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04:14:52

오바페미 마틴스

오바페미 마르틴스에서 넘어옴

나이지리아의 前 축구 선수
파일:Martins_inter.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오바페미 마틴스
Obafemi Martins
본명 오바페미 아킨운미 마틴스
Obafemi Akinwunmi Martins
출생 1984년 10월 28일 ([age(1984-10-28)]세) /
나이지리아 라고스
국적
[[나이지리아|
파일:나이지리아 국기.svg
나이지리아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70cm / 체중 70kg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유스 에베데이 (1999~2000)
AC 레지아나 1919 (2000~2001)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01~2002)
선수 AC 레지아나 1919 (2000~2001)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01~2006)
뉴캐슬 유나이티드 (2006~2009)
VfL 볼프스부르크 (2009~2010)
FC 루빈 카잔 (2010~2012)
버밍엄 시티 FC (2011 / 임대)
레반테 UD (2012~2013)
시애틀 사운더스 FC (2013~2015)
상하이 뤼디 선화 (2016~2018)
상하이 뤼디 선화 (2020)
우한 창장 (2020)
국가대표 파일:나이지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41경기 18골 (나이지리아 / 2004~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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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이지리아의 축구 선수. 주 포지션은 스트라이커.

특유의 빠른 주력과 작은 키에 걸맞지 않게 쫄깃한 피지컬이 돋보였던 선수. 해외 축구에 관심이 많은 팬들에게는 이전부터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고, 2010 월드컵에서는 우리 나라와 같은 B조에 속하게 되어 알려지며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2. 클럽 경력

2.1. 경력 초기

자국의 축구팀 에베데이에서 축구를 시작하였으며, 2000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당시 세리에 C에 있던 AC 레지아나에 입단하였다. 입단 후 이내 1군으로 승격되어 2경기를 치른 뒤 2001년 말 인터 밀란파르마 칼초의 제안을 받게 된다.

2.2.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파일:Martins_inter_1.jpg

2001년, 75만 유로에 인터밀란에 입단하였다. 첫 시즌, 유스 팀에서 무려 23골을 득점하며 캄피오나토 나치오날레 프리마베라 우승을 이끌면서 단숨에 최고의 유망주로 거듭났고, 2002-03 시즌 중반에 1군으로 콜업되어 2002년 12월 22일, 파르마를 상대로 세리에 A 무대에 데뷔했다. 이후 레버쿠젠과의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전에서 UCL 첫 골을 기록하며 인터밀란의 8강 진출을 견인했고,[1] 4강에서 숙적 AC 밀란을 상대로 또 다시 골을 기록하였으나,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데뷔 시즌은 10경기 3골에 그쳤지만, 그가 보여주었던 활약상은 다음 시즌을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2003-04 시즌부터는 로테이션 멤버로 자리잡으며 해당 시즌 37경기 11골, 2004-05 시즌은 46경기 22골로, 지난 시즌보다 눈에 띄는 골 결정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코파 이탈리아의 활약이 돋보였는데, 대회 6골을 기록하며 우승을 거머쥐는데 큰 역할을 했다. 2005-06 시즌에는 43경기 13골을 기록하면서 3시즌 연속 두 자릿 수 득점을 달성하며 활약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2005-06 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나게 되었는데, 새 시즌을 앞두고 유벤투스에서 온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첫 시즌 인테르에서 잠시 함께 뛰다 첼시로 이적했던 에르난 크레스포가 실패를 맛본 뒤 다시 인테르로 돌아오게 되면서 그의 입지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2.3.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파일:Martins_Newcastle_1.jpg

이브라히모비치와 크레스포의 합류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한 마틴스는 구단에 이적 요청서를 제출하였고, 얼마 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뉴캐슬로 이적하였다. 이적료는 1,500만 유로로, 계약기간은 5년이었다. 구단의 레전드인 앨런 시어러의 9번을 물려받으며 입단부터 큰 주목을 받았지만, 초반 몇 경기는 별 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9월 17일, 웨스트햄을 상대로 리그 첫 골을 기록하더니, 막힌 혈이 뚫렸는지 이후 확연히 달라진 경기력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1월 겨울 이적시장에는 첼시의 제안을 받기도 했지만 잔류하였다.

2007년 1월 14일, 토트넘전에서는 대포알 중거리 슛[2]으로 동점골이자 시즌 10호골을 성공시켰다. 이후 팀은 역전에 성공하며 화이트 하트 레인 원정에서 귀중한 승점 3점을 가져올 수 있었다. 시즌 기간동안 그는 유리몸으로 전락한 먹튀 마이클 오언, 주전으로 기용되기에는 부족했던 앙투앙 시비에르스키가 포진된 뉴캐슬 공격진에서 유일하게 제몫을 해주며 첫 시즌은 46경기 17골, 준수한 성적으로 마무리하였다.

다음 시즌에는 새로 부임한 샘 앨러다이스마크 비두카와 오언으로 이루어진 투톱 조합을 선호하면서 그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전반기 동안 마틴스는 교체 요원으로 활약했지만, 그와중에도 간간히 득점을 기록했다. 그러다가 빅샘[3]이 경질되고 케빈 키건이 새롭게 지휘봉을 잡으면서 마틴스에게도 다시 기회가 찾아왔는데, 키건이 기존의 투톱 대신 마틴스-비두카-오언으로 이어지는 3톱을 구상했기 때문이다. 키건 부임 후 다시 선발로 발돋움한 마틴스는 33경기 10골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비록 지난 시즌보다는 적은 골을 기록했지만, 전반기동안 좋지 않았던 입지와 리그 중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차출 등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기록이었다.

2008-09 시즌을 앞두고 아스날의 제의를 받았으나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렇게 맞이한 3번째 시즌, 초반부터 마틴스는 예사롭지 않은 골 결정력을 보여주며 리그 12경기 6골을 기록하고 있었다. 지난 두 시즌과 달리 전반기부터 남다른 득점 페이스를 선보이며 커리어 하이 시즌이 될 것을 의심치 않았으나, 12월 초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설상가상 뉴캐슬 의료진이 뒤늦게 마틴스의 탈장 사실을 확인하면서 이듬해 1월 독일로 건너가 탈장 수술까지 받았다.[4] 이로 인해 공백기는 더 길어졌고, 그 사이 뉴캐슬은 강등권을 맴돌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후 부상을 털고 복귀한 뒤 미들즈브러전에서 멀티골을 기록하며 희망의 불씨를 살렸으나, 끝내 EFL 챔피언십 강등을 막지 못했다.

강등이 확정된 후, 마틴스는 자신을 기다려준 뉴캐슬에 보답하기 위해 팀에 남아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돕겠다고 했지만, 결국 VfL 볼프스부르크로 이적하였다.

2.4. VfL 볼프스부르크

2009년 7월 29일, 뉴캐슬은 분데스리가 우승팀인 볼프스부르크의 900만 파운드 제안을 수락했고, 7월 31일 계약에 최종 서명하면서 이적이 확정되었다.

초반에는 선발과 교체를 오가며 출전 시간 대비 높은 골 결정력을 보여주면서 자리를 잡아가는 듯 했으나, 11월 말 정강이 부상을 당하면서 좋았던 흐름이 끊기더니,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이후에는 폼까지 떨어지면서 후반기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2.5. FC 루빈 카잔

2010년 7월 9일,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디팬딩 챔피언인 루빈 카잔과 4년 계약에 합의하면서 입단이 확정됐다. 마틴스는 지난 시즌 팀의 주포로 활약하며 우승을 견인한 뒤 제니트로 떠난 알렉산드르 부카로프의 대체자로 영입되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심지어 1,700만 유로의 이적료(약 270억원)에 이르는 거액의 이적료에 영입되었기에 더욱 기대가 컸다. 그러나 루빈 카잔에서도 별 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먹튀로 전락해버렸다.

2.5.1. 버밍엄 시티 FC (임대)

러시아에서 부진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마틴스는 자녀가 태어난 뒤 가족과 함께 하기를 원했고, 2011년 1월 31일, 시즌이 끝날 때까지 EPL의 버밍엄 시티로 반년간 임대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후 취업비자 발급 과정을 거쳐 2월 10일에 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비자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발표하면서 입단을 확정지었다.

아무리 최근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뉴캐슬 시절 EPL 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준 기억이 있기 때문에 팬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버밍엄을 구원해주기를 바랬다. 그리고 FA컵 5라운드 셰필드 웬즈데이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하더니 일주일 뒤에는 아스날 FC와의 풋볼 리그 컵 결승전에서 후반 44분 결승골을 기록하며 48년만에 칼링컵 우승을 안기는 등 팬들의 기대에 보답하는 듯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다. 정작 리그에서는 무득점에 그쳤고, 설상가상 4월부터는 경골 피로골절로 시즌아웃되면서 강등권 탈출이 절실했던 버밍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버밍엄은 2년만에 챔피언십으로 강등을 맞이하고 말았다.

2.6. 레반테 UD

마틴스는 임대 복귀 후, 2011-12 시즌 카잔에서 활약하다 시즌이 끝난 뒤 방출되었다. 이후 2012-13 시즌이 개막한 후에도 무소속 상태였다가 9월 12일, 라 리가의 레반테에 자유계약으로 이적했다.

전반기동안 팀의 공격을 책임지면서 한때 레반테가 6위를 수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나, 후반기부터는 득점포가 침묵하면서 덩달아 소속팀도 순위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팀내 최다 득점자로서 답이 안보이는 공격진들 중 유일하게 제몫을 해주었다.

2.7. 시애틀 사운더스 FC

2013년 3월, 시즌 도중 MLS팀인 시애틀 사운더스 이적 소식을 발표했다. 이적료는 400만 유로라고 한다. 레반테 팬들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었는데, 당시 마틴스는 팀내 최다득점자로서 처참했던 레반테 공격진에서 유일하게 제몫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단 입장에서는 그를 이적료없이 자유계약으로 데려왔기 때문에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을 것이고, 마틴스 본인도 레반테로 이적할때 삭감된 주급을 충분히 보상해줄 수 있는 시애틀로의 이적에 매력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시애틀에서는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며 84경기 43골을 기록하며 팀의 주포로 맹활약했고, 서포터즈 실드, US 오픈컵 우승을 견인했다.

2.8. 상하이 뤼디 선화

2016년 2월 18일, 상하위 뤼디 선화와 계약을 채결하면서 중국 슈퍼 리그에 진출했다.

첫 시즌부터 주전 스트라이커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다음 시즌에는 FA컵 결승 1,2차전에서 모두 득점을 기록하며 우승을 거머쥐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2018년 4월 3일, 가시마 앤틀러스와의 AFC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오른쪽 무릎의 대퇴사두근 힘줄이 부분 파열되면서 6개월간 경기에 나서지 못하게 되자 6월 1일에 구단과 계약을 해지했다.

2.9. 상하이 뤼디 선화로 리턴

2020년 7월 15일, 상하이 뤼디 선화로 재영입 되었다. 이갈로맨유에 가 있기에 빈자리를 메꾼 영입으로 보이며, 김신욱의 백업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2.10. 우한 창장

상하이 선화에 입단한지 2개월만에 우한 창장으로 이적했다. 계약기간은 2020 시즌 종료까지이다.

6경기 1골을 기록하고 계약 만료로 방출되었다.

3. 국가대표 경력

2004년 5월 29일, 아일랜드와의 친선경기에서 19살의 나이에 A대표팀에 데뷔했고, 이 날 팀의 두번째 골 이자 자신의 데뷔골까지 기록하며 3:0 완승을 이끌었다.

2006년 1월, 이집트에서 열린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 참가하여 대표팀이 3위의 성적을 거두는데 일조했다. 중간에 여러차례 그의 나이 논란이 있었기는 했지만,[5] 큰 문제로 이어지진 않았다.

2007년 2월 6일, 가나전 출전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단 불참하며 논란이 있었다.# 경기 후, 마틴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위독하셔서 병문안을 가야했다고 말했지만, 분노한 나이지리아 감독은 그를 대표팀에서 제외시키겠다고 선언하면서 갈등이 증폭되었다. 일주일 뒤, 마틴스는 무단 불참에 대해 사과했지만, 어머니의 건강이 중요했다고 말하면서 앞으로는 대표팀을 위해 헌신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2007년 3월 24일, 우간다와의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 경기를 통해 복귀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2007년 11월 17일, 자신의 19번째 경기였던 호주와의 친선전에서 처음으로 주장 완장을 달고 출전했다.

이후 잦은 부상으로 인해 한동안 대표팀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다가 케냐와의 남아공 월드컵 지역예선 경기에서 후반 38분 환상적인 오버헤드킥으로 결승골을 성공시키면서 조국의 월드컵 본선행을 확정지었다.

이후, 23인 최종 명단에 포함되며 자신의 첫 월드컵에 참가하였다. 본선에서는 아르헨티나와의 1차전과 대한민국과의 3차전에서 교체 출전하였으며, 대표팀은 조 3위로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했다. 이 때 본인이 정성룡과의 1:1 찬스를 말아먹으며 대한민국 첫 원정 16강에 기여했다.

4. 여담

  • 인테르 시절 뉴캐슬로부터 영입요청이 들어왔을 적, 동향 출신의 뉴캐슬 소속 셀레스틴 바바야로의 폭로로 연령 사기를 의심받았다.(당시 마르틴스는 22살이라고 알려져있었으나 바바야로는 자기와 같이 훈련을 했었다며 28살이라고 주장했다)
  • 마리오 발로텔리의 친누나와 열애 중이다.
  • 피파온라인3에서는 가성비 캐릭터로 널리 사용 되었었다. 위닝 일레븐 팬들에게도 스피드 99찍는 선수로 옛날부터 유명했다.

[1] 득점 후 보여준 공중제비 셀러브레이션은 많은 축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2] 시속이 무려 135km/h로 밝혀졌다.[3] 앨러다이스 감독의 별명[4] 그와중에 마틴스는 "뉴캐슬의 의료진을 비난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들은 항상 구단과 선수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라며 대인배의 품격을 보여주었다.[5] 나이지리아 축협 공홈에 그의 생년월일이 1978년 5월 1일로 표시되면서 논란은 가중화되었다. 물론 축협 측에서 행정적 오류라고 밝히며 사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