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10:20:40

찬탈

찬탈자에서 넘어옴
1. 개요2. 설명3. 찬탈자 목록
3.1. 아시아3.2. 유럽3.3. 아프리카
4. 가공의 찬탈자5. 같이 보기

1. 개요

찬탈(, 영어: Usurpation)은 전대 임금의 자리를 강제로 빼앗는 일을 말한다. 쿠데타 등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것도 찬탈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의어로 찬위(簒位)가 있다.

2. 설명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왕조가 쇠락하면 신하의 힘이 강해지는데 그 강성해진 신하가 임금의 자리를 힘으로 빼앗아버리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이성(異姓) 신하들 말고 헌덕왕, 신검, 태종, 세조 등 임금의 동족인 왕족들이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켜서 찬탈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쪽은 혈통적 정당성이 어쨌든 있었으므로 그나마 명분을 내세우기가 좀 쉬웠다. 그래서 왕족들은 친척이지만 군주의 잠재적 라이벌로 항상 경계 대상이었다.

왕위를 으로 빼앗아 버리고, 선대 임금은 그냥 죽여버리거나 독살하거나 하는 일도 있었지만 좀 더 천하의 시선과 정치적 안정성을 의식해 선양, 양위를 강요하는 일도 있었다. 말이 선양이지만 사실상 찬탈이다. 성즉군왕 패즉역적이라고, 반란을 일으켜 멀쩡한 왕을 혼군이라고 선전하여 폐위하고 왕위를 강탈해도 유능한 찬탈자가 선정을 베풀고 다른 정치 세력들을 모두 제압할 정도로 정치력이 좋으면 유야무야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찬탈자 상당수가 명분이 없었으므로 조금이라도 폭정을 하면 야심 많은 다른 반란자들에게 공격 당하기 쉬웠기 때문에 정치분쟁으로 내전이 일어나 국가 멸망의 테크트리를 탄 경우도 수두룩 했다. 대표적으로 중국사팔왕의 난, 남북조시대, 오대십국시대, 로마의 군인 황제 시대가 그렇다.

설령 힘으로 빼앗았어도 명분이 없으면 곧바로 다른 정치 세력들에게 찬탈자라 비난받고 공격당하거나 심지어 외국이 쳐들어오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군주가 힘이 약하더라도 권신들이 맘대로 찬탈하기는 쉽지 않았다. 베트남 같은 경우 권신 호계리가 찬탈을 했다가 쩐 왕조 유신들이 지원을 요청한 명나라의 침공을 받고 멸망한다. 그래서 군주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뒤에서 조종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동탁, 조조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섭정정치도 일반적으로 너무 길게 가진 않고, 실권자의 영향력이 충분히 높아지고 현 정권의 권위가 충분히 추락했다 싶을 땐 결국 사실상의 강제 선양 루트를 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동탁처럼 이런저런 자충수로 자멸하거나 군주의 충성파들에 의해 역관광당한 경우도 있으며, 왕망은 선양 및 신 왕조 개창까지 성공했지만 역시 무리수를 너무 많이 두는 바람에 외적의 침략과 국내 반란에 시달리다가 정통 왕조가 복벽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려왕조 시절 무신정권도 명분 없는 무인들이 신하의 몸으로 감히 찬탈을 하기 힘들어서 도방 같은 것을 만들어 군주를 괴뢰화하고 뒤에서 조종을 했으며 일본 같은 경우도 막부 정치를 내세워서 군주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중세 서양 가톨릭 국가 같은 경우 교황의 종교적 권위가 막강했기 때문에 단순히 힘이 있다 하더라도 종교적 인정을 받지 못하면 왕이 될 수 없었다. 멋대로 찬탈했다간 파문당하고 인근 영주들과 외국 왕이 쳐들어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1] 게다가 유럽의 왕·귀족들은 활발한 통혼으로 인해 대부분 혈연관계로 얽힌 친족인 경우가 많았기에, 기존 왕조의 찬탈 피해자 측에서 친인척인 외국 군주들에게 지원을 요청하면 역관광을 당할 우려도 컸다.

서양 근대로 가면 혁명으로 왕실이 날아간 상태에서 힘으로 외국이고, 교황이고 다 찍어누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황제에 오르고 자기 친족들도 유럽 왕 자리를 하나씩 줬지만 주변의 유럽 왕실에는 그저 찬탈로 보였고 그 권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계속된 전쟁 끝에 다굴을 맞고 부르봉 왕조의 복귀로 나폴레옹은 몰락한다. 사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아무 정통성도 없이 갑툭튀한 격이니 그렇다 쳐도, 루이필리프처럼 왕족이더라도 정당한 계승법에 의해 즉위한 것이 아니라면 외국 군주들뿐 아니라 자국 귀족들에게도 멸시당했다. 반대로 스웨덴칼 14세는 왕족 혈통이 아니지만[2] 선왕인 칼 13세의 양자로 들어갔기에 왕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3]

3. 찬탈자 목록

찬탈자 - 찬탈당한 군주

3.1. 아시아

3.2. 유럽

3.3. 아프리카

4. 가공의 찬탈자

5. 같이 보기



[1] 다만 교황에게는 실질적인 힘이 없었기 때문에 교황이라고 함부로 파문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충분히 강력한 권력을 가진 왕은 오히려 교황을 역관광해서 내쫒거나 허수아비로 만들 수 있었으니까. 세간에 잘 알려진 카놋사의 굴욕도 사실은 교황이 하인리히 4세의 선대인 3세에게 꼭두각시가 되었다가 그 뒤를 이은 4세가 지방 제후들을 억압하다가 역공을 당하자 벌어진 일이었다. 교황이 하인리히 4세를 만나주지 않은 것도 뭔가 함정이 있을 지도 몰라서 그랬던 것.[2] 루이필리프는 전제왕정을 고수하는 타국의 귀족들이나 군주들로부터 폭동왕이라 폄하당하며 왕임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분명히 부르봉 왕조의 방계 가문이 맞았다.[3] 그러나 베르나도테 왕조는 한동안 타국의 군주들과는 혼인관계를 못 맺고 신흥가문들하고만 맺어야 했다. 이 때문에 베르나도테 왕조는 오랜 기간동안 살리카법이나 귀천상혼 등을 칼같이 지키며 왕조의 격을 높이고자 노력하였고, 구스타프 5세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증손녀 바덴의 빅토리아와 결혼하면서 정점을 찍었다.이 때문에 구스타프와 빅토리아의 결혼은 구세대 스웨덴 왕조와 신세대 스웨덴 왕조가 결합했다는 상징이었고, 벼락출세 이미지의 신흥 왕조였던 베르나도테 왕조의 정통성은 더욱 높아졌다.[4] 이 사례는 정확히는 왕의 자리를 뺏은 것은 아니나, 연설을 통해 왕을 사실상 허수아비로 만들었고 실권을 본인들이 취했다.[5] 실마릴리온 기준으로는 명백한 찬탈자이지만, 가운데땅의 역사서 기준으로는 다소 애매하다.[6] 안나타르의 꾀임에 넘어가 당시 에레기온의 영주이던 갈라드리엘과 켈레보른을 몰아냈다.[7] "왜 이러느냐? 대체 무슨 짓이냐, 아들아." / "왕위를 계승하는 중입니다, 아버지."