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 <tablebordercolor=transparent> | 쇼기 관련 문서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colbgcolor=#E1BD71,#E1BD71> 게임 구성 | ||
<colcolor=#A97600,#A97600> 구성 | 쇼기판 · 기물(왕장/옥장 · 비차 · 각행 · 금장 · 은장 · 계마 · 향차 · 보병) · 규칙 | ||
전략 및 용어 | 전법/전형(앉은비차 · 몰이비차 · 울타리) · 접쇼기(2보찌르기 · 은다전) · 봉수 · 천일수 | ||
파생 게임 | 변형 쇼기(도부츠쇼기 · 쿠지라쇼기 · 토리쇼기 · 야리쇼기 · 쇼쇼기 · 대포 쇼기 · 츄쇼기 · 다이쇼기 · 타이쇼기 · 타이쿄쿠쇼기 · 군진쇼기 · 요닌쇼기) | ||
쇼기 기전 | |||
관련 단체 | 일본쇼기연맹 · 바둑장기채널 | ||
주요 기사 | 오오야마 야스하루 · 나카하라 마코토 · 하부 요시하루 · 와타나베 아키라 · 후지이 소타 | ||
8대 기전 | 용왕전 · 명인전 · 예왕전 · 왕위전 · 왕좌전 · 기성전 · 기왕전 · 왕장전 | ||
일반 기전 | NHK배 · 아사히배 쇼기오픈전 · 은하전 · 신인왕전 · JT배 쇼기 일본시리즈 · 달인전 · 카코가와 청류전 · ABEMA 토너먼트 · SUNTORY 쇼기 올스타 동서대항전 · 신은하전 | ||
여류 기전 | 백령전 · 청려전 · 마이나비 여자오픈 · 여류왕좌전 · 여류명인전 · 여류왕위전 · 여류왕장전 · 쿠라시키토카전 | ||
기타 | |||
쇼기 게임 | Lishogi · 모리타 쇼기 · Pychess · 혼쇼기 나이토 구단 쇼기 비전 입문편 · 쇼기클럽 24 · 쇼기워즈 · 81dojo | ||
쇼기 관련 창작물 | 3월의 라이온 · 그래도 아유무는 다가온다 · 용왕이 하는 일! · 어웨이크 · 시온의 왕 · 81 다이버 |
오오야마 야스하루 15세명인 大山康晴 十五世名人 / Yasuharu Ōyama | |
| |
출생 | 1923년 3월 13일 |
오카야마현 쿠라시키시 | |
사망 | 1992년 7월 26일 (향년 69세) |
치바현 카시와시 | |
국적 |
|
직업 | 쇼기 기사 |
소속 | 쇼기대성회→일본쇼기연맹(관서)→일본쇼기연맹(관동) |
입단 | 1940년 |
은퇴 | -[1] |
단급 | 九단, 15세명인 |
통산 타이틀 획득 | 80기(역대 2위)[2] |
일반 기전 우승 횟수 | 44회(역대 2위) |
순위전 | 통산 A급 44기 재적 |
통산 승-패 | 1433승 781패(.647) |
홈페이지 | 일본쇼기연맹 |
1. 개요
일본의 쇼기 기사. 15세명인이다. 15세명인 이외에도 영세십단[3], 영세왕위, 영세기성, 영세왕장 칭호를 보유하고 있으며, 통산 타이틀 80기를 기록하며 하부 요시하루 九단의 뒤를 이어 역대 2위에 자리잡고 있다.2. 생애
1935년 키미 킨지로(木見金治郎) 문하로 장려회에 입회하였으며, 사형제로 몰이비차 연구로 유명한 오오노 겐이치(大野源一), 오오야마의 평생의 라이벌로 불리며 역시 정석 개발에 힘쓴 마스다 코조(升田幸三) 등이 있다. 이후 5년 만인 1940년 프로로 데뷔했다.1948년에는 츠카다 마사오(塚田正夫) 명인의 도전자로 마스다 코조가 유력했던 가운데, 오오야마가 B급 1위로서 도전하였다. 지금과 명인전(순위전)의 제도가 달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오오야마가 25세였으며 당시로서는 최연소였다.[4]1950년 다시금 명인위에 도전했지만 이때는 키무라 요시오(木村義雄) 명인이 방위하였다. 이후 신설된 타이틀전 구단전의 제1기에서 우승하며 첫 타이틀로 구단을 얻었는데 이때가 그의 나이 27세였다.[5] 1951년 구단전의 방위에 성공했고, 1952년 키무라 요시오 명인에게서 명인위를 탈취하며 최초의 2관이 되었다. 그러나 1952년 구단위를 츠카다 마사오에게 탈취당했다.
이후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왕장전 3연패를 달성했으며 명인전은 1956년까지 5연패하며 15세명인 자격을 얻었다. 1955년부터 1957년에 거쳐 마스다 코조가 명인위, 구단위, 왕장위를 모두 탈취하여 최초의 3관이 되며, 아쉽게도 최초의 3관왕 달성은 넘겨주게 되었다. 이후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오오야마가 3개의 타이틀을 전부 탈취하며 2번째 3관이 되었다.
이후 10년 넘게 압도적인 성적을 보여주었고, 새로 창설된 왕위전과 기성전에서조차도 역시 압도적인 성적을 보이며 사상 최초의 4관왕과 최초의 5관왕을 연달아 달성했다.
그의 전성기는 기성전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1966년 후타카미 타츠야(二上達也)[6]가 기성위를 탈취하였고 오오야마가 다시 기성위를 탈취한지 1기만에 야마다 미치요시(山田道美)가 다시금 기성위를 탈취했다. 또한 세대 교체의 주역인 나카하라 마코토 역시 첫 타이틀이 기성전이었으며, 그는 야마다와 같은 연구회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명인전, 십단전[7], 왕장전, 왕위전에서도 타이틀을 전부 나카하라에게 탈취당하며 1972년 무관이 되었다. 1974년부터는 나카하라가 4관을 이어가는 중에 기성전에서 7연패를 하며 겨우 1관을 유지했다. 이후 그는 1981년 왕장전을 마지막으로 타이틀을 탈취하지 못했다.
한편 그는 1976년부터 1989년까지 10년 넘게 일본쇼기연맹 회장직을 맡았다. 역대 회장 중에서는 압도적으로 임기가 긴데, 심지어 이 당시에도 그는 타이틀전을 포함한 다양한 기전에서 여전히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사망 2년 전인 1990년에도 타이틀전에 도전한 적이 있는데, 그의 노년기 기량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1992년 순위전 A급, 용왕전 1조를 유지한 상태에서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연령인 69세 4개월은 순위전 A급 기사 역대 최고령의 기록이며, 이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8]
3. 주요 기전 성적
<명인전>
18기, 15세명인 (1952~1956, 1959~1971)
18기, 15세명인 (1952~1956, 1959~1971)
<구단전>
6기, 영세구단[9] (1950~1951, 1958~1961)
6기, 영세구단[9] (1950~1951, 1958~1961)
<십단전>
8기, 영세십단 (1962~1967, 1969~1973)
8기, 영세십단 (1962~1967, 1969~1973)
<왕위전>
12기, 영세왕위 (1960~1971)
12기, 영세왕위 (1960~1971)
<왕장전>
20기, 영세왕장 (1952~1954, 1957~1961, 1963~1971, 1979~1981)
20기, 영세왕장 (1952~1954, 1957~1961, 1963~1971, 1979~1981)
<기성전>[10]
16기, 영세기성 (1962후~1965후, 1966후, 1970전, 1974전~1977전)
16기, 영세기성 (1962후~1965후, 1966후, 1970전, 1974전~1977전)
4. 여담
본래 망루를 특기로 삼는 고전파 앉은비차파 기사였으나, 중년의 나이에 들어 서로앉은비차 특유의 연구량을 감당하기 힘들어지자, 주위의 조언을 받고 몰이비차파로 전향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근현대 몰이비차를 사실상 개척하여 인식을 완전히 뒤바꾸었으며,[11] 그 자신의 커리어도 오히려 전성기를 맞이하며, 현재까지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몰이비차의 전설로써 기억되고 있다.상대의 돌파를 허용하지 않는, 마치 이름대로 거대한 산(大山)과도 같은 응수 기풍이 특징이었으며,[12] 이 기풍이 몰이비차의 견고함과 맞물려 시너지를 냈다고 한다. 이 탓에 몰이비차의 인식은 당시 프로들 사이에서도 크게 바뀌었고, 이는 몰이비차에 대한 앉은비차의 대책이 크게 진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도 스승이었던 키미 킨지로(木見金治郎) 아래에서 수학하던 시절에는 원래 공격적인 기풍이었다고 한다. 그러했던 그가 견고한 응수 기풍으로 바뀐 것은 사형(師兄)이자 그의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마스다 코조(升田幸三)의 영향이 크다. 사형이자 나이도 조금 더 많았던 마스다가 오오야마를 공격적인 쇼기로 수시로 괴롭혔다고(...) 이러한 공격쇼기에 지지 않기 위해 어린 오오야마는 자신의 타고난 기풍을 버리고 수비에 집중하게 되었으며, 이때 그의 기풍이 정립되게 된 것. 막상 마스다는 당시 수비적인 기풍이었으나 프로 입단 이후 공격적인 기풍으로 유명해졌다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
현재라면 논란이 될 정도로 반외전술을 자주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타이틀전 도중에 상대를 무시하고 마작을 치러 간다던가, 후타카미 타츠야(二上達也) 九단 상대로 일부로 외통을 늦추며 농락하는 수를 뒀다는 일화 또한 유명하다. 대국 이후 자신에게 패배한 하나무라 모토지(花村元司) 九단의 아마추어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를 건드리며 조롱한 일도 있었다고. 이에 대해 쇼기 기사인 카와구치 토시히코(河口俊彦)는 자신의 저서 오오야마 야스하루의 만절(大山康晴の晩節)[13]이라는 책에서 오오야마의 반외전술에 대해 오오야마가 1인자가 된 후 자신이 계속 1인자로 군림하기 위해 상대에게 굴욕감이나 콤플렉스를 철저하게 심는 비정한 승부 지상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
쇼기 만화 3월의 라이온에 나오는 노장 기사 야나기하라 사쿠타로 영세기장의 모델 중 하나가 되었다고 여겨진다.[14]
[1] 1992년 현역 A급 재적 중 사망했다.[2] 명인 18기, 구단 6기, 십단 8기, 왕위 12기, 기성 16기, 왕장 20기[3] 영세구단의 자격 또한 보유하고 있지만 영세십단과 동일시되며 별개로 취급되지 않는다. 십단전이 구단전의 후신이기 때문. 용왕전이 마찬가지로 십단전의 후신이기 때문에 영세용왕이 영세십단을 보유했을 경우 어떻게 될지가 의문이나, 십단전은 이미 폐지된 지 오래이고 현재 이 조건에 해당하는 기사는 없기에 의미는 없다.[4] 타이틀전 자체가 당시에는 창설된지 10년도 채 안되던 신설제도였다.[5] 이후 세대의 주축인 나카하라 마코토, 하부 요시하루와 후지이 소타 등에 비해서 첫 타이틀 획득이 훨씬 늦는데, 이는 당시에 창설된 타이틀전 자체가 몇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오야마 명인이 같은 실력으로 현대에 태어났다면 하부의 99기를 뛰어넘는 수의 타이틀을 확보했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6] 하부 요시하루 九단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7] 구단전의 후신이자 현 용왕전의 전신.[8] 현역 A급 기사로 활동하던 도중 사망한 기사는 오오야마 15세명인 외에도 야마다 미치요시(山田道美, 1933~1970) 九단과 무라야마 사토시(村山聖, 1969~1998) 九단이 있으나, 이들은 젊은 시절에 중병으로 요절했다는 차이가 있다.[9] 영세십단과 동일시되며 별개로 취급하지 않는다.[10] 기성전은 당시 1년에 2기씩 개최되었다.[11] 특히 당시에는 몰이비차 자체가 기습전법에 가까운 취급이었다. 에도 시대 당시 이미 파훼되었다고 여겨졌었기 때문. 감히 몰이비차를 두었다고 스승으로부터 파문당한 제자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12] 두터운 수비진을 살려 상대의 공격을 전부 받아내 일말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곤 했으며, 때문에 보통 응수 기풍은 받아넘긴다(受け流す, 우케나가스)라고 표현되는 것에 비해 오오야마 명인의 응수는 받아뭉갠다(受け潰す, 우케츠부스)라는 별명마저 붙었다고 한다.[13] 참고로 오오야마가 사망한 이후인 2003년에 출판된 책이다.[14] 노년의 나이에 A급에서 사투를 벌이는 모습으로부터 그렇게 예측하는 팬들이 많다. 그러나 영세기장이라는 영세자격, 유머러스한 성격 등 가장 많은 부분에서 모티브를 따온 모델은 요네나가 쿠니오 영세기성에 가깝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