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08 15:55:10

장이석(정치인)

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5대 대통령 선거 후보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신흥당 장이석
2 자유민주당 송요찬 사퇴
3 민주공화당 박정희 당선
4 추풍회 오재영
5 민정당 윤보선
6 국민의당 허정 사퇴
7 정민회 변영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
신흥당 총재
장이석
張履奭
파일:장이석.png
<colbgcolor=#08508a><colcolor=#fff> 출생 1903년?[1]
사망 몰년 미상
학력 보성전문학교
(現 고려대학교)
새사람 나왔다!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구호.[2]
파일:5대대선 장이석.jpg
제5대 대통령 선거 선거벽보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인물로, 역대 대선후보들 중 가장 미스테리한 행적을 보인 인물이다.

2. 생애

정치 활동 이외에는 생애 초년기와 말년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 집도 직업도 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도를 닦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문서는 대다수의 출처를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의존하고 있다.

1963년 9월 15일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충청남도 공주시 출신에 숭덕학교 졸업, 보성전문학교 졸업[3]이라고 한다.# 그러나 9월 16일에 나온 동아일보에서는 평안북도 영변군 태생이라고 한다. 8.15 광복 직전 독서회 사건에 투옥되었다고도 한다.#

1931년 3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6월 학교장으로 치러진 김해합성학교 설립자 허발의 장례식에서 50명의 위원 중 하나로 참석했다고 한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의 동대문구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29일 국가보안법 문제로 불구속송청되었다.# 사유는 과거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선전부원으로 활동한 혐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계룡산 산신과 정감록의 계시를 받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주장했지만 최종적으로 등록하지는 않았다.#[4][5]

이후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흥당의 후보로 9월 13일 최종 등록하였다. 당시 그는 신흥당의 대표였고 신흥당은 전국 45개 지구당을 가지고 있었다.#

1963년 9월 15일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선거 구호는 '새사람 나왔다'였고 도의민주주의를 내세웠다. 장이석 본인은 '집 한칸 없이 떠돌아다닌 사람'이라고 소개했으며 수행원은 '도를 많이 닦은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이력란에는 경력도 없었고 3대~4대 대선 출마가 유일한 경력이었는데 본인 주장에 따르면 3대 대선, 4대 대선에 출마하려 했으나 자유당의 방해로 등록하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주요 공약은 당시 기준으로 파격적인 것들이었는데 민주도의의 정신을 총동원해 민주도의국가를 세운다는 것, 행정의 부패를 막기 위해 공무원의 처벌에 대한 특별법을 만든다는 것, 헌법을 개정해 무소속 입후보를 허용하고 정당조항을 없앤다는 것 등이었다.[6] 그 외 국민보호법, 국민보건봉사제도, 고아원과 양로원의 국영화 또는 공영화, 주택 국영화 등의 사회 정책들이 있었다. 그러나 정책의 근거나 자금은 마련하지 못했다고 한다. # 9월 15일 밤 기호추첨에서 기호 1번을 배정받았다.[7] 9월 16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당시 나이는 60세이고, 입후보 동기는 군정종식에 있다고 했다. 다른 후보들은 관직을 살아먹은 때가 묻었다면서 야권 단일화를 매우 반대했으며, 일본에서 법대를 중퇴한 이유는 배일사상 때문이라고 했다. 이후 중국을 방랑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것은 아니고 친일거두(...)인 왕자오밍(왕징웨이), 후한민과 교류를 했다고 한다. 종교는 무신앙(무종교)이되 각 종교를 총망라해서 이해하고 있었다. 취미는 광대무변한 태평양상에서 좋은 배를 타고 세계의 정치가들과 정담을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9월 16일 동아일보 인터뷰에 따르면 어디까지가 설교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가려듣기 힘들다는데, 규슈제국대학(당시 표기로는 '구주제대') 중퇴를 했고, "방랑시인 김삿갓"[8]이라는 노래도 본인을 두고 만든 노래라며 본인을 '장삿갓'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석가, 공자, 예수의 3성(三聖)과 나폴레옹, 카이젤,[9] 히틀러??의 3영(三英)을 가진 지도자가 나와야 해서 끼니조차 힘든 당원들이 애를 쓴다고 했다.[10] 직업을 가져본 적도 없고, 평생 돈 한푼을 주머니에 넣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한편 숙명여중(숙명여자중학교) 28회 졸업생에 숙전(숙명여자전문학교, 현 숙명여자대학교) 1회 졸업생이라는 아내인 박순옥 여사는 퍼스트레이디(당시 표기로 퍼스트 레디)가 된다고 고자세 취하는 건 꼴불견이라고도 밝혔다.#

그런데 9월 18일에 구주제대의 동창회장인 이병용 변호사가 구주제대를 중퇴했다는 장이석 후보의 학력 주장은 가짜라고 폭로하였다. 당시 구주제대에는 법과가 없고 법문학부만 있었으며 동창회 명단에도 없고, 보전(보성전문학교)을 거쳐 구주제대를 나온 최호진은 장이석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김영천 차장검사는 입후보결격사유가 아니며 당선 후 벌금 1만원 이상의 유죄판결을 받으면 당선무효라고 하였다.# 장이석 후보는 등록서류에 보전 졸업을 최종학력으로 썼으나 벽보원고에는 구주제대 중퇴를 더 추가했고, 이 벽보원고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하면 다시는 수정할 수 없었다.# 또 9월 21일 숙대 동창회에서는 아내 박순옥 여사가 숙전 1회 졸업생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9월 22일 조선일보 기사에서 신흥당 선거본부는 선거전략의 산실이라기보다 20세기 신화의 산실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는데, 흔한 전화 한대가 없고,뭐라고... 전화가 없다고? 한정수 선거사무장은 "보십시오 우리는 아무것도 없읍니다. 선거전략도 별게 없어요. 그러나 모두가 새사람들 뿐입니다. 그저 1만3천명의 전국당원이 하나하나 총알이 되어 도의민주주의를 선전하여 표를 얻는 것만이 우리가 짜고있는 전략이지요" 라며 돈 때문에 기동력이 전혀 없다고 아이디어(?)를 말하고 있다고 한다.#
9월 25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는, 동지를 구하기 위해 해방 후 17년 동안 안 다녀본 고을이 없다고 했다. 계룡산에서 도 닦았다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그런 케케묵은 사상에 젖지 않았다고 했고 세 성인인 석가 공자 예수, 세 영웅인 나폴레옹 카이젤 히틀러를 다시 언급하면서 후진국에서는 3성3걸의 조건을 모두 갖추어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게 신념이라고 했다. 또 정치는 형식과 경험이 아니라 인격과 경륜과 웅변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고, 세계약소민족자주연맹을 만들어서 미국의 동의와 유엔의 권위아래 이 연맹을 만들면 공산위성국가들이 다 들어오고 한국, 독일, 월남(베트남)은 통일된다고도 말했다(...)#

10월 1일 선거운동을 시작하였는데, 대전역전광장에서 약 3천명의 청중들에게 도의민주주의로서만 국토를 통일할 수 있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미국뿐만 아니라 자유우방 어느 나라와도 손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또 위 3성3걸에 해당하는 철인, 영웅을 합친 것과 같은 사람이어야 우리나라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자기는 예언가는 아니나 오래전부터 우리나라가 오늘과 같은 혼란속에 빠질 것을 알았다고 했다.# 5일부터 14일까지 2차지방유설(유세)을 계획했는데,(5일=전주, 6일=광주, 7일=목포, 9일=서울, 10일=부산, 11일=마산, 12일=대구, 13일=춘천, 14일=안동)# 6일 광주에서 장이석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공산위성국가를 모조리 UN총회에 가입시켜 자동적으로 남북통일을 이루겠다고 했고, 히틀러를 비롯한 고금위인 세사람을 혼합한 인물이 오늘의 한국지도자로서 최적이라고 단정하여 청중을 폭소하게 만들었고(...) 보전 동창생인 김득천은 야당중의 야당인 신흥당이 인신공격만 일삼은 구정치인들을 공격해야겠다며 윤씨(윤보선)는 20점 허씨(허정)는 100점이라고 평가하여 나이어린 학생과 경찰과 신문기자가 다수인 청중을 웃게 만들었다(...).#허경영? 한편 상단의 기사는 윤보선 후보의 남산강연에서 윤제술 찬조연사가 춘향가의 한 구절을 부르다가 우는 연극(?)까지 하자 군중들은 누구를 위한 울음이냐며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는 내용이다.1960년대의 코미디 정치

10월 15일 본투표 결과 20만표도 안 되는 19만 8,837표, 1.97% 득표율을 기록하여 5위로 낙선했다.# 송요찬허정이 사퇴를 한 상태여서 꼴지로 낙선한 셈이다.[11] 신흥당은 대표가 표문화로 교체됨에 따라 장이석은 신흥당 대표직에서 내려오게 된다. 10월 17일 조선일보의 3위를 득표한 오재영 후보가 스포츠라면 동메달이라고 말한 기사에서 식구들에 의해 밖에 나가셨다고 전해진 변영태 후보와 함께 짧게 언급되는데, 대전, 대구 등으로 유세를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아서 부인이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언론사에서도 5대 대선 이후의 행보가 공개되지 않았고 대통령 선거의 역사를 언급할 때 가끔 언급되는 편이다.

3. 여담

1999년 5월 18일 조갑제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5대 대통령선거 편에서 이름이 언급된다.#[12]

한편 의 소재가 된 것으로 유명한 봉우사상의 창시자인 봉우 권태훈이 1953년에 장이석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기이하고 특이한 자기소개와 공약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허경영의 원조격이라 볼 수도 있는 인물인 셈이다.

가장 적은 선거비용인 13만 4000원을 쓴 인물이기도 하다. 한편 가장 많은 선거비용을 쓴 후보는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500억 8714만원을 쓴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

정보가 매우 부족하고 경력도 사실여부를 알 수 없고 주장도 황당한 인물이다. 1963년 당대에도 '뉴페이스'나 '낮선사람'으로 불릴 정도로 듣보잡인 인물이었으며, 경향신문에서 '7대통령후보의 7대 불가사의'라는 기사에서 가장 먼저 다루어졌다.
장이석씨

◇.... [새사람]을 자처하는 장이석씨는 "새사람나왔다"고 외치는 말을 듣기보다는 이 새사람이 누구인가에대해 오히려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가 3,4대 대통령에 출마하려다 등록방해로 좌절되었다고하는 약력보다는 오히려 "그런사람이 있었던가?"하고 외면해버리는 사람이 오히려 많다. 그의 단조한 경력-일제시대는 말할것도 없고 해방 후에도 줄곧 관물을 먹어본 일이 없다는걸 자랑스레 말하지만 그렇다고 항일반독재투쟁을 했다는 뚜렷한 기록도 없다. 이것이 새사람의 면목이다.

60세-충남 공주 출신으로 되어있으나 본적이 어디든 믿을만한 기록은 그의 출생지가 평북으로 되어있으며 유일한 이북출신이다.[13]

◇.... 구주제대중퇴라는 그의 학력이 위조라고 떠들어대는 소리가 바로 그의 앞에 다가와도 그는 침묵을 지켰다. 구주제대동창회장이 공연하게 그의 학력을 의심해도 한마디 해명조차 없다. 과연 그의 학력은 위조인가? 새사람에게 불어닥친 역풍은 그것만이 아니다.

항일학생운동을 하다 구주제대를 중퇴했다는 그가 중국에 망명한 후에는 왕조명과 교류를 했다니 새사람치고는 알수없는 인물. 왕조명은 일본제국주의의 괴뢰로서 일제와 손잡고 장개석정부에 도전한 사람이었으니까.

신흥당 당수. 일제때부터 전국을 순방하며 새 동지를 규합하여왔으니 "여러분들이 그분을 알든모르든 그분의 인격과 애국심을 아는 사람은 수십만이 될것"이라고 호언하는 그의 대변인의 말은 정작 투표에서 얼마나 신빙성을 보여줄지? 기호는 1번. [새사람]이 이제야 등장했으니 화제일수밖에.... (A)

'7대통령 후보의 7대 불가사의' - 경향신문, 1963년 9월 21일


[1] 1963년 9월 16일 경향신뭇 기사에 기재된 60세라는 나이에 따라 추측한 것이다.1956년 기사에는 55세라고 나오는데 이에 따르면 1900년~1901년쯤이 된다.사망 시점도 알 수 없다.[2] 후술하겠지만 특별한 선거전략도 없이 저 구호와 도의민주주의, 황당한 주장들을 내세우는 웅변으로 선거에 임했다.[3]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4] 참고로 이 기사에 나오는 한자 표기는 동명이인 화가 이름이다. 실수인 듯.[5] 한편 해당 기사에는 진보당의 대변인 윤길중과의 인터뷰도 나와 있다.[6] 당시에는 무소속 후보의 출마가 금지되어 있었다.[7] 현재는 원내정당의 의석수에 따라 기호를 정하지만 당시에는 추첨제였다.[8] 명국환의 노래[9] 카이저(Kaiser)의 당시 표기로 7대 대선에 출마한 진복기 후보의 카이저 수염이 '카이젤 수염'이라고 불렸다. 정황상 빌헬름 2세를 말하는 듯하다.[10] 여기서 문제는 3영의 대상이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빌헬름 2세, 아돌프 히틀러 모두 전쟁을 일으킨 존재라는 건데... 당시 국민들의 입장에서 영웅이었던 지도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허나 이 자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프랑스에선 영웅으로 기억되는 나폴레옹이나 평가는 엇갈릴지라도 그렇게 금기시될 정도는 아닌 빌헬름 2세면 몰라도 히틀러는... 히틀러와 직접 싸운 미국과의 외교에 큰 차질이 갈 가능성이 높다.[11] 사실 군소정당에 갑툭튀한 인물 치고는 잘 받은 것이긴 하다.[12] 참고로 왼쪽 사진에 익숙한 얼굴이 있는데, B.J 멤버스텔을 광고하는 미국계 한국인 방송인 하일이다.[13] 참고로 박정희는 경상북도 구미, 윤보선은 충청남도 아산, 오재영은 경기도 안성, 변영태는 경기도 부천 출신이며 사퇴한 후보 중 송요찬은 충청남도 청양, 허정은 부산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