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슬레지 Eugene Bondurant "Sledgehammer" Sledge | |
출생 | 1923년 11월 4일 |
미국 앨라배마 주 모빌 | |
사망 | 2001년 3월 3일 (향년 77세) |
미국 앨라배마 주 몬테벨로 | |
신체 | 173cm 63kg[1] |
복무 | 미합중국 해병대 |
복무 기간 | 1942 ~ 1946 |
학력 | 플로리다 대학교 생물학 박사 (1960) 몬테발로 대학 생물학 교수(1962~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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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진 슬레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합중국 해병대에 복무했던 참전군인이며, 대학교수이고, 작가이기도 하다. 1981년 발간된 그의 전쟁 회고록, "태평양 전쟁(With the Old Breed: At Peleliu and Okinawa)"은 후일 켄 번스(Ken Burns)의 PBS 다큐멘터리, "The War"의 소재가 되었고, HBO 방송국의 전쟁 드라마 "더 퍼시픽, The Pacific"으로 극화되기도 했다. 드라마 더 퍼시픽에서 배우 조셉 마젤로(Joseph Mazzello)가[2] 유진 슬레지 배역을 맡아 연기했다.2. 생애
2.1. 유년기
1923년 앨라배마 주 모빌에서 부유층으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남북 전쟁 당시 남부군 장교였고, 아버지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미합중국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한 경력이 있으며 모빌 지역에서는 유명한 의사였다. 유진은 책을 좋아했고 몸이 허약했었다. 그의 아버지는 유진이 바깥에 나가는 걸 장려했고, 유진은 아버지로부터 낚시와 사냥을 배웠으며, 유진의 부모님은 그를 위해 자동차를 사주기도 했다.[3] 또한 시드니 필립스하고는 고향 친구였으며, 둘 다 밀덕질에 심취해 구덩이나 참호를 파서 리인액트먼트를 하는가 하면, 남북전쟁 당시 쓰였던 총알이나 남부군 벨트버클 같은 유물을 파내는 걸 즐겼고, 이를 위해 거의 주말마다 모빌 외각에 있는 옛 남북전쟁터로 답사를 나가기도 했다.그러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 전역이 분노에 휩싸였을 때 필립스와 함께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유진이 류머티스성 열을 가지고 있으며, 당시에 다니고 있던 머피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이유로 참전을 반대했다. 류머티스성 심장 잡음[4] 때문에 제때 입대할 수 없었던 유진을 두고 친구인 필립스는 먼저 신병 훈련소로 떠난다. 머피 고등학교 졸업 후, 1942년 가을에 유진은 앨라배마의 마리온에 있는 마리온 군사학교에 입학했으나, 그는 그 학교 대신 1942년 12월에 미 해병대에 지원하여 장교를 양성하는 V-12 프로그램에 배치되어 조지아 공과 대학에 다니게 된다. 그러나 유진은 이 프로그램을 계속 받다가는 직접 전쟁터로 나가서 싸울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일부러 시험 성적을 적당히 낮추어 프로그램을 이수하지 않고,[5] 자신이 원하던 전투부대인 미 해병대 1사단에 입대하게 된다.
이 당시 유진의 형으로 미 육군 기갑병과 장교였던 에드워드 슬레지 소령(최종 계급)은 자신이 전쟁터[6]의 전차 앞에서 찍은 사진을 유진한테 보냈다고 한다. 유진은 사진을 보면서 형이 아직 전쟁터에 나가지 않은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껄끄러웠다고 한다.
2.2. 참전
입대 후, 그는 미 해병대 제1사단 5연대 3대대 K중대('킹 중대') 박격포소대[7]에 배치되었고 펠렐리우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를 겪는다. 군생활을 하면서 스내푸하고 꽤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8]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중국 베이징으로 파병됐다. 1946년 상병 계급으로 제대했다.그는 복무기간 동안 가지고 있던 성경이나 기타 종이에 틈틈이 전쟁에 대한 생각 등을 정리했고, 이는 나중에 그가 회고록을 쓸 때 참고가 되었다.
2.3. 전역 이후
생물학과 교수 시절의 유진 슬레지.
전역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고자 했으나, 해병대 전투부대에 들어가려고 일부러 낙제한 V-12 프로그램을 이수하지 않은 것이 의대 진학에 방해가 되었다. 결국 그는 앨라배마 기술대학(오번 대학의 전신)에서 경영학을 공부했고 보험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친구의 결혼식에서 같은 모빌 토박이인 진 아르세노를 만나 1952년 3월 결혼했고, 전혀 즐겁지 않았던 보험회사 일을 때려치우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공부를 재개하여 플로리다 대학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앨라배마 주 북부의 몬테발로 주립대학에서 생물학과 교수가 되어 여생을 보냈다. 이후로는 자신이 전쟁 당시에 성경이나 쪽지에 일일이 메모했던 내용을 정리하여 1981년 참전 수기 <With the Old Breed at Peleliu and Okinawa>를 출판했다. 'With the Old Breed'는 드라마 더 퍼시픽의 엔딩곡 제목이기도 하다.
2001년 3월 3일에 손자, 손녀 6명을 두고 위암으로 사망했다. 1년 뒤인 2002년, 아내인 진 슬레지는 남편이 손으로 쓴 참전 수기의 원래 원고에서 일부 원고를 <중국 해병대(China Marine)>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3. 여담
* 1982년도의 유진 슬레지.
- 참전 수기를 쓰기 전까지는 스내푸하고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스내푸는 유진의 참전 수기를 읽고 1980년 해병대 참전용사 모임에 참석해 유진과 재회하게 된다. 유진 슬레지의 별명인 슬레지해머[9]는 스내푸가 지어준 별명이다. 전쟁 당시 참호에서 유진은 스내푸와 같이 지냈는데, 불침번을 서던 스내푸가 교대하기 위해 유진의 귀에다가 '슬레지해머'라고 속삭여서 깨웠던 경험 때문에 유진은 전쟁이 끝난 지 몇십 년이 지나도 아내가 자신을 흔들어 깨울 때 귀에다 '슬레지해머'라고 속삭이면 벌떡 일어났다고 한다.
- 자식들한테는 자신이 참전용사였다는 사실 자체를 이야기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자식들은 성인이 되고도 한참 후에나 자신의 아버지가 참전용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딸과 사위는 당시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점잖은 분이 젊은 시절에 전쟁터에서 사람들을 죽였다는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 말수가 적은 내성적이고 과묵한 성격이고 묵상을 좋아했으며 지옥스러운 전장에서도 깊이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았으며[10][11], 새를 관찰하거나 모짜르트와 클래식 기타를 즐기는 등 사람 자체는 군대와 전쟁에 어울리지 않는 편이었다고 한다. 오키나와와 중국에서 주둔하던 시절에는 오키나와 주민들 및 중국인들과 친하게 지냈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 등을 배우며 그들에 대한 동정심과 존경심을 품기도 했다.
-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개봉됐을 때, 처절했던 상륙전을 흥행 오락물로 여긴다고 영화를 보길 거절했다고 한다. 다만 이건 잘못된 판단으로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쟁의 끔찍함을 정말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시작부터 기관총에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장면이나 폭발에 다리가 날라가고 사람이 폭사하는 장면, 잘려나간 팔을 들어서 걸어가는 병사나 내장이 그대로 노출된채 어머니를 부르며 고통스러워하는 병사의 모습, 수많은 병사들의 시체에서 나온 피가 바다를 빨간색으로 물들이는 충격적인 장면까지 지금까지의 우리가 생각했던 멋지고 환상적인 전쟁의 틀을 완벽하게 깨버렸다. 실제로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직접 이 영화가 19세 관람가가 된다고 해도 전쟁의 잔혹함을 그대로 담을 것이라고 언급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참전용사가 이 영화를 보고 다른 건 냄새뿐이었다며 눈물을 흘렸던 인터뷰는 이미 유명하다.
- 전쟁 이전에는 취미가 사냥이었다고 한다. 다만 전쟁 이후에는 두번 다시 사냥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드라마 상에서는 제대 후 아버지와 같이 사냥을 나갔으나 총을 쏘지 못하고 오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말미의 내용 중에 리처드 윈터스가 작은 새를 총으로 쏜 후 죄책감을 느껴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걸로 보아 두 사람 다 전쟁에 참가한 후 생명을 빼앗는 행동에 거부감을 느끼게 된 듯하다. 또한 입대 때까지만 해도 해병대나 전쟁에 대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으나, 종전 때가 되자 해병대나 전쟁에 대해 언급하는 걸 꺼렸다. 그래도 자신이 속한 K중대에 대한 애정은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늘 외출할 때마다 군용 수통을 가지고 다녔는데, 아내가 이에 대해 묻자, 그는 "글쎄, 펠렐리우 전투 첫날에 하도 목이 말라서 앞으로는 절대로 물 없이는 안 다닌다고 생각한 것이 머리에 박혔나 봐"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드라마 더 퍼시픽에 등장하는 주인공 3인방(로버트 레키, 존 바실론, 유진 슬레지) 중 유일하게 붕가씬이 없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와서 유진의 형이 "그 전쟁통에 니 총각성을 지켰다고?" 라며 놀라기도 했다.
- 또한 드라마에서 유진 슬레지가 의사인 아버지에게 심장과는 상관없이 해병대에 입대한다고 했을때 아버지[12]는 육체적 부상이 아닌 영혼적 부상을 걱정한다. 전후의 유진 슬레지의 행보를 생각했을때 미묘한 복선.
- 신장 173cm에 몸무게가 60kg대인 굉장히 마른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 드라마에서 전역 직후 오번 대학교에 등록하러 갔을 때, 접수원이 특별히 교육 받은게 없냐고 물어보자 "그냥 훈련소에서 화기교육을 받았죠"라고 답했는데, 그 이후 회계, 언론, 공학이나 기술 등을 아냐고 물어보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며 대신 폭발물(박격포탄을 의미)을 취급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접수원이 해병대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어떤 것도 배운게 없냐고 하자, 얼굴을 갖다대며 "해병대는 저에게 쪽바리 새끼들을 죽이는 법을 가르쳐줬어요. 제가 그거 아주 잘 했거든요"라는 충격적인 대답을 했다. 이 여성 접수원은 전혀 예상치 못한 험악한 답변을 받자 그만 할 말을 잃고 만다.[13] 다만 실제로는 다소 열받긴 했지만 "아가씨, 서로를 죽이는 전쟁이 일어났었고, 저는 거기서 살인을 해야 했던 사람이였습니다." 라고 점잖게 얘기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여성 접수원은 부끄러워하며 황급히 자신의 무례를 사과했다고 한다.
- 태평양의 전선을 누비면서 목격한 일본군의 잔학 행위[14]와 일본군의 포화로 죽어나간 전우들로[15] 인해 느낀 극렬한 증오로 타계하기 직전까지도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버리지 않았으며 그가 전쟁 동안 죽인 일본군 병사들에 대해서 어떠한 동정심이나 후회도 느끼지 않았다고 인터뷰에서 증언했다.
[1] 징병검사에서 측정된 수치이다. 본인의 저서에서는 본인의 키가 175cm 정도(five feet nine inches) 라고 밝혔다.[2] 쥬라기 공원(영화)에서 존 해먼드의 손자 티미 역을 맡았던 배우. 이후 보헤미안 랩소디(영화)에서 스내푸 역의 라미 말렉과 다시 만난다.[3] 1930년대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세계 1위이긴 했지만, 중산층 부모들이 영화에서처럼 자식들에게 자동차를 사줄 정도로 부유해진 것은 1950년대 이후에나 가능해진 일이다. 즉, 유진네 집안은 지역 유지급의 부자였던 셈. 드라마에서도 넓은 마당이 딸린 집에 흑인 정원사와 가정부를 두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4] 드라마 더 퍼시픽 초반에 유진이 아버지로부터 입대 전 심장박동 검사를 받은 것도 이 심장 잡음 때문이었다.[5] 부모님에게는 일부러 낙제했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은 채 '그냥 이 길이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다'고만 알렸다.[6] 에드워드는 유럽 서부전선에서 나치와 싸웠다.[7] 60mm 박격포 분대원으로서 포탄을 떨어뜨릴 각도를 재는 역할을 했다. 박격포가 소용없는 근접전투에서는 들것 운반이나 지원 사격수를 맡기도 했다.[8] 유진의 참전 수기에서 유진은 스내푸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밝혔다.[9] 소위 '오함마'라고 불리는, 양손으로 내리쳐야 하는 큰 망치이다. 유진의 이름에 '슬레지'가 들어가기도 하지만, 유진이 평소엔 조용하다가도 의외로 성깔 있고 잘 싸워서 붙여준 듯 하다. 스내푸가 이 별명을 지어 줄 때 옆의 빌 스미스에게는 반대로 '볼핀 해머'라고 지어주었다. 이유는 '작으니까'(...)[10] 이와 정반대로 그의 절친 시드니 필립스는 매우 쾌활하고 밝은 성격이었고 유진이 전쟁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11] 그의 이러한 성격은 그가 훗날 회고록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12] 군의관으로 1차 세계대전을 경험했다. 이 때문에 전쟁의 참상을 잘 알고 있기도 하다.[13] 심약했던 유진이 험악한 성깔로 바뀐 것을 보여줌과 더불어 당시 민간인과 군인간의 괴리를 묘사하기 위한 부분이긴 하지만, 이정도로 멕이는 질문을 한다는 것은 미국 내에서도 상황 묘사를 와닿게 표현하려고 접수원을 의도적으로 심각하게 무개념으로 설정했다는 평이 주류이다. 하지만 실제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긴 했었다고.[14] 일본군이 펠렐리우에서 미 해병대가 미처 수습하지 못한 전사자들의 시신을 탈취하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훼손한 채 유기했고 이를 이후 발견한 슬레지와 동료 해병들은 일본군에 대해 엄청난 증오와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15] 특히 앤드류 할데인 대위의 죽음은 그에게 전쟁이 끝나고 수십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슬픔과 상실감을 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