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
이름 | 이진호 |
생년월일 | 1966년([age(1966-12-31)]~[age(1966-01-01)]세)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
신체 | 170cm[2] |
학력 | 동국대학교 전산원 |
가족 | 아내 정 모씨, 슬하 2녀(2011년 사망) |
직업 | 전직 컴퓨터 엔지니어(현재 무직)[3] |
범죄유형 | 살인 |
[clearfix]
1. 개요
일산 여중생 자매 백골 시신 사건의 가해자. 범행 당시 45세였다.2. 상세
아내 정 씨(당시 36세)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학습지 판매원으로 일했는데 팀장이 되기 위해 빚을 내 가면서 무리하게 학습지 판매를 강행[4]하다가 2010년 9월 이런 방식을 회사에 들켜 징계[5]를 받게 되었다. 결국 1억 3,000만 원이나 되는 빚을 견디다 못 한 아내[6]는 그[7]에게 동반자살을 권유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다.설상가상으로 그의 가족이 얹혀 살던 그의 누나가 살던 집도 월세가 밀려 어려운 처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3. 범행
2011년 2월 14일에 가족여행을 명목으로 딸들을 데리고 나와 포천시의 민박집에서 숙박한 그와 아내 정 씨는 자녀가 잠들자 번개탄을 피워 동반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과정은 다음과 같다.- 그는 가족들과 집을 나선 후 오후 5시쯤에 포천시 이동면 백운계곡에 위치한 어떤 민박집의 3호실에 투숙하게 되는데 두 딸을 일찍 재우고 난 뒤에 이진호는 밤새도록 아내를 설득했으나 아내는 자살 의지가 확고했으며 설득에 실패한 그는 차라리 아내를 따라 죽겠다며 체념했다.
- 다음 날 오후 1시 20분쯤 아는 사람으로부터 21만 원을 입금받았고 근처 편의점에서 유서를 쓰려고 편지지와 편지봉투와 볼펜 한 자루를 사서 민박집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 두 딸은 영문도 모른 채 방 안에서 놀고 있었는데 주차장에 세워 놓은 대우 누비라 차량 안에서 그와 아내는 유서를 써내려갔다.
- 아내 정 씨의 유서는 다음과 같았다.이런 부모가 또 있을까요?사는 것 보다 죽는 게 모든 사람에게 더 큰 피해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 그가 매형에게 쓴 유서는 다음과 같았다.아이들에게 미안합니다. 남아서 천덕꾸러기가 될 것 같아 저희가 데려갑니다.불쌍한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합니다.어제도 결정을 해서 행동으로 옮기려 했으나 아이들의 눈이 밟혀 못했습니다.
- 오후 5시 즈음에 그는 이동우체국에서 우표를 사서 두 장의 유서를 우체통에 넣고 밤 11시쯤에 다시 투숙하였고 자던 중에 살며시 일어나서 민박집의 주방 가스레인지와 연결되어 있는 LPG 가스통의 호스를 칼로 반쯤 자른 뒤에 밖으로 나가 고기를 구워 먹겠다는 구실로 민박집 주인으로부터 받은 번개탄 2장에 불을 붙이고 주방 안에 있던 냄비에 넣었다. 이때 정 씨가 말 없이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 하지만 막내 딸이 자다가 일어나서 화장실에 가던 도중에 번개탄이 들어있는 냄비를 밟고 넘어지자 우당탕 하는 소리에 놀라서 잠이 깨 번개탄이 건들어짐을 눈치 챈 그는 환기를 시킨답시고 창문을 열고 번개탄을 창 밖으로 던졌다.
- 그 다음날 오전 11시에 민박집을 나온 그의 가족은 일동면 화대리 부근 제일유황온천 부근에 있는 식당에서 아점을 먹고 주차장으로 나온 정 씨는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는 죽기로 했으니 너희들은 보육원에 보내주겠다”며 처음으로 죽음을 암시했다. 큰 딸은 울면서 따라 죽겠다고 했고 작은 딸은 울기만 했다.
- 오후 6시 쯤에 그는 지인에게 빌린 돈 15만 원을 근처 농협에서 찾아 산정호숫가에 있는 한 숙박업소로 이동했다. 길가에 있는 마트에서 막걸리와 소주를 각각 2병 사고 번개탄을 3장 구입했고 2월 16일 새벽 2시 쯤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까스로 다독여 차에 태우고 호숫가 공터에 차를 세운 후 불붙은 번개탄 3장을 냄비에 담아 차에 같이 타고 있던 정 씨의 다리 밑에 놓았는데 잠을 청한 지 2시간 쯤 지난 새벽 4시에 두 딸이 괴로워 하면서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하자 딸들이 있는 뒷자리로 넘어가 작은 딸부터 목을 조르고 정 씨는 발버둥치는 아이들 다리를 잡았다. 결국 두 딸은 경부압박질식으로 사망했다.
- 그와 아내는 깨어난 두 딸을 목 졸라 숨지게 한 후, 자신들도 죽을 마음으로 차를 몰아 여우고개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그 충격으로 자매의 시신이 차 밖으로 튕겨 나가고 말았지만 습관적으로 안전벨트를 맨 채 절벽 아래로 차량을 몰았고 절벽 20m 지점에서 차량이 나무에 걸려 충격이 완화되는 바람에 세 번째 자살시도도 실패했다. 이렇게까지 일이 꼬이자 그는 돌로 아내의 머리와 자신의 머리를 순차적으로 내려쳤지만 죽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러자 그와 아내는 영하의 날씨에 저체온증으로 동사하기 위해 옷을 벗기까지 했으나 역시 죽진 않았고 지나가던 사람에 의해 발견되어 기절한 후 깨어났다.
4. 사건 이후
다섯 번에 걸친 자살 시도가 전부 무위에 그치자 그와 아내는 그때서야 생존을 선택했다. 그와 아내는 지인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 동상과 머리의 상처를 치료한 후 검거 전까지 2년 동안 진천[11], 강릉, 밀양, 부산 등에서 일용직 근로 생활을 하며 숨어지내는 삶을 살다가 부산 기장에서 검거되었다. 어떻게 검거되었냐면 당시 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에 거주하던 A(당시 52세)씨가 업무차 인근 은행을 찾았다가 은행 벽에 붙어 있던 중요지명 피의자 종합수배 전단에 그가 있음을 보고[12] 자신의 집 근처 농장에서 그가 일하던 걸 목격한 기억을 떠올려 경찰에 신고했다.[13]징역 10년을 선고[14]받아 복역한 후 2023년 4월 9일에 만기출소하였다.
[1] 2013년 상반기 중요지명 피의자 종합수배 전단에 등록된 이진호의 사진이다.[2] 2013년 상반기 중요지명 피의자 종합수배 전단에
신장 170cm, 보통 체격으로 기재되었다.[3] 후술할 내용대로 용산전자상가에서 컴퓨터 사업을 하다가 사업에 실패하였다.[4] 빌린 돈으로 교재를 사서 인터넷에 염가로 파는 방식[5] 팀장 직위 박탈로 평사원 직위로 강등되었다.[6] 큰딸의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교복을 살 돈마저 없었다.[7] 당시 집 전세금을 털어 아는 사람들을 모아 용산전자상가에서 컴퓨터 관련 사업을 했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스티로폼 공장 기능공으로 일하던 상황이었다.[8] 어쩌면 여기에서 범행을 저지를 것이 암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9] 당시 그의 용산전자상가 컴퓨터 사업과 아내 정 씨의 학습지 판매원 일로 서로 돈을 벌어 잘 살아 보려고 했던 것을 말한다.[10] 그의 컴퓨터 사업 실패와 아내 정 씨의 염가판매 행위에 의한 징계로 생계가 막막해짐을 말한다.[11] 진천에서는 오이 농장에서 일했다.[12] 2013년 상반기 고유번호 1번. 다만, 공범인 아내 정씨는 등록되지 않았다.[13] 거동수상자로 신고되었다는 말도 있다.[14] 항소하였으나 항소심도 기각되었다.
신장 170cm, 보통 체격으로 기재되었다.[3] 후술할 내용대로 용산전자상가에서 컴퓨터 사업을 하다가 사업에 실패하였다.[4] 빌린 돈으로 교재를 사서 인터넷에 염가로 파는 방식[5] 팀장 직위 박탈로 평사원 직위로 강등되었다.[6] 큰딸의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교복을 살 돈마저 없었다.[7] 당시 집 전세금을 털어 아는 사람들을 모아 용산전자상가에서 컴퓨터 관련 사업을 했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스티로폼 공장 기능공으로 일하던 상황이었다.[8] 어쩌면 여기에서 범행을 저지를 것이 암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9] 당시 그의 용산전자상가 컴퓨터 사업과 아내 정 씨의 학습지 판매원 일로 서로 돈을 벌어 잘 살아 보려고 했던 것을 말한다.[10] 그의 컴퓨터 사업 실패와 아내 정 씨의 염가판매 행위에 의한 징계로 생계가 막막해짐을 말한다.[11] 진천에서는 오이 농장에서 일했다.[12] 2013년 상반기 고유번호 1번. 다만, 공범인 아내 정씨는 등록되지 않았다.[13] 거동수상자로 신고되었다는 말도 있다.[14] 항소하였으나 항소심도 기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