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6 18:38:45

이남규(1867)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이종태(李鍾泰)
본관 함평 이씨[1]
출생 1867년[2] 8월 26일
전라도 함평현 식지면 수하리
(現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수하리)
사망 1907년 11월 7일 (향년 40세)
전라북도 고창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26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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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67년 8월 26일 전라도 함평현 식지면(現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수하리에서 아버지 이경인(李景寅, 1851 ~ 1895. 2. 27.)[3]과 어머니 밀양 박씨(1850 ~ 1886. 6. 19.)[4] 사이에서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11촌 지간의 족숙(族叔) 이현근(李鉉根, 1832 ~ 1878. 2. 2.)[5]에 입양되었으며, 전라도 무주현(現 전라북도 무주군)으로 이주했다.

아버지 이경인은 1877년(고종 14) 경기도 수원유수부에서 심한 기근이 들자, 1만 냥을 의연금으로 기부하였다. 이에 대한 포상으로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 종6품)에 임명되면서 관직에 진출했다. 이때 또한 전라도에도 기근에 대한 의연금 2,000냥을 기부하기도 했다. 1887년(고종 24) 고창현감(高敞縣監)에 임명되었으나 1888년 총무관 겸 전운어사(總務官兼轉運御史) 홍종영(洪鍾永)의 탄핵으로 사고가 있을 때 관련 아전과 향임(鄕任)을 제때 파견하지 않아 일 처리를 그르치고, 무뢰배가 진(鎭)의 장교(將校)를 구타했음에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음이 드러나 파직되었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난 뒤 45촌 지간의 족질(族姪)인 고군산진 수군첨절제사(古群山鎭水軍僉節制使) 이태형(李泰亨, 1841 ~ 1894. 12. 25)[6]이 후방에서 동학농민군에 가축 및 식량 등 군수물자를 지원해주는 정황을 알아내자 이를 관아에 밀고해 그가 처형되는 데 일조했다. 동학 농민 혁명이 진압된 뒤 1895년 2월 27일 전라도 함평현을 방문해 읍내 기성면 서부리(現 함평군 함평읍 내교리 서부마을)[7]에서 연회를 벌이던 중 이태형의 장남 이두회에 발각되어 살해당했다.

1894년(고종 31) 식년 생원시에 3등 38위로 입격했다.

1907년 정미 7조약이 체결되고 이어 대한제국군 해산이 단행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음력 8월 8일(양력 9월 15일) 장성군 서이면 관정리(現 장성군 황룡면 관동리 관정골) 수연산(隨緣山) 석수암(石水菴)에서 기삼연을 만나 의논한 뒤 의병진을 창설했다. 이때 후군장(後軍將)에 임명되었고, 이후 나주군(現 나주시), 광주군(現 광주광역시), 담양군 등지에서 일본 제국 육군 및 관군과 접전해 전적을 올렸다.

이후 고부군에 있던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사령부를 공격하기 위해 1907년 음력 9월 23일(양력 10월 29일) 기삼연과 함께 고창군 고사면 칠성리(現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칠성마을) 문수사(文殊寺)로 진군하던 중 이를 발견한 일본 제국 육군 및 관군의 습격을 받아 접전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1907년 음력 9월 24일(양력 10월 30일) 호남창의동맹이 창설되자 재차 기삼연 의병장의 후군장에 선임되었다. 이어 고창군 천남면 읍내(現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서 고창읍성을 함락시키고 읍성 아래에서 의병진의 후군(後軍)을 지휘했다. 그러나 다시 관군에 읍성이 함락되었고 이때 중상을 입어 몸을 숨겼다. 그러나 어느 여인의 밀고로 일본 제국 육군에 체포된 뒤 1907년 11월 7일 처형되어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당초 함평군 함평읍 내교리 대화마을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3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 1954년 또는 1955년에 종손(從孫)[8] 이정근(李正根, 1924. 3. 6. ~ )[9]이 아버지 이경인이 밀고해 처형되게 만든 이태형의 손자 이성우를 전라남도 광주시(現 광주광역시)에서 만나 과거의 앙금을 풀고 화해했다. 이후 이성우의 장남 이일행(李一行, 1931. 12. 5. ~ 2006) 또한 서울특별시에서 이정근을 만나 재차 화해했다.

[1] 현감공(縣監公) 손무(孫茂)파 27세 규(奎) 항렬.[2] 독립유공자 공적정보에는 1856년생으로 기재돼 있으나, 『상지즉조32년갑오식년사마방목(上之卽祚三十二年甲午式年司馬榜目)』 및 함평이씨대동보 권13 1709쪽에는 1867년생으로 등재돼 있어 이를 따른다.[3] 초명 이현인(李鉉寅), 자는 진구(珍九).[4] 박진환(朴晋煥)의 딸이다.[5] 자는 의여(意如).[6] 족보명 이계균(李啓均), 자는 상삼(相三).[7] 지금의 함평농협본점 자리[8] 첫째 남동생 이철규(李喆奎, 1873 ~ 1899. 11. 3.)의 손자.[9] 족보명은 이재근(李載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