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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764><colcolor=#fff> 출생 | 1900년 8월 7일 |
충청남도 보령군 주산면 증산리 | |
사망 | 1979년 4월 8일 (향년 78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 |
호 | 추강(秋江) |
본관 | 전주 이씨 |
재임기간 | 제2대 공보처장 |
1949년 8월 4일 ~ 1950년 8월 14일 | |
제4대 공보처장 | |
1950년 11월 26일 ~ 1953년 1월 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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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관료2. 생애
2.1. 해방 이전
1900년 8월 7일 충청남도 보령군 주산면 증산리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주산 옥성학교를 졸업한 후 1915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 1919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만세운동을 하다가 학교에서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17일 다시한번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1919년 5월 중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이어갔으며 1920년 미국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신문학, 철학을 전공했다. 1934년 귀국하였고 1938년 흥업구락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제국에 의해 고초를 겪어 1943년 중국으로 갔다.
2.2. 해방 이후
1946년경 미군정에 의해 공보부차장에 임명됐으며 얼마안가 공보부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인 1949년 8월 4일 김동성의 뒤를 이어 공보처장에 임명되었다. 1949년 11월 19일 국회에 출석하여 도자기 사건[1]을 보고했다. 1950년 3월 2일 다시 한번 출석하여 당시 국회의원들이 추진하고 있던 내각제 개헌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1950년 공보처장직을 사임했다.1950년 11월 공보처장직을 사임한지 3개월만에 다시 임명되어 활동했다. 1951년 11월 10일 국회에 출석하여 전시상황 국민들에게 빠른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마을당 라디오 설치, 잡지 및 사진 전시회 등의 정책을 설명했고, 외국과의 교류로 6.25 전쟁을 유리하게 만들자고 말했다. 이후에도 몇사례 계속해서 국회의원들에게 전시상황의 공보활동을 설명했다.
이후 1953년 공보처장을 사임하고 1979년 4월 8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망했다.
[1] 1949년 당시 국회의원들이 도자기 업자들과 결탁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