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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303호 304호 305호
수문장계회도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대사례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304호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소재지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노원구 화랑로 574
(공릉동 77-1,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분류 유물 / 일반회화 / 기록화 / 계회도
수량 / 면적 1축
지정연도 2010년 6월 17일
제작시기 조선 후기
파일: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jpg
<colbgcolor=#C00D45>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1. 개요2. 내용3. 외부 링크4.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3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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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 1588년(선조 21)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였던 이일(李鎰)이 여진족의 시전 부락을 소탕하고 그 포로를 심문하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 현재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304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파일: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2.jpg
파일: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3.jpg
<colbgcolor=#C00D45>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의 일부를 확대한 모습[1]
조선 중기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장양공(壯襄公) 이일(李鎰, 1538~1601)이 함경도 지역을 침략하던 여진족 시전부락을 정벌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이일의 자손인 경상좌수사 이견(李汧, 1618~?)이 조부의 공훈을 기념하고 후세에 알리고자 화원에게 조부의 증언을 토대로 그림을 제작하여 가문에 보관토록 한 것이다. 다만 현재는 당시 그린 원본이 소실되었고 현존하는 것은 1849년(헌종 15)에 8세손 이재관(李在寬)이 낡은 그림을 원본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1500년대 후반 여진족 시전부락 일대의 넓은 지역을 부감시(俯瞰視)로 조망하고, 장양공의 부대와 여진족 사이에 벌어진 전투 상황을 화면 가득 담았다. 지형도식 묘법으로 지형지세의 틀을 잡았는데, 산봉우리는 먹선으로 윤곽을 그린 다음 안쪽에 호초점(胡椒點)을 찍어 질감을 나타냈다. 또 아래쪽 근경의 산봉과 능선에 화보풍(畵譜風) 수목들을 배치해 상부의 원경과 구별하였다.
파일: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4.png
<colbgcolor=#C00D45>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의 일부를 확대해서 본 조선시대 기병
질서 정연하게 도열한 16세기 조선시대 기병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파진대적도(擺陣對賊圖)〉와 함께 임진왜란 전후 조선군에 나타난 전술 변화의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료로, 과거 기병 위주의 편제와 전술체계를 가졌던 조선군이 임진왜란 이후 조총 제작 등에 따라 급속히 보병 위주의 편제와 전술 체계로 재편된 모습을 잘 보여준다.〈역사스페셜〉 : 17세기 조선을 뒤흔든 일본행 무기 밀매 사건

3. 외부 링크

4.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제304호

조선 중기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장양공(壯襄公) 이일(李鎰, 1538~1601)이 함경도 지역을 침략하던 여진족 시전부락을 정벌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라고 쓴 전서체의 제목과 그림, 좌목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계축 형식이다. 맨 아랫단 좌목의 말미에는 8세손 1849년 윤하(閏夏) 일자의 이재관(李在寬) 글이 있어 여진족 시전 부락을 토벌하게 된 경위와 그림의 제작 경위를 알 수 있다.

제목과 그림, 좌목을 붉은 선으로 구획하고 좌목에도 붉은 선으로 인찰하였다. 좌목에는 대장(大將)인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과 그 휘하의 조전장(助戰將) 서득운(徐得運), 종사관(從事官) 이용순(李用淳), 승의랑(承議郞) 심극명(沈克明), 심약선교랑(審藥宣敎郞) 이혜정(李蕙汀), 조전장 7명의 이름이 쓰여 있다. 이어 선봉장(先鋒將)인 고령진(高嶺鎭) 병마첨절제사 유극량(劉克良)을 포함한 22명의 좌위(左衛) 소속 군병, 선봉장 함경북도 조방장(助防將) 李薦(李薦)을 포함한 24명의 우위(右衛) 소속의 군병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재관에 의하면 원래는 장양공 이일의 손자 경상좌수사 이견(李汧, 1618~?)이 조부의 공훈을 기념하고 후세에 알리고자 그림을 그려 종손(宗孫)과 지손(支孫)의 집안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남은 것이 한 건 밖에 없게 되자 1849년에 다시 신본(新本) 3건을 만들어 예전에 가장(家藏)했던 대로 보관한다는 내용이다. 전형적인 계축 형식이지만 좌목의 인물들이 공유하였던 결계(結契)의 기념화가 아니라 집안 조상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집안 차원의 기념화로 제작된 점이 주목된다.

좌목 말미에 글을 쓴 이재관이 조선후기 화원(畵員)인 소당(小塘) 이재관(李在寬, 1783~1837)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림의 작자가 이재관인지 아닌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 그림은 당시의 전투 상황이 잘 표현된 우수한 작품으로 부감시에 의해 여진족 시전부락 일대의 지세(地勢)가 잘 드러나 있고, 전투하는 군사들과 오랑캐들의 모습도 다양한 자세와 움직임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산은 먹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작은 점을 골고루 찍었으며 나무에서는 화보풍의 남종화풍이 엿보인다. 채색은 적색, 황색, 갈색, 엷은 녹색 위주로 담채되었다.

이와 같이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는 전형적인 계축 형식을 지녔지만 결계(結契)의 기록물이 아니라 조상의 공훈을 기리기 위한 집안 차원의 기념화로 제작된 점, 전쟁 장면을 내용으로 한 점, 무인(武人) 집안에서 주관한 점 등에서 희귀성을 갖고 있고, 이모된 경위가 작품에 확실하게 기록되어 기록화로서의 가치가 인정되고 작품의 수준도 우수하다.

[1] 사진출처 : 《주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