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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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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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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6년 9월 14일
전라북도 김제군 월산면 후장화동
(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장화동[1] 후장마을 214-1번지)[2]
사망 1981년 1월 21일 (향년 84세)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
본관 동래 정씨[3]
윤옥(允玉)
화암(華岩)[4]
학력 중국영농대학 (중퇴)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신세계공원묘지[5]
상훈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3. 광복 이후4. 독립운동가를 역사에 기록한 독립운동가5. 정치인 정현섭6. 기타7.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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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이자 야권 정치인.

의열단, 한인애국단과 같은 무력 독립운동 조직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창설했다. 이회영과 함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이다. 구파 백정기와의 친분도 유명하다. 또한 옥관빈 피살사건의 주모자이기도 하다.

2. 생애

1896년 9월 14일 전라북도 김제군 월산면 후장화동(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장화동 후장마을)에서 아버지 벽초(碧初) 정환전(鄭桓全, 1866.9.17. ~ 1937.)[6]과 어머니 진주 강씨(1874.12.20. ~ 1929.10.6.)[7] 사이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면서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만세 시위에 참여한 뒤 1920년에는 미국 의회 사절단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이들에게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활동을 계획했다. 이때문에 일본 제국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어 1921년에 중화민국 베이징시로 망명하였다. 한때 중국영농대학에 재학하기도 했으나 2년이 채 안 되어 중퇴하였고 1924년부터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회영, 신채호, 박열, 신성모아나키즘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함께 활동하였다. 이들과 같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했다. 이때부터 무력을 사용한 독립운동에 뜻을 두면서, 폭탄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를 기도했다. 이무렵 중국의 아나키즘 혁명운동가인 리스쩡, 우징헝 등과 제휴하여 동방자유혁명자연맹(東方自由革命者聯盟)을 조직하였다.
1928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이며 안중근의 동생인 안공근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의자연맹을 결성하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맹하고 기관지 《탈환》을 발행했다. 상하이를 거점으로 무정부주의 운동을 계속하면서 1930년, 중국의 아나키스트이며 암살대왕으로 불리던 서남파의 정객 왕야차오의 지원을 받아 유자명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기도 했다.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유기석을 만나 유자명·장도선(張道善)·정종화 등과 중국인 무정부주의자와 연대하여 함께 활동하며 공동 무력 투쟁을 시도했다.

1931년 1월 원심창이 상해로 건너와 정화암과 합류하자 조직을 강화하고 상해 일대에서 친일파 및 전향자 등을 사살하였다. 1931년에는 이회영, 오면직, 백정기, 박기성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재건해 아나키즘을 연구하였다. 1933년 3월 청년들을 모아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였다.1933년 3월 중순 일본 주중(駐中) 상해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중국 유력자를 육삼정(六三亭)에 초청해 연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 공사를 사살하려고 계획했으나 밀정의 고발로 거사 직전에 검거되었다. 1936년에는 국내 호서은행(湖西銀行)에서 5만 7000원을 탈취하여 기관지 ≪남화통신 南華通信≫을 창간, 발행기금으로 활용하였고 남화통신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1940년부터는 상하이에서 한국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 활동했다. 태평양 전쟁 중에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정탐하여 미합중국 공군에 보고하는 정보 활동을 벌였다. 일본군으로 강제 징집된 조선인 학도병의 탈출 공작도 진행하고 탈출 학도병을 임시정부로 보내는 데 후원하였다.

3. 광복 이후

1945년 8.15 광복 이후 1946년 상하이 한인인성학교(韓人仁成學校) 이사장, 상하이교민단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1958년 민권수호연맹 지도위원, 1959년 통사당(統社黨) 최고위원을 역임하고, 1960년 사회대중당 발기인으로서 창당에 관여했고, 창당된 뒤에는 지도위원에 취임했다.

1960년 7월 29일 열린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사회대중당 후보로 전라북도 김제군 갑 선거구에 출마했다. 이때 곽상훈이 당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던 조한백을 지원하는 연설을 했는데, 상대 후보였던 정현섭에게 사상으로 공격하였다. "정화암은 무정부주의자입니다. 공산주의자의 사촌쯤인 무정부주의자에게 이 나라 정치를 어떻게 맡기겠습니까"라고 비판했다.

이에 '나는 곽상훈 씨를 위대한 정치가인 줄로 여겨왔다. 그런데 그 위대한 정치가가 무정부주의는 공산주의의 사촌쯤 된다고 말했다니 그 동안의 이 나라의 정치작태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무정부주의공산주의도 구별 못하는 사람이 위대한 정치가로 대접받아 왔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그런 소리는 이불 속에서 자기 마누라하고나 하시오. 유권자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곽상훈이라도 꽤 무식한 사람이구나 하는 말을 들을 뿐입니다.'라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선거 결과, 17,784표를 얻어 26,281표를 얻은 민주당 후보 조한백에게 2위로 석패하였다.

1961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회 위원에 추대되었고, 5.16 군사정변으로 붙잡혀 6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풀려났다. 1969년 3선 개헌에 반대하여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고문으로 참여하였다. 1973년 민주통일당 최고위원, 1974년 민주통일당 상임고문에 추대되었다. 1974년 민주화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하였다.

1981년 1월 21일 서울특별시 은평구 갈현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86세.#

1983년 8월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나의 회고록》,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가 있다.

4. 독립운동가를 역사에 기록한 독립운동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인데, 약산 김원봉과 백범 김구의 활약을 역사에 기록하였다. 보수적인 시각에서 일제 강점기, 광복 직후 시기를 중심으로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 연구를 해왔던 역사학자 이정식 교수(펜실베니아 대학교)가 젊은 시절 김성숙, 장건상, 정현섭, 이강훈 등 독립운동가 출신 인물과 인터뷰해서 구술·기록한 책이 있다.#

5. 정치인 정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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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정치인의 길을 간 독립운동가 출신 정현섭은 수난을 꽤 당해왔다. 1960년 5월 13일 사회대중당이 창당되었을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던 그는 그 해 7월 29일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김제군 갑구 선거구에 사회대중당 소속으로 출마하였다. 그런데 당시 상대 후보였던 조한백의 지지유세를 한 독립운동가 곽상훈(한국민주당 정치인 출신)으로부터 아나키스트란 이유로 공산주의자와 비슷하다는 비방을 받았다. 결국 이때 선거에서 조한백 후보에 밀려 낙선하고 말았다.

1년 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체포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이후에 박정희 정권 당시 1969년에 실시한 3선 개헌에 항의하며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유신정권 치하의 1974년에는 민주화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 운동가로 활동하였다.

6. 기타

7.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전북 김제 갑[8]
파일:사회대중당글자.png
17,784 (40.35%) 낙선 (2위)


[1] 동래 정씨 집성촌이다.[2] 이 지번에 현재 정화암선생생가가 남아 있다.[3]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휘(諱) 효손(孝孫)공파 30세 섭(燮) 항렬.[4] '정화암(鄭華岩)'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5] #[6] 자는 윤경(允敬).[7] 강흔계(姜昕季)의 딸이다.[8] 제20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