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01:39:15

이득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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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광공사 사장 (1962~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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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두영
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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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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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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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공사 사장 (1982~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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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183c><colcolor=#fff> 제22대 문화방송 대표이사 사장
이득렬
李得洌
파일:이득렬.jpg
출생 1939년 5월 7일
경기도 경성부 초음정 26번지
(현 서울특별시 중구 오장동)[1]
사망 2001년 2월 24일 (향년 61세)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본관 원주 이씨
재임기간 제22대 문화방송 대표이사 사장
1996년 7월 22일 ~ 1999년 3월 8일
제17대 한국관광공사 사장
1999년 6월 26일 ~ 2000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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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183c><colcolor=#fff> 가족 배우자 김윤자[2], 슬하 1남 1녀[3]
학력 보인상업고등학교 (졸업 / 30회)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문학 / 학사)
종교 개신교
약력 1966년 문화방송 입사
문화방송 보도국 정경부 차장 (1974.10.16~1976.1.1)
문화방송 보도국 정치부 차장 (1976.1.1~1978.7.1)
문화방송 보도국 정치부장 (1978.7.1~10.18)
문화방송 보도국장석 부장 (1978.10.18~1980.3.13)
문화방송 보도국 사회부장 (1980.3.13~1981.3.9)
문화방송 보도국 보도제작2부장 (1981.3.9~6.16)
문화방송 보도국 보도위원 (1981.6.26~1983.3.1)
문화방송 보도국 부국장 (1983.3.1~1987.5.1)
문화방송 총무국 워싱턴지사장 (1987.6.1~1990.2.21)
문화방송 보도이사 (1990.2.22~1992.2.10)
문화방송 전무이사 (1992.2.10~1993.3)
MBC 애드컴 사장 (1993.3~1996.7)
문화방송 대표이사 사장 겸 한국방송협회 부회장 (1996.7~1999.3)
한국관광공사 사장 (1999.6.26~2000.5.16)
새천년민주당 당무위원 및 삼성생명보험 사외이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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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앵커 시절2.2. 앵커 이후2.3. 사망
3. 여담4. 어록5. 수상 경력6. 참고/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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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언론인. 하순봉 - 이득렬 - 엄기영으로 이어지는 MBC 뉴스데스크의 간판 앵커 라인 중 한 명이다.

2. 생애

1939년 5월 7일 경기도 경성부 초음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오장동) 26번지의 3대째 서울토박이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보인상업고등학교(30회)와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66년 문화방송 공채 3기 기자로 입사하여 사회부에서 시작해 정경부로 이동된 후 청와대 출입기자로 활동한 바 있고, 1974년 차장 승진 후 1976년 정경부가 정치부로 개편되면서 그쪽으로 이동되었다.

2.1. 앵커 시절

1974년 10월 30일부터 1987년 4월 30일까지 12년 반 동안 <MBC 뉴스데스크>를 진행했으며,[4] 1981년 초에는 <MBC 뉴스센터> 초대 앵커까지 맡았다. 앵커를 하면서 1978년 정치부장으로 보직간부 생활을 시작해 보도국장석 부장(1978~1980), 사회부장(1980~1981), 보도제작2부장(1981), 보도위원(1981~1983), 보도국 부국장(1983~1987) 등을 거쳤다.

당시 최장수 앵커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후배 앵커인 엄기영(1989-10-09 ~ 1996-11-08, 2002-01-01 ~ 2008-02-01)이 13년 3개월을 진행하면서 이 기록을 경신했다.
1980년대 평일 뉴스데스크 영상을 찾아보면 앵커는 항상 이득렬 앵커였다. 하지만 그 위상은 철저한 어용방송으로 유지한 것이었다.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 폄훼하는 보도는 물론이고[5] 전두환을 찬양한 프로그램을 여러 번 진행했고, 결국 땡전뉴스의 상징이라는 오명을 남겼다.[6]

사실 영상 보관이 잘 안 되던 시절이라서 이 정도인 것이지, 방송자료의 제대로 된 보존이 몇 년 정도만 일찍 이루어졌어도 엄청난 흑역사 영상들이 인터넷에 널려 있었을 것이다.[7] 다만 어떻게 보면 시대가 시대인지라 방송자료 공개를 꺼리는 것일 가능성도 높다.[8]

2.2. 앵커 이후

1987년 워싱턴 지사장으로 보직 이동하여 근무했고, 1990년 2월 귀국과 동시에 MBC 보도이사로 선임되면서 임원이 됐다.

1992년 전무로 승진한 후 이듬해 강성구가 사장으로 취임하자 MBC애드컴 사장직을 거쳐 1996년 7월에는 전임 강성구 사장[9]의 사퇴로 공석이 된 MBC 사장직에 취임하여 1999년까지 한국방송협회 부회장까지 겸임했고, MBC 사장 퇴임 후에 홍두표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자 한국관광공사 사장으로 영입되면서 나머지 임기를 수행했다.

앞선 어용 언론인으로서의 삶을 보면 의외의 일로, MBC가 진보성향의 방송사가 된 것도 이득렬 사장 때부터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임 사장이던 황선필, 김영수, 최창봉, 강성구 등이 MBC 논조에 관여했다가 내부 구성원과 갈등을 많이 빚으면서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결국 중도에 사임했던 일을 교훈삼아 MBC의 논조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시기의 보도나 시사프로그램 편성과 제작에서 이전보다 자율성이 존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1998년에 이득렬이 과거의 과오가 있기 때문에 물러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이에 MBC 직원들이 원칙에 어긋난다면서 크게 반발했고 민주화 이후로 끝까지 임기를 마친 첫 번째 MBC 사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1999년 말 당시 여당이 추진하던 신당에 영입되어 2000년 1월 새천년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 지역구 출마가 유력했지만 본인이 출마를 거절했고[10], 그 해 5월 한국관광공사 사장직에서 물러나 개인 방송 프로덕션을 운영했다. 또한 2000년 10월부터는 프리랜서 자격으로 MBC 라디오 프로그램인 MBC 초대석 이득렬입니다를 진행하였다.

2.3. 사망

평소 지병인 간경변을 앓고 있었는데, 사인이 매우 기구하다. 토요일이던 2001년 2월 24일 아침에 방송 녹음을 마치고 아내와 같이 친척의 대학 합격을 축하하러 가다 오는 길에 휴게소에서 사먹은 군밤을 제대로 씹지 않고 삼키는 바람에 파편에 식도 정맥이 파열되어 급성 내출혈이 일어났고, 아내가 급히 119에 연락했지만 하필 그날 비가 와서 주말 도로 정체로 구급차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골든아워를 놓쳤다. 이후 서초구 반포동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하필 이 날은 병원장이 취임식이라 초보 인턴을 제외하면 모두 취임식장에 가 있었고, 응급처치가 늦은 바람에 결국 그날 저녁에 향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운명하기 하루 전까지도 표준FM의 라디오 프로그램 'MBC 초대석 이득렬입니다'(매일 오전 11시 10분부터 30분간 방송되었다.)를 진행하며 방송에 깊은 애착을 보였다. 사망 하루 전인 2월 23일에 녹화한 녹화분은 사후인 25일과 26일에 방송되었다.

한편 고인의 장례식은 27일 오전 9시 30분에 서울 여의도동 MBC 구사옥 앞마당(현재의 브라이튼 여의도)에서 사우장으로 치졌으며, 고인의 영구는 이날 오전 10시에 MBC 본사를 출발해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선산에 안장되었다.[11]

유족으로는 부인 김윤자와 아들 이영상[12], 딸 이효정[13]을 두고 있었다.

3. 여담

  • 김주하가 MBC에 아나운서로 입사할 때[14], 10년 이상 MBC를 먹여살릴 얼굴이라는 평가를 했다. 실제로 김주하는 뉴스데스크 진행을 시작 한지 10여 년 뒤에 MBN으로 이적했다. 어찌 보면 예언이었던 셈이다.
  • 클로징 멘트는 "오늘 뉴스데스크 여기서 전부 마치겠습니다"라는 말로 항상 클로징을 했다. CBS 이브닝 뉴스의 전설적인 앵커였던 월터 크롱카이트의 클로징 멘트인 "That's the way it was."의 오마주로 보인다.[15][16]
  • 이득렬 앵커가 진행할 때인 1980년 12월부터는 컬러 텔레비전으로 방송되기 시작했다.

4. 어록

훌륭한 앵커는 몇 세기에 한 번 태어난다. 그만큼 훌륭한 앵커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그러므로 앵커들은 훌륭한 앵커가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2010년, 뉴스데스크 40주년 특집, 백지연이 다른 역대 앵커들에게 말할 때 세상에 알려졌다.
여러 가지 아름다운, 그리고 긴 말보다는 짧은 진실이 뉴스에서는 제일이구나 하는 경험을 얻고 떠납니다.
1987년 4월 30일, 뉴스데스크 마지막 진행, 클로징 멘트.[17]
백조가 임종할 때 노래를 부른다고 그래요. Swan song이 백조의 노래인데 백조의 노래가 우리말로 해석하면 자기의 마지막 작품, 그래서 여기 방송하는 것이 나의 Swan song이 될 거야, 마지막 작품...
2000년 10월 30일 인터뷰 중에서.
여러분.. "내일부터 당장 어떻게 생활하시겠습니까?" 한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1979년 5월 11일 뉴스의 현장 에너지 전쟁 보도 특집 당시 클로징 멘트 당시 영상

5. 수상 경력

  • 서울시 문화상 (1985)
  • 은관문화훈장 (1997)
  • 한국방송대상 특별공로상, 자랑스런 한양언론인상 (2001)

6. 참고/관련 자료

  • 저서
    • 좋은 질문입니다 - 비전. 1979.
    • 머물지 않는 말 - 창원출판사. 1986.
    • 잃어버린 서울 그리운 내 고향: 이득렬 에세이 - 고려원. 1994.
  • 외부 자료
    • <MBC 가이드> 1982년 1월호(창간호) '방송에 산다: 앵커맨 이득렬'(#1, #2, #3, #4)


[1] #[2] 1944년9월 생.[3] 아들 이영상은 1973년생으로 변호사이다. 경복고등학교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사법학과(92학번)를 졸업하였으며, 1997년 제39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29기로 수료하였다. 검사로 활동하다가 대구지방검찰청 부장검사를 끝으로 2018년 9월에 퇴직하였다. 참고로 이영상의 장인이 서영제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서영제하고 이득렬은 사돈이다. 다만, 이영상은 이득렬 사후 2년 뒤인 2003년에 결혼식을 올려서 이득렬은 아들의 결혼식을 보지 못했으며, 딸 효정은 1974년생으로 당시 결혼 후 미국 유학중이었다.[4] 1981년 5월까지는 여러 앵커들과 번갈아 진행했고, 1981년 6월부터 고정진행을 맡게 된다.[5] 대표적인 보도가 광주 MBC가 왜곡보도를 하자 시민들이 불태웠는데 시민들을 폭도로 보도하였다.[6] 정부가 언론을 압박하여서 어쩔수 없이 전두환을 찬양한 보도를 진행하였다.[7] 땡전뉴스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뉴스데스크 다시보기에서 제공하는 그가 진행한 뉴스데스크 분량은 2개월도 되지 않는다. 비슷한 시기 옆 동네에서 KBS 9 뉴스(뉴스센터 9)를 진행한 최동호 前 보도본부장 시절 방송 자료 역시 많이 남아 있지 않다.[8] 실제로 뉴스 자료는 1987년 전량보존 결정 이전에도 어느 정도 보관이 된 편이었으며, 이미 2007년 KBS의 땡전뉴스 다큐멘터리에서도 KBS가 방송했던 땡전뉴스 일부가 공개되기도 했고,보면 당시 뉴스자료들을 아카이브에 공개하지 않은 게 100번 이해가 갈 정도다. MBC 아카이브에 1980~1985년의 땡전뉴스 일부가 공개되어 있다.[9] 공교롭게도 강성구 앵커는 이득렬 앵커와 같은 해인 1966년 MBC에 입사했으며 평일 뉴스데스크 후임 앵커로 발탁되었다.[10] 사실 이득렬 본인이 땡전뉴스를 비롯한 5공 시절 친정부 논조를 방송에 내보낸 대표적인 인물이었던데다가 공기업 사장 신분을 유지한 상태에서 정치권에 영입된 것을 놓고 뒷말이 무성했기 때문에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다. 결국 서울 성동구에는 임종석이 공천되어 당선되었다.[11] 고인이 어린시절 좋아했던 외갓집이 있는 동네였다고 한다.[12] 당시 대한법률구조공단에서 공익법무관으로 재직하다 2018년에 퇴직했다.[13] 당시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14] 이후 기자로 보직 변경되었다.[15] 실제로 CBS와 MBC는 협력관계에 있다. 1985~1988년 연간의 뉴스데스크 오프닝 화면이나 1990년대 중반 뉴스 스튜디오는 CBS의 그것을 카피한 것이다. 실제로 뉴스데스크 초창기에 앵커와 PD들이 CBS의 이브닝 뉴스의 영상을 공수해 와서 그것을 보고 따라 했다는 증언이 있다.[16] 혹은 당시에 이어져 오던 표현일 수도 있다. 지금은 "'모두' 마치겠습니다"가 보편화된 표현이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전부' 마치겠습니다"가 혼용되어 사용했다. 한자어 사용 빈도가 높았기 때문(全部=모두)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MBC 뉴스데스크 40주년 특집 방송에 나온 리포트는 저 클로징 멘트를 특별히 부각시킨 것으로 보아 오마주 쪽으로 해석하는 모양이다.[17] 6.29 선언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이다. 결국 이득렬은 전두환 정부의 압박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지만 저 발언을 토대로 마지막 양심은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31년 뒤 황상무 전 KBS 뉴스 9 앵커도 마지막 방송 때 비슷한 클로징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