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2e008b><colcolor=#fff> 前 삼풍백화점 사장 이한상 李漢相|Lee Han-sang | |
출생 | 1953년 9월 10일 ([age(1953-09-10)]세) |
경기도 양주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전의 이씨[1] |
직업 | 前 기업인, 現 선교사 |
학력 | 연세대학교 (학사)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 (목회학 / 석사) |
부모 | 아버지 이준, 어머니 조현옥(1926~?) |
형제[2] | 형 이한웅(1950~1977) 남동생 이한창(1957~) 여동생 이경희(1959~) |
약력 | 삼풍건설산업 대표이사 사장 삼풍백화점 대표이사 사장 |
종교 | 개신교 (침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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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출신 선교사.2. 생애
1953년 9월 10일 삼풍그룹 회장 이준[3]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age(1953-09-10)]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경기도 양주군 출신이며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다녔다고는 하나 냉담자였다는 것 말고는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게 별로 없다. 1972년에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으며 형이자 그룹의 후계자로 유력했던 형 이한웅[4]이 중동에서 근무하다 사고로 객사해서 이 때부터 그룹의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다. 다른 회사에서 일하다가 1989년 12월 1일 삼풍백화점이 지어지자 아버지의 회사에 들어가 회사의 사장을 지냈다. 친동생 이한창은 전무로 지냈다.이렇게만 놓고 보면 여느 상류층 집안 아들의 평범한 일생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2.1. 참사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건물에 이상이 있음을 오전부터 보고 받았지만 이한상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후 3시 쯤 돼서야 아버지인 이준 회장 주재로 건물 이상에 대한 긴급 회의를 열었지만 보수 작업은 하되 영업은 계속하자는 결과가 나왔다. 결국 오후 5시 40분, 붕괴가 본격화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이준, 이한상 일당은 대피 방송도 안 한 채 먼저 백화점을 빠져나왔다고 알려졌지만 이건 사실이 아니다. 당시 청문회 영상이나 직원 증언에서 이한상과 임원진은 참사 현장이 아닌 곳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고 참사 건물에 없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5] 이는 후술할 KBS 모던코리아 ‘시대유감, 삼풍’에서 한국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외면한 채 참사의 비극을 특정 개인에게 전가하는 한국 언론과 사회 분위기로 재조명되었다. 결국 17분 뒤인 5시 57분, 백화점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애초부터 건물 자체를 부실하게 지은 건 물론 관리도 허술하게 했고 당일 조짐이 있음을 분명히 알았음에도 지들끼리 빠져나왔다고 오보되자 시민들은 그들에게 분노했다. 그렇게 이한상은 아버지 이준과 삼풍백화점 경영진, 뇌물을 받아서 건축 허가를 낸 일부 공무원 등과 같이 구속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2세였다.[6]
2.2. 출소 이후
2002년 10월에 출소했다. 2000년 어머니이자 이준의 아내 조현옥이 대한민국 법무부에 가석방을 탄원했지만 시민 단체 등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결국 이준은 남은 형량을 모두 채우고 2003년 4월에 만기 출소했다.출소 이후 자택인 삼풍아파트에서 칩거하다가 목사인 지인을 통해 선교사가 되기로 하고 몽골로 출국했다. 출소 1년 뒤인 2003년 10월 4일, 아버지 이준이 사망할 당시 상주[7]임에도 빈소를 지키지 못했고 대신 이한상의 동생인 이한창이 상주를 맡았다. 이한상 본인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이미 출국 전부터 오늘내일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출소 이후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를 취득했다.
사고 이전과 석방 후에도 언론의 노출을 가급적 피해 왔지만[8] 2015년 1월 CBS에 출연해 그동안의 몽골 선교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2020년 2월 KBS 다큐멘터리 '모던 코리아'에 출연해 사고 당시를 회고했다.
당시 백화점의 책임자였지만 붕괴 사실을 알면서도 미리 빠져나갔다는 이유로 현재까지도 비난이 일고 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건물의 균열을 발견하고 이한상 사장을 비롯한 모든 임원진이 붕괴를 예견하지 못한 채 붕괴 시점까지도 백화점 건물 안에 모여 건물 보수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었다. 다만 무너진 A동 건물이 아닌 반대편 B동 건물에 있었기에 임원진이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만일 당시 보수 공사 회의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한상 사장을 포함해 많은 임원도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이한상 사장은 붕괴가 일어난 뒤 사고 현장에서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다가 그대로 구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아래의 KBS <시대유감, 삼풍> 영상을 보면 잘 설명되어 있다.
이한상 사장은 인터뷰에 응하면서 "어떤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 분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하며 반성하는 태도를 보였고 그 영상이 유가족 대표에게 전달되었는데 유가족 대표는 "내가 만약 백화점의 경영자였다면 어땠을까, 우리 모두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위 다큐멘터리에 나온 것처럼 이한상은 2020년 기준으로 러시아에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현재는 러시아에서 선교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한상이 활동하는 교회의 선교 소식을 확인해 보면 2019년을 전후해서 러시아로 부인과 같이 간 것으로 보이며, 거주하는 곳은 연해주의 우수리스크이다. 또한 2020년 11월 소식에 의하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도 감염되어 고생했던 것으로 보인다. 2021년 기준으로 그의 소속 교파는 침례회이며 성서침례친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3. 비판
삼풍백화점은 아버지 이준 회장과 경영진, 뇌물 수수 후 불법으로 건축 허가를 내 준 공무원들이 부실하게 지었으며 붕괴 당일 이한상 당시 사장도 붕괴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처를 제대로 안 해서 이런 끔찍한 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아버지의 개차반스런 인간성으로 인해 잘 부각이 안 돼서 그렇지 이쪽도 아버지급으로 엄청난 개차반이었다. 붕괴 즈음에는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져서 이한상이 사실상 경영을 맡았는데 독선적인 경영으로 부하 직원들과 갈등을 빚었고 동생인 이한창(이준의 3남)과도 경영 문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한다.[9]여러 혐의를 받고 구속되었지만 고난, 영적 전쟁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되었다. 한 매체는 <2002년 10월 출소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삼풍 사고가 영적인 전쟁의 한 사건"이라면서 "저와 함께 고난을 받으신 많은 분들의 고난과 헌신이 귀하게 쓰여 하나님 이루시는 일에 진보가 있다면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진정어린 반성과 사과가 없는 그의 넋두리는 악마의 주술과도 같았다.>고 덧붙였다.#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이한상 사장의 형수 추경영도 부상을 당했는데 거기에 많은 논란이 겹치다 보니 고인드립과 패드립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10]
[1] 대사성공파 형조정랑공파 30세 호(鎬)○ 항렬이나 항렬을 쓰지 않았다. 족보명 이상호(李祥鎬).(족보)[2] 형제끼리는 한(漢)○을 돌림자로 썼다.[3] 1922년 ~ 2003년[4] 李漢雄, 1950년 ~ 1977년[5] 삼풍백화점은 A동과 B동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A동은 백화점으로, B동은 삼풍건설산업의 본사와 증권사 대리점, 문화센터 등이 입주해 있었다. 삼풍백화점이 참사 당시에 건물 전체가 죄다 주저앉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무너진 것은 백화점으로 쓰이던 A동만 무너졌고 B동은 멀쩡하게 살아 있어서 이준 회장과 이한상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 역시 B동에 위치한 삼풍건설산업 본사 사무실에서 휴/폐점 여부를 두고 회의 중이었다고 한다.[6] 왼쪽에서 두 번째에 있는 인물로, 사진에서 봤다시피 42살인데도 불구하고 앞머리가 다 까진 대머리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유전인 듯. 참고로 왼쪽에 있는 사람은 시설이사 이영길,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건축구조기술사 이학수다. 맨 끝에 있는 사람은 긴 말 안 해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7] 상주는 원래 장남이 맡기에 자연스레 이한상의 친형이자 장자인 이한웅이 맡아야 했지만 이한웅은 1977년에 세상을 떠나고 없어서 차남인 이한상이 대신 상주가 된 상태였다.[8] 다만 언론의 노출을 아주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2006년과 2011년 국민일보와 인터뷰는 한 적이 있다.2006년 인터뷰 2011년 인터뷰[9] 이한창이 아버지와 형에게 제발 휴업을 하던지 땜질식으로라도 보수 공사라도 하자고 읍소했는데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고 한다.[10] 다만 재판에 가서는 이준 회장과 이한상 사장이 이 일을 언급하며 할 말 없다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준 회장의 경우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서 "내 며느리도..."라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