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4:32:39

조커: 폴리 아 되/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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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평점
2.1. 평론가 평점
3. 평가
3.1. 긍정적 평가3.2. 부정적 평가
3.2.1. 전작과의 괴리3.2.2. 영화 자체의 완성도 부족3.2.3. 호평에 대한 반론

1. 개요

조커: 폴리 아 되의 평가를 정리한 문서이다.

2.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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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전에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국제 비평가 평점 3.25/5점(전체 6위), 이탈리아 비평가 평점 3.3/5점(전체 5위)을 받으며 전작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 평점을 받아 개봉 이전 기대감을 일으키기도 했다. 전체적인 양상으론《다크 나이트》 이후 최고의 배트맨 프랜차이즈 영화이다"라거나 "일부러 혹평받을 작정으로 만든 영화 같다"는 등 극과 극으로 평이 갈리는 가운데 1편과 매우 다른 속편이라는 것은 공통된 중론이었다.

하지만 정작 개봉 이후의 평가는 관람객과 평론가를 막론하고 혹평이 압도적인 상황이다. 국내에서는 개봉 첫날 곧바로 CGV Golden EGG지수가 64%[1]로 내려앉았으며 롯데시네마 7.6점, 메가박스 6.6점, 네이버 5.4점 등 다른 실관람객의 평점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2]

북미쪽의 반응도 국내와 동일하게 좋지 않은 편으로, 평점을 보면 국내보다 혹평이 더 두드러진다. IMDb의 사용자 평가 비율만 봐도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10점(만점)보다 1점(최하점)이 휠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작은 10점이 가장 많았고 1점은 1.4%로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불호의 경향이 굉장히 강한 셈이다. 로튼 토마토 팝콘지수의 경우 무려 30%대로 추락하였다.[3]

전작과의 괴리와 심각한 완성도 부족 등이 주요 원인이며, 호평하는 의견으로 감상의 초점을 비롯해 작품 외적인 메타적 요소가 많다는 특징이 있다. 호불호를 가리지 않고 전체적으로 영화가 상당히 난해하다는 평이 많다.

전작이 ‘어떻게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었는가’를 그리고 있다면, 이 작품은 큰 틀에서 대중이 열광하는 상징으로서의 조커와 불안정하고 소심한 아서 플렉을 정면으로 충돌시킨다. 이 때문에 ‘조커로서의 아서 플렉’을 기대할수록 실망할 가능성이 높다.

전개의 주요 장치로 기능하는 뮤지컬도 관객들의 반응이 좋지 못하다. 길이나 횟수가 지나치게 과하다는 지적이 많고 일반적인 뮤지컬과 다르게 작중 배우가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공연을 한다기보다 자기 서사를 시도한다.[4] 따라서 화려하게 설정된 배경과 동작이 절제되는 등 실험적 시도가 많이 보인다. 라라랜드 등의 뮤지컬 영화와도 결이 다르다 볼 수 있다.

코믹스 실사영화 사상 최초로 시네마스코어 D 등급을 받았는데, 이는 최악의 코믹스 실사영화로 뽑히는 판타스틱 4(2015)가 기록한 이제까지의 최저점 C-를 거의 10년 만에 갈아 치운 신기록이다.

2.1. 평론가 평점

전문 평론가들만이 참여하는 로튼 토마토 신선도는 33%로 썩은 토마토를 받았고, 신선도의 탑 크리틱 46개 중 33개가 부정적인 평가로 굉장한 혹평을 받았다. 메타스코어는 45점으로 복합적과 불호 평가의 수가 호평의 2배이다. 평가 수치로만 따지면 같은 DC 코믹스 원작 영화 중 망작으로 꼽히는 저스티스 리그보다도 낮다.
뼈 아픈 각성에 목 놓아 노래를
박평식 (씨네21) (★★☆)
소격효과와 자학적 반성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탈진한 활력
김경수 (씨네21) (★★★)
조각난 할리우드의 환상 속을 헤매는 조커 최후의 벌레스크
김소미 (씨네21) (★★★)
내가 쓴 증오의 노래의 돌이킬 수 없는 성적표를 받아든 비운의 예술가
김철홍 (씨네21) (★★★★)
서도철도 아니고 조커가 자기 반성을 하니, 마음 한켠이 울적하다
김현승 (씨네21) (★★★)
유희를 내던진 거대 엔터테인먼트, 지친다
이용철 (씨네21) (★★★)
서커스장에서의 길고 지루한 진담과 궁색한 속죄
이우빈 (씨네21) (★★☆)
반대를 위한 반대명제
이병현 (씨네21) (★★)
성공한 1편의 별책부록
이해리 (맥스무비) (지수 69%)
망상과 광기를 공유하거나 단절해가며 전편과 내내 밀고 당기듯 치열하게 추는 2인무.
이동진 (★★★★)[5]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시리즈의 연속성을 노렸다기 보다 '조커란 무엇인가?' 라는 그 질문 자체로 감독 나름대로의 깊은 고찰을 담아냈다고 볼 수 있다. 부제인 '폴리 아 되'가 작품의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이었던 것. 작중 아서는 사람들의 광기와 기대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 조커가 되어 사람들이 원하는 조커를 연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최후반부에 아서는 조커는 환상일 뿐 자신은 아서 플렉이라며 한탄하고 극 중 인물들의 상당수는 이에 대해 극도의 실망감을 표출한다.

현실 관객들도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지 않았다며 동일한 혹평을 내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내적으로나 메타적으로나 ‘타인이 아서 플렉을 조커라며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또 일방적으로 실망한다’는 일치된 양상을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제목인 ‘폴리 아 되’는 아서와 할리(로 대표되는 조커 지지자들)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실 관객과 극 중 조커 지지자들의 관계’라고 볼 수도 있다.

전작이나 본 작품이나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전작은 사회 시스템 내에서 약자인 아서 플렉이 조커가 되는 과정을 보여줬다면, 본작은 이미 '조커가 된' 아서 플렉이 외부에 의해서 끊임없이 조커이기를, 혹은 조커가 아니기를 강요받으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과정을 보인다. DC 코믹스에서의 조커가 광기의 화신으로 받아들여지는 점을 생각하면, 조커를 낳은 '사회'라는 광기를 조명하고 사회 앞에서 개인은 아무것도 하지 못 한 채 그저 휩쓸려 다니는 존재라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오히려 조커에 걸맞은 영화라는 호평이 나오기도 한다. 전작에서 잔뜩 쌓인 분노와 불만이 가득한 사회가 조커라는 불씨로 인해 타오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고담은 조커가 언제 어디서라도 태어날 수 있는 광기의 산실이 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불호평에서 말하는대로 분명 관객들은 아서 플렉이라는 인간에게 관심이 없지 않았다. 그의 과거사와 현실에서 느끼는 좌절과 슬픔, 분노에 크게 공감을 표하고 그가 조커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심히 공감한건 분명하다. 하지만 이는 결국 혼돈과 파괴의 화신으로 치달은 조커라는 빌런의 오리진을 설득력 있게 극이 제시하면 그것을 흔쾌히 납득하고자 하는 심정에서 나온 것임도 분명하다. 이 영화는 표제부터가 '조커'고 아서 플렉이라는 작중의 주인공이 제목의 슈퍼빌런 조커로 가는 서사를 그리고 있다는 것 쯤은 이미 영화를 보자마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1편에서 아서 플렉이 조커로 가는 모습을 애초에 기대하고 있던 관객들은 그가 정말로 조커 그 자체가 되길 원했는가, 그걸 긍정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에서 '당연히 그는 이런 불행한 과거를 겪었으니 조커로써의 삶을 긍정할 수 밖에 없었고, 긍정해야 한다'고 단정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2편에서는 '실은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아서 플렉이라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기원을 알 수 없는 혼돈의 악신 조커'가 아니라 '인간 아서 플렉'인 것이고 그에게는 어느쪽으로든 갈 수 있는 길이 있었으며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렇듯이 그는 망설이고 흔들리다가 그 길을 포기한 것 뿐이다. 애당초 1편에서부터 아서는 조커라는 아이덴디티에 휘말린 것이지 조커 그 자체가 되길 정말 원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결국 조커라는 부자연스러운 옷을 입은 사람에 가까운 것이며 그가 조커로 가는 길을 일관성 있게 견지한 것은 엄밀하게는 아서가 아니라 그가 조커가 되는 결말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한 관객들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서가 지지를 받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아서 플렉이 아니라 조커를 지지한 작중의 조커 지지자들처럼 진정으로 그는 관객들에게 조차 이해받지 못했다는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1편에서 아서 플렉이 조커를 자신의 일부라고 받아들였던 것은 분명하다. 조커가 비록 달갑지 않은 뭔가라 할지라도 결국은 스스로 받아들임으로써 아서의 일부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혁명가이자 빈민층의 분노 표현이었던 조커는 아서가 의도한 바가 전혀 아니었다. 아서가 조커라는 자의식을 가진 시발점인 지하철에서의 살인은 폭행에 대응하다 벌어진 우발적인 사건이다. 이것이 매스컴을 타며 광대는 빈민층의 분노를 표현하는 상징으로, 범인은 그들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를 보며 그동안 장애로 인해 무시받고 소외당한 아서는 마침내 자신이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수단을 찾는다. 이렇듯 조커는 대중과 아서에겐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아서에게 조커는 아서 자신을 인정 받기위한 수단으로 대중이 받아들인 투사와는 거리가 있다. 후에 머레이를 죽임으로서 대중이 바라는 조커의 모습은 완성된다. 그러나 아서는 대중이 바라던 모습을 의도하지 않았다. 둘의 견해는 큰 간극을 보이고 대중의 조커를 받아들이려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한 이야기가 조커2의 이야기이다. 1편을 전복해서, 1편에서 마치 코미디언으로 자의식을 구성해보려다 실패한 것처럼 2편에선 아서 자신이 새로 받아들인 이 조커라는 자의식을 구성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이 경우 아서라는 소시민적 면모가 존재했기에 이마저도 안 된것이다. 즉, 1,2편을 통틀어 조커 시리즈는 '아서 플렉이라는 사람이 사회에서 받아들이는 무언가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이야기'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은 사실 이렇게 단 하루의 불운한 순간을 맞이한 사람들조차 항상 모두 같은 광기와 혼돈으로 치달야하고 자신의 폭력과 파괴를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하지 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그렇게 항상 일관성만 있는 존재가 되기 어렵고 대부분은 항상 자신의 앞에 놓은 길의 불확정성에 대해서 고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치 킬링 조크의 결말에서 똑같은 '몹시 불행한 한 순간'을 겪고 변해버린 사람들조차 그 결과물은 배트맨과 조커로 확연히 갈려진 것처럼 말이다.

1편과 2편에서 아서가 진정으로, 일관적으로 원했던 것은 사람들의 인정과 자신을 사랑해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들의 존재였다. 아서는 폭주하는 혼돈과 광기의 화신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가 폭력을 갈구하는 자들을 만족시키려 조커와 같은 폭력과 광기를 흉내내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반대로 모두의 사랑을 받는 어릿광대가 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본인 자신이 가진 능력의 한계로 본인이 원하는 사람은 어느쪽으로든 도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떤 길도 선택할 수가 없어서 자포자기하고, 파멸해버리는 것이 이 영화 시리즈가 일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1편의 관객들은 그 아서 플렉의 암울한 삶을, 정도는 다르지만 역시 고달픈 일상의 한 조각을 할애해가며 1시간 이상 지켜본 끝에 그가 조커야 되어야 할 당위성만을 생각하고 그가 조커라는 슈퍼 빌런이 되면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1편과 2편에서 보여줬듯이 현실에 천국은 없고 오로지 그의 망상에만 존재했다. 그렇기에 그의 노력 자체가 그를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자신과 주변을 오히려 불행하게 했고, 그의 노력도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커 시리즈는 그런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버려 실존을 위협받는 개인에게 닥쳐온 거대한 비극을 관조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다. 물론 아서에 극히 공감하고 어떤면에서는 동치하면서 그의 행복을 어떤식으로라도 바라기에 그가 조커가 되는 것은 설득력이 있으며 '조커가 되는 것은 오히려 그의 당연한 권리'하다고 생각했던 관객에게 이게 배신으로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고 충분히 이해 가능한 평가이기도 하다. 1편은 어디까지나 그래도 앞으로를 기대하는 일종의 '해피엔딩'이라고 볼 소지도 있었는데 2편에서 이 시리즈는 희망이 없는 비극이라고 선을 그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극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면 폴리 아 되 이후의 고담은 이제 자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버렸기에 배트맨이 등장할 당위성이 갖춰지므로 조커만 사용한 개별적인 작품임에도 나름 제 역할을 다 한 셈. 거기에 이 시리즈를 조커의 이야기가 아니라 고담에 살고있는 소시민 아서 플렉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의 비극적인 일대기를 잘 마무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작이 바닥에서 출발해 상승해서 조커가 되는 스토리라면, 본작은 거꾸로 조커라는 정상에서 바닥으로 처박히다 못해 완전히 매장당하는 스토리로, 완벽한 산 모양 곡선을 이룬 피카레스크 영화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코믹스의 조커는 정체불명에다가 다른 이유 없이 미친놈이기에 미친놈인, 혼돈 악이었기에 정체가 온 나라에 알려지고 불쌍한 사연으로 인해 악해진 아서 플렉은 애초부터 조커가 될수 없기에 그를 치워버리고 이후 나올 조커의 정체와 과거를 다시 정체불명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점도 외적으로 호평을 받기도 한다. 아서는 수수께끼의 한 수감자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는데 이후 보인 행동[6]을 볼 때 그가 우리가 알던 진짜 조커일 가능성이 존재하며 기구했던 삶과 함께 조커라는 페르소나까지 미치광이 사이코 빌런에게 강탈당하는 아서의 비참한 결말로 볼 수 있다. 혼돈악 그 자체인 원작의 조커를 생각하면 아서가 창조해낸 조커라는 상징이 불러일으킨 혼돈과 파괴를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아서가 이를 부정하자 그에게서 더이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망설임없이 죽여 빼앗아간다. 아마 진짜 조커는 이후 출소하거나 탈옥해서 마치 아서의 거죽을 뒤집어쓴듯이 자신이 아서인양 행세하며 그의 삶을 마치 자신의 것인것마냥 이야기하며 자신의 과거를 날조할지도 모른다.[7] 사실 그저 불행한 소시민이었던 아서에게서 거대한 악이 탄생한것. 이런 관점으로 해석하면 이 시리즈를 진짜 조커의 오리진, 프리퀄 영화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호평이 많다. 특히 주연인 호아킨 피닉스는 전작에서 이미 오스카 상을 받았는데, 속편에서는 그걸 뛰어넘었다는 반응이 지배적일 정도로 또 하나의 커리어 하이를 갱신했다.

후술하듯 뮤지컬의 남발이라는 연출이 전반적으로 혹평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 이외의 화면 구성, 의상과 미술 등을 비롯한 미장센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좋게 평가받은 편이다. 특히 리와 사랑에 빠져 아서가 망상에 빠진 리와의 첫 뮤지컬 장면에서의 빛이 서서히 밝아지며 등장하는 촬영 구도로 이룬 아름답고 예술적인 표현이 미적으로 극찬을 많이 받았다. 일부 연출은 전작과 대비를 이루기도 하므로 두 편을 모두 본 관객은 그 차이점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혹평과는 별개로 이 영화는 뮤지컬 영화로 볼 수 없을 정도로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뮤지컬 장르를 활용한다. 본작에서의 뮤지컬 장면은 기존처럼 즐거움이나 슬픔 등의 감정을 일으키며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서가 현실에서 망상으로 도피할때마다 겪는 공허한 내면의 광기를 직접 드러내는 장치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느끼는 지루함과 어딘지 불편한 위화감은 지극히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실제 감독과 배우들이 뮤지컬 장면을 어딘가 어색하고 부족하게 보이도록 의도했다는 인터뷰가 있는데, 이것 역시 위와 같은 목적으로 볼 수 있다. 혹평이지만 제발 노래좀 그만 부르라는 아서의 결말부 대사에 관객들이 깊이 공감했다는 점은 의도된 지루함과 불편감에 느꼈던 피로를 토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 내내 반복되는 의미없는 뮤지컬 장면에 제발 멈춰주길 바라는 관객의 마음이 바로 아서가 멈추지 않는 자신의 광증에 제발 멈춰달라 애원하며 느꼈던 그 감정이었을 것이다.

3.2. 부정적 평가

아서 플렉 : 싸한 분위기를 보니, 사람들이 원하는 건 이게 아닌 거 같은데?
리 퀸젤 : 괜찮아, 자기. 그렇다면 사람들이 원하는 걸 주자고.
조커와 할리 퀸과의 만담 中[8][9]

3.2.1. 전작과의 괴리

이 영화는 명백히 전작이 있는 영화이므로, 영화 자체와는 별개로 전작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의 평가가 이뤄질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제시하는 바가 전작과는 너무 다른지라 당연히 관객들에게 반발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불호의 의견으로 이어진다.

가장 주된 비판은 아서 스스로가 조커를 부정함으로써 전작에서 쌓아올린 '조커'의 서사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는 평으로, 아서 플렉은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10] 조커를 자처하다 감당하지 못한 정신질환자에 불과하다는 결론으로 영화가 끝이 나버리면서 관객들에게 실망감을 표출했다는 평이 대다수다.

이런 실망감은 영화에서 의도한 것이라고 쳐도, 예고편 연출부터 '슈퍼 빌런'이 된 조커의 광기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대놓고 그런 기대를 유도했기에 관객들에게 '배신당했다'고 여겨도 마땅할 비판받을 요소다. 심지어 조커와 할리 퀸이 추종자들의 환호와 함께 위풍당당하게 춤을 추며 법원에서 나오는 예고편의 마지막 장면은 예고편 낚시로 정작 본편에는 단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11] 이 장면은 1차, 2차 예고편에서 전부 등장한 장면이기도 하고, 전작에서는 혼자서 추던 계단 춤을 이번에는 할리 퀸과 함께 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 기대한 사람들을 낚았다고도 볼 수 있다.[12] 하다못해 아서의 망상 속 장면으로라도 처리될 여지가 있음에도 결코 나오지 못했다.

상업영화라는 장르에서 흥행을 위한 어느 정도의 포장은 당연한 것이고, 어쩌면 그 또한 배급사의 실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관객에 대한 '기만'이 되면 곤란하다. 이 영화는 조커가 주인공이 아님에도 아서가 조커인 것 마냥 주인공인 척했고, 심지어 영화에 나오지 않는 장면까지 매 예고편마다 집어넣어 광고했다. 조커가 주인공이라는데 '조커가 된' 아서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결국 그럴 거면 왜 조커라는 이름을 달고 영화를 만들었냐는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물며 일부 호평에서는 이 영화를 차라리 예술영화로 분류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러면 이 '기만'은 더더욱 문제가 된다. 실제로 이 작품에 비교적 좋은 평가를 내린 이동진 평론가조차 예고편이 의도적으로 관객을 오도한 것은 마케팅의 선을 넘었다고 지적했으며, 이 모든 실패와 악평까지 감독의 의도라는 것은 오히려 영화에 대한 과몰입이라 선을 그을 정도다. #캡처, #

마치 영화의 조커 추종자들처럼 관객들도 결국 아서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조커에만 관심을 가졌다고 반박하지만, 전작의 결과물을 부정하는 해체주의 안티 플롯을 내세우면서 관객들이 아서에게 관심이 없다고 주장하는 건 아전인수식 해석에 가깝다. 엄밀히 말하자면 관객들은 아서에게 관심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과거사와 현실에서 느끼는 좌절과 슬픔, 분노에 크게 공감을 표했다. 행위 자체에 찬성하지는 않아도 그에게 관심을 갖고 또한 이해했기에 아서의 조커가 이전과는 상당히 이질적임에도 아서를 조커라 부를 수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애초에 1편의 마지막에서 아서는 조커라는 자신을 받아들임으로써 관객들에게 조커가 곧 아서 플렉이라 보여지도록 완성된 캐릭터다. 즉 1편의 관객들은 그 아서의 암울한 삶을, 정도는 다르지만 역시 고달픈 일상의 한 조각을 할애해가며 1시간 이상 지켜본 끝에 그가 조커가 되어야 할 당위성을 인정했던 것인데 2편의 전개는 그걸 통째로 부정해버렸으니 애초에 1편을 봐야할 당위성을 잃게 만든다.[13]

종종 아서가 본디 원했던 것은 조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의 인정을 바랐을 뿐이라는 반론이 있으나, 이는 전작을 고려하지 않는 발언이다. 아서 스스로도 조커가 일종의 상징임을 분명히 인지했고, 내리막길임을 알고 있음에도 끝내 스스로가 조커가 되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 반론대로라면 아서가 권총을 랜들에게 억지로 받고 억지로 월스트리트 금융인 세 명을 총으로 쏘고, 머레이를 억지로 쐈다는 전개가 된다. 1편에서 아서가 금융인 세 명을 쏘아 죽인 것은, 그 금융인들이 여성을 괴롭히다가 자신도 괴롭히려 하자 자기방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쏘았다고 해도, 그 후의 서사는 아서가 의도하는 대로 흘러갔다. 첫 살인 후에 세상의 주목을 받는 것에서 흥분하고, 랜들을 죽이고 계단에서 신나게 춤춘 것은 아서가 아닌 조커가 원했다는 궤변이 돼버린다. 무엇보다 아서가 결국 '조커'를 자신의 일부라고 받아들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사람은 결코 자신이 원하는 존재만이 될 수가 없고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게 자신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아이덴티티에서 스스로 부정하고 싶은 일종의 결함으로 인식되는 요소가 존재한다. 다시 말해 오로지 원했던 것만이 그 사람의 진정한 구성 요소라고 부를 수 없으며, 아서 플렉은 조커가 비록 달갑지 않은 뭔가라 할지라도 결국은 스스로 받아들임으로써 틀림없는 그의 아이덴티티의 일부가 되었고 그렇게 하나의 완성된 캐릭터로 자리잡은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2편에서 갑자기 조커가 아니라고 부정해봐야 1편에서 완성된 캐릭터를 목격한 관객에게 있어서 심한 거부감이 들게 된다. 1편의 서사 끝에 조커를 받아들인 아서를, 갑자기 사실은 이걸 원한 게 아니었다며 기존으로 되돌리는 전개를 보여주는 것은 전편에서 캐릭터의 서사를 쌓아올리는 과정을 전면으로 부정함으로써 캐릭터 자체를 퇴화시켜버린다.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이런 식으로 캐릭터를 퇴화시키는 건 같은 인물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시리즈물에서는 결코 좋게 평가받지 못하는 부분이다.

조커를 포기하는 과정과 묘사 또한 결과적으로 부실했는데, 할리의 부추김 속에 변호사까지 해임하며 의기양양하던 흉악범 빌런이 무너지는 계기는 '고작' 게리의 하소연이고 그 직후 아서는 곧바로 공개적으로 조커이기를 포기해버린다. [14] 법원 폭파 씬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이 장면 자체로도 전작에 비해 빌드업이 부족하다. 전작에서 법원 폭파씬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장면이 바로 아서가 머레이를 쏴죽이는 장면인데, 전작에선 아서의 극도로 불안정해진 정신 상태와 소유하고 있던 총으로 '아서가 머레이 쇼에서 자살할 계획이다'는 걸 보여줌과 동시에 그럼에도 다르게 흘러갈지도 모르는 전개로 기대시킨 후, 아서가 토크쇼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고 나서 머레이의 지속적인 조롱으로 인해 아서가 점점 폭주하기 시작하는 전개를 보여줌으로써 언제 터질 지 모르는 긴장감을 심어주다 기어코 머레이를 쏴죽여버리며 카타르시스를 극대화시켰다. 하지만 본작의 폭파 씬은 빌드업이라 해봤자 전날 아서가 했던 대사 한마디가 전부고, 뜬금없이 대폭발이 일어나기 때문에 보는 사람마저 이게 뭔 상황이냐며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어버린다. 서스펜스 문서 최상단의 인용문을 한번 읽어보면 얼마나 나쁜 연출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대미라 할 수 있는 법원 폭파 씬과 이어지는 차량 탈출 씬은 '조커의 추종자들이 아서 플렉을 버렸다'는 주장마저도 어색하게 만든다. 조커 추종자들은 끝까지 아서를 데려다 주려고 했다! 그저 아서가 자신을 구원해 줄 일말의 가능성을 걷어차놓고, 결국 자신을 구해보려는 이들로부터 제 발로 도망치며 부정해버렸다. 이는 '조커인 척하며 조커를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심지어 마지막까지 조커를 포기하지 않는 관객들을 매몰차게 내팽개쳐버렸다'고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문제다.

결국 관객들이 이 영화에서 목도하는 것은 '흉악범 빌런의 몰락'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정신질환자의 몰락'이 된다. 1편에서는 소시민으로부터 조커가 되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 반면, 2편에서는 조커에서 소시민이 되는 과정을 표현했어야 했음에도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아서는 광기로 도시를 물들이는 빌런은 고사하고 그저 타인에게 휘둘리는 소시민의 모습, 심지어는 교도관들의 폭력에 무자비하게 노출되어 있는 '약자'의 입장으로부터 끝까지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피카레스크적 구성의 완결조차도 되지 못하고 어딘가가 뚝 잘려나간 시리즈물이 되어 관객들이 영화에 공감하지 못하게 되었다.

시리즈물에서 후속작은 전작에서 이어지며 설정을 공유하는 구조를 띠는 게 기본이다. 조커라는 캐릭터를 완성시킨 결말에서 갑자기 조커의 모습을 보이지도 않은채로 그저 조커를 부정하는 전개로 뒤집는다면 관객들 입장에서는 설정파괴로 느껴지면서 당연히 거부감이 클 수밖에 없다. 특히 서술한 지루한 연출과 지나친 뮤지컬 남발로 인해 이 영화 내용에 납득할 만한 몰입감도 크게 하락하면서 그 거부감은 더욱 심화된다. 이는 관객들의 태도와 작품의 의도만을 논하면서 정작 그 내용물로 관객을 설득시키려는 노력이 매우 게을렀다고 평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1편에서 아서 플렉을 조커라는 빌런이자 분노의 상징으로 완성시켰지만 후속작에서는 조커라는 개념 자체가 사실 존재할 필요조차도 없게 됐다. 1편에서도 아서 플렉은 기존의 조커와 이질감이 강하기는 했으나 배트맨 세계관의 요소가 잘 어우러졌기에 재해석의 영역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이지, 2편은 배트맨 세계관과 전혀 상관없는 나약하면서도 어리석기까지 한 범죄자를 향한 조명에 불과해졌기 때문이다. 고담 시는 '배트맨'의 활동 무대로서 창조된 장소다. 즉 그 디스토피아적 막장 설정은 어디까지나 배트맨이라는 슈퍼히어로가 빌런들을 찾아내어 응징하는 배경으로 필요성이 인정되어 수용된 것이고, 배트맨이 없이 조커가 단독 주인공인 전작에서는 그 역할을 아서 플렉이 고담의 부조리 속에서 조커로 각성함으로써 대신하였다. 그런데 아서 플렉이 그 조커조차 되지 못한다면, 1편의 그 암울함을 기억하는 관객들은 고담시 자체를 수용할 어떠한 동인도 찾을 수 없게 된다. 캐릭터 이전에 그 배경의 존재의의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이다. 반대로 1편과 별개로 2편만 떼어놓고 생각하면 영화 안에서 비판한다는 고담 사회의 문제가 뭔지조차 희미해진다.

서사를 뒤로하고 오직 메시지만을 강요하는 전개는 관객들의 반응과 태도로 영화의 평가를 완성하고자 하는 행위에 가까우며 영화 내부가 아닌 외부적인 요소만을 논하는 평가라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 "관객의 반응은 모두 영화의 의도대로" 라는 논리를 내세움으로써 영화의 좋고 나쁨을 관객의 반응과 사회적 영향력 등의 외부적 요인을 최우선 기준으로 두고 판단하게 되는 일종의 순환 논리의 구조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영화의 결과물보다는 영화의 의도를 통해 평가받으려는 행위라고 여겨질 수 있다. 이 점을 불쾌하게 느낀 관객들에게는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II와 비교되기까지 할 정도.

3.2.2. 영화 자체의 완성도 부족

본작이 상업성이 아닌 예술영화를 목표로 하였다 가정해도, 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영화의 완성도 자체가 매우 떨어진다. 실제로 상업성과 상관없이 높은 점수를 주기도 하는 평론가들조차 전반적인 완성도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지적하며 좋지 못한 평가를 내리는 중이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뮤지컬 영화에 가까울 정도로 분위기가 전환되었는데, 이게 자주 나와서 자꾸만 극의 맥을 끊어 먹고 지루하다는 지적이 많다. 오죽하면 더 타임스토드 필립스 감독이 후속작은 없을 것이라 말했지만 마음을 바꾼 대신 뮤지컬이 탄생했다며 비꼬았다. 전작은 어디까지나 리얼리즘에 가까운 극 영화였는데, 본작은 성격이 확연히 달라지면서 뮤지컬로써 이 괴리감을 해소하고자 시도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영화의 긴장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산만하게 만들었다.

긴장감과 분위기가 고조되는 순간 매번 맥빠지게 로맨틱 코미디스러운 노래와 춤을 추며 역으로 영화에 집중되지 못해서 되려 괴리감이 들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서는 감옥과 법정으로 한정된 공간적 배경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한 것이라고도 여기나, 그런 류의 법정영화로 2시간을, 그것도 엄청난 몰입감과 함께 끌고 간 작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미 감옥과 법정 밖 리 퀸젤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도 나온다. 더군다나 정극 사이의 공간을 채우느라 고심했다면 굳이 138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요구할 필요는 없기에 대체로 뮤지컬 파트는 완성도는 높아도 관객들의 몰입감을 자아내는데에 실패했다고 보는 게 주된 평가이다.

이건 상술한 전작과의 괴리와도 어느 정도 맞물리는 문제점이다. 작중 내내 아서 플렉과 조커를 철저히 분리시키며 아서에게 초점을 맞추는 작업이 반복되기에, 관객들을 캐릭터가 재구성되는 이 상황에 몰입시키기 위한 장치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오히려 전작보다 더한 몰입감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는데 뮤지컬을 비롯한 영화의 모든 연출이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뮤지컬은 너무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해서 지겹다는 감상만 남게 되며, 모든 문제의 원인을 아서에게 몰아넣기 위한 작업이 무의미한 학대에 가깝다 보니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과하다는 느낌만 든다. 본작은 배트맨 세계관의 요소를 거의 배제한 채 현실에 있을 법한 나약한 인간 한 명을 조명하는 내용이라 전작보다 현실적이라 볼 여지가 큼에도 오히려 전작의 세계관보다도 훨씬 이입하기 힘든 상황이 갖춰진다. 이 정도로 몰입감이 조각난다면 아무리 좋은 메시지를 갖춘들 관객들에게 메시지 전달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이 영화가 평론가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요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회의 안전망이 무너진 현실의 씁쓸함, 상징으로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개인, 미쳐 돌아가는 책임을 아서 한 명에게 미루는 고담 등 모든 요소들이 지나치게 현실적이라 오히려 불쾌함을 불러일으킨다. 전작도 비슷했지만 마지막에 아서가 조커가 되어 폭발하던 순간의 통쾌함으로 만회한 것에 비해 본작은 극중 내내 텁텁한 먼지를 씹는 느낌이 들게 한다.

웹진과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주제나 메시지를 풀어내는 방식이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비판이 압도적이다. 스크린 인터내셔널의 팀 그리어슨은 '뛰어난 완성도를 지닌 전작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평을 했으며, 필름 아일랜드 매거진의 셰인 맥케빗은 '전작과는 다른 매력이 있지만, 다시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다'라고 평했다. 더 가디언은 '전편처럼 거칠면서 진지한 분위기는 있지만 지루한 작품'이라며 비판했고, BBC는 '조커 신화의 해체 작업이 대담하기는 하나, 짜증스러울 정도로 교만할 뿐만 아니라 확실히 재미가 없다'고 비판했다.

3.2.3. 호평에 대한 반론

관객들의 혹평은 단순히 아서가 조커여야만 한다는 고집이 아니다. 전작의 부정이라 여겨지기에 나타나는 거부감의 표출이 가장 큰 원인으로 이는 완성도 문제와 비슷한 요인이다. 이러한 거부감을 최소화하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게 연출할 수 있느냐는 결국 감독의 역량에 달려있을 뿐 관객에게 일부러 그 기대를 바꾸길 요구할 수 없다.

호평의 가장 중심적인 해석은 '관객은 아서가 아닌 조커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것인데 정작 이 영화는 조커가 우발적으로 사건을 저질렀을 뿐이라는 매우 단편적인 일면을 발단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애초에 아서의 범죄가 우발적이었다는 건 이미 1편에서 분명하게 묘사됐었다. 그럼에도 조커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장면으로 끝맺었는데 이미 전작에서 마무리된 요인을 다시 끌고와 처음부터 되풀이하면 이 역시 캐릭터의 퇴화나 다름이 없다. 조커가 되겠다는 아서의 선택은 1편에서 자신이 겪고 행한 일련의 사건들을 모두 끌어 모은 일종의 총체적 결론이며 캐릭터의 완성인데, 2편은 '우발적인 사건'이라는 아주 단편적인 일면 하나에만 집중하여 전작의 총체적 결론을 통째로 부정하는 IF 세계관을 따로 구축한 셈이다. 이건 아서에게 초점을 맞췄다는 감독 본인이 정작 아서를 이루는 극히 일부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커다란 모순에 봉착하게 만든다.

이러한 모순의 가장 큰 문제는 관객들은 오히려 아서에게 이입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1편에서 아서에게 이입하고 공감하여 '아서 = 조커'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관객은 이 영화를 즐길 수가 없다. 조커 1편부터 쭉 아서를 웃기는 헛수고와 착각을 일삼는 웃기는 캐릭터로 생각해야 하며, 아서가 겪는 고난을 '조커가 되기엔 한참 부족하다'고 평가해야 한다. 1편 마지막 장면을 어쩌다 한 번 관심을 받았을 뿐, 그 기나긴 서사 끝에서도 아서는 캐릭터로서 아무런 성장도 없었으며, 조커의 겉모습만 뒤집어 쓴 것에 불과할 뿐 진정한 조커가 된 적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둬야만 한다. 사람 셋을 총으로 사살하고, 직장 동료를 가위로 살해하고, 자기 양어머니를 죽이고, 생방송에서 호스트를 사살하는 식으로 아서의 살인은 스케일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 갔다. 이를 그저 우발적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캐릭터 서사에 아무 영향이 없다고 주장한다? '관객들은 아서가 아닌 조커에게만 관심이 있었다'는 해석이 근본부터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조커를 빼고 보라고 하면 아서는 사람 6명을 죽인 흉악범이라는 점만 남는 인물인데 도대체 관객이 이런 흉악범에게 왜 관심을 줘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이런 해석은 너무 작품 외적으로만 영화에 접근하는 것으로, 작중 내용이나 완성도에 상관없이 관객 스스로 감상의 초점을 아예 뒤집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심각한 맹점을 지니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이 영화를 이해하지 못한 관객의 탓이라고 떠넘긴다 여겨질 수 있으며 실제로 커뮤니티 등지의 팬들에게 많은 반발을 사 초기 흥행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

또한 결국 아서라는 존재가 영화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무엇이냐는 반문에 직면할 수 있다. 결말부를 언급하며 단순히 조커가 사회의 현상이라고 넘어가면 굳이 이 시리즈의 주인공이 아서여야만 할 이유가 아예 없다. 그 순간부터 아서에게 초점을 맞추는 영화의 행위 그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뜻이다. 조커 시리즈는 엄연히 배트맨이라는 히어로 장르 세계관의 일부다. 이런 장르는 주인공인 히어로와 또다른 주인공이라 볼 수 있는 빌런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기에 히어로와 빌런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인물'로 세우려는 시도 자체는 사실 금기에 가깝다. 이는 감독이 시리즈의 장르적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서 플렉이 기원이 명확하고 이로 인해 약해져서 조커에 어울리지 않다는 주장은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의 조커가 '브루스 웨인의 원수'라는 기원을 부여했음에도 매우 큰 인기를 얻었음을 간과한 주장이다. 또한 2편에서 전작에 호평받았던 배트맨 세계관의 요소까지 대부분 배제하더니 여기에만 다시 원작을 끌고 오냐는 반발을 사기도 했다. 무엇보다 2편에 거는 팬들의 기대가 컸던 건 오히려 저렇게 약한 조커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조커가 도대체 어떻게 배트맨의 숙적이라는 거대한 빌런으로 거듭나는지 그 서사를 기대했던 것이다. 전작의 완성도가 워낙에 훌륭했고 그 끝이 토마스 웨인의 죽음과 대비되는 조커의 탄생이었기에 더더욱.

결말에서 아서를 죽이고 우리가 알던 기원이 불분명한 새로운 조커가 탄생했기에 이를 프리퀄로 볼 여지가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하는 히어로 장르에서 캐릭터의 서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크게 간과한 것이다. 다크나이트의 히스 레저 조커 역시 기원이 불분명한 조커지만 적어도 작품 내에서는 착실하게 서사를 쌓아간다. 기원만 묘사하지 않았을 뿐이지 조커의 행동원리가 무엇인지 매우 세세하게 설명하고 관객에게 이를 납득시킨다. 하지만 본작의 소위 새로운 조커로 추정되는 인물에게는 그 어떠한 서사도 없다. 관객들은 1편의 아서 플렉을 중심으로 쌓아 올린 캐릭터 서사를 지켜봐왔고 이에 공감했는데 2편에서는 철저히 무너뜨린 것도 모자라 그 어떤 서사도 쌓지 않은 엑스트라에게 조커라는 거대한 상징을 너무나 가볍게 넘겨버린 것이다. 캐릭터를 퇴화시키는 걸 넘어서 아예 삭제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는 2편이 '조커가 아닌 아서 플렉을 조명했다'라는 관점에서 입각할수록 관객들의 반감이 커지게 되는 악순환으로 작용한다.

1편의 사회적 영향력을 목격한 감독이 이를 우려하여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다는 의견도 이 영화가 시리즈라는 점에서 심각한 모순을 지닌다. 당시 1편이 개봉했을 때 일부 평론가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우려한 비판과 낮은 평점을 주었기에 논란이 벌어졌었다. 따라서 1편을 호평하기 위해서는 '영화는 영화일 뿐이며 외적인 요소로 작품성을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라는 평가 기준을 지녀야만 했다.[15] 문제는 2편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우려해 아서만을 조명하고 추락시켰다'라고 말할 경우 1편에 호평을 줬던 그 평가 기준을 정반대로 뒤집어야만 한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이해하고 호평하기 위해서는 같은 세계관의 2부작 시리즈에 서로 극과 극인 2가지 평가 기준을 지녀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엄연히 시리즈인데, 갑자기 전작을 호평했던 기준을 정면으로 부정해야만 2편을 호평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격이니 대다수의 관객들이 이를 납득할 리 만무하다. 무엇보다 결국 이건 '감독이 관객들을 잠재적 폭도로 보고 계몽하기 위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뜻이 된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관객을 조롱하기 위해 작품을 만들었다는 이런 주장은 호평이 아닌 심각한 모욕이다.

결정적으로 본작에 존재한다는 이러한 장점들은 해석의 입장 차이라는 영역에 한정된다. 관객이 스스로 감상의 초점을 완전히 뒤집어야만 와닿을 수 있는 장점들이며, 다시 말해 영화가 관객에게 맞추는 것이 아닌 관객이 영화에게 맞춰줘야만 한다는 전제를 요구한다. 이는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극복하는데 아무 보탬이 되지 못하므로 결국 관객에게 대부분 전달되지 못한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이 영화에 어느 정도 장점이 있음을 말하는 평론가들조차 이를 풀어내고 전달하는 방식에 가장 큰 문제가 있음을 공통되게 지적하고 있다.

이 영화에 대한 압도적인 불호는 "본인만의 오리지널 시리즈를 만들 것이지 왜 조커라는 브랜드를 이용하느냐?"라는 거부감에서 출발한다. 전작에서는 고담시의 빈부격차, 줄어드는 복지정책 등 계층간 갈등을 조커라는 네임벨류를 이용해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내려 시도했고 실제로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사회 갈등에서 비롯된 아서 플렉의 폭주가 단순히 아서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포커스가 옮겨졌고, 그런 사이코패스 범죄자 조커에게 열광하는 너희(관객)가 문제라는 식의 전개가 되어 대중적 공감을 이끌어내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조커라는 이름이 없다면 그다지 특출난 점이 없는 사회 비판 영화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이 작품은 배트맨이라는 히어로 장르의 세계관을 가져왔고, 히어로 장르에서 빌런은 또 하나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전작에서 쌓아놓은 주인공의 빌드업을 갑자기 퇴화시키는 것도 모자라 '아서가 조커여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버렸다. 이는 사실상 아서에게 초점을 맞췄다면서 정작 주인공이 아서일 필요가 없다고 묘사하는 셈이다. 영화가 이런 내용이니 자연스럽게 조커가 된 아서를 보고 싶었던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렇게 흥행은 나락으로 갔다.

심지어 이처럼 금기에 가까운 시도를 남발하면서 정작 관객들을 납득시키는 노력조차 매우 게으르다. 감독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그 의도는 선명하다 못해 매우 노골적이지만, 그것만을 최우선으로 둔 탓에 메시지를 거의 강제로 주입시키듯 뮤지컬을 비롯한 모든 연출이 지나질 정도로 과해지고 이에 따라 영화 전체의 완성도가 크게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전작에서도 코믹스에서는 캐릭터 및 모티브 정도만을 가져왔고 오히려 택시 드라이버코미디의 왕 같은 영화에서 더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 적은 있다.[16] 전작에서는 늘 움츠러들던 아서가 흑화하는 감정선과 조커의 탄생이 주 내용이라서 이 문제가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토머스 웨인이라는 캐릭터를 적절히 재해석함으로써 조커의 영원한 아치에너미인 배트맨의 존재까지 자연스레 끌어왔다. 이만큼의 빌드업을 쌓아놓았으면서 정작 본작은 전작을 정면 부정한 탓에 거부감이 강하게 폭발한 것이다. 감독이 자신의 의도를 무엇이라 주장하든 관객과 평론가들은 결과물을 보고 판단할 뿐이며, 결과물을 통해 전달하지 못했다는 건 그저 감독의 역량 부족을 시인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렇다고 해당 영화에서 선보인 '조커' 라는 것이 한 사람을 특정하는 것이 아니고, 마치 개념이나 상징처럼 되어서 여러사람이 그 이명을 사용한다는 것 역시 캐릭터에 대한 신선한 재해석이라 볼 수 없는데, 이미 드라마 고담에서 선보인 적 있는 뛰어난 퀄리티의 캐릭터를 훨씬 열화해서 보여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종합하자면 창작자가 전작과의 연속성과 장르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의도만을 우선시하여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노력을 게을리할 경우 시리즈 전체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주는지 보여주는 사례다.[17] 결론적으로 본작은 상업성과 예술성 양쪽에서 모두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호불호가 갈린다는 표현은 주인공을 향한 공감대의 기반을 튼실하게 쌓아 놓아야 나올 수 있는 평가다. 반면 이 작품은 주인공 아서에 몰입하기 위한 기반을 쌓기 보다 그저 아서 자체를 혐오스럽고 초라한 인간으로 깎아내리는 연출만을 반복했다. 조커 신화를 무너뜨리는 데만 집중하느라 오히려 1편보다도 아서에게 초점을 맞추는 행위를 게을리 한 것이다. 맥락상으로 조커는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라는 표현을 하려는 느낌만 남을 뿐으로, 미쟝센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공감대를 쌓아 놓지 못했으니 전작과의 괴리는 물론이고 아서의 이야기조차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함만 남는다. 창작자의 의도를 비롯해 여러 요인을 따로 떼놓고 본다면 호불호의 영역에서 입장이 갈릴 수 있을지 몰라도, 모든 요인을 한데로 묶은 결과물 그 자체를 두고 평가한다면 영화로서 수준 미달이라는 선고를 받은 것이다.


[1] 이는 그동안 개봉한 MCU 영화 중 가장 관객 평점이 낮은 더 마블스보다도 낮은 지수다. 아무리 망작이라도 에그지수가 70% 미만이 되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가장 최근에 이 정도 수준까지 떨어진 영화는 희대의 망작이라는 마담 웹이 있다.[2] 2024년 10월 3일 기준으로 롯데시네마는 평점 7.9로 선방하는 양상인데, CGV나 메가박스의 경우 상대적으로 비용이 높은 아이맥스, 돌비시네마 위주인 반면 롯데시네마는 일반관 위주이다. '비싼 돈 주고 볼 물건은 아니다'라는 데 인식이 모아지고 있다는 방증이다.[3] 팝콘지수는 80%미만으로 진입해도 호불호의 단계고 60%미만부터는 마담 웹이나 그린랜턴(2011)처럼 쓰레기라고 평가받는 영화들 뿐이다.[4] 레이디 가가는 인터뷰에서 평생을 프로페셔널 가수로 살아오면서 뮤지컬에도 다수 출연했는데 이번의 감독의 요구는, 노래를 일부러 못 부르고 춤을 고의로 어설프게 추는 것이라 정말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조커2의 리 퀸젤의 노래는 레이디 가가가 부르는 것이 아니며 진정으로 리 퀸젤이 부르는 것으로 보라고 했다.[5] 평론가 중에서 비교적 높은 점수를 주었고, 이에 대해 갑론을박이 일어나자 영상을 통해 평점의 이유와 보다 세세한 감상을 밝혔다.#[6] 아서를 찔렀던 흉기로 자신의 입을 찢고 미친듯이 웃는다.[7] 다크나이트에서의 조커 역시 과거에대해 일관성 없는 진술들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진짜 과거가 어떤 것인지 절대 말하지 않는다.[8] 참고로 해당 장면은 아서의 망상 속에서 나오는 대화이기 때문에 리의 대사도 망상이고 아서의 내면을 반영시킨 조커의 대사만이 실제다. 거기다 이 망상은 아서의 자괴감이 반영된 망상이었기에 리가 말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조커의 죽음이라는 것 마냥, 이 대사 뒤에 노래를 이어가려는 조커의 배에 총을 쏜다.[9] 영화가 개봉된 후 제작진들이 자기들을 셀프디스한게 아닐까 화자되곤 한다.[10] 의외로 대부분의 매체에서 조커의 기원은 대개 내친 김에 됐다는 식으로 전개될때가 많다. 은퇴를 앞두고 한탕하려던 경범죄자가 화학약품에 빠져 얼굴이 변색되자 내친 김에 범죄 아티스트의 길을 걷거나, 화학약품에 쩔어 정신이 나가버린 후 쾌락살인마의 길을 걷거나 한다. 차이점이라면 이들은 더 이상 일반인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데 비해, 아서는 몸도 멀쩡하고 자신이 미쳤다는 자각이 없어서 1편 전까진 사회에 순응했을 정도로 이성도 어느정도 남아있었기에 조커를 그만두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착각할 여지가 남은 나머지 흔들렸다는 것.[11] 또한, 영화 홍보 멘트로 '온 세상이 무대라느니, 혼자가 아니야라는 구절이 나왔지만 아서 플렉의 비참한 최후를 보면 전부 다 거짓말이다.[12] 심지어 조커와 할리가 계단에서 함께 춤추는 장면은 예고편을 넘어 무려 아이맥스 포스터로까지 나왔다.# 이정도면 대체 무슨 깡인지 알 수 없을 지경.[13] 어설픈 해체주의 또는 설정파괴를 내세우는 바람에 서사가 용두사미가 되는 것을 넘어, 작가 또는 감독의 역량 까지도 의심받게 된 대표적인 사례가 기안84패션왕이다. 주인공 우기명이 고생 끝에 패션왕 선발대회 준결승까지 갔는데 뜬금없이 준결승을 포기하는 전개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14] 다만 아서가 '가장 동질감을 느끼던 사람'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파괴했단 걸 자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개연성에 아주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영화에서 아서는 게리를 심문하며 마치 머레이가 했던 것처럼 게리를 공개적으로 웃음거리로 만들려 했고, 그러면서 뭔가 기대를 품는 모습을 드러냈지만 돌아온 건 자신과는 전혀 다른 평범한 사람의 하소연이었다. 중요한 장면이었음에도 심리 묘사가 부실해서 관객들은 다소 납득하기 어렵게 만들었다.[15] 영화를 보고 자극을 받아 범죄를 일으킨다는 논리는 게임 중독과 범죄를 연관 지을 때와 비슷한 논리이기도 하다. 애초에 이전에도 사회적 폭동과 범죄를 주 소재로 다룬 영화는 한없이 나왔지만 이에 대한 모방범죄를 영화 탓으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16] 아이러니하게도 그 택시 드라이버의 각본가인 폴 슈레이더 감독은 본작을 '정말 형편없는 뮤지컬이라고 혹평했다.[17]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II가 연상된다는 의견이 많은데, 전작을 부정하는 전개와 제작자의 의도만을 최우선한 탓에 완성도와 대중성 모두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특히 라오어 2는 예고편 낚시라는 똑같은 논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