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일본 공사 | ||||
오오이시 마사미 | ← | 오토리 게이스케 | → | 이노우에 가오루 |
大鳥 圭介
1833 ~ 1911
1. 개요
오토리 게이스케는 에도 시대 말기의 군인이자 일본 제국의 정치인, 외교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청일 전쟁 초기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갑오개혁 당시의 일본 공사로 알려져 있다.2. 생애
1833년 하리마국 아코군에서 탄생했다. 오카야마번이 세운 시즈타니 학교에서 유학, 한의학[1]등을 배운다. 이후 1852년부터는 오가타 코안이 오사카에 세운 데키주쿠에서 난학을 익히고, 1854년에는 에도로 올라가 서양 군사학 등을 배우며 카츠 카이슈 등과도 교류한다.이후 막부의 서양학 학교 교사를 거쳐 막부육군의 간부가 되었다. 프랑스인 교관 쥘 브뤼네의 제자가 되었고, 보병봉행이 되었으며 프랑스식으로 훈련받은 엘리트 부대 전습대 창설을 주도했다. 전습대는 이후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에게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으로 꼽혔다.
보신 전쟁 발발 직후 구 막부군은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대패했고, 의욕을 잃은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에도성 무혈개성 및 항복을 선택했다. 반면 오토리는 신센구미 대원들 등과 함께 주전파를 형성하여 도호쿠 지방에서 오우에쓰 열번동맹과 함께 항쟁을 이어갔다. 우츠노미야 성 전투에서 일시적으로 승리하기도 했지만 곧 연패 끝에 아이즈 전선에서도 무너지며 에노모토 다케아키 함대와 함께 홋카이도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후대에 에조 공화국이라고도 불리는 에노모토의 군벌정권에 참가하여 육군총사령관 격인 육군봉행이 되었다. 하지만 1869년 봄 홋카이도에 상륙한 신정부군에 연전연패한 끝에 결국 에노모토와 함께 항복하고 수감되었다.
수감된 상태로도 수인들에게 서양 지식을 가르쳤고, 석방된 뒤에는 메이지 신정부에서 간척사업이나 가쿠슈인 원장, 조선공사 등 몇몇 직책을 맡았다.
[1] 한국의 의술을 배운 것은 아니고, 일본식 한방 의학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