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의 검술을 일컫는다.2. 정의
조선 시대에 군영, 민간 등 각계 각층에서 사용된 검술을 일컫는다.주로 환도를 사용하나, 창포검을 쓰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일본도를 노획하여 사용하기도 했던 듯하다.[1]
3. 역사
3.1. 조선 전기
3.2. 조선 중기
숙종 대 군교 김체건을 통해 군영에 왜검이 도입된다.3.3. 조선 후기
고종 시기에는 일본의 격검이 도입된다. 순검의 격검 기구 도입 비용과 관련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다[2].대중의 인식과는 달리, 일부 검술은 멀지 않은 시기까지도 수련된 것이 확인된다. 예로 군영의 제독검은 1880년까지 수련되었다.[3] 또한 무예청의 경우, 1910년 이전까지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4]
즉 조선 검술 자체는
이들로부터 이어졌음을 주장하는 편이 고조선, 고구려를 위시한 일부 무예의 계보 날조보다 합리적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민간의 남사당놀이에는 칼살판이라는 땅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3.4. 현대
광복 이후인 1949년에는 검도, 총검술 등을 수록한 무예도보신지가 발간된다.현재 조선 군영의 검술은 공식적으로 전승이 단절되었다. 때문에 각 단체에서는 무예도보통지를 통해 복원하고 있다.
간혹 가전 전승을 말하거나, 한국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검술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전승을 증명할 자료가 부족하거나, 유파측에서 증명에 관심이 없는 등의 이유로 국가적인 인증은 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유사 전통 검술의 과도한 PR에 질린 나머지, 검증이 아닌 무조건적인 비판부터 내세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
4. 특징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군영 검술을 기준으로 설명한다. 무반가에는 상급의 커리큘럼을 가진 검술이 존재했을 수 있다.[5]대타 수련인 교전을 제외하면, 모든 검술이 홀로 연무하는 투로의 형태로 되어 있다. 이는 쿠미타치(組太刀) 위주로 수련하는 일본 고류 검술과는 대비되는 부분이다.[6]
무예도보통지의 삽화에서는 양손을 붙여서 사용한다. 이는 환도의 자루가 대부분 길지 않은 편이기 때문으로 보인다.[7] 일본 검술에 익숙하다면 이러한 파지법이 어색해 보일 수 있다.
만기요람의 용호영[8] 시예(試藝)에 의하면, 용검수(用劍手)는 용검, 쌍검, 제독검, 언월도, 왜검, 교전본국검, 예도를 통합하여 일기(一技)로 삼는다.
일성록에는 검술을 척계광식 9등급[9]으로 평가한 기록들이 있다.
5. 기타
- 조선은 검술 수련이 금지였는가?
혹자는 조선에서 무예를 익히는 것을 역모라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왜검으로 잘 알려진 김체건, 김광택과 군영에 예도를 전한 고후점, 고만흥 부자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사사로운 무예의 수련 및 전수가 완전히 금지였다면, 김광택은 금위영에 채용되는 것이 아니라 처형되었을 것이다.
6. 대중 매체에서
대중의 인식이 개선되며 띠돈, 뒤로 차기 등의 패용법이 반영되고 있다.주로 사극에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나, 환도를 쓰는 인물이 사용하기도 한다.
7. 관련 문서
7.1. 검술
7.2. 도검
7.3. 인물, 단체
[1] 대표적으로 권응수 장군의 장검이 있다.[2]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3205023_002[3] https://jsg.aks.ac.kr/vj/gy/item?[4] 순종순정황후가례도감의궤(1906)에서도 확인된다.[5] 병사를 양성하기 위한 군용 무술은 보급형이다. 그러나 전문 무사를 위한 무술은 평생 배워야 할 정도로 체계가 높은 경우가 많다. 군인을 위한 전투 태권도와 프로 선수를 위한 MMA의 차이를 생각하면 쉬울 듯하다.[6] 일본에도 독련 형태의 수련은 있다. 대표적으로 거합이라던지.[7] 물론 개인 취향에 따라 길게 커스텀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긴 했다.[8] 금군[9] 상상~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