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이수광(李睟光) |
출생 | 1563년 3월 24일 조선 (음력 2월 20일) |
사망 | 1629년 1월 19일 조선 (향년 66세) (음력 1628년 12월 26일) |
본관 | 전주 이씨 |
자 | 지봉(芝峯) |
호 | 문간(文簡) |
부모 | 부친 - 이희검(李希儉, 1516 ~ 1579)[1] 모친 - 류오(柳塢)의 딸 문화 류씨[2] |
형제자매 | 2남 3녀 중 막내[3] 이복 형 - 이겸광(李謙光, 1539 ~ ?)[4] 누나 - 이숙례(李淑禮, 1554 ~ ?) 누나 - 이숙란(李淑蘭, 1558 ~ ?) 누나 - 이숙희(李淑姬, 1560 ~ ?) |
배우자 | 김대섭(金大渉)의 딸 안동 김씨 |
자녀 | 슬하 2남 장남 - 이성구(李聖求, 1584 ~ 1644)[5] 차남 - 이민구(李敏求, 1589 ~ 1670) |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이다.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자이며, 그 중에서도 남인 실학파의 토대가 된 인물이다. 다만 이수광 본인은 당색에 치우치지 않은 관계로 인조반정 이후에도 당상관으로서 중용되어 서인 계열의 견제를 받지 않았다.2. 생애
태종의 서자 경녕군 이비의 5대손으로 1563년 조선의 수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585년 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를 지냈다. 관직에 있는 동안 임진왜란, 정유재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 다양한 난을 겪었다. 명나라에도 3번이나 파견되었다. 이조판서로 재직하던 중 1628년 사망하였으며,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이수광은 뛰어난 외교력과 문장 능력을 인정받아 28세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35세 때 진위사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며, 49세 때인 1611년에도 중국을 다녀왔다. 당시의 세계적인 선진국 명나라에서 그 문화를 보고 배우는 한편, 세 차례의 사행 기간 중에 베트남, 시암, 류큐 왕국의 사신들과 교류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실제로 중국에서 베트남 사신 풍극관과 교류하여 풍극관이 베트남에 이수광의 시를 소개해 유행하였다고 한다. 이런 다양한 경험과 풍부한 지식을 토대로 1614년에 전근대 동양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유서 지봉유설을 써서 오늘날까지 명성이 높다.
이수광에 대한 인조실록의 졸기(卒記)에는 "그가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안남, 유구, 섬라의 사신들이 그의 시문을 구해보고 그 시를 자기 나라에 유포시키려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후대 조선 사신들에게 이들 지역의 사신이 "우리나라에서 조선 사람이라면 이수광이라는 사람이 유명한데 그 사람을 아느냐?"면서 문의한 적이 있을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이 있었다.
3. 평가
그의 사상은 영의정에까지 오른 장남 이성구[6]와 성리학자 겸 실학자였던 차남 이민구[7], 허목을 통해 윤휴(이민구의 문인이다), 유형원, 이서우, 이익, 채제공, 정약용 등에게로 이어졌고 남인 실학파의 근간을 형성하였다.지봉유설을 통해 당대 중국에서 유통되던 다양한 학문 서적을 조선에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중에선 천주교 교리서인 천주실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