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15:06:27

조문환(독립운동가)

파일:조문환(독립운동가).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창녕 조씨[1]
출생 1907년 11월 24일[2]
전라남도 영암군 군시면 교리
(現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3] 39번지)
사망 1949년 10월 21일 (향년 41세)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358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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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907년 11월 24일 전라남도 영암군 군시면 교리(現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39번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영암면 교동리 30번지로 이주했다.

일찍이 조선일보사 목포지국 기자로 근무했고, 1926년 목포무산청년회와 목포청년동맹 상무서기로 활동하면서 청년운동에 앞장섰다. 또한 1926년 12월에는 조선일보사 목포지국 회계국원에 선임되었다.

또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장래의 주역이 될 청소년의 역량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소년운동에도 힘을 기울여 갔다. 소년운동의 통일을 목적으로 1927년 7월 30일 경성부 시천교당에서 열린 조선소년연합회(朝鮮少年聯合會) 발기대회 때 방정환 등과 함께 창립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10월 16일 천도교 기념관에서 열린 조선소년연합회 창립대회에서 마찬가지로 방정환 등과

또한 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목포지회 설립에도 힘을 쏟아 그해 12월 목포지회 정기대회에서 간사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이후 1928년 8월 전라남도 광주군에서 개최된 전남소년연맹(全南少年聯盟) 간담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그 직후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광주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다가 23일 불기소처분으로 석방되었다.

그해 12월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목포야체이카[4] 소속으로 활동하였는데, 이후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다.

결국 1930년 12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2년 7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5년 5월 20일 동아일보사 영암지국장에 임명되었다. 1945년 3월 작성된 《昭和二十年(쇼와 20년, 1945) 朝鮮人要視察人略名簿(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 - 特高課(특고과)》에 등재돼 있던 것으로 보아, 8.15 광복 이전까지도 일본 제국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후 1949년 10월 21일 별세하였다.

3. 기타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6년 11월 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945년 3월 작성된 《昭和二十年(쇼와 20년, 1945) 朝鮮人要視察人略名簿(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 - 特高課(특고과)》에 따르면, 키가 5척 4촌이었다고 한다. 일본의 곡척에 따라 1척이 약 30.3cm, 1촌이 3.03cm 정도 되므로, 5척 4촌이면 163.62cm 정도였을 것이다.

[1] 24세 환(煥) 섭(燮) 열(烈) 항렬.[2] 1945년 3월 작성된 《昭和二十年(쇼와 20년, 1945) 朝鮮人要視察人略名簿(조선인요시찰인약명부) - 特高課(특고과)》에는 11월 10일생으로 등재돼 있다.[3] 인근의 남풍리와 함께 창녕 조씨 집성촌이다. 김준연 전 법무부장관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세포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