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16:20:01

니콜라이 예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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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제2대 내무인민위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Ежо́в
Nikolai Ivanovich Yezhov
파일:Nikolai_Ivanovich_Yezhov_20200318_000636.jpg
출생 1895년 5월 1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1]
(現 러시아 북서 연방관구 상트페테르부르크 연방시)
사망 1940년 2월 4일 (향년 44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주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주)
묘소 돈스코이 묘지
재임기간 제2대 내무인민위원
1936년 9월 26일 ~ 1938년 11월 24일
서명 파일:니콜라이 예조프 서명.png
학력 초졸
종교 무종교 (무신론)
신체 151cm[2]
소속 정당
[[소련 공산당|]]
주요 서훈[3] 레닌훈장
적기훈장 (몽골 인민 공화국)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1. 개요2. 일생
2.1. 초기2.2. 스탈린 밑에서 승승장구하다2.3. 몰락(1938~1939)과 최후(1940)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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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Лучше пусть пострадают десятки невинных, чем пропустить одного шпиона. Лес рубят – щепки летят.
한 명의 스파이를 놓치는 것보다 수십 명의 무고한 사람이 고초를 겪는 것이 더 낫다. 숲을 베어내다 보면 나무조각이 튀기 마련이다.[4][5]
"내가 살아온 긴 평생에 예조프만큼 혐오스러운 작자는 보지 못했다. 내가 그를 쳐다볼 때면, 난 항상 라스테라예바 거리 광장에서 파라핀에 적신 종이를 도둑고양이의 꼬리에 묶고 거기 불을 붙여놓은 뒤, 공포에 질린 동물이 거리를 미친 듯이 뛰며 다가오는 불꽃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던 못된 악동들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예조프 역시 그것과 비슷한 놀이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제는 그 외양만 다를 뿐 지금 역시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 니콜라이 부하린이 저술한 "늙은 볼셰비키의 편지(Letter of an Old Bolshevik, 1936)"라는 회고록 중

소련 내무인민위원부(NKVD) 인민위원(장관). 스탈린대숙청을 주도하여 피의 난쟁이[6], 스탈린의 개로 불렸지만, 본인도 나중에 스탈린에게 토사구팽을 당했다. 최고 권력자 밑에서 호가호위 하다가 자중하지 않고 지나치게 날뛴 나머지 밉보여서 한순간에 몰락한 2인자의 전형적인 예시를 보여준 인물이다.

그가 숙청당한 뒤에 많은 자료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특히 유년기나 가족 사항에 대해 그렇다. 이름 역시 본명이 아니며 막심 고리키 소설의 등장인물에서 따왔다. 다만, 숙청 뒤 부를 이름이 없어 편의성을 위해 제 3자가 그에게 소설 등장인물의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고, 그가 스스로 자칭하며 사용한 가명이다. 소비에트 연방 초기의 공산주의 활동가들은 차르 지지자들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 본명 대신 가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흔했다.[7][8] 따라서, 그의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활동 초기부터 죽을 때까지 스스로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로 행세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다.

2. 일생

2.1. 초기

소련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반 예조프는 예조프가 잘 나가던 시기에는 공장 노동자로 기록되었으나 예조프가 숙청된 후에는 사실 러시아 제국군 군악대에 복무한 부농이며 포주로 기록이 바뀌었다. 이는 예조프가 직접 자백한 내용이긴 하지만 예조프를 최대한 나쁜놈으로 만들기 위한 강압적 수사 결과에서 나온 것은 감안해야 한다. 어머니는 리투아니아 사람으로 이반 예조프가 군악대 근무 시절에 만난 지휘자의 하녀였다. 예조프는 자신의 어머니가 리투아니아 사람이 아니며 그저 리투아니아어를 알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교육은 초등학교까지만 받았고, 1909년에서 1915년까지는 재봉사 조수와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먹고 살았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1917년에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1917년 예조프는 공산당의 "회계 및 분배부"로 전근되었고, 이곳의 책임자가 되었다. 러시아 내전이 끝난 1922년 2월 이후 공산당의 여러 지역위원회의 서기로 일했다.1929년부터 1930년까지 농업부의 차관이 되었다. 이후에도 계속 당직을 거쳐 승진했다. 농업부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쿨라크[9] 처리와 집단화를 경험하게 해주었고 이들에 대한 강력한 적개심을 품게 만들었다. 또한 경제부서에서 일하면서 그는 부하린과 우익 반대파들이 여전히 많이 들어가 있는 경제관료들이나 기술자들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품었으며 부르주아 전문가들을 처리하는 데는 직접 나서기도 했다. 1932년 스탈린 파벌 내에서는 급진파에[10] 속해있었는데, 기존의 대학 학제를 없애고 공장과 연계된 현장교육 + 기술교육 기관으로 바꿔버리자고 주장해서 온건파들의[11] 극딜을 얻어맞게 된다. 제1차 5개년 계획이 끝나가던 시기는 밀어붙이던 기존 속도를 조금 줄이고 숨을 고르자는 분위기가 대세여서 더 얻어맞은 감도 크다.

2.2. 스탈린 밑에서 승승장구하다

이후 그의 사람 족치는 능력에 어울리는 자리를 맡게 되어 1933년 숙청[12] 업무를 담당했고 교육이나 경제 쪽보다는 이쪽을 더 잘하는 것으로 판명났다. 1934년 2월, 17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는 한편 조직국원, 당통제위원회 부위원장, 당중앙위원회 산업부장에 임명되는 등 대대적으로 약진한다. 1934년 12월, 당통제위원장으로 승진하는 한편, 1935년 2월 전원회의에서 서기국 서기로 선거되었다.당통제위원회는 당 내의 비리를 비롯해서 당원의 전반적인 기율을 감사하는 위치였다. 1935년~36년 당원 문서 확인 및 교체 작업을 진두지휘했고 이 작업의 필요성과는 별개로 너무 심하게 당원들을 갈궈댔다는 것은 당시에도 나오던 말이었다.

그는 매력이 없는 인물이었고,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일단 사적인 생활과는 별개로 공적인 곳에서는 철저하게 청교도적인 인간으로 유명했다. 내전기 헤어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고 소련 관료들이 넥타이에 양복을 입을 때도 군복을 입고 다녔다. 이런 모습은 1937년 그가 레닌훈장을 받은 뒤 더 심해졌다. 또한 151cm의 단신이었고 부하린은 그의 잔인함과 사디즘적인 면을 지적했다. 이런 이유로 그의 별명은 '피의 난쟁이', '독 품은 난쟁이'가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ikolai_Yezhov_conferring_with_Stalin.jpg
이오시프 스탈린과 의논하는 예조프
예조프는 스탈린에게 아낌없는 충성을 바쳤으며, 1935년 발표한 논문에서는 "(스탈린에 대한) 정치적 반대는 필연적으로 폭력과 테러로 귀착된다"라고 주장했다. 이 시기 스탈린은 예조프를 대단히 아꼈으며 그의 건강과 관련된 사소한 사항도 모두 다 챙겨주었다.

당통제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당시 NKVD 위원장이었던 겐리흐 야고다와 충돌했다. 야고다도 숙청 관련한 일을 당연히 하긴 했지만 그래도 당시 공산당은 분위기가 달라서 예조프처럼 막 해댄 건 아니었다. 특히 트로츠키 파벌 문제가 당 내에서 불거졌을 때, 야고다는 당 내의 중론을 따라 "야, 적당히 반대파 놈들만 족치고 끝내자"라고 주장했으나 예조프는 아예 전국의 공산당 전체를 겁줘서 숨은 첩자들을 잡아내는 데 반대파들의 재판을 써먹자고 주장했다. 예조프는 곧 니콜라이 부하린을 기소했으나, 야고다는 이에 대해 문제가 없다는 식의 입장을 내서 스탈린의 심기를 건드렸다. 결국 스탈린은 야고다가 임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그 자리에 예조프를 내세우게 된다.
예조프 동지를 내무인민위원 직에 임명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피하며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고다 동지는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연합 세력을 적발하는 일에서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감당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합동국가보안부는 이 일에서 4년은 뒤쳐져 있습니다. 모든 당 일꾼과 내무인민위원회의 대다수 주 대표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936년 9월 25일, 이오시프 스탈린과 즈다노프가 소치에서 카가노비치, 몰로토프 및 정치국 다른 위원들에게 보낸 전보.

스탈린으로부터 부여된 예조프의 첫 번째 임무는 전임 내무인민위원이었던 야고다를 체포하여 조사하는 것이었다. 예조프는 의욕적으로 증거를 조작하여 야고다를 반역자로 기소하고 처형하였다. 뿐만 아니라 야고다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서 처형 전에 옷을 벗기고 고환에 심한 고문을 하도록 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1936_genrich_grigorijewitsch_jagoda.jpg
겐리흐 야고다

야고다를 첫 번째 희생자로 하여 예조프는 무자비한 대숙청을 실행하였다. 1937년~1938년 사이에 50%에서 75%의 고위 공산당원과 붉은 군대 고급장교들이 처형되거나 혹은 시베리아에 있는 수용소에서 강제노역형을 받았다. 또한 수십만의 소련의 일반 시민도 처형되거나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이런 시민 중에서는 예조프가 임의로 할당한 체포자 수를 채우기 위해 무고하게 끌려온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내무인민위원부와 군사정보국 내부자에 대한 숙청도 단행하였다. 전임자였던 야고다나 멘진스키가 임명한 요원들을 숙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임명한 요원조차 숙청의 칼날은 피해갈 수 없었다. 그는 무고한 사람 열 명을 처형하더라도, 한 명의 스파이도 놓쳐선 안된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였다. 그의 치하였던 1937년~1938년 130만 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 68만 명(이 이상일 수도 있다)이 처형되고 나머지는 굴라크로 끌려갔다. 굴라크에서도 가혹한 생활 조건으로 인해 적어도 14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1937년 10월 전원회의에서 스탈린은 예조프를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삼을 것을 직접 제안하였고, 이는 당연히 통과되어 소련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보선되었다.

2.3. 몰락(1938~1939)과 최후(1940)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Voroshilov%2C_Molotov%2C_Stalin%2C_with_Nikolai_Yezhov.jpg
왼쪽부터 보로실로프, 몰로토프, 스탈린, 예조프

예조프는 내무인민위원부 설치 20주년 기념식이 열린 1937년 12월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이 행사에서 그는 주인공으로 행세하면서 참석자들의 갈채를 받았는데, 행사에 참석했던 스탈린은 이를 보고 예조프의 정치적 야망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자신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이 크기 전에 싹을 잘라왔으며, 이것은 자신의 권력을 수호해왔던 예조프에게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38년 4월 6일 예조프는 수운인민위원부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계속 내무인민위원부를 맡고 있었으나, 예조프의 마구잡이 숙청으로 인해 소련의 고급 인재가 상당히 많이 사라진 것을 깨달은 스탈린이 숙청을 완화했기 때문에 예조프의 영향력은 계속 감소되었다. 특히 나치 독일의 위협이 증가하고 있던 때 예조프가 실시한 군대에 대한 광범위한 숙청은 소련의 국력을 심각하게 저하시켰다. 예조프가 수운인민위원에 임명된 것은 그가 수운 문제에 집중하게 함으로 내무인민위원부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키려는 스탈린의 의도로 설명된다.

1938년 8월 22일, 스탈린이 자신의 동향인이었던 조지아 공산당 서기 라브렌티 베리야를 내무인민위원부의 제1 부인민위원으로 임명하였고, 베리야는 스탈린의 배경을 업고 내무인민위원부에서 예조프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항상 권력기관에 배치한 부하들의 권력이 커지게 되면 다른 심복으로 교체한 후 숙청하였는데, 예조프도 베리야의 임명이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을 직감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술과 절망으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는 계속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 직무를 전혀 손대지 않았고, 스탈린은 계획대로 1938년 11월 25일 예조프의 직무소홀을 이유로 들어 해임하고 그의 후임으로 라브렌티 베리야를 내무인민위원으로 승진, 임명하였다.

스탈린은 예조프를 몇 달간 무시하고 있다가 베리야를 시켜 연례 정치국 회의에서 예조프의 재임 중 행위를 비판하게 하였다. 1939년 3월 18차 전연방공산당 당대회에서 예조프는 공산당의 모든 지위에서 해임되었다. 예조프는 18차 당대회에도 참석은 했지만 만취한 상태에서 지각을 했으며 일부 불분명한 출처에 따르면 스탈린이 나라면 예조프를 중앙위원회에 재선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그의 면전에서 빈정대기까지 했다. 당대회 이후 수운인민위원으로 경력의 목숨줄만 겨우 부지하다가 4월 10일 체포되었다. 예조프는 고문을 받고 "정부기금 착복", "독일 스파이들과의 연계", "직무소홀" 등을 자백했는데, 당연히 증거는 없었다. 또한 다른 정치범들과는 달리, 모욕적인 죄목(성적 일탈행위, 양성애 성향 등)도 기소장에 추가되었다. 그의 서류상 민족은 러시아인에서 리투아니아인으로 바뀌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사창가 포주, 어머니는 술집 댄서로 기록이 바뀌었다.[13] 수운인민위원부는 아예 통째로 해산되어 해운인민위원부와 강운인민위원부로 분할되었다.

예조프와 그의 일가친척, 지인들은 모조리 체포되어 고문당했고 예조프는 극심하게 건강이 악화되어 1940년 1월에 잠시 병원으로 이감되었다가 정치국의 지시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폴란드, 독일, 영국, 일본의 스파이로 고용된 혐의, 쿠데타를 기도한 혐의, 스탈린, 몰로토프, 베리야를 암살하려 한 혐의, 사보타주 혐의, 수은을 이용한 독살 혐의, 영국 간첩인 아내를 죽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2월 1일, 베리야는 예조프를 수하노프카 감옥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 불러 만약 그가 진정으로 자백을 한다면 목숨만을 살려주겠다는 거래를 제시하였다. 예조프는 베리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스탈린을 몇 분간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면서 빌기도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다음날인 2월 2일, 바실리 울리흐 판사가 주재한 비공개 군사 재판에서 예조프는 베리야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자백은 고문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번복하고 자신의 죄는 다름아닌 충분히 숙청을 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예조프는 자신이 이러한 처지가 된 것조차도 외국 간첩의 음해에 의한 것이니 자신이 그 간첩들을 미리 잡지 못해서 벌어진 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예조프는 자신이 살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고 사느니 진실을 말하고 죽겠다면서 고통 없이 빨리 총살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자신의 노모와 딸만은 제발 보살펴달라고 간청한 후 "스탈린 동지께 내가 인민의 적들의 간계에 빠져 죽는 희생양이라고 알려주시오. 스탈린 동지께 내가 그의 이름을 외치며 죽겠다고 전해주시오."라고 최후 변론을 하였다.[14]

최후변론 후 감방으로 돌아간 예조프는 30분 후에 다시 법정에 돌아와 사형판결을 들었다. 판결문을 들은 예조프는 하얗게 질려서 실신했고, 형리들이 그의 양팔을 붙잡아서 법정 밖으로 끌고 나갔다. 감방에 끌려간 예조프는 검사인 아파나스예프에게 소련 법률에 따라서 소련 최고회의에 사면을 탄원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고 예조프는 스탈린이 자신을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라 믿어서 탄원서를 작성했다.[15][16] 당시 고문으로 손가락이 으스러져있던 예조프는 정상적으로 글씨를 쓸 수 없어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큰 글씨로 겨우 탄원서를 썼다. 그래도 예조프는 그의 희생양들보단 운이 좋았는데, 그의 탄원서가 적어도 크렘린에 보고되긴 했기 때문이었다. 아파나스예프 검사는 탄원서를 울리흐 판사에게 전해주었고, 울리흐 판사는 크렘린에 전화를 걸어서 예조프가 탄원서를 썼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30분 만에 탄원서를 가차 없이 기각하고 총살을 집행하라고 명령했다.

아파나스예프 검사는 예조프에게 탄원서가 기각되었다고 전해주었다. 예조프는 히스테리를 일으키며 울고 딸국질하기 시작했고 비명을 지르며 경비원과 싸우다가 방 밖으로 끌려나가야 했다.[17] 1940년 2월 4일, 그는 소련 대법원의 군사대학 건물 지하의 처형장에서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예조프는 야고다에 대해서 자신이 명령했던 것과 같이 처형 직전에 옷이 벗겨지고 심하게 구타당했다고 전해진다. 몇몇 증언에 의하면 예조프는 처형할 당시 반쯤 의식을 잃은 상태였으며 심하게 딸꾹질을 하며 억제하지 못할 정도로 울부짖었다고 한다. 처형장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마구 발버둥을 쳐대서 경비병들이 질질 끌고 들어가야 했고 죽기 직전에 "스탈린 만세!" 라고 소리쳐댔다.[18]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그의 가족들이 묻혀있는 모스크바의 돈스코이 공동묘지에 있는 집단 매장지에 버려졌다. 예조프의 죽음은 1948년까지 최고 비밀로 분류되었다.[19]

예조프의 죽음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1920년대부터 진작 구성된 스탈린의 이너 서클이라 불리는 인사들[20] 중에서 대숙청 수준의 무자비한 학살에 열렬히 찬성한 건 예조프 외에는 없었다. 악명 높은 베리야조차도 스탈린이 죽자 정권의 탄압을 완화하라고 지시했고, 대숙청에 대놓고 반대한 인사도 오히려 잘 먹고 잘 산 경우도 있었다. 스탈린의 입장에서 예조프처럼 대숙청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인사는 책임을 떠넘기고 죽이기 정말 좋은 희생양이었고, 실제로 이 예조프의 활약(?) 때문에 대숙청은 과거의 학설이든 수정주의적 시각이든 '스탈린의 역할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 이견이 갈린다.

그의 아내는 우크라이나 예술의 중심도시였던 오데사의 극장에서 연기하던 배우였으며,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예조프가 실각하기 직전 정신병원에 들어가있던 아내는 자살했다. 딸은 예조프가 처형당한 뒤 인민의 적을 수용하는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성인이 된 뒤 마가단에서 사실상 유형 생활을 보내야 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Commissar_Vanishes_2.jpg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숙청된 뒤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는데, 그 때문에 대부분의 자료가 유실되었다.

3. 여담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舊 스탈린 : 강철권력)에 따르면 니콜라이 예조프는 양성애자였으며, 또한 동시에 질이 아주 나쁜 변태였다고 한다. 그와 관련해서 젊은 부부를 협박하여 3P 플레이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예조프는 비록 물질적인 금전욕은 매우 적은 편이었으나 성욕이 매우 강했으며, 후에 그가 숙청당했을 때에도 그 죄목에 양성애적 성향과 변태성향이 포함되기도 했다.

웃긴건 그런 양반도 집에서는 무능력한 남편이었다. 예조프의 두번째 아내 예브게니아는 잡지사 편집인 출신이었는데 문학살롱을 운영하며 이사크 바벨, 미하일 숄로포프 등 많은 문인들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 예조프는 아내의 불륜을 알았지만 차마 어쩌지 못했다.

2015년 3월 1일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그의 이야기가 방송되었다.

Hearts of Iron 시리즈에 소련 첩보장관으로 등장한다. 최신작 Hearts of Iron IV에서는 저항군 진압 30%를 주기 때문에, 안그래도 저항군 진압 NF가 있는 소련은 헌병 주둔군 없이도 점령지에서 저항군이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예조프를 살리려면 대숙청 NF에서 4스킬 장군이자 사단 회복력 8%를 제공하는 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를 숙청해야 한다. 대숙청을 하지 않으면 스탈린이 죽고 트로츠키가 집권하는데 그러면 바실렙스키보다 좋은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를 못 쓰게 되고 코네프가 스탈린주의자 반란을 일으킨다. 숙청을 하되 아무도 죽이지 않으면 안드레이 블라소프가 우크라이나 반란을 일으킨다. No Step Back DLC부터는 위의 설명이 다 무효화되었으며 실제 역사처럼 야고다를 숙청하면 장관으로 쓸 수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일화로 인해 AI를 이용해 사진을 지우는 예제로 쓰이거나 밈으로 활용되는등 저 사진만큼은 잊혀지기는 커녕 오히려 유명해지게 되었다.

파일:취좆 당하는 예조프.jpg
뿐만 아니라 루리웹 베스트 글에서 꼴리는 작품이 있으면, 니콜라이 예조프가 스탈린에게 꼴리지 않냐고 하는 짤을 올리는 밈. 웬만한 경우엔 숙청으로 유명했던 스탈린 답게 숙청 엔딩으로 끝나는 짤이 대부분이지만, 역으로 스탈린을 숙청하는 짤이 있거나 혹은 스탈린도 인정하며 같이 웃는 짤등등의 바리에이션이 존재한다.[예시]


[1] 소련 당국의 공식적인 설명이며 진짜 출생지는 아무도 모른다.[2] 152cm는 구글 프로필 키이므로 많은 사이트에 널리 통용된 신장인 151cm로 기재함[3] 1941년 1월 24일 소비에트 최고 상임위원회의 법령에 따라 모두 박탈됐다.[4] 이는 통계학적으로 1종 오류를 감수하면서 극단적으로 2종 오류를 최소화하려는 태도이다. 무죄추정의 원칙과 정확히 반대되는 발언이자 유죄추정의 원칙을 나타내는 망언 중 하나.[5] 후술하겠지만 우습게도 예조프 본인 역시 이러한 논리로 인해 숙청되었다.[6] 동구권에서는 보게 되면 불행이 닥친다는 난쟁이의 전설이 있는데,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 이 '보면 불행이 닥친다는 난쟁이' 의 정체로 유력한 것은 슬라브 신화의 집의 정령 도모보이. 동구권에선 도모보이가 집 밖에서 본모습을 드러낸다면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는 말이 있고 관련 괴담도 있다.[7] 예를 들어 레닌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스탈린의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슈빌리'. 트로츠키의 본명은 '레이바 다비도비치 브론슈테인'이고,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는 본명과는 아무 상관없이 정체를 숨기기 위해 스스로 지어붙인 가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명은 곧 각종 논설등을 발표할 때 사용하는 필명이었으므로 본명보다 훨씬 널리 알려졌고, 각종 정치활동 역시 주로 가명을 사용해서 했기에 제정을 무너트리고 집권한 이후 자신의 본명을 써도 아무렇지 않은 상황이 되었음에도 널리 알려진 가명(필명)을 계속 사용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당시의 러시아 대중들은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이라고 하면 대부분 그게 누구인지 알아들었지만 울리야노프, 브론슈테인, 주가시빌리라고 하면 "그게 누구요?" 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 이렇게 가명을 본명보다 더 많이, 공식적으로 계속 사용하면서 아예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 처럼 가명에 퍼스트네임을 붙여 풀네임처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즉 제정 말기~혁명기에 활동했던 러시아의 공산주의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본명 대신 가명을 쓰는 경우가 흔하다 못해 본명을 그대로 쓰는 경우보다 더 많을 지경이었다는 것. 이 때문에 레닌 같은 경우 스탈린의 본명을 기억하지 못해 다른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코바(스탈린의 또 다른 별명)의 본명이 기억나지 않으니 좀 알려주십시오. 제 기억으로는 주...뭐였는데" 라고 물어봤을 정도.[8] 이는 지하활동을 하는 운동가라면 당연한 것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도 가명을 여럿 썼다.[9] 자영농들을 의미한다. 경작지가 크든 작든 땅을 소유한 농부들은 공산주의 계획경제체제의 관점으로 봤을 땐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혁명과 내전을 거치면서 악화된 식량사정을 개선하기 위해 자영농계급에 대한 유화책으로서 신경제정책이 시행되었지만 원칙적으로 계획경제와 양립할 수 없는 계층이었다. 가뜩이나 1930년대로 접어들며 스탈린이 실권을 잡고 중공업 분야를 최우선적으로 육성하게 되면서 잉여인력들이 도시와 공장으로 투입됐고 이들을 먹일 식량은 이들이 떠나온 바로 그 농촌에서 조달해야 했다. 그 목적을 위해 소련 전역에서 본격적인 농업집단화 조치가 이루어졌고 자영농계층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반항했음은 물론이었다. 이론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자영농계층에 대한 숙청은 이미 예정된 사실이었고 더이상 미뤄야 할 이유가 없어진 시점인 1930년에 농업과는 별 관련도 없던 예조프가 농업부차관으로 역임했다는 것은 그가 중앙정부의 명백한 의도에 의해 그 자리에 앉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결국 대숙청 이전부터 예조프는 당내에서 숙청 전문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10]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거두였다.[11] 세르고 오르조니키제가 거두였다.[12] 소련 공산당에서 '숙청'의 의미는 사실 당에서 일정 비율의 부적격자들을 출당이나 면직 등의 수단을 통해 정기적으로 걸러내는 것에 가깝다. '대숙청'이 특별한 이유는 이런 일반적인 숙청에서 미친 듯이 더 나가서 대규모 체포와 당원 이외의 시민들까지 그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13] 다만 없는 말을 지어낸 것까진 아니고 실제로 예조프의 어머니가 리투아니아인이긴 했다. 그래서 예조프도 리투아니아어를 할줄 알았다.[14] 먼나라 이웃나라 러시아 근현대편에서도 예조프가 베리야한테 저렇게 목숨을 구걸하는 장면이 나온다(162페이지).[15] 솔제니친의 그 유명한 수용소 군도에 나와 있듯, 의외로 당시에도 탄원서를 쓸 권리 자체는 보장되었다. 물론 실제로 작동하지는 않았지만.아래는 수용소 군도의 탄원서 관련 대목 전문.
"낮에 당신은 조그만 독방으로 불려나가 거기서 누구에게든지 - 인민의 아버지에게, 당중앙위원회나 최고 소비에트에, 베리야나 아바쿠모프(당시 엔카베데의 국장이었던 빅토르 아바쿠모프를 의미 - 작성자 주)에게, 검찰총장이나 군 검찰총장에게, 형무소 당국이나 신문 부서에, 자기의 체포에 대해서 또는 신문관이나 형무소 책임자의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진정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든 당신의 진정서는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발송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읽는 가장 높은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당신의 담당 신문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증명할 수도 없다. 어쩌면 신문관은 그것을 '읽지조차 않을' 것이다. 아니, 신문관뿐 아니라 다른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침에 용변 시에 내주는 휴지보다 조금 더 큰 가로 10cm, 세로 7cm의 종잇조각에다가 당신의 꼬부라진 펜촉에 맹물처럼 묽은 잉크를 간신히 '진정...'이라는 두 글자를 쓰고 나면, 마분지 같은 종이에 잉크가 확 번져버리고 다음 '서'조차 쓸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된다."(솔제니친, 수용소 군도 제1부 제5장)
[16] 이는 공산화된 동유럽 국가들, 중국, 북한 등에서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베리야나 체코슬로바키아의 루돌프 슬란스키도 아무런 효과도 없을 탄원서를 감방에서 필사적으로 써서 옛 동료들에게 바쳤지만, 그들 자신도 권좌에 있을 땐 자신들에게 오는 수많은 탄원서를 보고 비웃었다.[17] 아이러니하게도 예조프의 후임인 베리야도 이와 비슷하게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울부짖으며 끌려가다가 너무 심하게 울부짖은 나머지 처형장 계단 위에서 뒤통수에 총을 맞고 죽었다.[18] 다만 러시아쪽에 있는 처형에 관련된 인물들의 증언을 보면 예조프는 사형 집행 전 울며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고 한다.[19] 예조프에 비하면 베리야는 호상이다. 1948년까지 서방에서는 예조프가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20] 안드레이 안드레예프, 니키타 흐루쇼프, 라브렌티 베리야, 안드레이 즈다노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아나스타스 미코얀, 미하일 칼리닌, 게오르기 말렌코프로 구성되어 있다.[예시] https://m.ruliweb.com/etcs/board/300780/read/52699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