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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맨스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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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lywood Walk of Fame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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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제인 맨스필드
Jayne Mansfield
분야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6328 Hollywood Blvd.
}}}}}}}}}}}} ||

<colbgcolor=#4ac4eb><colcolor=#fff> 제인 맨스필드
Jayne Mans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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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비어러 제인 파머
Vera Jayne Palmer
출생 1933년 4월 19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브린마
사망 1967년 6월 29일 (향년 34세)
미국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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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배우
활동 1954년 ~ 1967년
신장 168cm
학력 서던 메소디스트 대학교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배우자 폴 맨스필드(1950년 ~ 1958년, 이혼)
미키 하기테이(1958년 ~ 1964년, 이혼)
맷 심버(1964년 ~ 1966년, 이혼)
파트너 엔리코 봄바(1962년 ~ 1964년)
자녀 제인 머리 맨스필드
미클로스 "미키" 하기테이 주니어
조울탄 하기테이
머리슈커 하기테이
토니 심버
종교 가톨릭[1] / 사탄교[2]
서명 파일:JMsig_Converted.sv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IMDb 로고.svg
1. 개요2. 생애 및 활동
2.1. 데뷔 전2.2. 데뷔2.3. 먼로의 후계로 지정되다2.4. 생존을 위한 몸부림
3. 비극적인 교통사고4. 가족관계5. 여담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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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배우.

2. 생애 및 활동

2.1. 데뷔 전

변호사였던 아버지 허버트(Herbert)는 심장마비로 맨스필드가 세 살 때 사망했다. 교사였던 어머니 비어러(Vera)가 1939년 재혼하면서 텍사스 댈러스로 가족이 이사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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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대회에서 입상하면서 일찍 스타의 꿈을 키웠는데, 머리가 매우 비상한 편이었다. IQ가 163이었고, 5개 국어를 구사했고, 피아노바이올린도 솜씨가 있었다. 하일런드 파크 고등학교[3]를 겨우 2학년 때 마치고 댈러스 대학에 진학해 연기를 공부했다. 16살 때 임신을 하면서 다음해인 1950년 아이의 아버지인 폴 맨스필드와 결혼하게 됐지만 1953년 대학에서 올린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첫 무대 데뷔를 하면서 다시 배우로서의 꿈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이 연극의 연출가는 다름 아닌 감독 시드니 루멧의 아버지 버루 루멧(Baruch Lumet)이었다.

남편, 딸과 오스틴으로 이사한 뒤엔 텍사스 대학에서도 연기를 공부했다. 육아와 공부의 병행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 사이에도 군소 미인대회에서 여러 번 입상했고, 주저하는 남편을 설득해 연기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54년 로스앤젤레스로 이사를 해 각종 고된 알바를 뛰면서도 다시 UCLA에서도 드라마 수업을 들었다.

2.2. 데뷔

맨스필드는 플레이보이의 1955년 2월호에 이달의 플레이메이트[4]로 등장해 잡지 부수를 껑충 뛰게 만들며 단숨에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았다. 이때부터 맨스필드는 언론 플레이에 능한 스캔들 메이커로 유명해졌는데, 미국에서는 킴 카다시안이나 패리스 힐튼의 선지자로 불린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맨스필드는 예술활동에 대한 재능과 열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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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영화 데뷔작은 로런스 티어니의 상대역이었던 B급 누아르 <Female Jungle>(1955)이었는데, 플레이보이에 나오기 전에 계약한 작품이었다. 이제는 플레이보이로 이름이 알려진 덕에 맨스필드는 워너 브라더스와 반 년 짜리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잭 웹(Jack Webb)이 연출한 <피트 켈리의 블루스(Pete Kelly's Blues)>(1955)와 에드워드 G. 로빈슨 주연의 법정 스릴러 <Illegal>(1955)에서 조연 역을 하고, 앨런 래드의 범죄 드라마 <Hell on Frisco Bay>(1955)에선 크레딧에 오르지도 못하는 역할까지 찍고 나자 계약 기간이 종료되었다. 아내의 연기자 활동이 잠깐의 취미생활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남편 폴 맨스필드마저 할리우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홀로 댈러스로 돌아가 맨스필드는 일과 가정을 모두 잃을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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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수 없이 맨스필드는 1955년 가을 브로드웨이에서 조지 액슬로드(George Axelrod)의 코미디극 "성공이 록 헌터를 망칠까?(Will Success Spoil Rock Hunter?)"에 출연하게 된다. 영화산업을 풍자한 이 공연에서 맨스필드는 마릴린 먼로에게서 따온 관능적인 여배우 리터 말로우(Rita Marlowe) 역을 맡았는데, 공교롭게도 긴 금발머리와 큰 가슴을 지닌 맨스필드는 당시 육체파 배우의 대명사였던 먼로의 후계자들 중 가장 낫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양산형 먼로("the poor man's Marilyn")"로 불리며 평생 폄하 당하기도 했다.

2.3. 먼로의 후계로 지정되다

다행히도 공연이 성황리에 끝나면서 다음 해 봄, 맨스필드는 다름 아닌 바로 먼로의 소속사였던 20세기 폭스와 다년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먼로는 촬영을 줄줄이 펑크 내는 등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며 전혀 통제가 안 되고 있었는데, 폭스는 맨스필드를 먼로의 대용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맨스필드는 에드먼드 오브라이언, 줄리 런던 등이 출연한 뮤지컬 코미디 <더 걸 캔트 헬프 잇(The Girl Can't Help It)>(1956)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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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크게 흥행했고 맨스필드는 먼로를 어설프게 따라했다는 평을 받았음에도 골든 글로브 신인상을 타면서 명실상부한 스타가 되었다. 당시 한창 유행 중이던 10대 겨냥 로큰롤 뮤지컬 장르를 풍자하려던 영화의 의도도 관객에게 잘 전달돼, 2006년 AFI에서 최고의 뮤지컬 영화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자신이 "멍청한 금발 여자"로만 소비되고 있다는 자각이 있던 맨스필드는 존 스타인벡 원작의 <The Wayward Bus>(1957)에서 그간의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난 인물을 연기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조운 콜린스, 댄 데일리(Dan Daily)가 함께 출연했다.

맨스필드는 또한 자신을 부활시켜줬던 연극의 동명 영화판에까지 나왔다. 이 코미디 <성공이 록 헌터를 망칠까?>(1957)는 맨스필드의 두 번째 남편이 되는 보디빌더 미키 하기테이(Mickey Hargitay)의 영화 데뷔작이기도 했다. 영화는 제목의 주인공이 그대로 등장하고 맨스필드가 나온다는 것 외에는 연극과 공통점이 거의 없었지만 흥행에 상당히 성공했다. 공동 주연이었던 토니 랜덜(Tony Randall)은 골든 글로브 후보에까지 올랐다. 훗날 영화는 미국 의회도서관 영구 보존 영화가 된다.

한편, 맨스필드가 연극으로 뜨기 전인 1955년 촬영이 완료된 후 창고에 처박혀있던 저예산 누아르물 <The Burglar>(1957)가 맨스필드의 유명세에 기대를 품으며 개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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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해진 폭스는 <사랑은 비를 타고>의 스탠리 도넌에게 감독을 맡기고 맨스필드에게 케리 그랜트를 붙여 로맨틱 코미디 <키스 뎀 포 미(Kiss Them for Me)>(1957)를 제작했다. 비록 맨스필드는 영화 속에서 눈요기감 금발 미녀 정도로만 취급 받았지만, 이름이 포스터 최상단에 배치되었다. 전쟁에 지친 조종사들이 상륙허가를 받아 샌 프란시스코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흥행과 평론 모두 실패하고 만다.

2.4. 생존을 위한 몸부림

하필 이즈음 폭스는 먼로를 어떻게든 갱생시켜 다시 써먹기로 결심했고, 영화 실패에 대한 보복을 겸해 먼로의 예비였던 맨스필드에겐 더 이상 괜찮은 배역을 내주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폭스와 급이 맞지 않는 소규모 영화사에 맨스필드를 대여하기 시작했다. 이 시절에 소속 영화사 제작 영화에만 얽매이지 않고 타 영화사 제작 영화에도 출연하는 건 해당 배우의 권한과 자율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영화사들 간의 급이 비슷할 때의 얘기였다. 폭스는 맨스필드가 할리우드 내 생존을 위해 어그로성 이벤트를 남발하는 걸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맨스필드를 유럽에서 제작되는 저예산 영화에 내보냈다.

그렇게 맨스필드는 급히 뜬 만큼이나 급히 저물게 되었고 이후 10여 년 간 쭉 섹스어필 캐릭터로만 소모되고 만다. 역시 박학다식했으나 B급 에로틱 배우 이미지로 평생을 시달렸던 배우 실비아 크리스텔과 비슷한 경우.

그러나 크리스털과 달리 맨스필드가 지금까지 불굴의 의지를 지닌 자수성가형 스타로 회자되는 이유는 이후로도 폭스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매주 언론에 어그로를 끌어 화제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존재감을 꾸준히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그렇게 맨스필드는 그 범작 이하의 출연작들을 쭉 흥행시켜 할리우드의 중심에선 쫓겨난 1963년에도 미국 극장주 협회에서 꼽은 흥행력 있는 스타 10위에 꼽히는 등 저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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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 1957년 소피아 로렌과의 투샷이다. 다만 이때 끈 어그로는 화제를 모으는 데에는 매우 성공했으나 역풍도 만만치 않게 컸다. 왜냐면 이날은 로렌의 미국 진출을 축하하기 위해 파라마운트 픽쳐스에서 특별히 열어준 만찬 자리였기 때문이다. 미국 연예계 역사에 길이 남게 된 이날의 사진은 1993년 안나 니콜 스미스의 전설적인 게스 진즈 광고로 패러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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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엔 사진작가 마크 셀리거(Mark Seliger)가 슈퍼모델 하이디 클룸으로 재해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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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필드가 "The Pink Palace(분홍 궁전)"이라고 이름 붙인 할리우드 저택도 큰 화제거리였는데, 이름 그대로 전면을 분홍색으로 칠한 게 특징이었다.

1958년 초, 아내의 할리우드 생활을 결국 견딜 수 없었던 남편 폴 맨스필드와의 이혼이 마무리되었다. 몇 달 뒤 맨스필드는 여러 남성들과 대놓고 끝없는 스캔들을 일으킨 끝에 실은 연극 "성공이 록 헌터를 망칠까?"를 만들 때부터 근 3년 간 비밀리에 사귀고 있던 미키 하기테이와 결혼했다. 하기테이는 미스터 유니버스(Mr. Universe) 출신의 보디빌더로 배우를 지망하고 있었다. 결혼생활은 평화롭지 못했지만 맨스필드는 하기테이와의 사이에서 세 아이를 낳았다.

라울 월시 연출의 저예산 코미디 서부극 <The Sheriff of Fractured Jaw>(1958)는 이탈리아에서 촬영되었고 미국 개봉이 몇 년이나 늦춰졌다. 앤서니 퀘일[5]이 나온 <The Challenge>(1960), 크리스토퍼 리가 나온 <Too Hot to Handle>(1960) 등 영국 스릴러 두 편을 찍고 다시 이탈리아로 보내져 남편 하기테이가 헤라클레스를 맡은 판타지 영화 <The Loves of Hercules>(1961)를 찍었다.

겨우 할리우드로 돌아와 전기영화 <암흑가의 신사(The George Raft Story)>(1961)의[6] 조연을 얻어냈지만, 결국 다시 이탈리아로 내쫓겨 올림픽 소재의 코미디 <It Happened in Athens>(1962)를 찍어야 했다.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자 폭스는 이를 핑계로 맨스필드와의 6년 계약 갱신을 거부했다.

맨스필드가 다시 경력을 되살릴 방법론으로 기댄 건 어그로였다.

맨스필드는 타미 누넌[7]이 출연한 독립영화 <Promises! Promises!>(1963)에 전라로 나오기로 결정했고, 촬영현장 사진이 플레이보이에 실리면서 맨스필드 본인은 물론 잡지에 관심이 집중됐다. 플레이보이는 또 한 번 맨스필드 덕에 엄청난 판매부수 급증의 호조를 누렸다. 휴 헤프너외설 혐의로 시카고 당국과 대립하며 고초를 겪기도 했다. 클리블랜드에선 영화가 상영 금지 조치 되었지만, 미 전역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한편, 1964년 다사다난했던 두 번째 남편 하기테이와의 이혼이 마무리되자 맨스필드는 맷 심버와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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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s Vegas Hillbillys>(1966) 메이미 밴 도런과 먼로를 비교한 1950년 사진
맨스필드는 이제 <The Fat Spy>(1966) 같은 Z급 영화로까지 급이 떨어져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나이트클럽 공연을 동시에 뛰었다. 컨트리 뮤직 코미디 <The Las Vegas Hillbillys>(1966)는 먼로 후발주자들 중의 하나인 메이미 밴 도런(Mamie Van Doren)과 공동주연이었다.[8]

월터 매사우의 코미디 <A Guide for the Married Man>(1967)에 우정출연한 게 생전에 개봉된 맨스필드의 마지막 출연작이었다.

3. 비극적인 교통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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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필드는 세 번째 남편 맷 심버와 1966년 이혼했지만 둘은 친구로 남아 맨스필드는 심버의 감독 데뷔작인 <Single Room Furnished>(1968)를 찍었다. 하지만 아직 후속 작업이 끝나지 않아 개봉은 이뤄지지 않고 있던 상황에서 맨스필드는 1967년 6월 34살 때 뉴올리언스에서 열리는 쇼에 참석하러 가게 된다. 그리고 타고 있던 차가 앞서 서행하고 있던 트럭 후면에 정면 충돌하면서 당시 남자친구였던 변호사 샘 브로디(Sam Brody), 운전기사와 함께 즉사했다.

당시 뒷좌석에서 누운 자세로 잠들어있던 세 아이 머리슈커, 조울탄, 미키 하기테이는 기적적으로 경미한 상처만 입었을뿐 무사히 살아남았다. 만약 아이들이 똑바로 앉은 상태로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즉사했을 것이다. 사고현장 사진 속 자동차 덮개에 맨스필드의 머리통처럼 보이는 물체가 나와있어, 맨스필드의 목이 잘려나갔다는 도시전설이 오랫동안 돌았다.[9] 실은 맨스필드의 가발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있던 배우라 사망 당시 중앙일보에서 기사가 뜬 적이 있다.

이 사건은 제임스 G. 발라드크래시에서도 언급된다.

이 교통사고를 소재의 일부로 삼은 2012년작 영화도 존재한다. 제목은 <제인 맨스필드즈 카(Jayne Mansfield's Car)>. 1969년 앨라배마가 배경인 이 영화에서 주인공 무리는 근처 마을에서 전시 중인 사고 차량을 보러가 참상의 흔적에 놀란다. 존 허트, 케빈 베이컨 등이 출연했다.

공교롭게도 맨스필드의 유작인 <Single Room Furnished>는 맨스필드의 출연작 중 최고의 연기로 꼽힌다. 현모양처였던 여성이 창녀로 전락하는 과정을 건조하게 그린 작품이었다. 다만 영화 자체는 그런 맨스필드의 연기를 못 살린다는 평이 대다수라 여러모로 안타까운 마무리가 되었다.

4.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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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제인 머리 맨스필드(Jayne Marie Mansfield)는 플레이보이 1976년 7월호에 "제인의 딸(Jayne's Girl)"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화보를 찍으며, 플레이보이지 사상 최초로 모녀가 모두 화보를 찍는 기록을 세웠다. 그 뒤 캐서린 헵번 주연의 독립영화 <Olly, Olly, Oxen Free>(1978)에 출연한 것 외엔 별다른 연예계 활동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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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살 때 어머니 맨스필드와 함께 타고 있던 자동차 사고에서 무사히 살아남았던 둘째 딸 머리슈커 하기테이(Mariska Hargitay)는 배우로 성공했다. 1999년부터 NBC에서 인기리에 장수하고 있는 TV 드라마 Law&Order: SVU의 상징인 올리비아 벤슨 역을 맡고 있다. 맨스필드가 어머니라는 걸 모를 때는 둘을 연계시키기가 쉽지 않지만 둘이 모녀지간이라는 걸 알고나서 다시 보면 이목구비에서 맨스필드가 바로 보인다는 얘기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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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테이는 인터뷰에서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것이 결코 아물지 않는 상흔을 남겼고 마음 속 구멍이 평생 메워질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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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했는데, 어머니 바로 옆자리로 배정되었다.

아들 조울탄 하기테이는 목수로, 할리우드 제작 현장에도 몇 번 참여했다. Apple TV+의 드라마 더 모닝 쇼(2022-)에도 목수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5. 여담

  • 무성 영화 시대 이후 최초로 노출 연기를 한 할리우드 배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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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개종하진 않았으나, 사실상 신자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2] 창시자인 앤턴 러베이와 만난 적이 있었으며, 메달과 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앤턴 러베이의 딸인 카를러 러베이는 맨스필드가 사탄교 신자였으며 앤턴 러베이와 연애적 관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3] Highland Park High School.[4] Playmate of the Month.[5] Anthony Quayle.[6] 원제 속의 조지 래프트는 갱 역할로 유명한 배우였다. 1901-80.[7] Tommy Noonan.[8] Z급 영화의 산실이었던 영화제작사 울너 브라더스(Woolner Brothers)는 다음해 <Hillbillys in a Haunted House>란 속편까지 제작했는데, 이땐 장르가 코미디+호러+뮤지컬이었다.[9] 사망 때부터 와전된 것이라 아래 한국 기사에도 머리가 잘렸다는 루머가 그대로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