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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眉壽
1456년(세조 2) ~ 1512년(중종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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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종의 장녀이자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와 영양위 부마 정종(鄭悰)의 장남. 즉 문종과 현덕왕후의 외손자가 되고 세조의 외종손자이며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외증손자이다.2. 생애
정미수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 정종이 세조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가 전라도 광주목으로 유배를 가 있던 바람에, 정미수는 광주에서 태어났다.죽은 단종과 경혜공주를 동정하며 세조를 비난하는 여론을 의식한 정희왕후 윤씨는, 과거 현덕왕후 권씨의 친정노비이자 경혜공주의 유모였고 당시에는 자을산군(훗날의 성종)의 유모였던 백어리니와 함께 같이 한양으로 돌아가자고 경혜공주를 설득했다.
아버지 정종이 처형된 후 7살 때인 세조의 어명으로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들어왔다. 원래대로라면 역신(정종)의 가족들은 죄가 연좌되어야 하나, 세조의 특명으로 경혜공주와 정미수는 면죄는 물론 신분까지 복귀되었다. 다만 정미수는 자을산군(훗날의 성종)과 같이 어울리며 궁에 지냈으나 경혜공주는 비구니가 되어 출가했다.
그리고 4년 후, 경혜공주는 정미수와 같이 세조를 찾아가서 면천과 세조의 지원을 받으며 어머니 경혜공주와 같이 살게 된다.
성종이 즉위하자 15세이던 정미수는 돈녕부 직장으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때 역신의 아들이라 하여 많은 이들이 정미수의 임용을 반대하였으나, 남편과는 달리 양심은 있었는지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는 세조의 유교라 하며 이들의 반발을 무마시켰다. 한편 그 해 말년에 어머니 경혜공주가 사망하였는데, 당시 16세이던 정미수는 항상 약물을 먼저 맛보고 옷도 벗지 않으며, 경혜공주의 대변을 직접 맛보는 등 그 병간호에 극진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여러 관직을 두루 지냈으며, 연산군 즉위 후에 대간들을 비롯한 많은 관료들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의 보호를 받으며 승진을 거듭하여 당상관의 지위에 올랐다.
정미수가 함경도 감사로 부임하였을 때 경국대전에는 데리고 갈 수 있는 노비가 2명임에도 불구하고 50명을 데리고 간 일로 인하여 연산군 8년 6월에 대간들이 정미수를 국문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연산군은 오히려 지금까지 평안도와 함경도의 감사로 부임하였던 이들로부터 이 법을 제대로 지킨 이들이 없음을 알아내고는 정미수를 보호하였다.
이후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신진세력들이 유자광이 득세하는 현실에 분개해 박경, 조광보, 유숭조, 문서귀, 김공저가 박원종과 유자광을 처치하고 정미수를 정승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정미수는 오히려 "그게 무슨 소리냐? 두 정승에 문제가 있으면 조정이나 대간에 논박하면 될 것이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며 강렬히 거부했다. 이로 인해 같이 호응해주리라 여겼던 남곤과 심정도 떨떠름한 반응이였다.
한마디로 이건 준역모급이나 다름 없었다. 한 마디로 왕에게 고하지 않고 왕이 임명한 사람과 훈신들을 죽인다는 것은 왕에게 칼을 겨누겠다는 뜻이다. 민란시대에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아전과 토호는 죽였지만 수령은 욕만 보일 뿐 죽이지 않는 같은 이유였다. 걱정이 된 유숭조가 고변을 하였고 이에 상중이던 정미수, 남곤, 심정은 이 소식을 듣자 뒤이어 고변하였다. 이게 사화를 일으킬 것 같지만 대간들이 "반정 초에 대규모 사화를 일으키지 말자"는 취지로 주모자인 박경과 김공저를 처형하고 늦게 고한 정미수, 유숭도 등은 유배보냈지만 유자광이 유배간 뒤 다 풀려났다.
혼인을 했으나, 자녀가 없어[1] 7촌 조카인 정승휴로 하여금 후사를 이었다. 그리고 정승휴의 외동딸은 중종과 희빈 홍씨의 장남 금원군과 혼인했다. 말년에는 단종의 부인이자 자신에게는 외숙모가 되는 정순왕후 송씨를 양자로서 모셨으나 본인이 정순왕후보다 먼저 숨졌다.[2]
3. 야사
정미수의 후손들은 대대로 단종과 정순왕후의 제사를 지켜왔는데, 정효준의 대에 이르러서는 벼슬도 하지 못해 가세가 매우 기울었다. 정효준은 3번이나 결혼했지만, 부인들이 모두 일찍 죽고 자식도 남기지 못해 늙은 홀아비로 살아가는 비참한 처지였다. 그나마 부사(府使)를 지낸 친구 전의이씨 이진경(李眞卿)과 교류하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하루는 정효준과 이진경이 함께 장기를 두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정효준이 이진경에게 "자네의 딸과 결혼해 자네의 사위가 될 수 없겠나"라고 질문했다. 이에 이진경은 "황당한 일을 다 본다"며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그런데 그날밤 이진경의 꿈 속에 단종이 국왕의 모습으로 나타나, "정효준과 너의 딸을 결혼시켜라"라고 명했다. 이진경은 꿈 속에서는 그리하겠다고 했지만, 쉽게 결정하기 힘든 일이라 부인과 상의했다. 당연히 부인은 "가난뱅이 홀아비와 딸을 결혼시킬 수 있냐"며 거절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밤 꿈속에서 다시 단종이 나타나 "왜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느냐"며 부인에게 곤장을 때렸고, 결국 정효준의 청혼을 수락해야 했다. 그런데 그 이후, 정효준도 "사실 나 역시 꿈 속에 단종이 나타나 '이진경의 딸과 결혼하라'고 명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토로했다. 결국 정효준은 이진경의 딸과 결혼했고, 이후엔 아들들을 낳아서 오형제 모두 문과에 올라 높은 벼슬을 하고, 정효준 역시 높은 벼슬을 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이야기다.
4. 평가
<연산군일기>에는 정미수에 대해 "문종의 외손으로 궁중에서 자라나 호화와 사치가 습관이 되었으나, 선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청의를 말하여, 갑자사화에서 사람들을 구하기에 힘썼다."라고 평하고 있다.정미수의 신도비문을 지은 강혼은 정미수에 대해 "외모가 수려하였으며, 옥사에 대해 논의할 때에는 매사에 깐깐하여 일의 경중이 늘 공에게 달려있었다. 죄 없는 사람들이 앙화에 걸리니 공이 형조에 있으면서 많은 이들을 살렸다." 등의 평을 남겼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박병련은 "정미수는 문종의 외손이자 중종의 공신으로, 조선 초기 훈구세력의 특징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대충 요약하자면 "종친으로서 자라서[3] 사치스럽고 일 처리에 까다롭지만, 수려한 외모에 주변 사람에 친절하다"라고 평가되는 듯하다.
5. 여담
미수(眉壽)란, "눈썹이 하얘지도록 오래 살아라"라는 의미이며 원래는 회갑연 등 때 집안 어른, 또는 스승에게 올리는 일종의 별호다. 수강(壽康), 덕수(德壽)[4][5] 등의 자(字)와 마찬가지. 아명도 아니고 굳이 이런 이름이 붙은 데에는 그의 처절한 탄생/성장 배경과 관련지어봄직하다.[1] 결과적으로 정미수 사후에 문종의 혈통은 완전히 단절됐다. 문종의 자식은 단종과 경혜공주, 경숙옹주뿐이었는데 단종과 경숙옹주는 후사를 두지 못했다. 경혜공주는 자식 2명을 보았으나 아들 정미수는 후사가 없었고 딸은 혼인 기록만 있고 후사에 관한 기록은 없다.[2] 이 역시도 정순왕후 송씨에게는 한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잘 알려진대로 송씨는 왕비가 된 이후로 시숙부인 세조에 의해 친정아버지가 처형당했으며 남편하고도 사별하고 어려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다 말년에 양자가 된 시조카 덕에 그나마 형편이 나아졌고, 같은 사람에 의해 비슷한 아픔을 겪은 만큼 서로 심정적으로 의지했던 부분도 컸을 터인데 그까지 앞세우게 되었다.[3] 물론 정미수가 문종의 외손자긴해도 이씨 왕가의 종친은 아니지만 종친처럼 자랐다는 소리로 추측된다.[4] 안맹담(정의공주의 남편, 세종의 부마)의 자.[5] 본래 경운궁이었던 이궁을 순종효황제가 덕수(德壽)궁으로 고친 이유도, 강제 퇴위해 경운궁에 기거하게 된 부황 고종태황제의 무병장수를 바라는 이유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