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하자마 전투의 절정, 모리 신스케와 최후의 일격을 벌이는 이마가와 요시모토. 미기타 토시히데(右田年英, 1863 ~ 1925) 작 「이마가와 요시모토 오케하자마 대전투(今川義元 桶狭間大合戰之圖)」, 토요아케 시립 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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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이로쿠 3년 5월 19일(1560년 6월 12일),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 오와리국의 오케하자마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고작 2천 기의 병사들로, 침공해 온 슈고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수만 대군을 격파한 싸움으로 일본 전국시대 3대 기습의 하나로 꼽힌다.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를 장악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된 전투이다.
2. 배경
스루가·토토우미를 지배하고 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는 근접한 오와리의 오다 가문과 노부히데, 노부나가 2대에 걸쳐 오랫동안 대립하고 있었다.이마가와 가문은 사가미의 호조, 가이의 다케다 가문과도 분쟁 상태였기에 쉽게 오와리를 정복할 수 없었으나,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히로타다[1]가 급사한 사건을 계기로 미카와에 대한 지배권까지 확보하였고, 처남 다케다 신겐의 제안으로 1554년에 호조, 다케다, 이마가와의 고소슨(甲相駿)[2] 3국 동맹을 맺어 후방의 우려도 없애는 데 성공하였다.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시나노의 카와나카지마에서 길게 대치하게 되자 안심한 요시모토는 전군을 오와리로 파견할 수 있었고, 스루가의 방위는 아들 우지자네에게 맡기고 최소 2만 5천에서 최대 4만 5천이라는 대군으로 오와리 침공을 시작했다.[3][4]
에도 시대의 한 설화에서는 이 전투에 출격하기 전 요시모토와 후계자 다툼을 하고 져서 죽었던 서형 겐코 에탄이 꿈에 나타나서 '넌 내 원수지만 이마가와 가문을 위해서 얘기하는데, 이번 원정은 중지해야 한다'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3. 전개
3.1. 신장공기의 기술
(1560년) 5월 17일에 쿠츠카케에 들어온 요시모토의 군대는 오타카 성에 군량을 들인 뒤 오다 군의 구원병이 오기 힘든 만조 시기를 노려서 차례로 오다 측의 요새를 함락시키기로 결정했으며, 18일부터 와시즈, 마루네 요새가 공격당한다는 소식이 오기 시작했다.하지만 18일 밤에도 노부나가는 특별히 군을 편성하지도 않고, 잡담을 좀 한 뒤 가신들을 해산시켰고, 이걸 본 가로들은 '운이 다하니 정신이 흐려진 것 같다'라고 비웃으며 돌아갔다. 날이 밝자 공격받고 있던 와시즈, 마루네 두 요새가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노부나가는 소식을 조용히 들은 후 춤을 추며 아츠모리(敦盛)를 불렀다.
인간 세계의 오십 년은 하천[5]의 덧없는 꿈과도 같도다. 한번 삶을 얻었거든 진멸치 않을 자가 어디 있으랴.
(人間五十年 下天のうちをくらぶれば 夢幻の如くなり ひとたび生を享け 滅せぬもののあるべきか)
(人間五十年 下天のうちをくらぶれば 夢幻の如くなり ひとたび生を享け 滅せぬもののあるべきか)
그리고 노부나가는 갑작스럽게 '소라 고둥 나팔을 불어라' '갑옷을 가져와라' 라고 명령을 내린 다음 신속히 갑옷을 입은 뒤 선 채로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말을 타고 성문을 빠져나갔는데, 이 출격에 눈치채고 동행한 건 5명의 호위 무사뿐이었다.
노부나가는 다 합쳐서 6명밖에 안 되는 일행으로 달려가서 오전 7시경 아츠타 신궁 앞에 도착했고, 두 요새 방향에서 연기가 솟는 걸 보고 마루네와 와시즈가 함락된 것을 눈치챘다. 조금씩 병사들이 모이기 시작했기에, 이 시점에서 모인 병력은 처음 마구잡이로 달려나온 노부나가와 기마무사를 합쳐 6명에 병사 200명 정도였고, 오다 군은 아츠타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탄게 성채, 젠쇼지 성채를 차례로 지나가면서 병력이 모이는 것을 기다리고 태세를 가다듬었다.
이 때 노부나가는 신사에 참배하고는, 동전을 던지면서 부하들에게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우리가 이긴다."라고 말했는데, 정말로 동전들이 모두 앞면이 나와서 사기가 크게 올랐다.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노부나가가 던진 동전은 실제로는 모두 앞면만 있던 것이라고 한다.
이때 요시모토는 4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쉬다가 두 요새가 함락된 걸 듣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병량 운송 임무로 지쳐서 오타카 성에서 쉬고 있었다. 마침 우연히도 노부나가가 젠쇼지 성채에 들어온 걸 안 오다 측의 한 무장이 300여 군사를 이끌고 무단으로 적진에 돌격했다가 참패하여 전사한 탓에 요시모토는 방심할 대로 방심해 있었다.[6]
노부나가는 움직임이 적에게 보인다는 제지를 뿌리치고 군을 이끌어서 다시 젠쇼지 성채를 나가서 나카지마 성채로 들어갔고, 이 시점에서 2천 명 정도가 모였다.
노부나가는 개전에 앞서 전군에게 한마디 연설을 했다.
적은 저녁에 군량을 사용하여 밤새 오타카 성으로 달려가고, 와시즈, 마루네 성채에서 격전을 치렀으며 이로 인해 손발이 모두 지쳐 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아직 팔팔하다. '적은 군사로 큰 적을 두려워하지 말라. 운은 하늘에 달린 것이다'라는 옛말을 모르느냐. 적이 공격해오면 빼고, 적이 빼면 공격해라. 이리하여 적을 쓰러뜨려라. 전리품을 챙기지 말고 자른 적의 목도 버려라. 이 일전에 승리한다면 여기 모인 자들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그 가문의 이름을 빛낼 수 있으리라. 한마음으로 힘써라.
또한 여기서 싸우고 있던 마에다 토시이에 등의 군대가 합류하였고, 노부나가는 이들까지 이끌고 오케하자마의 산기슭까지 몰래 진군했다.
이때 갑작스럽게 하늘이 흐려지고 강풍이 불며 대지가 흔들리는 큰 비가 쏟아졌는데, 쿠츠카케의 고개에 서 있던 두 아름이나 되는 나무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동쪽으로 큰 소리를 내며 쓰러지니 군사들이 아츠타 신사의 효험이라고 중얼거렸다.
곧 하늘이 맑아지려 하자 노부나가는 창을 하늘에 치켜들고 돌격명령을 내렸다. 전군이 요시모토의 본진에 한덩어리가 되어 돌격해 들어갔고, 이마가와 군은 전부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져서 무기, 깃발, 심지어는 요시모토의 가마까지도 내던져지는 형편이었다. (이때가 오후 2시경)
요시모토는 200여 호위병의 필사적인 보호를 받으며 계곡을 따라 퇴각했으나 포위당한 채 파상 공격을 받아 50여 명까지 호위 병력이 줄었다. 노부나가 본인조차도 말에서 내려 창을 휘두르며 적을 찔러죽이는 격전이었다. 이를 본 오다 군은 모두 분발하여 싸웠으며, 역전의 용사들이나 친위 무사들도 다수 죽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핫토리 고헤이타가 요시모토에게 달려들었으나 요시모토의 검에 허벅지를 베여 쓰러졌다.
이후 모리 신스케가 요시모토를 창으로 찔러 쓰러뜨린 뒤 목을 베었다.
오케하자마는 본디 계곡이 파이고 계곡 사이에는 깊은 늪지대가 조성되어 있으며 수풀이 높이 자란 험한 지형이었기 때문에 이후 이마가와 군은 이런 곳에서 헤매다가 늪에 빠지고 오다 군에 추격당해 속속 전사했다. 요시모토군은 너무나도 혼란에 빠진 나머지 무기와 깃발 등 온갖 장비를 내버리고 패주했다.[7]
노부나가는 요시모토의 수급을 제외하면 다른 수급은 모두 키요스 성에 귀환한 후에 확인하겠다고 한 뒤 승리 선언을 하고 귀환했다.
3.1.1. 신장기의 기술
노부나가는 사전에 치밀하게 단계적으로 이마가와군의 움직임, 본진의 배치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철저히 계획된 우회 공격을 가해 요시모토의 수급을 취했다. 전투 후에는 정보 수집의 책임자인 야나다 마사츠나, 첫 번째로 요시모토에게 창을 들이대고 돌격한 핫토리 고헤이타, 수급을 취한 모리 신스케의 순으로 포상했다.3.2. 실제
3.2.1. 병력
신장공기에는 이미가와군이 4만 5천이라는 엄청난 대군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도쿠가와 미키와 화본태합기에는 4만으로 기록되어 있다. 코요미키, 무공야화 등의 다른 사료에는 2만 ~ 3만 사이의 병력으로 기술된 것이 많다. 현재는 고쿠다카의 한계를 고려해서 2만 5천이 정설이다.오다군은 의외로 전체 병력이 많았지만[8], 주변 사방이 적이었기 때문에 실제 동원가능한 병력은 극히 적었으므로 전체 병력은 신장공기의 기술처럼 2천여가 고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2천이 이마가와의 2만여 군대와 싸운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5천가량의 본대와 싸웠고 이들이 악천후와 기습 때문에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져버렸으므로 전투 결과가 완전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9]
3.2.2. 전투 경위
후세의 창작물에서는 요시모토가 방심했다거나 노부나가가 실은 치밀한 계략으로 상황을 조성한 뒤 기습전을 벌였다는 식의 해석이 지배적이지만, 실제 1차 사료의 묘사를 보면 그런 설은 어디까지나 창작일 뿐이다. 주로 오케하자마 전투를 빛나는 기습전술의 승리로 기록한 <신장기>의 경우 동시대 기록자들에 의해 신빙성에 심각한 문제점이 지적받고 있다. 노부나가는 가신들이 전투를 포기한 것 아닐까 착각할 만큼 가만히 시간만 보내다가 번개같이 뛰쳐나갔을 뿐이며, 요시모토는 노부나가의 명령 없이 무단 출격한 오다 측의 돌격대를 꺾고 방심해 있었다. 승리의 중요한 요인으로 취급되는 요시모토의 방심은 노부나가의 치밀한 연출로 유도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연이었다는 말.요시모토의 본진은 고지대에 있었으나 급작스러운 폭풍우로 인해 순간적으로 주변의 정보가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고, 각 성채를 압도적인 병력을 나누어 점령하러 보낸 탓에 본대는 5천 정도였다. 고쿠다카에서 현재 추산되는 요시모토의 본대가 2만 5천 정도이므로, 본래대로 정면으로 회전을 벌였다면 2천을 거느린 노부나가는 12배의 적과 싸워야 하는 것이 되지만 이런 우연들이 겹쳤기 때문에 실제 전투는 결과적으로 방심한 상태이자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기습당한 본대 5천 vs 완벽한 조건이 갖춰진 기습을 가한 오다군 2천의 싸움으로 전력이 거의 차이가 나지 않게 되었다.
현재 학설로는 당시에 급작스러운 폭풍우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고, 면밀히 계산해 적의 눈을 속이고 기습했다는 우회 공격설[10]과 그냥 기습 이외의 특별한 작전이 없이 정면으로 돌격했는데 주변 환경상 대성공으로 이어졌다는 정면 돌격설이 맞부딪치고 있다.
많은 창작물에서는 당연히 전자의 치밀한 기습작전이었다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후자의 정면돌격전, 우연한 조우전이었다는 쪽이 지지받고 있다. 학계의 주류 의견은 오케하자마 전투는 노부나가의 번뜩이는 기습 작전이 일궈낸 전술적인 대승리가 아니며, 상당히 무모한 정면 돌격전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악천후와 상대의 방심 등이 맞물려서 싸우고 보니 운 좋게 적장과 사령부가 싹 전멸해 있었다는 것. 오다 쪽에서는 운빨로 최선의 결과가, 요시모토 쪽에서는 운빨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결과가 벌어진 셈이다.[11]
신장공기에서는 노부나가가 요시모토의 진격에 고민하며 가만히 앉아있다가 갑작스럽게 갑주를 챙겨입고 소집령을 내린 뒤 돌진했다고 쓰여 있을 뿐이고 아무런 정보전이나 전략, 전술에 대한 기술이 없다. 오다의 부하 무장인 삿사 하야토의 소부대가 이마가와군을 공격했다 패퇴해 더더욱 요시모토를 방심시키는 효과를 낳았고 이것이 기습 우회공격설에서는 보통 의도적 양동작전이었다고 해석되고 있으나, 이것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기록한 오타 규이치는 그가 '우리끼리 먼저 공을 세우자'면서 무모하게 돌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12]
물론 <신장공기>에도 기습 우회공격으로 볼 근거가 없지는 않다. 우선, 요시모토가 고지대에 사령부의 병력을 배치하고 다이묘의 위치를 각종 우마지루시, 자신의 화려한 가마 등으로 완전히 노출시킨 채 노래를 부르며 방심하다가 그가 전사하자 휘하 병사들이 이것들을 내던지고 도주한 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본진이 오다 측 스파이나 병사들의 눈에 들어왔고, 그것을 토대로 신속히 기습전술을 세웠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13]
현재로서는 노부나가 본인을 가까이서 섬겼으며 당시에도 오다군에 소속되어 있던 오타 규이치가 쓴 신장공기의 기술이 제일 신빙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만 이쪽도 상대의 병력을 4만 5천 명이나 되는 어이없는 대군으로 써놨기 때문에 이런 저런 자료들과 비교 검토가 필요하다.
이외에도 다케다 가문과 관련되는 중요 사료인 <갑양군감>에서는 약탈에 정신이 팔려 있던 이마가와 군에 슬쩍 섞여서 본진 근처까지 간 뒤에 요시모토를 급습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우회 돌격설의 근거 중 하나가 되었는데, 갑양군감은 정작 주제인 다케다 가문과 관련한 기술들의 신빙성도 의심받는 군담류 서적이어서 믿기 힘들다는 점이 문제.
신장공기의 묘사[14]를 근거로 하여 요시모토의 지휘소는 당시 지형상 공격받고 있던 오다 측의 요새인 마루네와 와시즈 성을 모두 전망할 수 있는 근방의 고지로 추정되고 있다.
전투 장소로는 전통적으로 오케하자마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으며 관련된 설화가 이것저것 전해지는 나고야 시 미도리 구 근방이라는 설이 있지만, <신장공기>보다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는 <신장기>에서는 덴가쿠하자마라는 곳이 전투 장소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3.2.3. 천하통일 시도?
본격 일본 최강이 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이 싸움을 시작으로 교토로 치고 올라가서 천하를 얻으려 했는데 어이없이 전사하여 좌절됐다는 식의 해석이 거의 사실인 양 다루어지고 있으나 실제 그랬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오와리의 오다 가문과 도토우미 /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문은 요시모토나 노부나가의 이전 대부터 계속 미카와를 놓고 싸우는 원수지간이었다.요시모토가 큰 병력을 끌고 오와리를 친 것은 즉석에서 교토로 대진공 작전을 벌이려는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미노, 오우미의 다이묘들은 요시모토의 고쿠다카에서 산출할 수 있는 2만 5천 가량의 병력으로 단번에 석권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으며,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 전투 전에 한 것은 오와리 진출을 위한 준비지 교토 진출 준비가 아니었다.
우선 이마가와 가문은 서쪽으로의 진출을 위해 사전에 3국 동맹을 맺어놓은 상태였다. 이 3국 동맹으로 인해 북쪽(다케다 가문)과 동쪽(호조 가문)은 안전해졌고, 남은 서쪽(오다 가문)으로의 진출이 용이해진 것이다(남쪽은 바다). 또한 이마가와 가문의 인물이 막부로부터 임명된 오와리의 슈고였던 역사가 있고 노부나가의 아버지인 노부히데 대에 이마가와를 배신하고 불법적으로 점거한 영토[15]가 있기 때문에 이마가와 가문은 사전에 전쟁명분 역시도 확보한 상태였다.
당시 오다 가문의 영지인 오와리(尾張)는 꽤나 풍요로운 곳이라서 1598년에 마무리 된 태합검지(太閤検地)에서 오와리의 고쿠다카(石高)가 57만 석이나 되었다. 이에 반해 이마가와 가문의 영지였던 미카와(三河), 도토미(遠江), 스루가(駿河)는 각각 29만 석, 25만 석, 15만 석이었다.[16] 그리고 스루가와 미카와는 이마가와 가문이 온전히 소유한 영지도 아니었다. 스루가의 동쪽 일부는 호조 가문이, 미카와의 서쪽 일부는 오다가 영유 하고 있었다. 이 역시 지형도를 보면 알겠지만 미카와에서 그나마 넓은 평야 지대는 미카와 서부에 있다.[17]
때문에 이마가와는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단순히 오와리를 가벼운 장애물처럼 짓밟고 넘어갈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이마가와에게 있어서 오다는 엄청난 강적이었으며, 노부나가가 처한 위기는 오로지 오다 가문의 분열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오케하자마 전투의 일차적인 목적은 오와리의 병탄이고, 그 후에 가서야 비로소 교토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오다 가문의 부의 원천은 이들의 영지였던 남쪽의 항구 도시인 츠시마와 아츠다에서 해운업으로 벌어들이는 엄청난 돈이었다. 이마가와는 이 두 도시를 차지하고자 했다.
4. 결과
이마가와 가문은 삽시간에 당주와 유능한 가신을 많이 잃었다. 후계자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아버지에 비해 능력이 떨어졌고 영지의 안정을 중요시했다.[18] 한편 선봉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는 자신의 영지였던 미카와의 오카자키 성에 입성해 종속 관계에 있던 이마가와로부터 독립을 해버리고, 요시모토의 모토(元)를 따서 종속 관계를 나타내던 이름을 마츠다이라 이에야스로 바꾼다.[19][20][21] 이후 이마가와 가는 잦은 모반 등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결국 1568년, 그렇잖아도 신뢰하기 힘들다는 평이 있는 다케다 신겐의 번개 같은 뒤통수를 맞아 스루가를 잃고 도쿠가와에 의해 남은 토토우미마저 뺏겨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이마가와 가는 순식간에 멸망하고 만다.[22][23] 이후 우지자네는 스루가를 되찾기 위해 후호조 씨를 의지하였으나 호조 우지야스가 죽고 노선을 전환하면서 흐지부지되었고, 결국 이에야스에게 몸을 의탁한다. 이로 인해 아버지의 원수들에게 나아가 여흥으로 축구 놀이를 보여주는 치욕을 겪게 된다. 우지자네가 이에야스 아래로 들어가면서 이마가와 가문 자체는 하타모토로 막부 말기까지 존속하다가 메이지 유신 시기에 남계 후손 단절로 가문이 없어진다.
반면 오다 노부나가는 1559년 오와리국 전토를 통일하고 당면한 가장 큰 적을 쓰러뜨려 미노, 오우미 등지로 진출하며 천하 포무의 발판을 디디게 되었다.
5. 매체에서의 오케하자마 전투
5.1. 게임
- 코에이의 노부나가의 야망 이벤트로 등장한다.
플레이어가 오다나 이마가와를 담당하면 나오는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예외로 천상기 같은 경우는 플레이어가 오다나 이마가와를 담당하면 오케하자마 이벤트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오다와 이마가와를 무조건 컴퓨터가 담당해야만 일어나는 이벤트. 이렇듯 시리즈마다 이벤트 조건이 조금씩 다르지만 어떤 시리즈든 관련 무장의 배치는 모든 시리즈가 거의 비슷하다. 근데 어이없게도 천상기는 오케하자마 전투 시나리오에서 어째서인지 오다 노부나가의 병력이 이마가와 요시모토보다 더 많다(..) 속령이 적은 노부나가는 300이 넘는데 훨씬 많은 이마가와는 250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심지어는 HD판에서도 수정되지 않았다.역사 고증 개판이네 이거 아무리 노부나가가 주인공이라지만 이건 심하잖아.
혁신과 천도의 경우는 아래의 조건을 만족해야 발생한다.. - 1555년 이후 타이겐 셋사이[24],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카자키 성에 있어야한다. 이마가와로 플레이하면 그냥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포함한 군세를 출진시켜 오다의 영지를 공격하면 발생한다.
- 오다 노부나가가 다이묘.
- 오다 노부나가가 키요스성에 있어야 한다.
오다 측에서는 "기습한다", "기습하지 않는다" 두 갈래가 있는데, '기습한다'를 선택하면 순식간에 요시모토 군세가 2000으로 줄어들고, 혼란 버프가 걸려있으며, 노부나가의 1000명의 기병대가 녹여버리는 것이고, 요시모토가 죽는 것이며 '기습 안한다' 를 선택하면 아무 일도 없다, 그런데 키요스의 군사론 요시모토 군사를 절대 못이긴다. 그리고 이마가와 요시모토 부대에 타이겐 셋사이가 부장으로 있으면 기습을 해도 기습이 실패로 끝나며 오히려 노부나가 부대가 혼란에 빠지는 역관광 크리가 발생한다. 이마가와로 플레이하면 좋지만 오다로 플레이하면 가끔 컴퓨터가 셋사이와 요시모토를 뭉쳐서 쳐들어오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할 것.
이마가와 측에서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끝이다. 그런데 만약 이벤트를 실행해서 요시모토가 죽으면 나중에 모토야스가 독립하는데 "이마가와 가"로 계속 한다. "마츠다이라 가를 한다"가 있는데 마츠다이라가의 우수한 인재들이 이탈한 이마가와 가를 찍을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조금 어려운 난이도로 진행하고 싶으면 이마가와로 진행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 직전신장전에서는 초반에 플레이하는 맵. 전투 전 선택지로 야전과 농성전을 선택할 수 있다. 야전은 초반 맵 치고는 적이 상상을 초월하게 많은데다가 날씨도 폭우의 확률이 높아 노부나가의 디폴트 병과인 철포 기병을 써먹기 애매해진다.[25] 또한 적 전멸은 포기하고 총대장인 요시모토의 퇴각만 노리자니 시작시 바로 옆에 있는 나루미성에선 성을 점령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적군이 초기 상태로 보충되는데(총 쟈코 4부대) 그렇다고 나루미성을 점령해버리면 기습이 실패해버리고 요시모토는 서쪽 성으로 이동해버리는 추격전이 되어버린다. 거기에 지형도 황야, 산지 + 하천 위주라 적 쟈코들은 역시 산지에 있어 2칸씩밖에 못움직이지만 아군이 요시모토를 향해 강을 돌아가며 2칸씩 느릿느릿 가는 동안 아군이 접근하기도 전에 요시모토를 중심으로 빠르게 집결해버린다. 즉, 초보자에겐 의외로 난이도가 어렵다. 허나 역사대로 기습에 성공하면[26] 이마가와의 본 부대가 혼란에 빠지고 떨어져있는 부대가 허둥지둥 이마가와에게 집결하며 나루미성의 부대들은 더이상 보충되지 않는다. 후방에 남긴 부대가 잉여가 아니라면 그 상태로 남은 나루미성 적을 혼자 쓸어버리고 나루미성을 점령하는 것도 가능(이 때 아이템도 얻을 수 있다).바로 혼란에 빠진 이마가와를 퇴각시키면 손쉽게 승리할 수 있지만, 이마가와 외에 도쿠가와와 다른 부하 네임드를 퇴각시킬 경우 이동력 +1의 말을 드랍하니 가능하면 얻는 것이 좋다. 서쪽 성에선 소지시 내구력 30을 올려주는 방패를 얻을 수 있으나 거리가 멀고 아군은 한턴에 2칸씩밖에 갈 수 없는지라 먹으려면 작정하고 보내야된다. 팁이라면 작정하고 보낼 장수 하나가 한 턴에 2칸씩 꾸준히 성을 향하여 움직일수 있게 나머지가 서포트해주는 것이 필요. 제대로 지원이 되었다면 25턴 ~ 30턴 사이에 서쪽 성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공격력 버프 특기가 아군에 없지만, 시바타 주변에서 공격할 경우 공격력 버프를 받는 것을 적절히 이용하고, 니와 나가히데가 대포라면 광역 공격으로 적을 정리하기가 좋다. 물론 공격 턴에 비가 오지 않게 적절히 세이브 로드 노가다를 해주면 좋다.
만약 야전에서 패배하면 게임 오버가 아니라 바로 농성전으로 이어진다.[27] 농성전은 적 병력이 순차적으로 맵에 출현하는데다가 아군은 성벽 안에 보호받으니 문 주변에 아군을 적절히 배치해 하나하나 각개격파하는 식으로 플레이하면 쉽게 클리어. 참고로 선택지를 통해 야전을 거치지 않고 바로 농성전을 하던, 야전 패배 후 농성전을 하건 전투 조건은 추가로 등장하는 부대 수에 약간 차이가 있을 뿐 거의 같으니 레벨업을 위해선 야전에서 일부러 30턴을 넘긴 후 공성전까지 플레이하는 것도 좋다. 다만 야전에서 공성전으로 넘어갈때는 창고, 대장간 등을 이용하여 정비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유의할 것. 야전, 공성전에서 모두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퇴각시킬 경우 보물 활을 드랍하지만 이마가와를 마지막에 처치할 경우 얻지 못하니, 이마가와를 잡기전에 쟈코 하나 정도는 남겨두도록 하자.
- 태합입지전에서는 시리즈 내내 일종의 오프닝 이벤트이자 처음 겪게 되는 전투 이벤트. 보통 초기 무장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플레이하게 되는데 1560년 시나리오에서 히데요시로 플레이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발생하는 이벤트다. 이 시점에서는 히데요시가 직급이 말단이라서 적은 병사를 거느리게 되는데 최대한 막타 신공을 이용해서 공적치를 쌓도록 하자. 태합입지전 5 같은 경우는 히데요시의 사기 스킬인 '위압'[28]을 이용하는 것이 포인트. 이마가와 부대가 혼란에 빠져 있고 사기치도 15 정도로 바닥이니 위압 스킬을 적시에[29] 이용하여 전투 공적치를 많이 쌓는 것이 빠른 승진의 지름길. 다른 오다 가문 무장으로 플레이해도 발생하니 공적치를 감사히 받아먹으면(…) 된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로 직접 플레이 할 경우 첫 평정을 열 경우 바로 이벤트가 시작되고 분기에 따라 오케하자마 전투를 피할 수 있으며, 상락을 선택하면 오케하자마 전투가 벌어진다. 기본 병력은 4천 vs 6천에 전군 혼란이 걸려 아군 사기는 15 정도에 오다 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른다는 점은 같으나, 오다 군 플레이시와는 달리 여기서는 이마가와 본대에만 혼란이 걸려있지 않다. 팁이라면 시작부터 다케다 가문과 동맹 중이고(사나다 마사유키에게 풍림화산을 배울 수 있다), 마츠다이라 쪽에 이타쿠라 가쓰시게가 있으니 풍림화산과 격려를 필히 배워둘 것. (오다 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지라 위압은 별 도움이 안된다.) 시작하자마자 바로 격려를 써서 사기를 올려놓은 다음, 2번째 턴에 풍림화산을 써서 아군을 강화하고 이때까지 피해를 적게 입는 것과 나머지 부대들의 혼란이 빨리 풀리기를 빌자. 적이 선턴을 잡고 시작하기 때문에 첫턴 오기 전에 1부대 - 2부대 퇴각은 각오해야하며, 재수없으면 타키가와 가즈마스가 환혹술을 써오는데 여기서 요시모토가 환혹술에 걸려버리면 요시모토의 첫턴이 오기도 전에 게임 오버되는 수가 있다. 요시모토는 기본 통솔 90에 족경, 궁술 기능이 4이기 때문에 풍림화산을 써줄 경우 상당히 잘 버티는데 그렇다하더라도 초기 병력이 적고 오다 군엔 유능한 장수가 많아 여차하면 다굴맞고 끔살이니 본대 포함 3부대 이상을 추슬러서 노부나가를 점사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 노부나가가 병에 걸려있는 로또를 바라는 것도 한 방법이다. 병에 걸린 걸 확인하면 바로 평정 열고 이벤트를 발생시킨다거나..여하튼 패배하면 역사대로 바로 끔살 후 게임 오버지만, 승리할 경우 노부나가가 전사하고 노부나가의 모든 영지, 장수가 아군 것이 되어 단숨에 천하인의 자리에 가까워진다. 요시모토 본인이 아닌 슨푸성 소속의 이마가와 군 다른 무장으로도 볼 수 있는 이벤트이지만 이 경우엔 상락 분기 없이 강제로 오케하자마 전투가 무조건 일어나고, 모두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요시모토로 해도 운이 따라줘야되는데 본인만 조종 가능한 일반 무장으로 전투에서 이기기란 에딧을 쓰지 않는이상 불가능하다고 봐야될듯.
- 전국바사라에서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말하다가도 자곤 하는 멍청한 사람으로 나온다. 게다가 요시모토를 공격하는건 아직 세상 빛 보지도 못한 다테 마사무네랑 마찬가지인 사나다 유키무라. 그림자 무사 2명 만들어 튀지만, 1명은 노히메한테 킬, 1명은 둘이서 킬, 진짜는 오다 노부나가한테 권총맞고 죽는다.
- 토탈 워: 쇼군 2에서도 역사 배틀로 등장. 오다 가문으로만 플레이 가능한데 초반에는 기병대로 숲속에서 순찰도는 이마가와의 경비대를 처리하고 요시모토의 본진을 습격하는 방식이다. 어째서인지 요시모토의 장군 호위대를 쳐서 요시모토의 목을 따는 게 아니라 점령 가능한 거점인 요시모토의 군막을 차지한 채 일정 시간 버티는 좀 맥빠지는 전개로 구현됐다. 캠페인의 경우, 아직 오다 가문의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았을뿐더러 이마가와 가문이 최대 판도가 아니었던 1545년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시작시 조건은 한없이 오케하자마 전투 당시에 가까울 정도로 오다 측에 불리하다(...) 이마가와 가문은 2지역을 손아귀에 넣고 있고 도쿠가와 가문을 수하로 두고 있는데다 컴퓨터 오다는 노부나가 같이 비범한 기습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늘 오다가 시작하자마자 박살이 나곤 했지만, 패치로 이마가와와 도쿠가와가 연합해서 쳐들어오지 않게 되고 사이토 가문의 시작시 병력이 거의 전무한[30] 수준으로 너프되었으며 캠페인 진행의 랜덤성이 강해져서, 최근에는 오다가 미노는 어찌어찌 차지하거나 때로는 천하를 노리는 그림도 나오게 되었다.
- 수라의 각에서는 비교적 이후의 학설을 반영해서 이마가와 군이 오케하자마 산 위에 진을 친다. 그러나 무츠 타츠미가 단신으로 이마가와 본진에 돌입해서 무츠원명류를 구사하자 겁에 질린 이마가와 군이 산에서 도망쳐 왔고, 때마침 천둥 번개와 폭우를 뚫고 돌격한 오다 군이 도망쳐 오는 이마가와 본진을 습격하게 된다. 이 전에 타츠미의 쌍둥이 아들 토라히코와 코마히코를 노부나가에게 보내서 적이 오케하자마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 게임 귀무자 1편에선 오프닝에서 전국 시대 야전의 처절함을 표현하면서 서장을 장식하는데, 여기선 노부나가가 승전보를 듣고 기뻐하다 갑자기 날아온 화살을 맞고 절명한 후, 환마와 계약을 맺고 부활한다. 본편에서의 오케하자마 전투는 이후 시리즈를 관통하는 악역인 오다 노부나가가 환마와 계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환마왕의 행보를 걷기 시작한 시발점이라 할 수 있겠다.
- Fate/Grand Order에서는 TS된 노부나가의 인연대사에서 언급되는데, 현재의 학설을 반영한듯, 엉망진창으로 싸웠고 용케도 이긴 전투였다며 개그 캐릭터답지 않게 진중하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전투에서 자신이 이겼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다시 만나니 존대말을 하고 손을 떨면서 긴장하고, 요시모토는 자신을 쓰러뜨린 숙적인 노부나가를 인정하고 아버지의 오명을 씻기 위해 싸웠던 아들 우지자네에게 부담을 줬다며 미안해 하기도 했다.
5.2. 드라마
- NHK 사극 풍림화산에서는 사건의 전후 관계가 다소 복잡한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에스기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이 작당해 꾸민 음모로 인해 다케다 신겐이 암살당할 뻔하자 그에 분노한 야마모토 간스케가 복수하려고 꾸민 일이다.
다케다 가에 복수할 일념에 불타는 등장 인물인 야자키 헤이조는 강력한 다케다 가문의 적대 세력을 찾다가, 우에스기 겐신이 상경한 동안 에치고를 지켜야 하는 그의 군사 우사미 사다미츠에게 접근해서주인공 야마모토 간스케[31] 처럼 군학을 배워 군사가 되어서 다케다 가문을 치고 싶으니 자신에게 병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게 된다.
이에 우사미 사다미츠는 헤이조의 실력을 시험하기 위해 신겐을 암살하는 임무를 맡기고 그 방법을 알려주는데, 몇 해 전에 신겐의 손에 죽은 스와 요리시게의 아들로 오래 전에 출가해 스루가에 살고 있는 토라오우마루를 찾아내 신겐에 대한 원한을 충동질하는 것이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영지인 스루가에서 초큐라는 이름으로 승려 생활을 하던 토라오우마루를 찾기 위해 헤이조는 우사미의 계략을 따라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어머니인 쥬케이니와 접촉하고, 쥬케이니 역시도 다케다 신겐을 위협적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을 더욱 왜곡해 토라오우마루를 충동질한다. 재밌는 이야기꾼 승려로 위장하고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신겐에게 접근해 암살하려 했던 토라오우마루는 그의 정체를 눈치챈 신겐에게 저지당해 실패한다.
그리고 오해를 풀기 위한 신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32] 토라오우마루는 신겐의 눈 앞에서 시녀를 죽이고 유폐된 뒤에 탈출을 하려다가 신겐의 가신들에게 잡혀 죽는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신겐은 한동안 은둔한다.
그리고, 이런 일들의 배후가 이마가와 가문임을 파악하고 격노한 간스케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와리로 대병력을 이끌고 침공한다는 정보를 얻고, 명목상 토라오우마루 사건을 불행한 사고로 취급하고 이를 수습하러 간 외교사절을 가장해 이마가와 가를 방문해서,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오케하자마는 위험하니 멈추지 말고 적의 기습을 주의하라'며 매우 타당한 내용의 충고를 한다. 그러나 야마모토 간스케를 싫어하던 요시모토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오케하자마에서 멈춰서 쉬다가 기습을 당해 죽고 만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간스케의 계략이었다. 자신이 충고하면 오만한 성격인데다 자신을 혐오하는 요시모토는 일부러 그 반대로 행동할 것임을 예측하고, 일부러 타당한 전략을 도발적이고 아니꼬운 태도로 진언해서 요시모토가 그 전략과 반대로 행동하도록 유도해서 죽인 것이다.
뒤늦게 이를 쥬케이니가 눈치채지만, 아무 물증이 없고 실제로 충고한 대로 되었으니 죽음 자체는 엄연히 요시모토의 잘못이 되기 때문에 간스케를 추궁할 수가 없어서 분해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가이로 복귀한 간스케가 요시모토가 죽었다는 소식에 놀라기는커녕 득의만만한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수상하게 여긴 오부 토라마사[33]가 간스케가 관여한 것이 아니냐고 추궁하지만, 간스케는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뚝 잡아뗀다.
- 같은 NHK 대하 드라마인 다케다 신겐에서는 역시 간스케가 관여하는 것으로 나오지만[34] 내막은 다소 다르다. 요약하자면, 신겐의 본격적이고 노골적인 요시모토 통수 사건. 이 드라마의 신겐은 겉으로는 천하 패권에는 관심이 없고 일개 지방 영주로 남으려는 것을 가장하지만 속으로는 천하 패권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는 남자인데,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노부나가를 격파하고 교토로 진군하면 이마가와 가문이 천하를 차지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막고 싶어하지만 동맹 관계이기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러던 중 이마가와 가문의 위협에 시달리던 오다 가문 측에서 사전에 신겐을 아군으로 포섭해 이마가와 가문을 같이 치려고 하는데, 이 때 신겐은 오다의 사자에게 넌지시 '간풍발미(奸風發迷)', 즉 '간사한 바람이 일어 망설임이 생겼다'라고 대답해서 이마가와 가문에 대한 배신 제의가 구미가 당기는 제안임을 시사한다. 그리고 요시모토가 본격적으로 오와리 침공을 개시하자 요시모토와도 안면이 있는 간스케에게 약간의 군사를 딸려서 지원군을 가장해 파견시키고, 신겐의 밀령을 받은 간스케는 노부나가에게 몰래 요시모토의 본진 위치를 통보해서 고의적으로 요시모토를 죽게 만든다.
자신의 처자를 인질로 잡는 등 자신을 박하게 대했지만 그래도 어엿한 주군이었던 요시모토를 정면으로 배반한 간스케는 이후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고, 요시모토 사후 이마가와 가문을 공개적으로 배신하고 스루가에 침공한 신겐에게 쥬케이니가 "내 아들 요시모토의 죽음에 관여한 바가 있는가"하고 추궁하지만, 신겐은 "나는 아무 것도 모르오. 영주에게 힘이 없으면 나라는 멸망하는 법이오."라면서 단호히 부정한다. 신겐의 마키아벨리스트적 캐릭터를 드러내주는 사건.
- 다른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인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주인공 야마우치 카즈토요가 오다 노부나가의 휘하로 들어가는 계기가 된다. 실제 역사와는 달리 드라마에선 카즈토요가 처음부터 낭인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오케하자마 전투 때 우연히 노부나가를 죽이려다 어쩌다보니 이마무라 가의 무사를 죽이는 공을 세우고, 논공행상 자리 때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벌떡 일어나서 창을 겨누더니, 곧 '그대의 창이 너무 짧으니 이 걸 주마'라며 창을 수여하고 그를 받아들이는 장면으로 나온다.
- 비교적 최근인 2023년 NHK 대하드라마 어떡할래 이에야스에서 비가오는 날씨로 1부 1~2화에서 다루어졌다. 다만 주인공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인만큼 오다 노부나가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4만 5천의 병력을 분쇄하는 장면은 직접 묘사되진 않고 정찰병에 의해 오타카 성에 고립된 이에야스(당시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에게 소식으로 전달되는 정도로 나온다.
6. 출전 무장
6.1. 이마가와 측
- 이마가와 요시모토
-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 오카베 모토노부
- 아사히나 야스토모
- 야마구치 사마노스케
- 우도노 나가테루
- 마츠이 무네노부
- 히사노 모토무네
- 이이 나오모리
- 유이 마사노부
- 요시다 우지요시
- 이치노미야 무네코레
- 우오즈미 하야토
6.2. 오다 측
- 오다 노부나가
- 시바타 가츠이에
- 마에다 토시이에
- 사쿠마 노부모리
- 모리 요시나리
- 카와지리 히데타카
- 미즈노 타다미츠
- 카지카와 타카히데
- 사쿠마 모리시게
- 오바 히데토시
- 이노오 사다무네
- 사쿠마 다이가쿠
- 야나다 마사츠나
- 삿샤 하야토
- 센슈 스에타다
- 핫토리 타다츠구
- 모리 요시카츠
[1]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버지.[2] 각각 세 가문의 본거지인 카이(甲斐), 사가미(相模), 스루가(駿河)의 글자를 딴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각 지방의 별칭인 고슈(甲州), 소슈(相州), 슨슈(駿州)에서 나온 명칭.[3] 요시모토의 병력은 코요미키에는 2만, 무공야화에는 3만, 신장공기, 화본태합기 등에는 4만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다르기 때문에 자세히 상정하게 어렵다. 실제 고쿠다카의 한계를 고려해보면 2만 정도가 타당하지만, 4만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4] 이 작전으로 이마가와 가문이 교토를 차지해 천하를 얻으려 했다고 해석되는 경우가 많으나, 확증은 없으며 오와리를 병합하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것이 정설. 어차피 교토에 가더라도 오와리는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5] 불교의 욕계 중 마지막 차원으로, 이곳의 주민들은 인간 세상에 비해 어마어마한 수명을 자랑한다고 한다. 즉 이곳의 시간 관념으로 사람의 인생은 극히 덧없는 찰나의 순간이라는 뜻[6] 흔히들 요시모토가 방심한 나머지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고 하는데, 후대로 가면서 <신장공기>보다 묘사가 다소 과격해진 감이 있다. 당시의 목격자인 오타 규이치는 이 바보같은 돌격대를 격퇴한 요시모토가 '나의 창끝에는 악마와 귀신도 당하지 못할 것이야!'라면서 병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기고만장해져 있었다고 한다. 그게 그거지만...[7] 본문에 쓰였듯, 이것이 보통 기습공격설을 거꾸로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 부분이다.[8] 오와리는 겉보기에는 땅이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비옥한 땅이라 고쿠다카로 치면 상당한 수준이었다.[9] 특히 오케하지마는 오다의 영지에 있는 곳이므로 노부나가는 지리에 대해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잘 알고 있었을 테니 교묘하게 본대만을 노리고 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노부나가 본인이 놀러다니는 척하면서 지리를 측정하고 다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속깊은 인물이었기도 하고.[10] 구 일본군의 전사 연구에서 주장해 왔던 학설이다. 구일본군의 전사 연구들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사상적으로 문제가 많은 건 물론이고 사료 분석이나 교차 검증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등 학문적인 수준에도 한계가 있어서 현재는 현대적 연구 결과에 의해 반박당하는 일이 잦다.[11] 물론 오케하자마는 오다 가의 영지 내였으므로 지리의 이점은 노부나가가 챙겼을 가능성은 높았다.[12] 명령을 위반하거나 명령 없이 적에게 공격을 가하는 행동으로, 당시 무사들 사이에서 흔한 군율 위반행위이던 '누케가케'라고 한다. 관례적으로 처벌이 별로 없었지만 도쿠가와군은 유독 이를 가혹하게 처벌했다.[13] 즉, 원래는 내부적으로 알아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단 당장 편성 가능한 병사들만 이끌고(당장 이렇게라도 안 하면 항복을 주장하거나 실제로 배신하고 항복할 자들도 있었을 테니까) 오케하지마에 왔는데 닌자들의 보고나 현재 상황을 봤을 때 지리적 이점도 있고 적은 방심 중인 데다가 적 부대는 분단되어 있고 비바람까지 내리는 등 의외로 생각보다 상황이 괜찮아서 그대로 기습했다는 것. 노부나가도 군략에 뛰어난 사람이었으니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건 자체는 우연일 수는 있어도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고.[14] 근처에 완만한 계곡과 늪지대가 펼쳐져 있음. 본진은 고지대. 아츠타 신궁과 최전선인 마루네, 와시즈를 조금 지나친 곳에 있음.[15]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는 막부로부터 위임받은 합법적 영토인 쇼바타성을 원래는 친분이 깊던 이마가와측을 배신하고 탈취했다. 그는 성주인 이마가와 우지토요의 시짓기 모임에 참석해 친목을 다지는 척 쇼바타 성에 자주 방문해 며칠이나 체류했고, 갑자기 쇼바타 성에서 쓰러져 죽어가는 척 하면서 긴급히 유언을 남겨야 하니 자기 부하를 쇼바타 성 안에 불러들이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해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성안에 들어온 부하들이 일제히 혼란을 일으키고 성주 우지토요를 인질로 잡아 성을 점거했다. 노부히데는 이런 기상천외한 계략을 써서 성을 단박에 빼앗았고, 이 쇼바타 성에서 노부나가가 태어났다.[16] 그도 그럴 게, 오와리는 간토 평야(関東平野)와 에치고 평야(越後平野)에 이어 당시 일본에서 세 번째로 넓은 평야인 노비 평야(濃尾平野)의 남반부를 차지하는 곡창 지대였다. 홋카이도가 일본의 판도에 들어온 지금에야 홋카이도의 이시카리 평야(石狩平野), 토카치 평야(十勝平野)가 각각 평야면적 2위, 3위를 차지하면서 밀려났지만 그럼에도 노비 평야는 여전히 일본에서 다섯 번째로 넓은 평야고 기소 강(木曽川)이 흘러 수원도 풍부한 곳이다. 이에 비하면 스루가나 미카와 도토우미는 산지가 많아 농지로서 가용한 면적 비율이 오와리에 비하면 현저히 떨어진다. 다만 오케하자마 전투 당시의 각 쿠니의 고쿠다카는 태합검지 실시 후의 고쿠다카와 다소 차이가 있긴 하다. 그러나 오와리와 이마가와 3국의 석고 차이는 지형빨 때문이고, 지형빨을 뒤집을 만한 특별한 요인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측 석고의 비율은 태합검지 때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17] 그 미카와도 원래는 마츠다이라 가문의 영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야스를 인질로 붙잡아놓을 필요가 있었던 것. 아무리 이마가와에서 이에야스를 교육하고 요시모토의 조카와 결혼시켜줬다고 해도 그걸 곧이곧대로 듣고 이에야스를 배신자로 볼 수 없는 근거이기도 하다.[18] 오다 노부나가가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당시 이마가와 가문의 국력은 오다 가를 능가했다.[19] 사실 이 종속 관계는 요시모토의 조카인 세나히메를 모토야스에게 시집보내는 등 그리 굴욕적이거나 가혹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면 이마가와를 이탈한 것은 도쿠가와의 비열한 배신 행위가 되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게 역사를 실컷 윤색한 이에야스 본인과 에도 막부의 공작으로 인해 현재는 철저한 굴욕적 예속 관계로 그려지는 경향이 많다.[20]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자기 영지를 이마가와에게 뺏긴 것이니 아무리 대우를 받았다고는 해도 불만이 없을 수는 없었다. 거기다 인질이었으니 목숨이 위험해도 이상하지 않기도 하고 또, 그런 식으로 영지를 뺏기면 자기 가신도 돌볼 수 없게 된다. 당장은 이마가와 가문이 오다보다 국력이 강했음에도 요시모토가 죽자마자 바로 등을 돌린 이유이기도 하다.[21] 또, 당시 상황은 미카와 영지를 온전히 먹기 위해 이마가와에서 이에야스를 모살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노릇이었다. 요시모토야 워낙 뛰어난 영주였으니 굳이 이에야스를 죽이지 않더라도 이에야스가 감히 경거망동을 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우지자네는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그 난리를 겪고도 이마가와에 얌전히 머물러 있는 쪽이 훨씬 더 어리석은 짓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에야스 본인도 이 참에 자기 영지를 돌려받을 생각이었을 테고.[22] 이 때문에 신겐이 오케하자마의 흑막이라는 주장도 있다. 신겐이 노부나가를 이용해서 이마가와를 제거한 뒤에 스루가를 차지했다는 것. 이 주장의 근거로 요시모토가 술판을 벌이고 있다가 기습을 당했다는 기록이 하필이면 다케다 가문의 군기라는 점이 제시된다. 오케하자마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은 신겐이 오케하자마 전투의 통설의 근거라는 점이 의혹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겐은 그저 쳐다보고만 있다가 낼름 스루가를 집어삼켰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겠지만...[23] 애시당초 이마가와는 다케다보다 강력했기 때문에 신겐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요시모토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그 요시모토가 죽은 이상 땅욕심 가득한 신겐이 그 욕망을 참아낼 리가 없었던 것. 물론 이렇게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이득만 챙긴 결과는 신겐 다음대에서 다케다 가문의 멸망을 불러왔다.[24] 셋사이는 꼭 없어도 되지만 하지만 요시모토를 살리려면 필요하다. 실제 역사에서 셋사이는 오케하자마 전투 5년 전인 1555년에 병사했다.[25] 물론 노부나가는 폭우 때도 범위는 좁아져도 공격이 가능한 비 피하기 스킬이 있고 이때쯤에 비 피하기 말고 딱히 쓸 스킬도 없기 때문에 잉여가 되진 않는다. 또한 강제 폭우가 아니고 폭우의 확률이 높은 정도라 기습이 성공한 이후엔 세이브로드 노가다로 2턴에 한번씩 맑은 날씨를 띄워주는 걸로 넘길 수 있다.[26] 팁은 나루미성을 점령하지 않고 이마가와 본대에 바로 공격을 퍼붓는 것. 나루미성을 점령하지 않고 돌아가는 중엔 나루미성의 부대를 제외하곤 이마가와 군대가 움직이지 않는데 10턴 정도면 이마가와의 본대에 접근할 수 있고, 아군 본진에 수비용 부대 하나정도만 남겨둬도 요새 보정이 엄청나기 때문에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27] 패배 조건은 셋 중 하나를 만족시키면 된다. 노부나가의 퇴각 or 아군 본진의 점령 or 승리 조건을 달성하지 못한채로 30턴의 경과.[28] 복수 부대의 사기를 중간 정도의 효과(통갈급)로 떨어뜨리는 스킬. 사기가 0이 되면 그 부대는 퇴각한다.[29] 야전에서는 무장의 스킬을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야 한다.[30] 오죽하면 시작시 외교창을 열어봤을 때, 사이토 가문은 병력이 전멸하거나 해서 수하에 병력이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일때 뜨는 feeble이 나온다.[31] 원래 헤이조 자신처럼 다케다 가문에 복수를 맹세했다가, 개인적 인연으로 다케다 신겐을 섬기게 되어 군사로 활약하는 야마모토 간스케는 헤이조와도 아는 사이다.[32] 신겐은 당시 스와 요리시게의 딸이자 토라오우마루의 누이인 유우를 두번째 부인으로 맞이해 잘 보살피고 있었고, 유우 역시 스와 가문의 핏줄을 남기기 위해 자발적으로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헤이조나 쥬케이니는 이런 사정을 나쁘게 왜곡해서 토라오우마루가 부친의 복수를 하도록 충동질한 것. 물론 다케다 가에 의해서 스와 가문이 망한 것만은 사실이었다.[33] 아내가 요시모토의 딸이어서 이마가와파인 신겐의 큰 아들 요시노부의 후견인이다. 즉 오부 역시 친 이마가와 파인 셈.[34] 간스케는 본래 다케다 가문에 첩자로 파견된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이었다가 다케다 가문 쪽으로 돌아서서 충성을 바치는, 닌자나 첩보원 같은 존재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