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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

제31회 동인문학상 수상
하성란
(1999)
이문구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2000)
김훈
(2001)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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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문구(李文求)
출생1941년 5월 17일
충청남도 보령군 대천읍[1]
사망2003년 2월 25일 (향년 61세)
서울특별시 중구 인제대학교 백중앙의료원[2]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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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아내 임경애
아들 이산복, 딸 이자숙
학력대천국민학교 (졸업)
대천중학교 (졸업)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 / 전문학사)
첫 작품다갈라 불망비 (1965)
마지막 작품장평리 찔레나무 (2000)
본관한산 이씨(韓山 李氏)
명천(鳴川)

1. 개요2. 주요 작품
2.1. 장편소설2.2. 단편소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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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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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소설가.

1941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유학자였고, 아버지는 공산주의 활동에 연루되었다가 6.25 전쟁 때 형들과 함께 죽었고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졸지에 소년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3]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와 막노동으로 살아가다가, 검정고시를 본 후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4]에 입학했다. 이문구는 당시 문단의 거목이었던 소설가 김동리 밑에서 배웠는데, 김동리의 계열에 들어간 덕에 이문구는 부친의 좌익 경력에도 불구하고 스승의 강력한 비호로 문단에 어려움 없이 등단할 수 있었다. 서라벌예대 재학 중이던 1965년 잡지 "현대문학"에 단편 "다갈라 불망비"를 게재했고 1966년에는 "백결"을 게재했는데, 이 또한 김동리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김동리는 이문구의 처녀작들에 대한 논평에서 "한국 문단은 가장 독특한 스타일의 작가를 가지게 되었다"고 평했다.[5][6] 그외 당시 김동리와 함께 같이 수업을 들은 동기 박상륭도 막역했다.

이후 주로 한국의 농촌과 농민의 문제를 다룬 여러 편의 소설들을 내놓았다.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의 농촌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과 근대화의 과정에서 훼손당했던 농촌 사회의 아픈 세태를 묘사하여 변모된 현실을 비판적으로 제시하는 자전적인 작품 "관촌수필"과 오자룡 필화사건을 겪고 난 후 자본주의적 근대화가 농촌 공동체의 고유한 사회 구조와 풍속, 그리고 농민을 어떻게 소외하고 있는가를 다룬 "우리 동네" 연작[7]들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문구는 충남 지역의 방언을 사용하여 맛깔나는 소설을 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문구의 작품에서 방언 및 토속어, 비속어의 사용은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뼈대로,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주로 농민들)과 배경(주로 농촌) 및 작품의 정서(향토적 정서)를 구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8]

김동리 계열에서 소설가 생활을 시작한 탓에 문단 내 보수적인 층들과 인연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보적인 인사들과도 친숙했고 실제로 문단내 진보성향의 작가들이 모인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직접 주도해 창설하여 부이사장과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런 배경으로 문단 내의 보수와 진보적 성향의 흐름을 서로 이해하고 상호공존시키려는 노력을 한 작가로도 평가받는다. 실제로 그의 장례식에는 문단내의 보수적 성향의 인물들과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이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물론 남민전 사건으로 김동리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대립했을 때와 1988년 김동리의 문협 이사장 발언 파문 시절에는 스승 김동리의 편을 들었다가 시간이 꽤 지난 2000년에 민족문화작가회의 이사장으로 복귀한다.

2003년 2월 25일에 향년 6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2. 주요 작품

2.1. 장편소설

2.2. 단편소설

  • 김탁보전 (1968)
  • 이 풍진 세상을 (1970)
  • 암소 (1970)
  • 해벽 (1972) - 1974년 간행된 소설집의 표제작으로 '황석영의 한국명단편 101선'에 수록되기도 했다.
  • 다가오는 소리 (1972)
  • 만고강산 (1972)
  • 관촌수필 (1972 ~ 1976) - 오래 전에 나온 작품이지만, 요즘에도 시사하는 점이 큰지, 수능 최다 출제 작품이다.[9] 많은 고3들의 출제작품 경계대상으로는 상위권. 이 작품이 출제되는 해는 언어영역의 변별력이 양극단으로 나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1992년에 SBS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며, 이문구 본인이 직접 각본을 맡았다. 양동근이 출연했다.
    • '일락서산', '화무십일', '행운유수', '녹수청산', '공산토월', '관산추정', '여요주서', '월곡후야'의 단편 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 엉겅퀴 잎새 (1976)
  • 우리 동네 (1977~1981) - 우리동네 시리즈도 수능출제순위에 속한다. 2021 EBS 연계작품에 '우리 동네 이씨', 2022 EBS 연계작품에 '우리 동네 황씨'가 포함된다.
    • '우리 동네 김씨', '우리 동네 황씨', '우리 동네 이씨', '우리 동네 최씨', '우리 동네 정씨', '우리 동네 유씨', '우리 동네 강씨', '우리 동네 장씨', '우리 동네 조씨'의 단편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 유자소전 (1991) - 실존 인물 '유재필' 의 일생을 기려 짓은 전 형태의 단편소설. 고등학교 문학계열 교과서에 자주 실린다.
  •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2000) - 생전에 마지막으로 출간된 소설집으로, '장곡리 고욤나무' 등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으로 예순 살의 나이에 동인문학상을 수상해 화제가 되었다.

3. 기타

소설가 김승옥은 이문구의 장례식에 참석하려다 운전석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그 결과 목숨은 건졌지만 자신의 언어 능력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

영화감독 박찬욱이 여러 인터뷰에서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으로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꼽았다.

별세 후 전집이 출간 되었으나 현재는 대표작 몇 개를 빼고 대부분 절판되었다. 이 사실에 김훈 작가는 꽤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1]충청남도 보령시 대천동[2] 사인은 위암.[3] 이문구의 형은 그 악명높은 서북청년회에게 가마니로 싸져서 바다에 수장되었다.[4] 수많은 문인들과 배우들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대학이다. 1972년 재단의 재정난으로 중앙대학교에 인수되어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으로 재편되었다.[5] 실제로 이문구의 독특한 문체에 대해 김동리는 이문구의 대학생 시절에 이문구의 문체에 대해 논하라는 시험 문제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6] 오죽했으면 1973년 김동리의 한국문인협회 회장 선거자금 마련을 위해 살던 아파트까지 팔았을 정도. 후일 김동리가 대놓고 '너 더는 못 막아준다'며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지만 이문구는 정말 아버지 같은 스승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다.[7] 70년대 말경 문단 내의 정치싸움에 지쳤고 도시 생활에 질려 시골이 그러워진 이문구가 주변 문인들의 권유로 향남읍으로 귀농해서 쓴 작품들이다.[8] 이문구 소설어 사전이 출간되기도 했다.[9] 수능에 복수 출제된 작품은 역대 네 개이다. 최인훈광장(1994학년도 1차/2006학년도), 염상섭삼대(1994학년도 1차/1999년), 박태원천변풍경(2013학년도/2019학년도)가 두 번 출제되었으며, 이문구의 관촌수필이 2003학년도, 2010학년, /2018학년도 이렇게 세 번 출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