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4-19 20:21:48

이규창(독립운동가)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1900년생 독립운동가에 대한 내용은 이규창(1900)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1889년생 독립운동가에 대한 내용은 이규창(1889)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파일:이규창.jpg
출생 1913년 3월 28일
중국 지린성 통화현 삼원진 합니하
사망 2005년 8월 2일 (향년 92세)
서울특별시 보훈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본관 경주 이씨[2]
난산(爛山)
부모 아버지 이회영, 어머니 이은숙
형제자매 형 2명, 누나 이규숙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독립운동2.3. 옥중 투쟁2.4. 해방 후의 행적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받았으며 독립유공자 이회영의 아들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913년 3월 28일 중국 지린성 통화현 삼원진 합니하 언덕의 초가집에서 부친 이회영과 모친 이은숙(李恩淑)의 3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이회영은 독립운동자금을 추가로 모으기 위해 일시적으로 귀국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친 이은숙이 그를 홀로 길러야 했다. 그는 출생 직후 '계백'이라는 예명으로 불렀는데, 이는 이회영이 계백 장군을 만나 무엇인가를 받는 꿈을 꾼 후 부인에게 아들을 낳을 것 같으니 이름을 계백이라고 지으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생애는 출생 직후부터 파란만장했다. 출생 6개월 만인 1913년 10월, 마적이 집에 침입해 모친 이은숙에게 총격을 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이규창은 안면과 손이 숯불 화로에 닿는 바람에 화상을 입어 평생의 상처로 남았다고 한다. 또한 1920년 1월 부친 이회영을 따라 베이징으로 이주한 뒤에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야 했으며, 누나 이규숙과 함께 중국 상인들로부터 2,000~3,000 위안의 거금을 갚으라는 위협에 시달리며 2년간 고역을 당했고 심지어는 욕을 먹거나 구타를 당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다 중국 상인들이 이회영이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가임을 알고 빚을 탕감해주며 존경을 표했다고 한다.

1925년에는 베이징에서 함께 사는 모친 이은숙이 생활비와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귀국했으며, 1927년에는 생활 형편이 너무 어려워 누나와 여동생을 빈민구제원에 맡겨야 할 지경에 처했다. 이규창은 후에 회고록 <운명의 여신>에서 이때의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평생 중에 죽을 고생을 한 것이 나의 어린 나이에 귀중한 인간 생활의 체험과 난관을 타개하는 굳센 의지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어려서 밥을 하도 굶어서인지 지금 나이 7 세이지만 히루 동안 음식을 굶어도 그리 고난을 느끼지 않는다. 과연 소시에 하도 굶었던 관습이 아니면 본래의 생리가그리한가. 나도 분간할수가 없고 여하튼 북경, 천진 시절의 기구한 팔자가 되어 비참한 고난을 당한 일만은 한시도 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어려운 처지였기 때문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그는 1926년 상하이 노동대학 부설의 중고등학교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학교 설립이 중단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당시 이규창은 입학을 위해 영어, 산술, 중국어, 작문 등의 시험을 치렀는데 특히 그가 중국어로 작성한 ‘현재 중국 농촌의 상황’이라는 주제의 작문은 상당히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천진남개학교(天律南開學校) 입학 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뒤 교장의 배려로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는 이를 고맙게 여기고 학업에 몰두해 성적이 언제나 최상위권이었다고 한다.

한편 이규창은 이회영의 아들로서 의열단이나 다물단 및 여러 독립운동단체의 연락 및 여러 심부름을 성실히 수행했고, 그러다보니 어린 나이부터 이미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을 직,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었다. 이 덕분에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부친의 뒤를 따라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2.2. 독립운동

당시 이회영이 거주하는 베이징에는 김창숙, 김규식, 안창호, 조소앙, 유자명, 정현섭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찾아왔다. 이회영은 이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했고, 1920년대 후반에는 아나키즘에 경도되었다. 그는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단행하자 유자명,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고, 회장에 유자명을 추대했다. 당시 이규창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의 기관지인 <남화통신>에 글을 게재하기도 했고, 유자명이 재직하고 있던 입달학원(立達學院) 내에서 <남화통신> 의 발간을 위한 인쇄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던 1932년 11월 부친 이회영이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하고 주만일군사령관 등을 암살할 목적으로 대련(大連)으로 가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했다. 이에 이규창은 1933년 2월 상하이에서 화랑청년단(花郞靑年團)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백정기, 정화암, 오면직, 엄순봉, 원심창, 이강훈 등과 함께 활동했다.

한편 이회영이 대련에서 순국한 뒤, 정화암, 유자명 등은 그의 만주 행을 일제에게 밀고한 자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이들을 색출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은 조사 끝에 이회영이 작별 인사 차 이석영을 찾아갔을 때 연충열과 이규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안공근이 일본 영사관 내에 심어둔 인사와 접촉한 결과 두 사람이 바로 일제에게 이회영의 행보를 밀고한 자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규서는 이석영의 둘째아들이었으며, 연충렬은 임시정부 요인인 엄항섭의 처조카였다.

이렇게 해서 부친을 밀고한 자들이 밝혀지자, 이규창은 두 사람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두 사람에게 항일투쟁을 위해 새로운 청년단체를 조직하고 유력인사를 모셔 조직을 활성화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면서 김구도 이 제안에 적극적으로 찬동하였으며, 입달학원에 찾아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두 사람은 김구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을 품고 입달학원으로 향했지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정기 등에게 체포된 뒤 자신들이 이회영을 밀고했음을 자백한 후 처단되었다.

1933년 2월, 이규창은 중국의 주요 정치인들을 매수하여 한인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던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암살하려는 계획에 관여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으며 백정기, 이강훈, 원심창 등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하지만 이후 흑색공포단 명의로 뿌려진 발표문이 중국 언론에 대서특필됨에 따라 국민당 내 친일세력이 축출되는 둥 일제의 계획에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1935년 1월 20일, 이규창은 엄순봉, 이달, 정화암, 김지강 등과 함께 친일 조선인 조상섭(趙尙燮)의 집을 습격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는 21일 정화암으로부터 권총 1정을 교부 받은 엄순봉, 이달, 김지강을 조상섭의 집으로 안내하여 조상섭의 부인을 위협하여 금품을 탈취하게 했다.[3] 또 1935년 3월에는 정화암과 협의하여 엄형순과 함께 상해 조선인거류민회(居留民會) 부회장과 고문을 역임한 바 있는 친일파 이용로(李容魯)를 사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도피에 실패하고 중국 경찰에 체포된 뒤 상해 일본 영사관으로 인도되었고, 1935년 5월 30일 국내로 송환되었다.

2.3. 옥중 투쟁

국내로 송환된 뒤 종로경찰서에서 심한 고문을 받은 그는 1936년 4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3년을 선고받고 마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형무소에서 인쇄공으로 사역했다. 그러던 1939년 4월, 그는 감옥에서 알게 된 사회주의자 박세영과 함께 일제의 중국침략을규탄하고 일제와의 투쟁을 강조하고 선전문을 발행하여 감옥 내외에 배포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글의 제목은 <전쟁은 동에서 서로가다>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쟁의 시작은 동에서, 즉 일본이 전쟁을 유발하였으니 장기화만 되면 세계 열강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묵과하지 않을 뿐더러 이해관계로도 가만히 있겠는가. 그러니 필연적으로 세계대전이 일어나면 일본 제국의 패전은 불문가지(不問可知)며, 그리되면 조선은 독립이 되며 공산주의화하는 것은 목적을 이룰 것이다.
1. 파소 일본의 중국 침략을 공동사수하자!
1.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국내 전쟁으로 전환시키자!
1. 조선의 독립 인민 정부 수립 만세!

그는 이 문건을 150매 인쇄한 뒤 일본어학생 기결수 주명선(朱明善)·이안진(李安珍_에게 배포케 하고 2차로 기결수 마건열(馬件烈)·이원석(李源錫)에게 배포하게 하였다. 이 일은 곧 일제 경찰에게 적발되었고, 그는 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0개월 23일을 가형받아 광주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 8.15 광복 직후 옥중에서 풀려났다.

2.4. 해방 후의 행적

석방된 후 남화한인총연맹의 동지였던 김지홍(金芝江), 상하이, 베이징, 천진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수행하던 이석규(李錫奎)·공형기(孔亨基)·차이직(車利織)·방우영(方又榮)과 함께 독립운동가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던 종로경찰서의 경부 미와 와사부로와 경부보 제보(齊寶)를 처단하기로 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와는 패전 직후 원산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간 뒤여서 뜻을 이룰 수 없었으며, 경부보 제보는 찾아내 현장에서 권총으로 처단하였다.

이후 서울 종로구에 거주하면서 회고록을 집필하며 말년을 조용히 보내던 그는 2005년 8월 2일 서울 보훈병원에서 병사했다. 향년 93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규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5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1] 이명은 이규호(李圭虎, 李圭鎬).[2] 백사공파 11대손, 시조 35세손.[3] 사실 조상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내고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정위원을 지내는 등 다양한 요직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초부터는 일제에게 영합하여 인삼 장사를 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친일 인사들과 빈번하게 교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