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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황릉 중 하나인 현릉 (顯陵) 전경.
1. 개요
钟祥영어 Zhongxiang
후베이성 징먼시의 현급시. 한수 동안의 평지에 위치하며, 관할 인구는 약 90만명이고 그중 30만이 도시 자체에 거주한다. 중세 시기 영주 (郢州)로 불렸기에 간혹 초나라의 수도 영으로 비정되기도 하는데, 사실이 아니며 중세에 영주로 불린 것은 초의 배도 (陪都)였기 때문이다.[1] 중샹 (종상)이란 지명은 상서로움이 모인다는 뜻으로, 명나라 황제 가정제의 출신지인 것에서 유래되었다.
황제를 배출한 덕에 16-17세기에는 남경 및 북경과 함께 3대 조정 직할부인 승천부 (承天府)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다만 현대에 들어서는 조금씩 쇠퇴하고 있다. 곡물, 목화 등의 농작물이 생산되고 중국 제2의 인산염 매장량이 확인되는 등 광물 자원도 풍부하다. 시가지 동북쪽의 명현릉 (明显陵)이 주요 관광지이자 세계유산이고, 샤오간 ~ 징먼을 잇는 창징철도가 지나는 중샹역이 있다.
2. 역사
춘추전국시대 독자적인 읍인 교영 (郊郢)이었고, 인근 징저우에 도읍한 초나라의 배도 (부수도)였다. 초나라의 행궁인 난대궁이 있었고, 초문학의 중심지였다. 전한 들어 교영은 영현으로 편성되었고, 손오 시기에 성벽이 둘러져 석성 (石城)이라 불렸다. 본래 형주 강하군에 속했다가 서진 시기인 299년에 신설된 경릉군으로 이관되었다.유송 시기인 470년 석성에 설치된 장수현 (萇壽縣)은 곧 경릉군의 치소가 되었고, 서위 시기인 550년에 그를 중심으로 한 영주 (郢州)가 설치되며 장수현 (長壽縣)으로 개칭되었다. 북주 시기 영주는 석성군 (石城郡)으로 개편되었고, 수나라 시기인 607년에 재차 경릉군 (竟陵郡)이 되었다가 당나라 시기인 621년에 영주로 고정되어 수세기간 이어졌다.
2.1. 중근세
가정제의 부친인 주우원이 안정되어 있는 현릉 전경
원나라 시기 영주는 안륙부 (安陸府)로 승격되었고, 명나라 시기인 1376년에 안륙부가 안륙주 (安陸州)로 격하되며 장수현은 흡수 및 폐지되었다. 명나라 가정제가 흥왕으로 재임하던 시절 영주에 머물렀고, 본래 왕위 계승 서열이 낮았지만 운좋게 즉위한 후 예법대로 부친을 안장한 현릉을 조성하였다. 시내에는 원우궁 (元佑宫), 흥왕부 (興王府) 등 그와 관련된 유적들이 남아있다.
1530년, 가정제는 안륙주를 승천부 (承天府)로 승격시켰고 양대 수도권인 순천부 및 응천부와 함께 조정의 직할 3부를 이루게 하였다. 동시에 현이 재설치되며 종상 (鍾祥)으로 명명되었는데, 상서로움이 모인다는 상서종취 (祥瑞鍾聚)에서 유래한 것이다. 1538년에는 배도에 걸맞은 흥도유수사 (興都留守司)가 부임하기 시작했다.[2] 1644년 입관에 이어 1645년 남경을 정복한 청나라는 구체제의 유산인 승천부를 폐하고 안륙부로 환원시켰다. (164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