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여인(汝仁) |
출생 | 1868년 |
강원도 춘천도호부 북내일작면 우두리 (현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우두동)[1] | |
사망 | 1902년 1월 1일 (향년 34세) |
강원도 춘천군 | |
본관 | 초계 정씨[2] |
가족 | 배우자 광산 김씨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92호 |
상훈 |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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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68년 강원도 춘천도호부 북내일작면 우두리(현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우두동)에서 아버지 정수영(鄭壽永, 1844 ~ 1908)[3]과 어머니 남양 홍씨[4]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하자 1896년 1월 18일 춘천부 춘천군에서 대한제국군 진위대 춘천분견대의 초관(哨官)이었던 성익현과 상인 박현성(朴玄成)을 필두로 포군 400여 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춘천관찰부를 습격하여 의병의 본영으로 삼았다. 그리고 전임 춘천부 유수(春川府留守) 민두호(閔斗鎬, 1829 ~ 1902.9.11.)의 생사당(生祠堂)을 불태우고, 민두호의 장남 민영준(閔泳駿, 1852.5.15. ~ 1935.12.30.)[5]이 살던 사저에 난입하여 집기를 불태웠다. 그리고 춘천군 출신의 명망높은 유학자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한 뒤 춘천군 백성들에게 통(通文)을 발송하는 한편, 강원도 각지에도 격문을 발송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관군의 반격으로 의진이 해체되었을 때 체포되어 한성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고, 풀려난 후 자택에 은거했으나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02년 1월 1일에 강원도 춘천군에서 사망했다. 유해는 강원도 춘천군 북내일작면 우두리에 안장되었다. 2010년 8월 15일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011년 5월 31일 배우자 광산 김씨[6]의 유해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