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6-24 15:07:33

정남균

파일:정남균.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마츠바라 난켄(松原南均)
벽파(碧波)
본관 경주 정씨[1]
출생 1905년 3월 5일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조약도 탄도리
(현 전라남도 완도군 약산면 장용리)[2]
사망 1950년 9월 24일[3]
전라남도 완도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408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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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정간용 전 국회의원은 7촌 재종질(再從姪)이다.

2. 생애

1905년 3월 5일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 조약도 탄도리(현 완도군 약산면 장용리)에서 아버지 정병국(鄭炳國, 1884. 5. 3 ~ 1961. 1. 7)과 어머니 전주 최씨(1883. 10. 5 ~ 1960. 12. 19)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이던 1926년 11월 3일, 광주부 부동정(현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에 있던 최규창(崔圭昌)의 하숙방에서 왕재일(王在一)·장재성(張載性) 등 광주고등보통학교 및 광주농업학교 학생 15명과 함께 조선의 독립, 사회과학 연구,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비밀결사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매달 회비 10전을 거두어 운영비로 쓰고, 매달 첫번째·세번째 토요일에 모여서 민족적 교양의 함양과 사회과학을 통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연구하기로 정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비밀을 엄수하고, 동지들을 포섭해 조직 확대에 힘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1927년 3월 회원 중 전학을 가는 사람이 생기고, 또한 왕재일·장재성·박인생(朴仁生) 등 주동학생들의 졸업으로 기밀누설의 위험이 있다고 판단해 정남균의 집에서 회의를 갖고 성진회를 해체하였다.

그러나 정남균은 1927년 3월 이후에도 계속 모교인 광주농업학교 독서회와 연락을 유지했으며, 고향으로 돌아가 사립 약산학교(현 완도 약산초등학교)에 교사로 부임한 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특히 1928년 3월 등사판 인쇄기를 사용해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경기도 경성부에서 발행하던 일간신문에 1926년 5월 말에 시리즈로 연재됐던 「現下(현하)의 朝鮮(조선)과 總督府(총독부) 經濟策(경제책)」이라는 제목의 '산업 제일주의' 또는 '산미증식계획' 등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경제 정책을 상세히 논한 신문기사 일부분 첫머리 1, 2항 약 백 수십 행을 인쇄하고 10여 장을 출판했고, 이를 관할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배포하려 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이후 1928년 12월 7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구한국 융희 3년(1909) 법률 제6호 출판법 위반 혐의로 벌금 20원(벌금 미납부시 20일간 노역장에 유치)의 형벌을 선고받고 이에 공소했으나 1929년 1월 26일 대구복심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형벌이 확정되었다.

그 뒤 1929년 9월 1일 동아일보 완도지국 기자에 채용되어 활동하다가 그해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성진회 동지들과 이를 주도했다가 이듬해인 1930년 고흥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0년 7월 1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광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10월 27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위 혐의로 징역 3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4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후 공소했으나,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로 징역 1년형(재판 미결 구류일수 중 365일 본형에 산입, 법정 미결 구류일수 통산 4일)을 선고받고 출옥했다.

출옥 후 1937년 3월 31일 고금어업조합(古今漁業組合) 감사에 취임했으며, 1939년 3월 31일 사직했다가 4월 28일 총대회에서 다시 감사에 선임되었다. 1940년 7월 23일에 마츠바라 난켄(松原南均)으로 창씨개명한 사실이 1940년 12월 26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에 보인다.

8.15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약산면 지부장을 역임했으며, 1950년 9월 24일 고향 완도군에서 타계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2년 7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

[1] 문헌공파-참의공파 69세 균(均) 항렬.[2] 경주 정씨 집성촌이다. 7촌 재종질인 정간용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음력 8월 13일.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9월 12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정남균 지사의 유족회에서 관리하는 애국지사정남균선생추모비에 9월 24일 타계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날짜가 더 정확하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