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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기훈/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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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프로 이전 경력3. 전북 현대 모터스4. 울산 현대
4.1. 2007 시즌4.2. 2008 시즌4.3. 2009 시즌
5. 수원 삼성 블루윙즈

1. 개요


염기훈의 클럽 경력을 기술해 놓은 문서.
  • 전북 현대 모터스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 2006
  • 수원 삼성 블루윙즈 FA컵 우승: 2010, 2016, 2019
  • 삼성 하우젠 K리그 대상 신인상: 2006
  • 하나은행 FA컵 득점왕: 2019
  • 하나은행 FA컵 MVP: 2010, 2016
  • K리그 클래식 베스트 XI: 2011, 2015, 2017
  • K리그 챌린지 도움왕: 2013
  • K리그 챌린지 베스트 XI: 2013
  • K리그 클래식 도움왕: 2015, 2016

2. 프로 이전 경력

1983년 3월 30일, 대전광역시에서 1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으며, 이후 충청남도 논산시로 이주해서 논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근대 2종 선수였고, 근대 2종 특기생 신분으로 논산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개학 첫날 축구부 훈련을 보고 바로 축구부로 전향하기로 결심했고, 마침 인원이 부족했던 축구부에서 그를 받아주며 축구선수로의 길을 새로히 걷게 된다. 중학교 3학년 때 뇌수막염에 걸리기도 했지만, 강경상업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학교에선 두드러진 활약으로 내내 주전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모두 약체 팀에서만 축구를 한 통에 번번한 우승 경력이 전무했고, 때문에 프로 진출은 물론 대학 진학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여러차례 거부를 당하다가 (고등학교) 3학년을 마쳐 갈 2001년 말, 당시 서현옥 감독이 있던 호남대학교에서 테스트 기회가 생겼고, 5일 간 받은 끝에 호남대에 합격하며 마침내 대학에서도 축구를 할 수 있게 됐다.

이후 2002년부터 새롭게 팀에 부임한 신연호 감독 아래서 황지수, 문민귀, 김동찬 등과 함께 전국대회 5차례 준우승을 이끄는 등 호남대의 전성기를 만들었다. 미드필더임에도 득점왕과 도움왕을 수상할 정도로 두각을 보인 그는 3학년부터 각종 대학 대표 선수로 선발됐으며, 결국 4학년이던 2005년 이즈미르 유니버시아드 멤버에 선발되며 대학을 대표하는 선수로 거듭났다.

3. 전북 현대 모터스

호남대 4학년에 두각을 보이며 여러 프로 구단들에게 관심을 받았으나 신연호 감독에게 모든 결정을 맡기고 운동만 했다고 한다. 결국 4학년 1학기에 2006년 K리그 드래프트에서 우선지명 신분으로 호남대 연고 구단인 전북에 입단하게 됐다.

3.1. 2006 시즌

등번호는 11번을 배정받았다.

3월 4일 K리그 슈퍼컵에 선발 출전하며 전북 데뷔전을 치렀고, 3월 8일 감바 오사카와의 AFC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1차전에 풀타임을 소화하며 ACL 데뷔전을 치렀으며, 3월 12일 리그 개막전인 포항 원정에서 역시 풀타임을 소화하며 K-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3월 29일 대전과의 리그 홈경기에서 프로 데뷔골을 터뜨렸다.

신인임에도 입단 동기인 최철순, 권순태, 정인환, 이현승 등과 함께 최강희 감독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받아 많은 경기에 나섰다.

하지만 그 해 7월 당시 팀동료였던 김형범의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된다. 염기훈이 훗날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머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났다고 말했으니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는 부분(...) 다행히 그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2개월이라는 공백을 거쳐 부상 회복했고, 계속 활약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특히 AFC 챔피언스 리그 결승 1차전에서 선제골을 기록하는 등의 맹활약을 펼치며 그 해 전북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크게 일조했다.

당시 전문가와 K리그 팬들은 물론 축구에 관심이 많은 축빠들 사이에서도 나름 유망주로 이름을 알렸다. 다만 일반 시청자 눈에는 머리에 땜통[1] 인상적인(...) 풋내기라는 인상이 많았다.

시즌 막바지까지 대전의 배기종, 대구의 장남석, 부산의 이승현 등과 신인상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결국 ACL 우승과 국가대표팀에 소집된 활약을 인정받아 06시즌 K-리그 신인상을 수상하며 리그 최고의 유망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12월 열린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대표 선수로 소집돼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FIFA 클럽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다.

K-리그 정규리그 20경기 3골 1도움, K리그 리그컵 11경기 4골 4도움, ACL 10경기 3골 2도움, FA컵 2경기 출전.

시즌 총 43경기 10골 7도움을 기록했다.

3.2. 2007 시즌

2007년에도 주전으로 나섰다. 개막전부터 2도움을 기록하더니, 제칼로스테보, 최철우 등이 활약하는 공격진에게 양질의 크로스를 배달하며 부상으로 빠진 김형범 없이 홀로 전북의 측면 공격을 이끌었다.

정규리그 7라운드 인천전에서 멀티골을 기록하는 등,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기량을 선보이며 리그와 국가대표팀 최고의 윙어로 자리매김했다.

전반기에만 리그와 리그컵을 포함해 18경기 5골 3도움을 기록하는 등, 거의 두 경기 당 한 개의 공격포인트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7 AFC 아시안컵 도중,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을 강행한다. 당시 그의 계약서에는 바이아웃 15억이 있었기 때문에, 해당 조항을 활용해 수원으로 이적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해당 사실을 알게 된 전북은 ACL 전년도 우승팀 자격으로 8강에 나서야했고, 이적료보다 선수 자원이 더 시급했다. 또한, 프렌차이즈 스타로 키우려던 염기훈이 이적을 시도하자, K리그 로컬룰을 이용해 선수 트레이드를 제시한 울산으로 염기훈을 팔아버린다.

염기훈 측의 의견은 이렇다. 보통 K리그 팀들 사이에서는 자기 소속팀 선수가 신인상을 받았을 시 해당 선수의 연봉을 적어도 100%는 인상해주는게 관행인데,[2] 전북은 시즌 시작 전 염기훈과 재계약 협상을 하면서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기분이 상한 염기훈은 전북 측에 자신의 바이아웃으로 15억원을 걸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전북이 수락하면서 염기훈에게 바이아웃이 책정되게된다. 전북이 염기훈의 바이아웃 요구를 받아들인 이유는 당분간 그 정도의 이적료를 제의할 팀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인데, 이때 수원이 염기훈에게 걸린 바이아웃을 지불하고 그와 협상을 진행해버리게 된다.[3] 바이아웃으로 그 정도 금액을 받더라도 염기훈급의 선수를 보강할 자신이 없었던 전북은 결국 수원이 제시한 바이아웃 금액을 받는 대신, 그 해 7월에 염기훈이 아시안컵에 차출되어있는 틈을 타 그에게 의사도 묻지 않고 울산의 정경호+임유환과 2:1 맞트레이드를 진행하는 만행을 저질러버린다.[4] 자기 소속팀이었던 선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은 전북의 이런 행태에 염기훈도 배신감을 표하였고, 결국 이로 인해 둘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해당 기사

반면, 전북 측의 주장은 이전부터 에이전트를 통해 잔류를 원한다고 의사를 전달했지만, 성과가 없었고 파주 NFC까지 가서 미팅을 진행했지만 염기훈의 부모님까지 구단을 찾아와 이적을 요청해서 이적이 추진되었다고 해명했다.당시 기사 전북 구단에서는 염기훈이 이적을 강력히 요청해서 대체 선수가 필요해 2:1 트레이드를 단행했다고 밝혔고, 염기훈은 전북측이 멋대로 자신이 수원으로 이적하고 싶다고 오해했다고 반박한다.[5] 전북은 에이전트를 통해 선수와 수원의 협상이 이미 진행 중이었다고 했고, 염기훈은 멋대로 울산에 트레이드를 단행한 전북에 배신감을 느낀다며 서로 언론을 통해 싸움이 전개되었다.정리

당시 염기훈이 대표팀 차출 당시 짐을 숙소에서 싹 빼서 나갔다, 시즌 도중에 수원과 사전접촉을 했다는 등의 말이 돌면서 전북 팬들은 염기훈을 여전히 배신자로 인식하고 있다. 훈련 기간에 사전 접촉을 해 클럽 분위기를 망쳤고, 이운재 등 수원 주요 선수들과 이적이 거의 확정시 된 것처럼 행동했다는 말이 전북 팬들 사이에 돌았다. 전북팬들의 인식은 시즌 도중에 사전 접촉으로 이적을 추진하고 부모님까지 대동하여 팀 분위기를 망쳤다는 것이다. 반면, 염기훈의 팬들은 애초에 전북이 내놓은 재계약 조건이 푸대접에 가까운 데다가, 선수의 잘잘못을 떠나 본인 의사와 반하여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팀으로 이적시키는 것은 구단 측의 만행이라고 주장한다. 상호 오해와 언론전으로 얽혀 있어 진실은 당사자들이 알 것이다.

4. 울산 현대

결국 2007년 7월, 갈등 끝에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또 다른 현대가' 울산 현대 호랑이의 유니폼을 입게 됐다.

4.1. 2007 시즌

등번호는 전북에서 달던 11번을 배정받았다. 네덜란드로 떠난 이천수의 공백을 메울 것으로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2007 AFC 아시안컵 3,4위전 한일전 도중 발등뼈 골절상을 입으며 약 5개월 아웃 판정을 받았다.

결국 정규리그 최종전 경남전에서 울산 데뷔전을 치렀고, 데뷔전에서 득점을 터뜨렸다. 플레이오프에서 두 경기를 소화하며 반 시즌 동안 3경기 1골을 기록했다.

4.2. 2008 시즌

절치부심하며 시즌을 준비했고 초반 2골 1도움을 기록하는 등, 좋은 출발을 보냈다.

하지만, 역시 부상에 발목잡혔다. 정규리그 6라운드 수원과의 빅버드 경기에서 엄지 발가락 골절로 아웃돼 또 다시 5개월 아웃 판정을 받았다.

이후 9월 20일 성남전에 복귀했으나 인천전 프리킥 득점 이외에 공격포인트가 없었다. 정규리그에선 계속 후반 교체로 투입되는 등, 완벽하게 회복되지 못한 채 경기에 나섰다.

그러다 친정팀과의 준플레이오프에서 이진호의 헤더를 헤더골로 연결하며 결승골을 기록, 팀을 플레이오프와 다음 시즌 ACL로 이끈 것이다. 세레모니는 당연하게도, 했다.

서울과의 플레이오프에서 득점을 기록했고 연장까지 120분을 풀타임으로 뛰었으나, 끝내 패배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시즌이 끝나고 염기훈 커리어 최악의 흑역사를 만들어버리는데, 바로 울산 구단의 허락을 받지 않고 김두현이 있던 EPL 웨스트브롬의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출국한 것. 염기훈에게 큰 관심이 있었던 웨스트브롬 측도 염기훈이 무단이탈한 것을 알고는 영입 의지를 철회하고 대체 자원을 영입하며 사건은 일단락됐다. 결국 울산 팬들의 큰 비난을 받았고 구단으로부터 무단 이탈에 대한 벌금 2000만원을 부과받게 된다.

해외 이적 문제가 불거질 때면 으레 적절한 언플과 함께 대승적 차원 운운하며 K리그 구단이 호구 선수를 일방적으로 편들기 마련이지만, 염기훈의 경우 다른 선수들과 사정이 달랐다. 전북에서 울산으로 이적할 때도 분란을 일으켰고, 2:1 트레이드로 영입한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엄연히 계약기간이 1년 남은데다가, 심지어 부상에서 갓 회복한 몸으로 해외로 뜬다고 한 것. 자연히 '프리미어 리거 6호 탄생'이라는 설레발 못지 않게, '제 버릇 개 못주고 또 징징대네' 하는 싸늘한 시선이 있었다.

염기훈은 훗날 한 인터뷰에서 이 사건의 전말을 밝혔는데, 당시 에이전트가 자신에게 구단의 허락을 맡았다고 말을 하였고 이에 너무 기뻤던 나머지 직접 사실확인을 하지 않고 그냥 출국을 했던 것이라 밝힌 바 있다. 이와 동시에 꼼꼼하지 못했던 자신의 행위가 경솔했다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를 봤을 때 염기훈의 행위가 일부러 한 행동은 아니었다고 판단은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해당 사건에 대한 책임은 피할 수 없다. 오죽하면 염기훈을 사랑하는 수원팬들 사이에서도 울산팬들이 염기훈 욕하는거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위의 전북 논란과는 다르게 울산에서의 논란은 염기훈도 명확하게 스스로 잘못이라고 시인하는 편이다. 염기훈이 2019년 선수협 이사로 임명되고 한 세미나에서 전북에서 울산으로 이적하던 시절의 아픔을 예시로 들며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했는데, 당연히 울산 팬들 입장에선 염기훈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냐고 격분했다. 이에 울산 팬이 인스타로 DM을 보냈고 염기훈 본인도 "철없던 시절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라며 잘못을 인정했다.

FA컵 1경기 출전을 포함해 시즌 총 20경기 5골 1도움을 기록했다.

4.3. 2009 시즌

나고야와의 ACL 개막전과 성남과의 리그 개막전을 풀타임으로 소화했지만, 이후 팀 훈련 중 지난 시즌 당했던 발등 피로골절이 재발해 4개월 아웃됐다. 울산에 합류한 이후 매 시즌 4개월 이상의 장기 부상을 당하고 있다. 그 사이 ACL에선 조별 탈락했고, 리그에선 4연패를 기록하는 등 13위를 기록하며, 새로 부임한 김호곤 감독 아래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다.

리그 복귀전이던 7월 12일 대구전에서 김신욱과 교체 투입돼 오장은의 쐐기골을 어시스트하며 복귀를 알렸다. 또한 8월 세 경기 연속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울산의 6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이끌었고, 6강 플레이오프 진출권까지 끌어올렸다. 대구와의 최종전에서도 후반 결승골을 기록하는 등 분투했지만 끝내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며 아쉬운 시즌을 보내게 됐다.

2009년에는 ACL 1경기 포함해 시즌 총 21경기 3골 3도움을 기록했다.

울산에 있는 동안 특유의 킥과 볼키핑 능력을 통해 팀의 공격을 이끌었지만, 2년 반 동안 반 이상을 부상과 재활에 날리는 등 유리몸 기질을 보였다. 또한 무단 이탈해 WBA에 입단 테스트를 보는 등, 충성도 마저 없는 선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시즌이 끝나고 결혼했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차범근 감독은 노쇠화된 김대의의 대체자로 어떻게든 염기훈을 영입하기 위해 2007년부터 몇 년 째 구애했다. 결국은 유망주 이재성에 이적료까지 얻어주고 영입을 확정했다.

5. 수원 삼성 블루윙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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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뷔한 시즌 교통사고를 당해 평생 남을 흉터를 얻었지만 금방 털고 복귀해서 신인상을 차지했다.[2] 꽁병지tv에서 김형범의 인터뷰에 의하면 신인왕 수상 후에 연봉 100%이상 인상이 당연시 됐었는데 인상폭이 이에 못 미쳤다고 한다. 김형범은 이를 전북이 잘못한 점도 있다고 했다. 참고로 같은 인터뷰 자리에서 송종국은 약 309%, 이 기록을 이천수가 경신했다고 한다.[3] 당시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염기훈에게 20억을 베팅했다는 루머가 돌았다.[4] 이 부분에 대해 전북은 바이아웃 조항은 어디로 보내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게 아니라 제시한 금액이 더 많은 쪽으로 보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선수가 원하는 팀으로 보낼 의무가 없으며, 울산측의 제시가 더 좋았기에 보냈을 뿐이라고 반박.[5] 이 부분은 위의 2019년 선수협 세미나 발언과 상반된다. 수원에 있던 많은 선배들이 연락해 잘해보자고 했다고 하는데, 이는 에이전트를 통해 이미 수원행이 거의 진행되고 있었다는 소리다. 즉, 최소한 수원과 염기훈 사이에 이적 논의가 상당한 수준까지 진행된 것은 사실이라고 봐야 한다. 염기훈의 수원 이적 추진 시기가 전북측 입장대로 사전 접촉하여 멋대로 상당히 진행시킨 것인지, 염기훈 입장대로 재계약 협상이 불만족스러워서 이후 진행한 것인지에 따라 논쟁의 촛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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