 돌려보내고, 주인공도 집에 돌아가려 하지만 발걸음을 옮길때마다 유미가 말했던 말과 소녀의 잔재가 머릿속에서 뒤영켜 혼란을 느낀다. 소녀가 자신에게 왜 기다리겠다고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골몰하던 중, 언젠가 소녀에게 자신이 '기다려 달라'고 말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미쳤고, 머릿속으로는 망상이라고 여기면서도 그 증명을 소녀에게 맡기고 싶은지 미친듯이 소녀를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러자 주인공은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F구역으로 향하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고, 소녀가 자신에게 정말로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남겼다면 여전히 E구역에서 기다릴거라는 생각에 열차에 탑승한다.

F구역에 도착해 단숨에 E구역으로 향하는 샛길을 찾아 철조망에 도착한 주인공은[39] 순간 이곳에 소녀가 있을까 고민하지만 이내 고민을 떨쳐내고,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 주위를 둘러보지만,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도 없었기에 주인공은 철조망 사이로 들어가고, 하늘을 가득 수놓은 별빛이 주인공을 반긴다. 주인공은 유미도 같이 데려올 걸 그랬나라고 독백하며 뒤를 돌아보는데, 바로 그쪽에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주인공이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떼자, 그 발자국 소리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고, 주인공은 필사적으로 그 소리를 쫒아간다.

그렇게 골목길을 몇 번이고 맴돌자 발자국 소리는 멈추었고, 모퉁이를 돌기 전에 숨을 고르며 주인공은 소녀와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할까 고민하지만 그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 이대로 또 놓칠 수는 없다는 일념 하에 모퉁이를 돌지만, 그 자리에 있던 건 소녀가 아닌 유미였다. 주인공은 어떻게 여기 있냐며 놀라고, 유미는 그러는 주인공은 이시간에 이런 곳엔 왜 왔냐고 받아친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까, 주인공은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대답하고, 이내 사람이 아닌 유령 소녀를 찾고 있었다고 정정하고, 유미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받아들인다. 주인공이 여길 어떻게 따라왔냐고 묻자, 유미는 어쩌다 보니라고 얼버무리고,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가길래 걱정했다고 하고는 방해해버려서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주인공이 어차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안했고, 자신을 반겨주지도 않을거라 생각했다고 하자, 유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싶어한다. 주인공은 지금처럼 유미와 어색한 곳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소녀가 자신을 살인자라 칭하며 사라졌던 이야기, 그리고 소녀가 사라지고 나서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주변을 떠돌던 이야기까지 해주고, 그제서야 유미는 창고와 레스토랑에서 왜 주인공이 그렇게 멍하게 있었는지 이해한다.

주인공은 유미에게 별이 예쁘지 않냐는 이야기를 꺼내고, 유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난생 처음 볼법한 별무리에 감탄한다. 주인공이 유미가 말했던 별도 있을거라 말하자, 유미는 바로 저 별이 자신이 말했던 별이라고 가리킨다. 주인공이 어떻게 바로 찾았냐고 묻자, 유미는 저 별은 북극성이라서 하늘에 가장 높이 떠있는 별, 즉 북극에서 가장 가까운 별을 찾으면 된다고 말해준다. 주인공이 폴라리스를 이야기하는거냐고 말하자, 유미는 저 별은 알라이라는[40] 별이라고 정정한다. 이내 유미는 주인공의 말을 이해하고는 북극성은 시간이 지나면 바뀐다며, 우린 서로 북극성이 다를 때의 사람이었던 거라며 신기해한다. 주인공이 처음 들어본다는 반응을 보이자, 유미는 가장 가까이 있는 게 늘 같을 수는 없다는 말을 꺼내고는 역시 혼자 빛나고 있었다며 중얼거린다. 하지만 저 별은 쌍성[41] 이라서 여기서는 보이지 않아도 정말로 짝이 있다고 한다. 주인공이 쌍성이 뭔지 묻자, 유미는 서로 같은 궤도를 도는 별 정도로 설명하고, 주인공이 별은 항상 그자리에서 홀로 반짝이는 줄 알았다며 신기해하자 유미는 보이지 않으면서 붙어있는 게 유령같다고 말하고, 그 말에 주인공은 알라이라는 별을 응시하고는 주변을 살폈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고 정말 소녀는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지고, 이제까지의 일은 아무것도 없는 일이 되는건가 생각한다.

유미가 유령 여자애는 더 안찾을거냐고 묻고, 아마라는 대답에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충고하자, 주인공은 직접 보면 더 후회할 수도 있다고 반박하지만 정말?이라는 말에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런 이야기는 왜 하냐며 말을 돌린다. 유미는 자신도 이런 말을 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인공도 이유 모를 행동을 하지 않냐며 묻고, 주인공은 속으로 긍정하고는 후회할거라 생각은 하고, 처음엔 우연이라 생각한 일들이 돌이켜 생각해보면 전부 필연인 것 같았다고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며 만약 유미가 자신이거나 유령 여자애였다면 어떻게 했을지 물어본다. 유미는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라며 대답해줄 수 없다고 하자 절망하며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되내이며 고개를 돌리자, 우연을 가장한 필연, 지극히 편의주의적인 전개인 듯이 그곳에 소녀가 있었다.
파일:여름꽃12.jpg

소녀는 주인공과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발걸음을 돌리고, 주인공은 필사적으로 소녀가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했기에 찾아왔다며 말을 건네자, 소녀는 고개를 돌려 서로 얼굴을 마주치게 된다. 소녀가 이야기의 설명을 요구하자, 주인공은 소녀가 사라진 뒤로 어떤 목소리가 말을 건네왔는데, 과거의 기억인 줄 알았던 목소리는 사실 소녀의 목소리였다고 설명한다. 소녀가 말도 안된다고 부정하자, 주인공은 정말이라며 향변하고, 소녀는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내 그런 염치 없는 이야기를 했을 리가 없다고 다시 부정한다. 주인공은 소녀의 목소리가 텔레파시처럼 목소리가 들렸다 주장하지만, 소녀는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고 단정하고, 주인공은 자격같은 게 왜 필요하냐며, 그리고 헤어질 때 이름 정도는 알려주겠다 했지 않았냐며 호소하지만, 소녀는 살인자의 이름은 몰라도 된다고 쏘아붙인다. 주인공이 같이 돌아가자고 설득하지만, 소녀는 자신이 있을 곳은 아무데도 없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소녀의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지만, 소녀는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고, 주인공이 어째서 그렇게 쉽게 부정하냐고 묻자, 소녀는 '그때'도 그랬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꺼낸다. 주인공이 이해하지 못해 고뇌하고 있자, 소녀는 같은 방법이었고, 그래서 기억해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주인공의 예상대로 연쇄살인범을 쓰러뜨리고, 주인공을 제외한 주변을 불태워버린 것도 소녀였던 것. 소녀가 살아있었을 때도, 같은 방식이었던 거라고 말하자, 주인공은 왜 그런거냐고 물어보고, 소녀는 고개를 돌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모르겠다고 중얼거린다. 주인공은 뭐가 모르겠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와 상관없지 소녀에게 가지 말라며, 어찌 됐든 괜찮으니 눈앞에서 사라지지 말아달라고 호소하며 소녀에게 다가간다. 소녀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이 맻혀 있었고, 소녀는 어째서 자신같은 살인귀를 붙잡고 있냐며 소리치자, 주인공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을 건넨다.
"좋아하는 것 같아."

소녀는 거절하려 했지만 거절하지 못하고 그렇게 말하면 자기도 붙잡고 싶어져 버린다고 울음을 터뜨리고, 주인공이 손을 내밀자 손을 잡고는 이러고 있으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흐느낀다. 그런 소녀의 손을 주인공은 살며시 어루만져주며 차갑게 남은 상처가 조금은 따뜻해질 수 있길 바란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한참을 지켜보고 있던 유미가 요컨대 유령이 옆에 있는거냐고 말을 건네오고, 주인공이 맞다고 하자 유령 여자애가 같이 돌아가겠다고 말했냐 물어본다. 주인공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미는 별이 되게 예쁘다며 조금만 더 있다 가자고 제안한다. 유미의 말에 소녀도 고개를 들어 별무리를 응시하고, 혼자였을 때는 한번도 본적 없었다며 감탄한다. 주인공은 그런 소녀의 모습에서 쓸쓸함을 느끼며, 돌아오는 내내 소녀의 미소를 다시 볼 수 있을지 고뇌한다.

호버크라프트를 타고 돌아오던 길, 소녀는 잠들었고 유미는 이제 어떻게 할거냐고 묻는다. 주인공은 덤덤히 다시 소녀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대답하자 유미는 사람을 죽였다는데 괜찮겠냐고 우려한다. 주인공은 그런 기억을 가지게 된 이유가 분명히 있을거라고 하고, 계획이 있냐고 물어보는 말에는 잘 모르겠지만 놓친 게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고 대답하자 계획 없는 건 여전하다며 핀잔을 받지만, 유미도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주인공은 유미에게 무언가를 잊는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잊을까 물어보고, 유미는 아마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주인공이 가장 오랫동안 기억하는 일 아니냐고 의아해하자, 유미는 가장 소중한 건 뭐라고 생각하냐고 되묻고는, 항상 곁에 있어서 익숙해진 일이라고 대답을 해준다. 정론같은 이야기였지만, 바로 감이 잡히는 건 아니었고, 유미가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봤냐고 묻자 주인공은 잊어버린 기억 중에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싶어 그랬다고 말해준다. 유미는 유령과 관계가 없던 거 아니었냐고 묻지만, 주인공은 걸리는 게 있다고 말하며, 속으로 과거로부터 날아온 망령인 자신이 소녀와의 인연을 주장할 수 없는 건 당연하지만, 무의식 속 목소리의 주인이 소녀인 게 계속 마음에 걸렸고, 어째서 망자로 엇나간 인연의 두 사람이 목소리로 연결되어 있는지 의문을 가진다.

목적지로 설정해둔 사거리에 도착하자, 주인공은 소녀를 깨우지만 소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결국 소녀를 업어들었다. 그러고는 유미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려는 찰나, 매번 고맙다는 말을 건넨다. 유미는 부끄럽게 그런 인사는 뭐냐며 머쓱해하고, 주인공은 그냥 그래야 할 거 같아서 그랬다고 말한다. 유미는 대답 대신 싱긋 미소를 짓고는 주인공에게 인사를 건넨다.
"[ruby(잘 가., ruby=lilac)]"

집으로 돌아가는 길, 주인공은 이렇게 소녀가 돌아와서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하며 최대한 발걸음을 늦추었고, 소녀의 숨결이 떨리자 주인공은 익숙하다는 듯 뭐든지 괜찮아질 거라는 선율을 읇조린다. 시간이 지나고 위화감이 들어 뒤를 돌아봤을 때는, 어느새 소녀가 잠에서 깨어나있었고, 소녀는 내려오려고 했는데 너무 편해서 그랬다며 부끄러워하고, 주인공은 담담하게 괜찮다며 오히려 집에 갈때까지 쭉 업혀갔으면 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허밍 소리를 중얼대자, 소녀는 주인공과 만난 이후 악몽을 꾸지 않게 되어 신기했는데 이제야 그게 이 노래 덕분인 걸 알았다고 말하고는 뺨을 어께에 푹 기댄다. 노래가 끝나갈때쯤, 소녀는 목소리에 온도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거같다며 따뜻하다는 감상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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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끝나자, 주인공은 소녀에게 만약 자신이 과거에서 왔다면 믿어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고, 소녀가 그런 얘기는 여태껏 왜 안해줬냐고 묻자 주인공은 그럴 틈이 없었고, 딱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을거라 생각해서 그랬다고 답한다. 소녀는 가볍게 수긍하고는 시간여행이면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왔냐고 물어보고, 주인공은 시간여행을 한건 자신의 영혼뿐이며, 잘 모르겠지만 유체이탈 같다고 말해준다. 소녀는 자기가 유령이라고 한 걸 바로 믿은 이유를 깨닫고, 주인공은 텔레이도스코프도 사실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내기 위한 기계였는데, 아무래도 그걸로 소녀를 사라지게 하는건 이제 힘들 거 같다고 말한다. 소녀는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걸 알게 되지만, 주인공은 언젠간이라는 말로 애매하게 답하고는 이곳으로 온 이후 줄곧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단 이야기도 해준다. 소녀가 어떤 목소리였냐고 묻자 그건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 목소리들이 소녀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도 믿어줄 수 있냐고 물어본다. 소녀는 비유적인 표현이냐고 묻고, 주인공은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라고 부정하고는, 소녀가 죽음의 색을 볼 수 있듯이, 주인공도 그 목소리를 볼 수 있었다고 하고는, 소녀를 만나기 전에는 목소리가 헝클어진 털실 모양이었는데, 소녀를 만나고 난 뒤부터는 그 목소리가 마치 소녀를 위해 준비돼있던 붉은 실마냥 소녀에게 이어졌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소녀가 그럼 지금도 그 목소리가 보이냐고 묻자, 주인공은 지금은 안 보인다고 답하고, 처음으로 소녀에게 목소리가 연결됐던 건 화재 사건을 조사했을 때였는데, 그땐 목소리가 소녀와 이어진다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학교 옥상에서 처음으로 깨달았다고 말해준다.

이렇게 말하자 헛것이라도 본 것 같다는 감상을 말하자 소녀는 그건 헛것이 아니었을거라 부정한다. 주인공이 어째서라고 묻자, 소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어쩌면 자신은 주인공의 생각보다 기대 이하의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고는, 늦었지만 고백할 게 있다고 한다. 소녀는 예전에 한번 언급한, 언젠가 집에 불이 났었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줬었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생전의 자신은 자신을 구해준 그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불이 났을 때 눈을 떴지만, 어째서인지 당시의 소녀는 밖으로 나갈 생각도, 가족을 구할 생각도 없이 그자리에서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눈을 감아버렸다고 한다. 이게 B구역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의 뒷부분이며, 화재 장소를 보러갔을 때, 누군가가 자신에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를 들었고, 그 목소리가 그리는 선을 따라 밖으로 나왔을 때는 주인공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는 죽음의 색을 보고도 떠올릴 수 없었던 기억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소녀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무서워 도망쳐버렸고, 화재 현장 속에서 죽지 못했다고 한 것도 무의식중에 드러난 진심이었으며, 자신이 살인자라고 단정할 수 있었던 이유도 한심한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녀는 안 그런척 하면서도 미움받고 싶지 않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주인공에게 미움받을까봐 하지 못하고는 기억이 돌아와 성불하는 날이 되기 전까지만 거짓말을 하고 사라지는 순간에 모든 걸 털어놓으려고 마음먹었지만, 지금까지 주인공이 준 따스함 때문에 그러지 못했는데 너무 변명 같다고 자조한다.

주인공은 학교 옥상에서 무엇을 봤는지 묻고, 소녀는 그날 봤던 여학생이 했던 말[42]을 자신도 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결국 겁쟁이처럼 마지막에는 "죽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사이 집에 도착했지만, 소녀는 주인공의 등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는 따뜻한 목소리였고, 그 목소리 덕분에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도 느꼈던 것 같다고 말하지만, 결국 지금은 이렇게 죽어버렸다며 이런 모습이 흉하고 한심하게 보이겠다고 자조한다. 그러면서 경멸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주인공의 등 위가 아니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거라 말하며 주인공의 등에서 내려온다. 주인공은 곁에 돌아와줘서 다행이라고 말해주고, 소녀는 울지 않고 메마른 흐느낌만을 쏟아낼 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있자, 샤워를 마치게 된 소녀가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던 이야기를 꺼내고, 주인공은 딱히 급한 일은 아니라며 지금은 다른 일을 신경쓰고 있다고 하자, 소녀는 자기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과거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묻는데, 주인공은 어렵다는 생각이 들며 고민하고는 그리 자랑할만한 사람은 아니지 않았을거같다고 대답한다. 소녀가 이유를 묻자 사실 자기도 잘 기억이 안나며, 가족이라던가, 이름이라던가, 나이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건 기억나지만, 내면의 자신에 대해서는 잊어버렸고, 무의식 속에서 들려온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는 목소리도 어쩌면 과거의 자신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런게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그 말을 듣고 소녀의 질문은 더 돌아오지 않았고, 눈치를 보다가 이내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한다. 이에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가면 여기서의 일들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고 하자 소녀는 시간이 지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만 주인공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텔레이도스코프를 통해 과거로 되돌아가면 여기에 있었다는 것 정도 외에는 전부 잊게 될거라는 말을 해준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기 전에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고 하자, 소녀는 과한 친절이라고 손사례를 친다.

주인공은 사실 급한 일은 아니라고 해도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 게 언제까지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이어가고, 소녀는 그러면 남은 시간을 더 행복한 일에 쓰는 게 낫다고 주장하자, 주인공은 자신이 사라지면 소녀는 성불할 수 없으니, 소녀를 불행하게 놔둔 채 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 소녀는 사라지지 않아도 괜찮으며, 앞으로 이곳에서 영원히 떠돌더라도, 가끔씩 주인공과 있던 일을 생각하며 웃을 수 있으면 행복할거라고 말하지만, 주인공은 거짓말이라며 부정하고, 소녀는 쉽게 거짓말이라고 긍정한다. 그러면서 사실은 좀 더 많이 떠올릴거고, 어쩌면 한시도 빼놓지 않고 떠올릴지도 몰라서 그런 행복했던 기억을 조금만 더 만들어줄 수 있을지 묻자, 주인공은 그런 일방적인 기억은 너무 잔인하지 않냐고 되묻고, 소녀는 생전에 큰 죄를 지었던 죗값이라며 괜찮다고 하고는 어차피 자신을 신경쓰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냐고 말한다. 주인공은 문득 실마리를 하나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자신들이 헤어진 곳으로 가자고 하며, 소녀와 이어지지 못한 목소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 목소리에 정답이 담겨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어느덧 소녀는 졸리다고 말하고, 그 말을 신호로 방의 불이 꺼지며 둘은 잠에 든다.

9. 7장

다시 돌아온 소녀와 맞는 첫 아침. 깨어난 주인공은 옆에서 잠들어 있는 소녀를 보며 평화롭게 흘러가는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게 느낀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으며 어제 있던 다양한 일들을 회상한다. 어제처럼 세상이 그토록 다양하게 물들었던 날이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머릿속에 순간순간의 색들을 새기고는 오늘 할 일을 생각한다. 오늘은 소녀와 함께 폐전신국으로 향할 것이고, 그곳에서 들은 이어지지 못한 목소리가 소녀에게 이어진다면 소녀는 기억을 모두 되찾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된다면 소녀는 사라지는 방법을 깨닫고는 행복하게 성불할 것이다. 그렇다면 주인공 자신도 행복할 것이고, 그렇게 과거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낙관적인 상상을 한다. 주인공이 이렇게 낙관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그곳에서 들었던 목소리 때문이었을 터인데, 주인공은 레인 맨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냐는 그 목소리를 회상하며, 목소리에서 느껴지던 이질감으로부터 단순한 목소리가 아닌 기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것이 잃어버린 기억이라기에는 또 다른 이질감이 자신을 그 기억 속에서 긁어내어 버렸고, 그렇다면 그 기억 속의 그녀는 누구일까 궁금해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어느덧 소녀도 눈을 떴고, 소녀는 일어나자마자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 싱크대에서 어제 주인공이 먹다 남긴 볶음밥이 담긴 프라이팬을 발견하며 소녀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맛을 보며 조금 싱거운 것 같다고 말하고는 레시피에 '간장 반 큰술 더!'라는 메모를 추가한다. 몇 분이 지나, 소녀가 다시 만든 볶음밥은 간장 반 큰술 차이치고는 뭔가 다른 맛이 느껴졌고, 주인공은 아마 소녀의 볶음밥 레시피는 자신에게는 끝까지 비밀로 남으리라 예상한다.

아침을 먹고 정오가 되자, 주인공과 소녀는 집에서 나와 열차를 타고 F구역으로 향한다. 그렇게 터미널에서 강을 낀 도로와 아치교, 좁은 골목길을 걸어 다시금 E구역으로 향하는 철조망을 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때 봤던 고양이가 있었다. 소녀는 반가워하며 고양이에게 손을 뻗고, 주인공은 그런 소녀와 고양이의 모습을 보며 마치 저 고양이가 행운의 상징이라도 되는 것 같아 이대로 뭐든 잘 될거 같은 마음에 실없이 웃는다. 하지만 그런 낙관적인 생각도 잠시, 폐전신국에 도착하자 난항을 겪게 된다. 예상과는 달리 이곳에 도착한다고 소녀와 그 목소리가 이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혹시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올까 귀를 기울이며 주변을 맴돌아도, 들려오는 건 휑한 바람 소리 뿐이었다.

근처의 그나마 멀쩡한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기로 하며 주인공은 백팩에서 주먹밥을 꺼낸다. 소녀는 자신과 이어져야 했을 그 목소리가 이번엔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할지 궁금하지만, 솔직히 나쁜 기억이거나 무서운 기억일지도 몰라 조금 겁이 나기도 한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소녀는 이번에는 용기를 낼 테니 괜찮다고 역으로 주인공을 다독인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들려오게 할 방법을 찾는 게 먼저인데, 전혀 갈피를 잡질 못한다. 그와중에 소녀는 이야기하고 보니 신기한 일 투성이라며, 이렇게 유령과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라고 말하고는, 어쩌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주인공은 소녀와 함께한 시간이 실은 있어서는 안되는 시간이라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허무할 거라면서.

주인공은 아무튼 그 목소리를 다시 들려오게 해봐야겠다면서, 생각해둔 방법이 하나 있다고 말한다. 그 방법을 소녀에게 긴가민가하며 건네려다가, 소녀가 그전에 궁금한 게 있다며 말을 걸어온다. 소녀는 자신과 이어지지 못한 그 목소리는 주인공에게 무슨 말을 전했는지 묻고, 주인공은 또렷하진 않지만 자신이 누구였는지 전해준 것 같다고 말해준다. 일단 폐전신국쪽으로 향하며, 목소리가 들려오게 할 방법이 뭔지 묻는 소녀에게 주인공은 그날의 일을 재현하는 거라고 대답한다. 다시말해 주인공의 몸에 충격을 주면 목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른다는 논리로, 옥상은 무리겠지만 3층이나 2층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 보는 정신나간 발상인데, 소녀는 당연히 말도 안되는 소리 말라며 반대하고 앞길을 막는다. 결국 실랑이 끝에 소녀는 그때의 일을 재현하려면 자기가 떨어지는 걸 받아주면 된다면서, 자신은 유령이니 잘못될 일도 없고, 그때와 최대한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며 자신이 떨어지기를 자처한다. 주인공은 확실히 괜찮냐고 걱정하지만, 소녀는 여러번 해 봐서 확실하다고 단정한다. 소녀를 설득시킬 수 없음을 느낀 주인공은 결국 소녀의 말대로 3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소녀를 받아주는 말도 안되는 계획을 실행하게 된다.

소녀가 폐전신국 3층의 깨진 유리창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주인공은 현지를 받아줬을 때를 회상하며 그때처럼 별 일 없을 것이고, 다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온 뒤 그 목소리가 소녀와 이어지기를 기다리면 될 뿐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렇게 장밋빛 예감으로 머릿속을 채우고는 주인공은 떨어지는 소녀를 향해 손을 뻗는다. 주인공의 품에 안긴 소녀는 공주님처럼 안긴 게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지만, 그대로 눈을 감고는 자신에게 올 목소리를 기다린다.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주인공을 부르고, 담쟁이덩굴처럼 뻗어나온 운명의 실이 소녀에게 이어진다. 소녀는 행복한 기억을 되찾아가는지 입가에 미소를 짓고, 그렇게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향해, 한 발짝 나아가는 것이다.
ㅡㅡ그랬으면 좋겠다고, 눈을 뜨기 전까지 생각했다.

주인공이 눈을 뜨자, 주변은 침묵의 원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주변을 둘러봐도 원래 그랬다는 듯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온몸을 지탱하고 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다가 허공을 붙잡던 손이 제자리를 되찾고는, 소녀가 사라졌다. 이런 형태로 결말이 다가올거라 예상은 못해 허무해했지만, 소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고, 주인공과 부딪힌 충격으로 소녀가 사라졌다고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소녀가 사라졌으면 그걸로 된건가라고 생각하며 주인공은 눈을 감고, 어지럼증을 동반한 이명이 뇌리를 스친다.

이번에는 소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고, 눈을 뜨면 그 목소리가 더는 들릴 것 같지 않아 그 목소리에 귀를 귀울이고, 이내 소녀의 걱정하는 목소리와 함께 양팔의 익숙한 감촉이 들며 주인공은 정신을 차린다. 주인공은 손을 뻗어 소녀의 어께에 손을 올린다. 소녀는 분명 이곳에 존재했다. 어떻게 된 거냐는 주인공의 말에 소녀는 오히려 본인이 묻고싶다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잘못된 줄 알았다고 눈물을 글썽인다. 우습게도 주인공은 소녀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한심할 정도로 기뻐했고,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둘러대며 앞으로는 조심하겠다고 안심시킨다. 주인공의 안색을 보고 걱정하던 기색을 거둔 소녀는 목소리가 들려왔는지 묻지만, 그 난리를 친 게 무색하게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고, 소녀의 기억도 변화가 없었다.

한참 동안 다른 방법을 물색하고 있었지만, 더 이상의 뾰족한 수단은 없었다. 결국 원하는 바는 못 이루고 돌아가게 되었고, 소녀는 조금 더 있다 돌아가자고 하고는 이런 게 좋다고 나지막하게 중얼댄다. 소녀의 말에 이런 건 무엇이고, 좋다는 건 무슨 감정을 의미하는 건지 고민하던 차에, 소녀가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냐고 말을 걸어오고, 주인공이 소녀가 말한 이런 게 뭘까 고민하고 있었다고 하자, 소녀는 이렇게 있으면 편안해진다면서 주인공의 어께에 머리를 기댄다. 정말로 편안해 보이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주인공은 걱정되지 않냐고 묻고, 소녀는 걱정된다고 한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무책임한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에 주인공은 황급히 소녀에게 사과하고, 소녀는 미안하면 걱정 끼칠 일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흘러가다 소녀는 소원[43]을 바꾸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바로 자신의 기억을 찾고 성불시키기 위해 이런 일들을 하는걸 그만뒀으면 한다는 것. 그러면서 이젠 뭘 해야할지도 모르고,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고도 했으니, 그럼 그때까지 정말 해야만 하는 일을 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면서 소녀는 자신을 위해 이렇게나 애써줬던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다면서 주인공의 뺨에 입술을 갖다댄다. 소녀는 어제 좋아한다는 말에 대한 대답이라고 하고는 그러니까 제발 그만둬달라고 한다. 주인공은 아무 말 없이 소녀와 같은 방식의 대답을 전한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 철조망을 지나고 골목길을 걸을 때만 해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F구역의 터미널에 도착하자 주인공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F구역이라지만, 터미널 내부가 마치 무인 역사라도 되는 양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열차에서 햇살을 받으며 잠깐 잠에 들고, A구역으로 돌아오자 꿈이라도 꾼 것처럼 주변에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하자, 흐릿한 느낌이 뒷덜미를 스쳤고, 모든 감각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마치 꿈속을 걷는 듯한 느낌이었고, 역 근처 횡단보도를 건너 큰길을 지날 때까지도 이 느낌은 지워질 기색이 없었다. 모든 것이 아득한 느낌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미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까지 어쩌다 나왔냐는 주인공의 질문에 유미는 잠깐 산책이나 하러 나왔다고 말하고는 주인공과 함께 걷는다. 유미가 어디 가는 길이었냐고 묻자 집 가는 길이었다는 대답에 유미는 어디 갔다 오는 길이었냐고 다시 묻고, 주인공은 전에 들렀던 폐전신국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고 말해준다. 유미는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그곳이 전신국인줄도 몰랐다고 하고는 반대편을 바라보며 지금 옆에 유령도 같이 있냐고 물어보고 어떻게 됐냐고 물어본다. 주인공은 잘 안돼서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말하고, 유미는 나도 그런데 비슷한 처지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주인공이 의문을 가지자 유미는 그냥 투정부린거고 신경 안 써도 된다고 둘러대고, 뭐라 할 틈도 없이 다음에 보자는 말과 함께 신호등의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유미가 사라지자 모든 것이 꿈만 같은 그 느낌이 다시 느껴졌고, 정신을 차리자 주변에는 모든 것이 녹아내린 듯 인기척이 없는 도시가 있을 뿐이었다. 주인공은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소녀에게 혹시 꿈을 꾸는 걸까라고 물어보고,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소녀에게 엄청 태연하다는 말을 한다. 주인공은 모두 사라졌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소녀가 뭐가 사라졌다는 거냐고 묻자, 주인공은 유미도 사람들도 모두 사라졌다고 말하고, 소녀는 유미는 건널목을 지나가서 사라졌을 뿐이며, 사람들은 지금도 바로 앞에서 지나가고 있다고 말하며 이해하지 못한다. 주인공은 자기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인다며 일단 집에 돌아가자고 중얼거리고, 소녀는 놀라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 주인공이 말 그대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말하려 하자 갑자기 소녀가 주인공을 잡아당기고는 부딪힐 뻔했다고 걱정한다. 결국 소녀가 주인공을 이끌고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주인공의 눈에는 생동감 없는 거리가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그런 주인공에게 소녀는 자고 나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떠오를지도 모른다고 수면을 권유한다. 그 말을 들은 주인공은 가끔 눈을 떠 보니 모든 것이 사라져있는 꿈을 꿨는데, 그게 꿈이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 꿈을 꾸고 나면 하룻동안은 계속 꿈을 걷는 기분이었고, 역으로 이 모든 순간이 그저 긴 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 태연했을 줄 알았다고 하는데, 소녀는 현실은 현실이고 꿈은 꿈이니까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한다. 주인공이 그럼 지금이 꿈인지 볼을 한번 꼬집어달라고 하자 소녀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볼을 꼬집어준다. 주인공은 사실 소녀를 폐전신국에서 받았을 때, 소녀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서 사라진 줄 알았고, 이내 소녀를 마주하자 사라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소녀는 다행이라고 말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하며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소녀는 우리들은 같은 곳을 보고 있다고 말하고, 주인공은 그 말 한마디에 기대어 잠시 그 순간을 만끽한다.
모조리, 모조리 끌어모아 지금의 감각에 흩뿌린다.
오랫동안, 오랫동안, 기억 속에 간직할 수 있도록.......

소녀의 권유대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지만,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잠에 들기 무서웠다. 주인공은 잠들면 다시 그 꿈을 꾸고, 눈을 뜨면 정말 그 꿈처럼 아무도 없을까봐 무섭다고 털어놓고, 소녀는 갑자기 주인공의 볼을 꼬집는다. 소녀는 갑자기 어리광을 부려서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하고는 주인공의 어께에 뺨을 기대고는 불면증이냐고 묻고, 주인공이 그런 것 같다고 하자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서로의 어께가 맞닿고, 눈을 감은 소녀가 눈앞에 무언가를 그리고 고개를 흔들며 직접 선율을 그리는 듯한 몸짓하고, 허밍을 읇조린다. 주인공은 익숙한 선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연주했을 때와는 달리, 음정들이 마치 자신의 곡인 양 소녀에 의해 완벽하게 정돈되어 흘러나온다고 느끼며 심장이 선율과 공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억 속에서 목소리가 선을 이루며 들려오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기억일 수도 있음을 직감하며, 주인공은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경기장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창틀 사이로 주인공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인공은 고교나 프로 야구 대회도 아니라며 긴장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려 했지만, 누가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그녀는 주인공의 어께에 손을 올리며 학교 끝나고 달려가면 경기를 볼 수 있을지 묻고, 주인공은 아마 7회나 8회쯤 될 거라며 끝까지 공을 던질 테니 볼 수 있을거라 장담한다. 여름의 매미 소리와 함께 침묵이 감돌고, 문득 주인공은 매번 이렇게 기다려 주고, 응원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꺼낸다. 그리고 무슨 말을 더 하려 하지만,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어쩔줄 몰라 하고, 그녀가 이야기할 때까지 안 보내 주겠다고 하자 주인공은 시합이 끝나면 전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녀는 자신도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고, 주인공은 시합이 끝나면 경기장 뒷편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하고, 그 말과 함께 완전히 기억을 찾지는 못한 채 목소리가 멀어져 간다.

소녀가 지금 들려왔던 거냐고 말을 걸어오고, 주인공이 그렇다고 하자 어떤 목소리였는지 물어본다. 주인공은 잘 기억나지 않는 소중한 사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했다고 답하고는 소녀가 본 것을 물어본다. 소녀는 한번 숨을 들이쉬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새까만 공간이었고, 잘 모르겠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무섭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고 말해준다. 이건 죽음이었을지 묻고 이내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소녀는 잠을 청한다. 주인공은 소녀가 말한 공간을 곱씹으며 화재가 났던 빌딩의 엘레베이터에서 느낀 그 감각과 비슷함을 느낀다.

어느덧 8월은 사흘밖에 남지 않았고 영원할 것 같은 여름은 가을을 기다리고 있엇다. 눈을 뜨자 소녀가 잠들어 있음을 보고 안심한 주인공은 태블릿을 들어 메일을 확인했다. 스팸 메일 하나와 현지가 보낸 아무 의미없는 메일이 두 개 와 있었고, 문득 생각이 든 주인공은 현지에게 전화를 건다. 막 잠에서 깬 듯 태블릿 너머로 현지의 몽롱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을 알게 된 주인공은 일단 현지가 전화를 더 받기 힘들다고 판단해 일어나면 연락을 달라는 문자와 함께 전화를 끊는다.

반나절 정도가 지났을까, 주인공은 소녀가 만들어 준 샌드위치로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현지의 문자를 확인한 뒤 바로 전화를 걸었다. 현지가 지금 자신의 상황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이유에서였는데, 그 사이 전화가 연결된다. 주인공은 지금 상황을 설명하려다가 뭐라고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잠시 말을 못하는데, 현지는 갑자기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던가 그런건 아니냐고 정곡을 찔러버렸고, 주인공은 설명을 할 필요도 없이 정확하다고 긍정해버린다. 현지는 깜짝 놀라며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주인공은 어제 폐전신국에서 있던 일을 설명해준다. 현지는 주인공의 설명을 듣고는 자세한건 직접 만나서 하겠다며 지금 바로 오컬트부실로 와달라고 요청하고 바로 전화를 끊는다.

주인공은 소녀의 도움을 받아 학교로 향하고, 오컬트부실에 도착하자 스스로 인기척을 느낄 수 없던 주인공은 소녀에게 혹시 안에 누가 있냐고 묻는다. 하지만 정말로 아무도 없었고, 주인공은 자리에 앉아 현지가 오기를 기다린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초자연적인 현상처럼 문이 열리고, 그때가 돼서야 주인공은 현지를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데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맞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혹시 지금 앞에 있냐고 묻던 순간, 주인공의 눈 앞에 초록색 불빛이 반짝인다. 불빛이 사그라들자, 현지가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주인공은 감각을 되찾는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현지는 빛은 파동이면서 입자인 유일한 존재라고 말하고, 주인공은 그렇게 말하면 못알아듣는다고 난색을 표한다. 그러자 현지는 텔레이도스코프를 조금 튜닝한 물건으로 조금 특수한 빛으로 차원 사이를 간섭해서 유령과 몸체가 분리되는 걸 억지로 다시 봉합시킨 거라고 설명한다. 주인공은 유령과 몸체가 분리되려 한다고 놀라고, 현지는 병원에서 자칫하면 유령이 되어버릴 수 있다고 했다 말하지만 주인공은 그건 시간이 아직 많이 남은 줄 알았다고 당혹스러워한다. 현지는 아마 몸에 큰 충격을 받은 게 원인이라고 추측하고, 지금은 잠깐 응급처치를 했을 뿐, 주인공은 지금 유령과 몸이 분리되려 하고 있으며, 멀쩡한 건 깨어있는 동안만이고 잠들면 원래 상태로 돌아가 버린다고 한다. 주인공은 그럼 다시 그 빛을 사용하면 되지 않냐고 묻자 현지는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다그치며, 유령을 조종하는 건 주인공의 무의식, 감각기관을 조종하는 건 주인공의 의식인데, 깨어있는 동안에는 의식이 강해 무의식을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기에 감각기관을 통해 아까 빛을 이용하는 식으로 무의식의 차원을 조절할 수 있지만, 자는 동안은 의식이 무의식을 통제할 수 없으니, 봉합한 상처가 떨어지는 것처럼 무의식이 진동하게 된다고 한다. 아직은 몸과 영혼을 이어준 실이 끊어지지 않았지만, 계속 영혼과 몸 사이를 진동하게 되면 그 실은 끊어져 버리며, 이 도구를 계속 쓸 수 없는 이유도 근본적으로 이 진동이 벌어지는 걸 막지 못하기 때문이고, 오히려 더 악화시킬 수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실이 끊어지면 소녀처럼 유령이 되어 영원히 차원 속을 떠돌아다닐지도 모른다고 한다.

주인공은 물론 소녀도 차원 속을 떠돌아다닌다는 이야기는 이해하지 못했고, 의미를 현지에게 묻자 유령은 이론적으로 한 차원 위의 존재인데, 3차원 공간에 예속될 수 있는 매게체, 즉 육체를 잃게 되면 그 뒤로는 불규칙하게 4차원의 공간을 떠돌게 된다고 한다. 주인공이 잘 이해가 안된다고 하자 현지는 차원을 넘나든다는 건 그때마다 통상적인 시간 흐름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이고, 이건 텔레이도스코프의 원리이기도 한다고 설명해준다. 또한 차원을 넘나들 때마다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기억을 조금씩 잃어가고, 차원의 간격이 넓으면 그만큼 더 많이 잃게 될 거라고 한다.

현지의 말을 듣고 문득 생각이 하나 떠오른 주인공은 현지에게 진동 상태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지 물어보고, 현지는 그 진폭의 시작이나 끝에 존재하는 것들, 다시말해 차원이 달라져도 달라지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다며 부실이나 탁상 위의 인형을 예로 든다. 주인공이 진폭의 머리 부분에 존재하는건 어떠냐고 물어보자, 현지는 아마 진폭의 시작점이 같다는 건 말 그대로 같은 차원에서 온 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진동의 시작점에 왜 유령 소녀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아무튼, 주인공은 이제 유령과 몸을 이어주는 실이 끊어지기 전에 과거로 돌아가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이 난다. 주인공이 학예제가 끝날 때쯤이면 되냐고 묻자, 현지는 태블릿으로 날짜를 확인하고는 늦어도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에는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말해 주인공에게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사흘. 주인공은 탁자 위에 인형을 집어들고는 이거 안 팔릴 거라는 실없는 소리를 하고, 현지는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며 타박한다. 주인공은 그러면서 불꽃놀이도 보고싶었다고 하며, 한 번도 불꽃놀이를 본 적이 없어서 보는 것도, 보여주는 것도 소원이었다고 한탄한다. 현지는 모레 밤에 텔레이도스코프를 작동시키는 게 최선일 것 같다고 결론짓고, 아마 학교 옥상에서 작별인사를 해야 할 거 같다고 말한다. 주인공은 몸을 일으키고는 잠시 유미에게 가봐야 할 거 같다며 현지에게 저녁에 시간 있냐고 묻는다. 현지가 남는 게 시간이라고 하자 주인공은 그럼 연락할테니 저녁 먹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는 유미에게 가기로 하고, 현지는 깜빡 졸거나 하면 안된다고 경고한다.

주인공은 유미가 있을법한 곳으로 향하며, 소녀에게 소녀가 죽은 게 1년 전쯤이었을 것 같다는 이상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말을 건넨다. 소녀가 갑자기 그게 무슨 뜻이냐며 의아해하자, 주인공은 소녀가 모든 기억을 잃었다고 했는데, 그러려면 수많은 차원을 건너다녀야만 있을 수 있기에 소녀가 죽은 건 1년 전일 수가 없다고 설명한다. 1년 전에 소녀는 단순히 여기에 도착만 했을 뿐이었는데, 어째서 소녀가 이곳을 배회하고 있었을까? 그렇다는건 주인공이 말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던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소녀였을 거라고 추측한다. 소녀가 바로 그럴 리가 없다고 반박하고,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한다. 주인공이 어째서냐고 묻자 소녀는 자신은 살인자인데 주인공의 기억 속 소중한 사람이 살인자면 안된다고 하고, 불길 속에서 자신을 구해준 그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기에 소녀 자신은 더욱 그 사람과 만나선 안된다고 말하고, 주인공에게 그러니까 과거로 돌아가 달라고 부탁하고는 그러면 자신이 주인공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며, 만약 주인공이 자신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면 싫어할지도 모르고, 싫어하고 싶지 않다고 읇조린다. 주인공은 덤덤히 소녀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어느새 학생회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바삐 돌아가고 있을거란 주인공의 예상과는 달리 학생회실에는 유미 혼자뿐이었고, 유미는 학생회실 귀퉁이에서 엎드려 자고 있었다. 나중에 연락하는 게 좋을거란 생각에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유미가 깨면서 언제 와있었냐고 놀라고, 주인공은 자고 있길래 나중에 연락하려 했다고 말한다. 유미는 어제 여기서 밤을 새버리는 바람에 그랬다고 하고는 어쩐 일로 들렀냐고 묻고, 주인공은 말을 하려다가 아직 일이 많은 것 같다며 말을 돌리고, 유미가 그래서 지금 멘토링도 못하고 있는데다가, 부모님도 반대가 심하다며 푸념하다가 이내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서 온 거냐고 다시 묻고, 주인공은 잠시 생각했다가 작별인사하러 왔다고 말을 꺼낸다. 그게 무슨 뜻이냐는 유미에게 주인공은 소녀와 있었던 일, 현지와 나눈 이야기들을 설명해주고, 그 말을 들은 유미는 바보같다는 짧은 한 마디를 내뱉는다. 그러고는 작별인사는 헤어지는 그 순간에 하는거라고 쏘아붙이며 그날 다시 정식으로 작별인사를 건네달라고 부탁한다. 주인공은 사과하고, 유미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하자 주인공은 겨울방학에 같이 여행가기로 했는데 못가게 됐다고 하고, 유미는 그건 성적이 30등 이내로 나오면 그러기로 한 건데 너무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타박하고, 주인공이 유미가 준비한 불꽃놀이도 못 보게 됐다고 하자 나지막히 중얼거린다.
"그런 거 미안해하지 말란 말이야, 바보처럼......."

저녁 무렵, 주인공은 학교 근처에 자주 가던 식당에서 현지와 저녁을 먹는다. 현지는 주인공에게서 밥을 얻어먹는 것도 끝이라며 아쉬워하고, 주인공도 필라프를 먹으며 동감한다. 현지는 다시 아쉽다고 되뇌이고는 아쉬운 걸 하나하나 이야기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니 그럴 수가 없다고 말하고는 그렇지만 주인공은 있어야 하는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거고 자신은 임무를 완수하는 거라며 싫어하는 티 내면 안되겠다고 하고, 주인공은 용케도 사라져야 할 사람과 가까이 지냈다고 말하자, 현지도 그렇다고 짧게 동감하고는 주인공이 후회하진 않냐고 묻자 그럴 리가 없다며 화를 낸다.
"좋았어요.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기분 좋은 꿈처럼요."

주인공은 현지에게 감사를 전한다. 현지는 모레 학교 옥상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고는 주인공과 헤어지고, 다음에 보자는 말과 함께 현지와 헤어지며, 다음에 보자는 이야기를 다음번에 만날 때는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씁쓸해한다. 유미에게도, 현지에게도, 소녀에게도 모레면 '다음에 봐'라는 인사를 건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주인공은 그럼 뭐라고 작별인사를 건네야 할지 고민하고, 남은 이틀동안 더 고민해보기로 한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주인공은 방 침대에 앉고, 기다리고 있던 소녀는 내일 뭘 할지를 물어본다. 주인공이 잘 생각이 안난다고 하자 소녀는 여태껏 있었던 일들을 요약해보면 어떻냐고 권유한다. 한 달동안 있었던 간단한 일들을 이틀 만에 해 보고, 미처 못 해봤던 시시콜콜한 것들을 거기에 덧붙이는 거라고 한다. 소녀는 전에 가본 크레페 가게도, 디저트 카페도 다시 들려보자고 하고, 주인공이 그때 못 뽑은 큰 곰인형도 다시 뽑아보겠다고 하자 소녀는 바로 그거라는 듯 환한 웃음을 짓는다. 그리고 주인공은 내일부터는 눈이 다시 잘 안보이게 될 테니 소녀에게 자신의 눈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고, 소녀는 그럼 서로의 눈과 손이 되는거라고 웃으며 주인공의 팔을 붙잡는다. 주인공이 혹시 지금 하고싶은 일이 있냐고 묻자 소녀는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고, 주인공도 사실 자신도 그렇다며 동의한다.

이튿날, 주인공은 소녀의 손에 이끌려 크레페 가게, 디저트 카폐, 인형뽑기 기계가 있는 게임 센터를 순회했고, 게임 센터에서 큰 곰인형 하나를 뽑고 났을 때는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주인공은 소녀에게 인형은 어쩌다 좋아하게 됐냐고 묻고, 소녀는 횡설수설하다 결국 좋아하는 데 이유를 붙인다는 건 힘들다면서 역으로 주인공에게 자신같은 불행투성이 역귀가 좋은 이유를 세 가지나 요구한다. 주인공은 소녀의 눈치를 살피며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가 일단 예쁘다는 말을 꺼낸다. 소녀는 그게 뭐냐며 주인공의 팔을 툭툭 때리고, 주인공은 어휘 능력이 꽝이라며 능청을 떤다. 소녀가 어휘 능력이랑은 상관없다며 타박을 주자, 주인공은 예쁜 구석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려면 날 샐지도 모른다고 하고, 소녀는 안 궁금하니까 거기까지만 해달라며 고개를 숙이고는 한참동안 들지 못했다.

해가 저물자, 소녀는 주인공을 이끌고 막차 시간이 거의 다 된 터미널로 향한다. 어리둥절하다가 소녀의 의도를 파악한 주인공은 이런 곳에서 밤을 보내도 괜찮냐고 묻고, 소녀는 엉뚱한 곳에서 밤을 보낸 건 자주 있었던 일이기도 하고, 별로 집에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기분이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다. 그렇게 30분 뒤, 막차가 지나갔다는 안내 방송과 함께 조명이 다 꺼지기 시작하고, 주인공은 혹시 소녀가 자신을 재우고 싶지 않아서 이곳을 택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은 지금 유령에게만 보이고, 유령만 볼 수 있는 처지가 되자 자신도 꼭 유령이 된 것 같다고 하고는 차라리 이대로 유령이 돼서 영원히 소녀의 곁에 머무는 건 어떨까 생각하는데 소녀는 그렇다면 전혀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단호하게 반대하고 주인공은 자신보다 더 중요한 걸 두고 온거니까 돌아가야 한다고 강권한다.

소녀가 행복하지 않다고 하자 유령이 될 마음을 접은 주인공은 이번에는 소원 이야기를 하며 화제를 돌리는데, 소녀의 소원[44]을 이뤄주지 못해 미안해한다. 하지만 소녀는 이미 넘칠 만큼 아름답다며 자신은 이미 행복으로 가득 차서 이 이상 행복해 질 수 없는 물병과 같기에 잘 된거라 하고는 텅 빈 자신을 가득 채워 줘서 고맙다고 감사를 전한다.

길 거라고만 생각했던 터미널에서의 하룻밤은 오히려 잠을 잤을 때보다 빠르게 지나갔고, 첫차가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주인공은 터미널에서 나와 소녀를 뒷편에 앉힌 뒤 자전거로 인적 없는 강변도로를 달린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어디로든 달리고 싶었던 것일까, 한참을 달린 주인공은 숨이 차기 시작하자 강변 한쪽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소녀가 어디까지 갈 생각이냐 묻자, 잘 모르겠다고 하고는 돌아오지 못할 만큼 멀어질 것 같으면 목덜미를 한 대 때려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소녀가 침대에서 같이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며 말을 걸어온다. 주인공은 직감적으로 자전거의 속도를 늦추면서 대꾸하고, 소녀는 사실 책 내용은 기억이 안난다며 말을 이어간다. 주인공도 그때는 소녀가 어디를 읽고 있는지 신경쓰느라 마찬가지였다며 공감하는데, 하지만 소녀에게는 그저 같이 책을 읽었던 그 순간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고 말하고, 그런 소녀의 손에서 희미하게 떨림이 느껴졌다.
"그러니까요, 저는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든. 그저 이렇게 함께 있었던 시간만을 행복하다며 기억할 거에요."

떨리는 목소리로 울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주인공을 안심시키는 소녀의 말에,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해가 지고있었고, 소녀는 예쁜 석양이라며 행복해한다. 목 끝까지 올라온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겨우겨우 참아낸 채, 주인공은 돌아가자는 말과 함께 소녀와 학교로 향한다.. 마지막 석양이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소녀와 함께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다 저물어 있었다. 유미와 현지가 옥상에서 기다리고 있나 싶어 전화를 할까 했지만, 일단은 옥상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옥상 문은 김샌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활짝 열린채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곳을 향해 발을 내딛자, 익숙한 바람과 함께 눈앞에 초록색 불빛이 반짝였다. 불빛이 사그라들자, 그 앞에는 유미와 현지가 미묘한 표정으로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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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는 말없이 리모컨같은 물건을 주인공에게 건네고, 주인공이 손을 뻗지만 현지의 손이 힘을 놓지 않은 채로 주인공이 가져가려는 것을 거부했다. 애써 태연한 척하던 현지는 이제 돌아오지 못하는 거고, 선배가 가면 오컬트부에는 자신밖에 남지 않고, 밥 사줄 사람도, 같이 카페에서 이야기할 사람도, 시시한 이야기 들어줄 사람도 없어진다며 어리광을 부리는 듯 이야기를 꺼내고, 이에 주인공은 잘 할 수 있을거라는 틀에 박힌 말과 함께 현지의 손을 쓰다듬으며 마법의 주문같이 남아있던 기억 속의 문장을 중얼거리고, 현지의 손은 이내 스르르 풀린다. 현지에게 리모컨을 건네받았지만 전에 쓰던 헤드셋이 없었는데, 현지는 왠지 불편할 거 같아서 헤드셋은 뺏고, 마음의 준비가 되면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해준다.

주인공은 잠깐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거 같다면서 심호흡을 하고는 주위를 둘러보는데, 아까부터 유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어디선가 화살이 귓전을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서는 쏘아올려진 불꽃 하나가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그 불꽃을 시작으로, 이내 수많은 불꽃들이 하늘을 수놓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는 주인공의 앞에 유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 마지막 소원 #==
주인공: "......어떻게 된 일이야?"[45]
유미: "보다시피. 불꽃놀이잖아."
주인공: "폭죽은 어디서 난 거고?"
유미: "글쎄~ 어디서 난 폭죽일까?"
주인공: "......학예제 때 쓰려고 했던 폭죽들 맞지?"
유미: "으응, 맞아. 몇 개 챙겨온 거야."
주인공: "몇 개가 아닌 것 같은데......."
소리 내어 만족스럽게 웃어 보이는 유미.
유미는 그 어느 때보다 뿌듯한 얼굴로 밤하늘의 불꽃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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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행복했으면 좋겠다."
유미: "응, 행복할 거야."
난데없는 나의 말에도, 유미는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미: "여태껏 놓쳤던 것 전부, 앞으로는 붙잡을 수 있도록."
눈앞에서 쏘아 올려진 불꽃들은 생각보다 더 크고, 환했다.
소녀도, 나도, 그리고 유미와 현지도 밤하늘에 수놓이는 형형색색의 불꽃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이 순간의 모든 것들을 오감을 동원해 붙잡으려 애썼다.
하늘을 가득 수놓는 가늠하기 힘든 불꽃의 크기, 선명한 색상의 흩어지는 꽃불들, 귀청을 울리는 거대한 굉음, 꽃가루가 흩날리듯 매캐하게 맴도는 화약 냄새,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모두의 표정.
그 모든 것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을, 머릿속에 새기려 안간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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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예뻐요."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까지.
나는 그 모든 것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을 마지막 순간에 모두와 함께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를 표했다.
주인공: "결국 마지막에 소원을 이루게 됐네."
소녀: "그러게요,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제가 좋아하는 누군가와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소녀가, 나의 왼손을 슬쩍 붙잡았다.
소녀: "실은, 절대 이루어지지 못할 소원이라고 생각했어요. 제 눈에 아름다운 것이 보일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고, 저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생길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한 적 없으니까요."
주인공: "그렇지만, 이렇게 둘 다 생겼잖아."
소녀: "그렇네요."
피어나는 불꽃들은 점점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여름의 끝에 피어난 수십 발의 불꽃들.
단지 그 짤막한 순간을 위해 순식간에 피어났다 져버리는 수많은 꽃잎.
그 꽃잎들이 여름의 끝을, 그리고 만남의 끝을 위로하듯 발현과 소멸을 반복한다.
마치 짤막한 만남과 이별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려는 것처럼.
==# 엔딩 #==
소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며 주인공에게 감사인사를 건넨다.[46]
"행복한 꿈이었어요. 행복한 한여름 밤의 꿈이요."
"이런 행복한 꿈을 꿀 수 있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파일:여름꽃14.jpg

마지막 불꽃이 쏘아올려지고, 소녀는 과거로 돌아가게 되면 여기서 있던 일들은 모두 잊는다고 했으니 지금이라면 어떤 짓을 해도 괜찮겠다며 주인공에게 입을 맞춘다. 밤하늘의 불꽃은 유미, 현지, 소녀와 함께였던 여름의 끝을 수놓고, 주인공은 소녀의 마지막 웃음을 간직하려 애쓰며, 입술을 살짝 떼어놓고는 텔레이도스코프의 버튼을 누른다.

텔레이도스코프가 작동하자 마치 분실물 보관소에서 물건을 찾듯 간단하게, 그리고 허무하게 기억을 되찾으며, 주인공과 소녀의 과거가 밝혀진다.

중학생 시절 주인공의 세상은 자신과 그녀, 가족, 기억속의 몇 명으로만 이루어진 작은 세상이었다. 처음부터 그녀가 주인공의 세상의 중심에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인공이 알지 못했을 뿐, 언제나 그녀는 주인공의 곁에 있었다. 주인공의 부모님은 어떤 제약도 주지 않은 채 주인공을 그 작은 세상 속에서 쏘다닐 수 있도록 풀어주었다. 밤이든, 낮이든, 새벽이든.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어느날 밤 열 두시쯤, 열 네살 무렵의 주인공은 집에 가다가 두 블럭 떨어진 이웃집에서 불이 난 것을 목격한다. 주인공이 할 수 있는 일은 119에 신고하는 일 정도였고, 몇 분정도 걸릴 거라는 말과 함께 멍하니 불길을 바라보는데, 2층에서 사람의 실루엣이 창틀을 향해 비쳐 보였다.[47]

주인공은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구하러 들어간다. 하지만 정작 2층 방에 들어서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한 주인공이 주변을 살피자, 한 소녀가 침대에 이불을 쓰고 그냥 누워있었다. 소녀는 살 마음과 희망을 잃은 채[48] 그대로 죽는 걸 기다렸으나 그걸 알 영문이 없던 주인공은 뭐가 됐든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소녀를 끌고 내려가려 하나 불길이 번지면서 어느새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막고 있었다. 그때 다행히 불렀던 119가 도착한 덕분에 주인공과 소녀는 소방대원에게 구해지고, 주인공은 몰래 현장을 빠져나간다. 주인공은 자신이 구해준 소녀의 이름이 가연이라는 것도, 자신과 동갑내기의 학생이라는 것도, 며칠 뒤에서야 알게 된다.

다음 날, 학교는 화재 사건으로 시끄러웠다. 학교는 화재로 부모님을 잃은 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있었지만, 주인공은 여전히 그 학생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학생이 1학년 E반의 누군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소녀가 자신과 같은 학교에 같은 학년인 학생이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을 뿐.

며칠 뒤, 주인공은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자, 거실에 한 여학생이 있었다. 곧 그 여학생이 화재 현장에서 구해준 소녀라는 사실을 알아챈 주인공은 놀라지만, 소녀는 주인공을 잠시 훑어보고는 간단히 "안녕"이라는 인사만 하고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주인공이 부모님에게 자초지종을 묻자, 부모님은 '가연'이라는 여학생을 데려왔다는 이야기를 설명해준다. 그 사고는 가연의 모든 것을 앗아간 듯 했고, 고아원으로 보내지려던 가연을 주인공의 부모님이 맡아주겠다고 나선 것이었다.[49] 부모님은 공부방으로 쓰던 방 하나를 쓰겠다는 이야기, 충격을 많이 받았을테니 친절하게 대해 달라는 이야기, 바로 옆집에 살던 동갑내기 친구니 친하게 지내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그렇게 가연은 주인공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주인공이 가연에게 받은 첫인상은 그저 그랬다. 상당히 내향적인 성격에다 학교에서 마주치는 경우도 없던데다가, 모습을 보려고 점심시간에 E반으로 가봐도 그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가연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저녁식사 시간뿐이었는데, 그마저도 식사가 끝나면 "잘 먹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바로 방으로 올라가버려서 주인공은 가연에게 말을 걸 기회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다 2주 뒤, 토요일 아침에 잠에서 깬 주인공은 TV 소리를 듣자 거실로 향하고, 거기에는 TV를 보고 있던 가연이 있었다. 주인공은 저녁을 먹는 것 외에는 인간다운 행동을 하지 않는 가연에게 마치 유령같다는 인상을 받았기에 그 모습을 보고는 상당히 의외라고 여기며 조심스레 부엌으로 향하는데, 가연이 주인공을 보고는 당황하며 소리 때문에 깼냐고 묻는다. 주인공은 푹 자고 일어났다고 말하며 TV를 끄려는 가연에게 무슨 영화를 보고 있었냐고 묻지만, 가연은 그저 좋아하는 영화라는 말만 하고, TV에는 얼핏 보기에도 제법 나이를 먹은 듯한 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이름을 들을 새도 없이 가연은 TV를 끄고 방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마침 부모님이 아침 일찍 나가고 밥을 알아서 챙겨먹으라는 메모를 남겨놓은 덕분에 주인공은 가연에게 점심을 만들어주면서 접점을 만들게 된다.

20분 정도가 지나, 주인공은 볶음밥을 만들어왔는데, 호기롭게 점심을 만들어주겠다는 말이 무안하게 어딘가 탄 내가 나는 햄 조각들이 뒤섞여 있는 등 어설픈 결과물이었다. 머쓱해진 주인공은 입맛에 안 맞을지도 모른다며 걱정하고, 가연은 무심하게 맛있어 보인다고 말로 역으로 주인공의 속을 긁는다. 주인공은 화제를 돌리려고 아까 보던 영화 계속 봐도 괜찮다며 TV를 켜줄지 물어보는데, 가연은 시계를 보고는 이미 끝났을거라고 한다. 주인공이 눈치없이 방에서 튀어나왔다며 머쓱해하자, 가연은 이미 결말도 알고있어서 괜찮다고 하고, 주인공이 다시 무슨 영화냐고 묻지만 또다시 좋아하는 영화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먼저 다 먹고 가연을 기다리자, 식사를 끝낸 가연이 정리는 자신이 하겠다며 자처하고, 주인공이 평소에 집안일 하는걸 좋아한다고 사양하려 하지만, 그럼 같이 하자며 무작정 수세미에 세제를 짠다. 가연은 집안일이 익숙하지는 않았는지 다소 서툴러 보였는데, 다 씻은 컵을 주인공에게 건네주려다가 손이 미끄러지고, 주인공이 급히 손을 뻗었지만 결국 컵은 깨지고 만다. 거기에 주인공은 컵 파편에 베여 손을 다쳤고[50], 가연은 자신을 안심시키려 왼손잡이라서 괜찮다는 말로 둘러대며 반창고를 찾던 주인공을 끌고 자신의 방으로 향한다.

가연의 방은 깔끔하게 책꽂이에 꽂힌 책 몇 권과 가지런히 정리된 CD들 뿐이었고, 주인공의 이미지 속 여학생의 방이랑은 동떨어져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연은 책꽂이 선반에서 구급상자를 꺼내 주인공을 치료해줬고, 괜히 잘하지도 못하는 일 하겠다고 나섰다며 사과한다. 주인공은 괜찮다고 하며 책꽂이에서 책 몇 권을 보며 저 책은 어떤 책들이냐고 묻는데, 가연은 역시나 좋아하는 책이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주인공은 한번 읽어보고 싶다며 컵 깬 일을 없던 걸로 해주는 대가로 책을 빌려달라고 요청하고, 가연은 잠깐 고민하다 200페이지 가량의 소설책 한 권을 빌려주고, 대출 기한은 일주일이지만 대출 연장은 마음껏 찾아와서 해도 괜찮다고 덧붙인다. 독서와 담을 쌓고 살던 주인공이었기에, 일주일만에 200페이지 분량의 책을 다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었고, 매주 대출 기한 연장을 위해 가연의 방을 찾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가연은 책의 어느 부분을 읽고 있는지, 책 내용은 어땠는지를 물어왔고, 주인공은 책의 내용이 어떻든 가연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이게 주인공과 가연의 첫 접점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흐르고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주말. 밤늦게까지 책을 읽던 주인공은 11시가 돼서야 일어났고, 부모님은 또 어느 틈에 사라져있었다. 주인공은 거실 소파에 앉아 TV 채널을 돌리다가, 책을 돌려주러 12시쯤에 책을 들고 가연의 방으로 향한다. 하지만 방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고, 귀를 기울여 집중하자, 안에서는 답답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자, 가연은 침대에 누워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고, 주인공이 이마에 손을 짚자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주인공은 황급히 밖에 나가 해열제를 사온 뒤 가연을 깨워 먹이고, 약 기운이 퍼질 때까지 조금 더 자고 있으라고 하고 방문을 나서려는데, 가연은 주인공의 팔을 잡아채고는 제풀에 놀라 팔을 다시 놓은 뒤 조금만 옆에 있어달라 부탁한다. 주인공은 이유를 물어보려다가 그냥 많이 아픈가 보다 싶어 침대에 걸터앉고, 몇 분 되지 않아 가연은 다시 잠든다. 가연이 잠든 걸 확인한 주인공은 다시 일어나려 하지만, 가연의 손이 주인공의 손을 붙들고 있었고, 별수없이 주인공은 가연이 일어날때까지 곁을 지키기로 한다.

세 시간 뒤, 몸이 조금 나아진 가연은 눈을 뜨고는 자신의 손이 주인공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을 보자 놀라서 손을 확 뺀다. 약 봉투를 보고 나서야 자신의 상황을 대강 파악한 가연은 주인공에게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냐고 묻고, 태연하게 주인공이 세 시간 정도라고 대답하자 아파서 정신이 없었다며 사과한다. 주인공은 딱히 신경쓰지 않고 가연에게 배고프지 않냐고 물어보자, 역으로 주인공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가연이 부탁한다고 하자 주인공은 부엌으로 향하고, 문을 닫고 나간 가연의 방에서는 이불을 팡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인공은 시간을 들여 서투르게나마 죽을 끓여왔고, 가연은 죽을 다 먹고는 주인공에게 감사를 전한다.

주인공은 점점 가연에게 익숙해져가고 있었고, 여름방학이 되면서 그녀와 이야기할 시간도 더 많이 얻게 된다. 그러던 중 어느날 밤, 밤늦게 집에 들어온 주인공은 부엌을 배회하다가 가연과 마주친다. 아직도 안 자고 있었냐는 가연의 말에 주인공이 가연도 자다 깬 것 같지는 않다고 하자, 가연은 책을 읽고 있었다고 답하고는 주인공에게 방금 들어왔냐고 묻는다. 주인공이 그렇다고 하자 부모님이 걱정 안하냐고 묻고, 주인공은 보다시피 그렇다고 답한다. 주인공은 물을 한잔 마시고 가연에게 책을 반납하겠다고 말한다. 가연은 책을 돌려받은 뒤 새 책을 추천해주고, 돌아가려던 주인공에게 지금까지 뭐하다가 들어왔냐고 살짝 째려보고, 주인공은 취미 생활이라며 거실에서 글러브와 야구공을 보여주고는 동아리 활동으로 야구부에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그러면서 금요일에 친선 경기가 있다면서 가연에게 한번 보러 오라고 권유하고, 가연이 응원해주기를 바라냐고 묻자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주인공은 대충 얼버무리고 시간과 장소도 알려주지 않은 채 방으로 돌아온다.

경기 당일, 당연하게도 가연은 보이지 않았다. 경기도 예상대로 상대에게 끌려가고 있었고, 어느덧 7회말 수비 상황에 점수는 7점차, 거기에 1루와 2루에 주자가 있었다. 안그래도 원정 경기라서 상대팀을 응원하는 여학생들만 있던지라 주인공은 의욕 없이 셋 포지션에 들어가는데, 그순간 3루 쪽 철조망에서 어떤 여학생과 눈이 마주치고, 그 여학생이 가연임을 주인공은 바로 눈치챈다. 경기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자 가연은 주인공이 뭐라 하기도 전에 그냥 우연히 지나친 거라고 변명하고는 다음번에도 경기가 있냐고 묻는데, 주인공은 다음 주 금요일 똑같은 시간에 있다고 말해주고는 다음에도 응원 와줄거냐고 묻고, 가연은 마음 내키면이라고 대답한다. 주인공이 속한 야구부가 패배주의에 찌들어 있었기에 그런 취미생활을 가연에게 딱히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주인공은 바쁘면 안와도 괜찮고 어차피 가연이 야구를 하나도 모른다고 했으니 재미없을수도 있다고 살짝 말린다.

다음 경기가 있던 날, 그날도 비슷한 상황에서 평범하게 경기를 끝낸 주인공은 근처에서 기다리던 가연과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경기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주인공은 가연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지만, 의외로 가연은 야구 경기에 흥미를 보이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공이 담장 너머로 사라진 상황이 뭔지를 묻는 등 야구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리고 야구에 흥미를 보이는 가연의 모습에, 주인공은 매번 지는 모습만 보여주면 순식간에 가연이 흥미를 잃을까 싶어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고 다짐하고, 가연도 책꽂이에 야구 서적이 늘어나는 등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다. 이에 주인공은 평범하게 공을 던져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서 감독에게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오르고 싶다고 요청한다. 그렇게 주인공은 단순 흥미로만 접근했던 야구에 진지하게 임하게 되었다. 물론 가연에게 야구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게 해주기 위함도 있지만, 한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주인공이 선발투수로 나선 뒤에도, 야구부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지는 않았다. 경기 결과만 빼고. 약체팀에서 선발투수가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수비를 믿지 않고 던지는 것이다.[51] 아무튼 공이 배트에 맞는 일이 줄어들면 변수도 그만큼 줄어들고, 주인공은 그걸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투수였다. 그리고 가연도 매번 경기장에 찾아와 주인공을 응원했고, 책꽂이에 늘어가는 야구 서적만큼 가연의 야구 지식도 늘어갔다.

이후 2학년이 되고, 주인공은 가연과 같은 반이 된다. 또한 야구부가 학교에서 더이상 유명무실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야구부는 여러 차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내년 전국대회 시드를 받게 되는 게 확정되었고, 매번 선발투수로 나선 주인공은 어느새 학교에서 인기인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마법처럼 주변이 바뀌고 있었다. 딱 한 가지, 가연에 대한 것만 빼고. 주인공은 가연과 같은 반이 되었건만, 어째 수업 시간 외에는 볼 일이 없을정도로 가연과의 접점은 줄어들고 있었다. 복도에서는 주인공을 못본척 지나치는 일이 많아졌고, 운동장에서도 항상 응원을 오던 가연이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마치 의도적으로 가까워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러다 어떤 남학생에게서 가연이 1학년이었을 때부터[52] 왕따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며 가연이 따돌림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제서야 가연이 왜 자신을 피하는지 이해한 주인공은 점심시간에 학교 옥상에서 가연을 찾아내어 다시 가연과 가까이 지내고 싶다고 하고, 가연은 가만히 생각하더니 그때 어째서 자신을 구해줬는지 따지듯이 묻는다. 주인공은 가연을 구해준 건 자신이 아닌 소방대원이라며 능청거리고, 가연은 주인공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라며 그때 죽어버리려고 했었고, 자신같은 미움받는 민폐투성이는 거기서 죽었어야 했다며 심경을 토로한다. 주인공은 그렇지 않다며 부정하지만 가연은 자신과 친해보인다는 이유로 주인공까지 피해를 보고, 같은 집에 산다는걸 다른 애들이 알게 되면 무슨 이상한 소문이 나돌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데, 주인공은 이미 알고 있으니 괜찮다고 하며 말을 끊는다. 이후 주인공은 가연이 옆동네에 있는 기숙사 딸린 사립학교로 가고싶다고 참고서에 적어둔걸 봤다는 이야기를 꺼내는데, 가연은 학비가 비싸니까 근처의 공립학교로 가도 상관없다고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자신도 가연과 같이 그 사립 학교로 진학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고, 가연은 두 명씩이나 보내면 학비가 부담될거라고 우려하지만, 주인공은 스포츠 특기자 전형으로 진학하면 되고, 만약 내년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고 MVP를 받으면 장학금도 나올테니 둘 다 그 학교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가연은 우리 학교 야구부가 냉정하게 우승후보급은 아니고, 투수의 어깨는 소모품이니 자신 때문에 무리하지 말라 하지만, 주인공은 가연이 응원해준다면 할 수 있다고 밀어붙인다. 자신 말고도 응원해주는 사람들은 많다는 가연에 말에 주인공은 너가 아니면 안된다고 말과 함께 가연이 처음 자신을 보러와준 날에 처음으로 공을 던지는 게 진심으로 즐거웠고, 가연이 다른 학교를 다 찾아다니느라 늦게 도착한 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가연도 결국 수긍한다.

그렇게 7월 20일,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주인공은 가연과 인형뽑기를 하러가거나, 가연이 만들어준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지냈고, 이후 하계리그를 끝내고, 중간고사를 치르고, 추계리그를 우승하고, 가연과 함께 기말고사를 공부하는 등[53] 즐겁게 2학년을 보낸다. 3학년이 되어서도 주인공은 가연과 같은 반이 되었고, 어느덧 가연은 주인공과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있었다. 전국대회 첫 경기날에는 수업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가연이 몰래 빠져나와 응원을 해주기도 했다.

예선전부터 결승까지, 야구부는 차차 승리를 거듭해갔다. 아무런 암초도 없이, 너무나도 쉽게 소원이 하늘에 닿은 듯 했다. 그리고 비가 오던 어느날, 주인공의 무의식 속에서 듣던 목소리의 닻이 내린 곳. 비 때문에 8강전 경기는 콜드게임으로 일찍 끝나고 경기장을 나가던 도중, 입구 근처에서 누군가가 주인공을 기다리며 손을 흔들었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미안, 오늘 보충 수업이 있어서 경기 못 보러 왔어."[54]

텔레이도스코프에서는 그때와 똑같은 기억이 또렷하게 흘러나오고, 주인공은 서로가 떠올렸던 목소리와 기억은 상대방의 기억이 아니었을지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그때 떠올리지 못했던 기억 하나가 피어오른다.
"난 비가 오는 날이 좋은데, 너는 어때?"

주인공은 같이 우산 아래에서 걸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고 하고, 가연은 손을 못잡아서 아쉽다는 의견을 보인다.[55] 이에 주인공은 그럼 우산을 접으면 된다는 주장을 하고, 가연은 감기 걸려도 모른다며 우산을 접어버리고 주인공의 손을 잡는다. 주인공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마르지 않았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행복할 수 있을 거고, 모든 게 행복하게 끝맻음 지어질 거라 생각했다.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가연이 기다리는 순간까지도 주인공은 행복하게 끝날거라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마 주인공은 비 오는 날 어께에 느꼈던 통증이[56] 그 꿈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신호[57]였지만, 주인공은 그걸 인정하지 못했다.

대망의 전국대회 결승. 주인공이 던진 공은 팀의 승리를 알리는 투구가 아닌 경기의 끝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어 외야로 뻗어갔다.[58] 타구의 결과는 확인하지 않고도 알 수 있었고, 주인공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운드에서 내려온다.[59]

결국 결승에서 패배를 맞이하고, 다들 짐을 챙겨 버스로 향하던 사이 주인공은 다른 동급생 야구부원 3명과 끝내기 타구를 맞기 전에 왜 자신들을 비롯한 다른 투수들에게 마운드를 넘기지 않았냐는 요지의 말다툼을 하는데 주인공은 한 것도 없으면서 순전히 내 덕분에 올라온 거 아니냐며 비아냥댔고 결국 몸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지친 상황에서 3명에게 이길 수 없던 주인공은 얻어맞은 뒤 쓰러졌고, 분이 덜 풀린 부원들은 주인공을 비품 창고에 가둔다. 그렇게 주인공은 비품창고에서 공포에 휩싸인 채 서서히 죽어갔던 것이다.[60]

결국 주인공의 영혼이 돌아갈 몸은 없었던 것.

텔레이도스코프가 명멸하고, 주인공은 자신을 유령이라 칭한 이름없는 소녀는 역시 자신의 기억 속의 그녀, 즉 가연임을 떠올린다. 정작 유령이 된 건 주인공이 먼저였지만. 이제 끝인라는 듯 텔레이도스코프가 보여준 세상이 무너지며 꿈에서 보던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상이 모습을 드러내고, 주인공은 가연의 부재를 절실히 느끼며 주변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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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는 어째서인지 가연이 있었다. 가연은 눈물을 흘리며 주인공에게 달려오고, 그 순간 희미한 빛이 일며 선을 이루고, 가연과 주인공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제서야 주인공은 소녀와 자신이 이어졌을 때마다 자신이 그녀의 기억을 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저 가연과 자신이 늘 함께였기에 자신의 기억인 줄 알았을 뿐. 그렇게 가연의 시선에서 본 그날의 뒷이야기가 텔레이도스코프에 그려진다.

경기장을 떠나가는 버스를 보고 낙담하던 가연,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도 주인공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걱정된 가연은 밖에 비가 내리는데도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안면도 없던 학생들에게 연락해봤지만, 모두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몇 시간을 더 헤메다가 가연은 경찰에 신고하고, 실종신고가 접수된 뒤, 경찰은 먼저 주인공과 경기를 뛴 다른 학생들에게 행방을 물었지만 주인공과 다퉜던 동급생들이 버스에 같이 탔었던 것 같다고 거짓말을 한 탓에 단순 가출을 염두에 두고 수사가 진행되어 그사이 주인공은 다른 학교의 비품 창고에서 고립된 채 구조되지 못했고, 결국 주말이 지나고 사흘 뒤에야 발견된다. 사인은 심한 탈수증세로 인한 쇼크사. 시합 후에 땀을 많이 흘렸고, 구타까지 당했던 주인공이 어둠뿐인 비품창고에서 사흘이나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많은 학생들이 소식을 듣고 애도를 전했지만 그뿐, 왜 주인공이 죽었는지는 수면 위로 나타나지 않았고, 가해자 3명은 높으신 분들의 아들인탓에 봉사와 근신 등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단순히 우발적인 사고였다고만 기록에 남았다. 이에 가연은 가해자들의 처벌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기각될 뿐이었고, 근신 처분이 풀리고 학교에 돌아온 학생들이 반성의 여지는 보이지 않자 절망과 분노를 느낀 가연이 가해자 중 한 명의 휴대폰을 훔쳐 한밤중에 급한 일이 있으니 나오라는 문자를 보내서 남은 가해자 2명을 인적이 드물면서 익숙한 곳으로 불러냈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
그는 이런 모습의 나라도 사랑해 줄 수 있을까?
그는 이런 모습의 나라도 이해해 줄 수 있을까?[61]
무거운 감정으로 엮인 기억의 별자리가, 안쓰럽게 빛을 발한다.

잃어버린 휴대폰을 돌려주겠다는 전화를 받고 찾아온 마지막 한명은 이미 낌새를 채고 있었는지 결국 마지막 복수는 미수에 그치게 되고, 가연은 역으로 반격을 당하여 쓰러져 버린다.

그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62] 다만 주인공이 죽은 시점에서 주인공의 영혼은 미래의 어떤 고등학생의 몸에 들어가고[63] 가연의 영혼은 사후 정처없이 오랜 시간 방황하다 시간선을 넘어 대부분의 기억을 잃은 채 주인공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사라지지 못한다는 것이 서로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채.

가연은 자신은 역시 용서받지 못할 살인자였다며 눈물을 흘린다. 주인공은 가연이 살인자든 뭐든 상관없이 좋아할 거라며 눈물을 훔쳐주고, 가연은 그저 한없이 기쁜 얼굴로 주인공의 손가락에 눈물을 맡긴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지 궁금해하는 가연에게 주인공은 잠깐 같이 걷자며 제의하고, 둘은 서로 손을 붙잡은 채 바람도, 햇살도 없고, 그렇다고 구름이 떠다니거나 비가 내리지도 않는 세상을 걸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기억을 보고 있었던 거네."

주인공은 문득 전해주지 못했던 이야기를[64] 말하려 하는데, 가연은 기억속에서 수도 없이 들었고, 시시한 이야기였다며 말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그 시시한 이야기를 마음속에 채워두고 서로 키득키득 웃고, 가연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꺼내고, 주인공도 자신의 원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하자 가연은 그럼 서로서로 각자의 이름을 빚졌다고 하고는 서로의 이름을 속삭이며 다시 한번 웃는다. 가연이 사라지지 못한 이유는 자신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걷던 도중, 둘의 영혼이 육신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듯, 빛으로 변해가려 하고 있었다. 가연은 이렇게 같이 사라질 수 있어서 다행이라며 울먹이고, 주인공은 정말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가연을 안으며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는 둘은 함께 빛이 되어 성불한다.
스러져가는 빛을 향해, 작별인사를 건넸다.[65]
명멸해가는 세상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언젠가, 언젠가가 아니라면 언젠가의 다음날.
서로가 서로에게 다시 한번.
다음에 봐, 라는 인사를 건넬 수 있길.
흩어져가는 숨결을 향해, 잊히지 않을 약속을 건넸다.
다음번에는 조금 더 행복한 결말의 동화 속에서 만나자고.
다음번에는 조금 더 길게 서로의 진심을 이야기해 보자고.
다음번에는 조금 더 오랫동안 서로에게 입맞춤해 보자고.
나는 너를,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기다릴 테니까.[66]

잠들어 있었던 기억들 속에서[67]
끝나지 않은 우리의 이야기
둘로 흩어져 버렸던 슬픈 기억 속에선
하나가 된 추억의 조각들
그때의 우린 찾을 수 없어도
계절은 또다시 찾아올 테니
여름과 함께 떠나보낸 너의 그 뒷모습은
행복한 꿈이었다 말할 테니[68]

[1] 원래 몸의 이름과 현재 몸의 이름 모두 간접적으로만 언급되고 정확한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도 모두 주인공을 이름으로 부르지를 않아서 작중에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2] 이때 화면에는 Mi atendos라는 글자가 출력되는데, 이는 에스페란토어로 '나는 기다릴 것이다'라는 의미이다.[3] 선택지라지만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대사 한 줄만 바뀌고 스토리는 똑같이 이어진다.[4] '집으로 돌아간다.'를 선택할시 현지가 부탁한 게 있으니 돌아가야겠다며 태블릿을 꺼내 시각을 확인한 뒤 40분이나 좁고 더운 골목길을 헤맸다는 자신이 바보같다는 생각을 하고 '정체불명의 소녀를 계속 찾는다.'를 선택할시 이대로 돌아가기엔 신경 쓰이는 부분이 너무 많다면서 태블릿을 꺼내 시각을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본다.[5] 소녀가 모퉁이에서 기다리다가 주인공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것이다.[6] 게임 내에서는 테루테루인형이라고 말한다.[7] 유령과 맞닿게 된 물건이 보이지 않는 현상. 주인공이 1학년 때 조사한 적이 있는 거라고 한다.[8] 다만 소녀가 유령이라 어차피 소녀가 있어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바로 되새긴다.[9] 간접적으로만 언급되고 이름이 뭔지는 여기서도 안나온다. 정황상 원래 이름이 아닌 몸의 주인의 이름을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10] 컷 신에서는 과거의 나와 속죄의 이야기, 그날 나는 너와 만났다, 과거의 너와 미래 여행 등의 제목이 나오는데, 여름의 끝에 피는 꽃이 제목이 되기 전에 후보 제목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1] 감독의 의도도 그런 쪽이라는 식으로 언급이 되어 AI가 복수를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되나 정확하게 뭐라고 남겼는지는 나오지 않는다.[12] 이 사람도 성우가 있어서 보이스가 지원된다.[13] 사진이 컷신으로 나오는데, 왜인지는 몰라도 얼굴 부분이 노이즈 처리가 되어 있어서, 민주가 스토리와 관련된 떡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14] 식당 주인과 마찬가지로 성우가 있어서 보이스가 지원되나, 노파처럼 이름이 뭔지, 성우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15] 눈치가 보였는지 주인공이 잠들 때까지 기다린 모양이다. 물론 주인공은 자는 척할 뿐이었고, 소녀도 혹시 자는 척하는 거라면 고맙다고 말하며 욕실로 향한다.[16] 예전에도 몇 번 꾼 익숙한 꿈이라고 언급된다. 당연한 것처럼 유미도, 현지도, 소녀도, 아무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는 않고 그저 쓴웃음만 짓고 꿈에서 깨어난다.[17] 아마도 주인공이 살던 시대에 유행해서 미래로 넘어온 지금은 사라진 팝송인 듯 하다.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는 멜로디만 간접적으로 언급된다.[18] 태블릿에 유미와 현지가 보낸 문자가 떠있는데, 유미는 "오늘도 좋은 하루~ 요즘 너무 안 봤네! 앗! 이런 말 하니 부끄러워!"라고 보냈고, 현지는 특유의 셀프 이모티콘과 함께 "선배 놀지 마요"라고 보내놨다.[19] 주인공은 소녀와 대화를 나눴지만,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혼잣말하며 웃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음식이나 음료도 한 명이 먹기에는 많은 양을 시켰으니...[20] 이때 CG로 주인공(정확히는 주인공의 영혼이 깃든 몸)의 얼굴이 처음 나온다.[21] 현지가 초반에 유령의 존재가 로봇에게 전파 혼선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가설을 내놓았는데, 이 말대로였다. 1년 전부터 일어난 로봇 실종 사건은 소녀의 영향이었던 것.[22] 이때 현지가 보낸 이모티콘이 배경화면으로 도배되는데, 특수문자 등을 조합해 보낸 것 치고는 굉장히 퀄리티가 높다...[23] 이때 현지의 CG가 나오는데, 현재와는 달리 안경을 쓰고 있다.[24] 이때 teleidoscope라는 철자가 노이즈 가득한 화면과 함께 나온다.[25] 선택지로는 3차원, 4차원, 5차원이 뜬다. 현지의 반응이 한 마디만 달라질 뿐 뭘 골라도 상관은 없고, 선택지를 고르면 후원자 버전에서는 '그냥 찍어보았어'라는 도전과제를 달성할 수 있다.[26] 3차원을 선택할시 주인공이 수수께끼나 넌센스냐며 물어보고 4차원을 선택할시 현지가 어떻게 알았냐며 의외라는 말을 하고 5차원을 선택할시 주인공이 생각없이 내뱉은 말에 현지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조금은 성의있게 생각해보라며 말한다.[27] 작중 설정에 따르면 영혼, 즉 유령은 4차원 너머의 존재고 따라서 시공간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28] 초반에 오컬트부실에서 가져온 테루테루인형.[29] 다만 이러면서도 식료품 코너 역시 인공육이나 GMO 채소 등이 진열되어 있다는 묘사가 있다. 주인공이 초반에 말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태양 이외에는 없다는 말이 여기서도 적용되는 셈,[30] 주인공은 소녀가 젖지 않게 신경써주는거지만, 소녀는 주인공 이외의 눈에는 보이지 않기에 다른 사람 눈에는 우산을 엉뚱한 방향으로 기울여서 쓰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주인공은 딱히 신경쓰지 않았지만.[31] 이때 소녀의 CG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는 연출이 나온다.[32] 이때, 주인공에게 기댄 소녀의 모습이 검은 실루엣으로 나타나는데, 실루엣이 붉게 물들더니, 검은 사슬로 뒤덮인다.[33] 이때는 주인공과 소녀의 모습이 하얀 실루엣으로 나타난다. 아마 주인공과 소녀의 심리 상태를 구분하기 위한 묘사인 듯 하다.[34] 이때부터 CG에 계속 노이즈가 걸리면서 불안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후로 죽음의 색을 본 뒤까지 계속 노이즈 걸린 화면이 자주 나온다.[35] 이때 주인공은 속으로 사람은 일정 선의 고통을 받을 때까지는 살려달라고 하지만, 그 선을 넘어서는 순간 죽여달라고 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고 덧붙인다.[36] 이때부터 소녀의 얼굴이 음영처리된 CG와 함께 사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OST가 나오는데, 이 OST의 제목은 Teleidoscope다.[37]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고, 노이즈가 걸린 듯한 빗소리와 함께 손글씨로 쓴 듯한 해당 대사가 CG로 나온다.[38] 취한 기색이 잔뜩 묻어난 방금과는 달리, 이 대사만큼은 진지한 톤으로 말한다. 유미의 진심이 취중에 묻어난 것.[39] 참고로 단숨에 E구역에 도착하는걸로 묘사되지만, 처음 주인공이 F구역과 E구역에 왔을 때 언급에 따르면 주인공이 사는 A구역에서 F구역까지는 열차로 4시간 가량이 걸리며, F구역에서 E구역으로 향하는 경계 구역까지는 버스와 도보를 이용하여 2시간 가량이 걸린다. 사실상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상의 거리를 달려온 셈.[40] errai. 공식적인 명칭은 세페우스자리 감마 A(Gamma Cephei A)로 K1형 준거성이자 세페우스자리 감마의 주성. 서기 3000년 이후의 북극성이 되는 별이다.[41] 세페우스자리 감마 B(amma Cephei B). M4형 주계열성(적색 왜성). 당연히 육안으로 관찰되지는 않는다.[42] 누군가에게 죽고 싶어라고 말했던 것.[43] 아름다운 것을 보며 사라지고 싶다.[44] 아름다운 것을 보며 사라지고 싶다[45] 이때부터 BGM으로 2차 PV곡인 마지막 소원이 나온다. 불꽃놀이라는 분위기와 굉장히 잘 맞고, 소녀와 주인공이 말했던 사라지기 전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장면이기에 제목과의 매칭도 좋은 편. 그리고 이 이벤트를 보는 동안은 저장이 불가능하다.[46] 챕터상으로는 여전히 7장이지만 엔딩 파트에서는 여기서부터 엔딩으로 표기된다.[47] 이때 화면이 넘어가는 용도로 신호등과 함께 알림소리가 나온다. 이후로도 계속 스토리가 넘어갈때 이 장면이 연출된다.[48] 이유는 따돌림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안나온다. 따돌림은 사고 이후에 생긴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49] 입양인지는 정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의 부모님이 어떻게 가연의 사정을 알고 맡은건지도 불명. 정황상 주인공의 집안이 가연과 친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그럼 이 게임이 근친물이 되는건가주인공이 가연을 몰랐던 이유는 아마도 촌수가 멀어서 친척이라지만 두 집안끼리는 서로 모르던 사이였고, 가연의 후견인을 찾던 와중에 주인공의 부모님에게 연락이 닿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50] 미래에서 맨 처음 주인공과 가연이 만났을 때 가연에게 걸려 넘어져서 오른팔을 다친 장면이 연상된다. 이 외에도 가연과 주인공이 미래에서 했던 일이 오마주되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51] 링크가 이상하긴 하지만 수비를 믿지 않는다는 얘기가 이 문서에 있는 류현진이 아이들에게 조언해준 일화와 매칭이 되는데다가, 여름꽃의 제작자들 중에는 예전부터 SNS에 야구 게시물을 올리는 등 열렬한 야구팬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따온 스토리일 가능성이 높다.[52] 정확히는 부모님이 화재사고로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부터[53] 이때 주인공의 독백으로 살려줘라고 말한다.(...)[54] 폐전신국에서 연쇄살인마에게 죽을 뻔하다가 소녀에게 구해졌을 때 들려왔던 기억이다. 그때는 가연의 모습이 나오지 않았고 목소리도 게임 내에서는 출력되지 않았지만 이 기억은 예상대로 소녀, 즉 가연과의 기억이었던 것.[55] 주인공과 소녀가 같이 비 오는 날에 산책을 나갈때, 소녀가 비가 오면 안 좋은 점으로 손을 못잡아서를 꼽았던 장면이 오마주된다. 가연은 그때나 이때나 똑같은 말을 한 것.[56] 주인공이 폐전신국에서 떠올린 기억에서는 우산을 들어주려 하다가 오른쪽 어께에 통증을 느껴 가연이 대신 들어주는 장면이 있었다. 일종의 플래그였던 셈.[57] 이때 어두운 밤에 내리는 비와 함께 붉은 신호등이 알림음과 함께 점멸한다. 여태껏 장면을 전환할 때마다 나온 신호등은 주인공이 꿈에서 멈춰야 한다, 혹은 멀어져야 한다는 '신호'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58] 게임 내 스크립트를 보면 끝내기를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타인지 홈런인지는 불명.[59] 기회가 되는 대로 선발로 나왔다고 하니 몸이 망가지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도 최동원이나 장명부 등 혹사로 인해 망가진 투수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여러모로 씁쓸한 모습이다.[60] 작중 주인공이 폐소공포증을 느끼는 이유는 이것 때문. 유미와 창고에 있었을 때 엘레베이터와는 달리 패닉에 이어 가연의 목소리까지 떠올린 이유는 그곳이 바로 자신이 죽은 곳인 비품 창고였기 때문이다.[61] 초반부에 유미와 본 영화의 대사와 동일하다. 가연의 복수에 대한 복선을 영화를 통해 미리 나타낸 것. 안타깝게도 유미와 주인공이 나눈 대화로 보아 주인공은 자신이 죽어도 가연이 복수하는 것을 바라지 않은 모양이었지만.[62] 정확히 가연이 죽은 이유는 나오지 않으나, 주인공의 독백으로 마지막 살인은 미수로 끝났고 상대방에 의해 소녀가 쓰러진 후 해당 독백이 끝나는 것을 보아 상대방의 반격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63] 정황상 그 고등학생이 호버크라프트에 부딪혔던 충격으로 인해 영혼이 튕겨나가서 몸이 텅 비어버렸고, 그 비어있던 몸에 주인공이 들어올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오직 주인공만이 가연을 볼 수 있던 것도, 가연이 주인공의 눈에서 죽음의 색을 볼 수 없던 것도 주인공은 이미 유령이고, 영혼없는 몸에 빙의된 상태였기 때문.[64] 결승이 끝나면 할말이 있으니 운동장 뒷편에서 오라고 했던 이야기. 하지만 보다시피 경기가 끝나고 동급생들에게 끌려가 죽는 바람에 전하지 못했다.[65] 이때 1차 PV곡이 MR로 나온다. 제목은 여름의 끝에 피는 꽃.[66] 주인공의 마지막 독백이자 작품의 마무리 대사.[67] 이때부터 PV곡에 보컬이 깔리면서 엔딩 크래딧이 나온다.[68] 이때 크래딧과 함께 타이틀 화면이 나오더니, 빛이 한번 비치고는 파란 하늘의 난간에 앉아있던 소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저녁노을의 황혼만이 남은 쓸쓸한 풍경으로 바뀐다. 이때부터 타이틀 화면은 저녁노을의 텅 빈 난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